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정치도 음악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니…/ 곽병찬의 향원익청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30. 22:50

사설.칼럼칼럼

[곽병찬의 향원익청] 정치도 음악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니…

등록 :2016-08-30 17:38수정 :2016-08-30 19:18

 

곽병찬의 향원익청

태종은 이도가 17살 되던 해 가야금 등 악기를 선물했다. 음악에 빠지면서 불안도 가시고, 평상심도 되찾았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세종이 예악의 기틀을 세우려는 계기가 됐다. 그런 세종의 뜻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이가 바로 고불 맹사성이었다.

악(樂)의 경지는 오로지 성인만이 이를 수 있다(<예기>)고 하였다. 공자의 꿈은 인애에 의지하여 예술의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었다. 고불은 조정에 있을 때나 향리에 있을 때나 음악의 경계에서 노닐었다. 상하 좌우 노소 남녀, 그에겐 걸림이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 세종이 가야금 줄을 고르고 나자 맹 정승이 내전에 도착했다. “피리를 꺼내시오.” “피리라니요? 어찌 관리가 악기를~.” “다 알고 하는 말이니 꺼내시오.” 맹사성은 소맷자락에서 피리를 꺼냈다. 곧 가야금과 피리 소리의 어울림이 승천하는 선녀의 옷자락처럼 나풀대기 시작했고, 무아의 경지를 오르내리던 화음은 절묘의 극으로 치달아 오르다가 조용히 가라앉으면서 멎었다….

소설가 신봉승의 <세자 양녕>의 한 장면이다. 고불 맹사성의 피리 솜씨는 세상이 인정하는 바였지만, 세종의 경우는 알려진 게 없다. 비록 ‘여민락’을 작곡하긴 했다지만 지나친 과장은 아닐까? <조선왕조실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세종의 왕자 시절 이도는 늘 불안했다.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제압하고 왕좌를 차지했던 부친 태종은 제 자식 사이에도 이런 난이 발발할까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태종의 처남(세종의 외삼촌) 민무질, 민무구 형제조차 세자 이외의 다른 형제를 미리 제거해 후환을 없애자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도가 습관적으로 편·과식을 하고, 책에 빠져 지내고, 때론 잘난 체하거나 고자질을 하곤 했던 것도 사실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태종은 이도가 17살 되던 해 가야금 등 악기를 선물했다. “너는 세자가 아니어서 따로 할 일이 없다. 편안히 즐기기나 하여라.” 전전긍긍하는 셋째가 안타깝고 또 불안했던 것이다. 이도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음악에 빠지면서 불안도 가시고, 평상심도 되찾았다. 형들과 관계도 원만해졌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형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세종이 예악의 기틀을 세우려는 계기가 됐다. 그런 세종의 뜻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 바로 고불 맹사성이었다. 둘은 협연자 이전에 예악정치의 막역한 파트너였다.

조선은 유교의 경세론인 예악정형(禮樂政刑)을 뼈대로 통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예로써 마음을 절제하고, 악으로써 마음을 화순하게 하며, 정치로써 이를 따르게 하고, 형벌로써 방지한다는 것이다. 예와 악은 천지자연에 고유한 것으로, 예가 천지자연의 구별과 질서를 추구한다면, 악은 그런 위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천지자연의 조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예에 구별이 있음은 천지자연의 분별을 본받음이며, 악의 조화는 천지자연의 조화를 본받음이다.”(<예기>) “예악이 밝게 갖추어져야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성육하는 결실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 예악은 불가능했다. 아들이 아비의 뜻을 거역하고, 동생이 형을 몰아내고, 아비가 자식을 죽이려는 난리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역류가 멈추고야 예(질서)와 악(조화)을 추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정에는 의식을 위해 중국에서 들여온 아악과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온 향악이 의례에 함께 쓰이고 있었다. 세종은 박연과 정양 등 신진 사류를 통해 아악의 이론을 정리하고, 악기를 정비했으며, 악보 채집과 연주법을 정리하도록 했다. 박연 등은 성실하게 그 일을 해냈지만, 아예 향악을 버리려 했다.

그러나 세종은 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것처럼, 우리의 악기와 성음에 맞는 음악을 기대했다. 세종은 좌의정 맹사성과 우의정 권진을 부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연, 정양 등 신진 사류에게만 전적으로 의뢰할 수 없으니 경들은 유의하라.”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이다. 중국인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으므로 제사에 연주해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후에는 아악을 듣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세종실록>) 두 정승의 의견도 같았다. “아악과 향악을 겸해 쓰는 것이 옳습니다.” “중국의 풍악과 같지 않으면 예전대로 향악을 쓰는 것만 못하옵니다.”

