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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을 떠도는 ‘살아있는 군주제’ / 김도훈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30. 22:28

정치정치BAR

‘현충원’을 떠도는 ‘살아있는 군주제’

등록 :2016-08-30 16:24수정 :2016-08-30 16:35

 

정치BAR_김도훈의 낯선 정치_대통령 묘역을 찾는 사람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신임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신임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다. 아니, 죽은 대통령의 사람들이다. 추미애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공식 일정은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였다. 그는 “전직 국가 원수에 대한 평가와 예우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게 저와 우리 당 지도부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한 “독재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하되 공과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바로 국민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가 ‘국민통합'이라는 거대한 사명의 일부라는 의미다.


추미애 대표의 참배 순서, 김대중→김영삼→박정희→이승만

거기에도 순서는 있었다. 추미애 대표는 김대중, 김영삼, 박정희, 이승만 묘역을 차례대로 방문했다. 순서는 중요하다. 순서는 많은 것을 말한다. 나는 이 순서를 정하는 더민주 지도부의 전날 밤 풍경을 상상해봤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 묘역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돌아가신 분부터 하거나, 가장 나중에 돌아가신 분부터 해야 차례가 맞는 거 아닌가요?” 그러다 누군가가 지적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묘역은요?” 누군가가 실리적인 대답을 내어놓았을 것이다. “경남 김해까지 가는 건 조금 무리일 것 같으니 패스하도록 하죠.”

문재인 전 대표도 지난해 2월 취임 뒤 첫 일정으로 전직 대통령들의 묘역을 참배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이니 참배할 묘역은 세 곳이었다. 순서는 김대중, 이승만, 박정희였다. 사실 보수진영의 두 전직 대통령 묘역을 야당 지도부가 참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음으로 당 대표를 맡은 김종인은 김대중, 김영삼, 이승만, 박정희 순으로 참배를 했다. “전직 대통령이니까 방문한 거지, 뭐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물론 그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달랐다.

다시 순서를 짚어보자. 세 대표가 참배한 순서는 미묘하게 다르다. 추론을 해보자면, 일단 더민주에게 김대중 대통령 묘역을 가장 먼저 참배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음은 김영삼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순서가 바뀌는 것은 조금 재미있다. 둘 중 누구를 먼저하고 누구를 나중에 할 것인가. 어쩌면 그건 순전히 각 대표 개인의 취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혹은 단순히 동선의 문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이 리스트를 보다보니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해 현충원에 묻히면 그의 차례는 어디 사이가 될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묘지 순례로 국민통합이 온다면…

다만 순서보다도 더 큰 질문이 하나 남아있다.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가 한 당 대표의 첫 번째 공식 일정이 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근사하긴 하다. 경건하고 준엄한 표정으로 검은 수트와 코트를 입고 경건하고 준엄한 표정으로 검은 수트와 코트를 입은 당 관계자들과 경건하고 준엄한 표정으로 주요 일간지 사진 기자들 앞에서 사진이 찍히는 것만큼 미디어 친화적인 이벤트는 또 없을 것이다.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 혹은 왕위를 이어받은 왕 같은 느낌도 나고 말이다.

그렇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건 결국 왕의 이벤트다. 거대한 봉분부터가 그렇다. 한국 대통령들의 봉분은 지나칠 정도로 크다. 구역의 넓이는 기본적으로 80평이다. 압도적인 봉분 앞에서 민주당의 새로운 대표들은 왕권을 이양받은 사람들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국민통합'을 이야기한다. 그들도 마음 속 은밀하게는 알고 있겠지만 묘지 순례는 국민통합과 별 상관없다. 그걸 한다고 통합이 오고, 하지 않는다고 통합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왕정정치적 쇼이자, 한국이 여전히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군주제 국가라는 것을 은밀하게 커밍아웃하는 행위에 더 가깝다. 1년 간 한국에 비가 내리지 않는 종말론적 위기가 닥친다면 새로운 당 대표들이 전직 대통령 봉분 앞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절을 할 거라는 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맥북에어를 걸겠다.

이 왕정정치적 쇼는 언젠가는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야당 대표는 계속 바뀔 것이다. 모두가 ‘국민통합'을 이야기하며 묘역을 참배할 것이다. 국민통합은 생각만큼은 빨리 오지 않을 것이다(서구 민주주의 국가들도 못 이룬, 사실 민주주의 원칙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닌 ‘국민통합’이 왜 최종 목적이 되어야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대통령들은 계속 별세할 것이다. 야당 대표가 참배해야 하는 묘역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손자는 새 야당 대표가 10개도 넘는 묘를 참배하며 ‘국민통합'을 열 번 이야기하는 과정을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한국은 드디어 민주주의를 버리고 완벽한 100% 국민통합을 이룬 왕정국가로 다시 돌아간 상태일지도 모르겠다만.

김도훈은 온라인 미디어 허프포스트의 한국판 편집장이다. 그는 하드뉴스는 소프트뉴스를 더 존경해야하고, 소프트뉴스는 하드뉴스를 더 경의해야한다고 믿는다. 종종 이 칼럼은 고양이가 대신 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