세종은 맹사성의 인품과 경륜 그리고 음악적 식견을 믿었다. 맹사성은 박연을 설득하고 이끌어 아악을 정비하는 한편 소멸당할 뻔했던 향악을 아악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맹사성의 음률은 태종과 그 중신들도 이미 인정했던 터였다. 태종 11년(1411년) 그가 충주목사로 제수되자 예조는 “음악은 아무나 할 수 없다”며 철회를 진언했고,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이번엔 영의정 하륜이 “나라의 악보가 다 없어지고 사라진 형편인데, 오직 맹사성만이 악보에 밝아 오음을 잘 어울리게 할 수 있다”고 태종을 설득했다. 그는 4년 뒤 음률을 관리하는 관습도감 제조와 예조판서에 제수됐다.

그의 한양 집은 북촌 가회동에 있었다. 좌의정 시절 병조판서 황상이 공무를 논의하러 찾아왔다. 마침 소나기가 쏟아지자 곳곳에 물이 새 방 안이 흥건했다. 황상은 돌아가자마자 짓고 있던 행랑채를 헐어버리게 했다던 바로 그 집이다. 지금의 정독도서관(화동)에서 그의 집 사이엔 고개가 하나 있다. 고불이 검은 소(기리마) 잔등에서 피리를 불며 출퇴근했고, 마루에 서면 피리 소리로 그가 있고 없음을 알 수 있었던 고개다. ‘맹현’이다. 사람 성씨를 붙여 이름 지은 유일한 고개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고불은 음률을 깨우쳐서 항상 하루에 서너 곡씩 피리를 불곤 했다. 혼자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피리 불기를 계속할 뿐 사사로운 손님을 받지 않았다. 공무로 오는 등 꼭 만나야 할 손님만 맞이할 뿐, 피리 부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 아래서 피리를 불고, 겨울이면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피리를 불었다. 그의 방에는 오직 (피리와) 부들자리만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고 한다.”

악(樂)의 경지는 오로지 성인만이 이를 수 있다(<예기>)고 하였다. 공자의 꿈은 인애에 의지하여 예술의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었다. 고불은 조정에 있을 때나 향리에 있을 때나 음악의 경계에서 노닐었다. 상하 좌우 노소 남녀, 그에겐 걸림이 없었다.

어느 해 한식, 온양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기리마를 타고 피리를 불며 한양으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용인에 이르러 소나기를 만나 주막에 들어가니 젊은 선비가 아랫목에 있었다. 선비는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오는 시골 노인네에게 아랫목을 권했다. 기특했던지 고불은 말끝에 ‘공’과 ‘당’을 붙여 심심풀이나 삼자고 했다. “서울엔 무엇 하러 가는공?” “녹사 시험 보러 간당.” “내가 합격시켜줄공?” “그런 건 옳지 않당.” 그사이 비가 그쳐 각자 서울로 올라갔다. 며칠 뒤 맹 정승 집무실로 녹사에 합격한 그 젊은이가 인사하러 왔다. “어떻게 되었는공?” 조아린 머리를 올려보니 바로 그 시골 노인 아닌가. 선비는 엎드려 답했다. “죽어 마땅하옵니당?” 자초지종을 듣고는 만장에 폭소가 터졌다.

꿈같은 이야기다. 부패한 청와대 권력과 언론 권력이 드잡이하고, 대통령까지 뛰어든 이 아사리 판에서 어떻게 그런 예악의 정치, 공당문답이 가능할까.

충남 아산 배방읍 중리엔 맹사성 고택이 있다. 1330년, 최영 장군의 부친 최원직이 지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다. 어린 맹사성의 맹랑한 태도에 반한 최영이 그 아비(맹희도)를 만나 손녀사위로 정혼하면서, 맹씨가에 넘겼다고 한다.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 날개에 3칸씩 방이 있다. 작지만 반듯하고 다부지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고택 오른편 둔덕엔 600살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공자가 그랬듯이 그 그늘에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고불이 심었다는 나무다. 고택 일원이 ‘맹씨행단’으로 더 알려진 까닭이다. 뒷문 밖 비탈 밭을 지나면 맹사성과 황희 그리고 권진, 세 정승이 느티나무 9그루를 심었다는 구괴정이 있다.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다. 한 그루는 속이 빈 채 늙은 부처처럼 비스듬히 누웠다. 기념관은 소박하다. 눈에 띄는 건 백옥적 하나다. 하지만 오히려 남루로 하여 고불의 청백이 완연하다.

고불은 76살(1435년)에 사직을 간청하여 귀향했고 3년 뒤 별세했다. 조정에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文은 예로써 사람을 대접한다는 의미이고, 貞은 청백하게 절조를 지켰다는 의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