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70인과의 동행] (22) 청계천 상류 물길에 삶이 얽히니…그곳이 서촌이고 역사길
김경호 선임기자 jerome@kyunghyang.comㆍ김창희 통의도시연구소 이사와 서촌 도보기행
“강의는 아니고, 시험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산책입니다. 사람 이름, 연대 등이 나오긴 하겠지만 전혀 외울 것도 아닙니다. ‘서촌이 이렇게 생겨 먹은 동네구나’라고 그냥 머릿속에, 마음속에, 몸에 담아가시면 됩니다.”
사람들 입가에서 단박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편안하게 산책하듯 따라다니며 잘 듣기만 하면 서울의 ‘서촌’을 제대로 알고 갈 게 틀림없었다.
22번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은 이전과는 달리 차편을 이용하지 않는 도보답사로 진행됐다. 이름부터 푸근하고 정감있게 다가오는 ‘서촌’, 경복궁의 서쪽 인왕산 아래 동네를 돌아보는 도시기행이다.
“답사가 끝난 뒤에도 서촌에 어린 정서를 느끼지 못하신다면 제가 설명을 잘 못한 거겠지요.”
지난 10일 오전 9시 서울 경복궁역 인근, 정부서울청사 뒤편의 종교교회 앞에 모인 40여명의 답사객들은 이날 인솔자로 나선 김창희 통의도시연구소 이사(58)의 농담에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20여년 언론인 경력의 김 이사는 서울의 기원과 서촌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 <오래된 서울>(동하)을 2013년 최종현 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와 펴낸 도시사학 분야 전문가다.
“서촌은 행정지명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는 이름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데는 없고, 일제강점기 때 잡지에 등장하는 이름이죠.”
답사의 출발점이 종교교회가 된 것은 이곳이 서촌의 남쪽 끝이기 때문이다. “서촌이란 게 정확히 경계가 없는 것이지만 경복궁 담장 서쪽, 인왕산 아래쪽, 그리고 북쪽은 자하문이라고 부르는 창의문, 남쪽은 우리가 서 있는 이 길이라고 보는 겁니다.”
예전 서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물길을 아는 게 먼저였다. 물길이 있으면 옆으로 도로가 생겼고, 그 길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삶이 얽히게 마련이다. “여기는 옛날에 종교라는 다리가 있던 곳입니다. 수성동, 인왕동에서 흘러내려 온 청계천의 상류 개울이 여기 흘렀고, 그걸 넘기 위해 다리가 필요했지요.”
서울지방경찰청 앞의 사직로 8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답사팀은 한 블록 지나 내수사터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 왕실의 물자를 조달하던 관청 내수사가 있던 자리이고, 길 건너편이 조선시대 적선방이란 동네가 있던 곳이라고 소개한 김 이사는 “조선시대 초기에 사대문 안쪽에 있던 70~80개 동네 이름 중에 아직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게 딱 4개 있는데 찍어보시라”며 돌발 퀴즈를 냈다.
여러 동네 이름이 나왔지만, 4개를 모두 알아내기란 어려웠다. 김 이사는 “찍기도 쉽지 않죠? 적선동, 가회동, 안국동, 서린동입니다. 이거 어디 가서 퀴즈로 써먹으세요”라며 답사객들을 사로잡았다. 출발하면서 조선 성종 때 허종, 허침 형제가 종교 다리에서 떨어져 훗날 연산군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피했다는 허구 섞인 설화를 소개한 데 이어 재미있는 퀴즈가 더해지자 답사객들의 눈빛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사직단 정문이 보이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 그는 “이 길은 태조 이성계 때부터 조선시대 임금이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러 가기 위해 다니던 어도였다”고 했다. 왕궁을 나와 육조거리(세종로)에서 우회전해 사직단 정문을 바라보며 들어가기 위해 만든, 621년 역사를 가진 길이란 말에 일행은 걸어온 길을 새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에서 바라본 사직단 정문은 인왕산의 두 번째 봉우리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정문이 저 자리에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횡단보도를 이 길에 맞춰 옮기는 게,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 역사 깊은 길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직단을 잠시 둘러보고 뒤로 난 계단을 따라 국궁 연습장인 황학정에 다다른 일행은 건물 뒤편 바위에 새겨진 ‘황학정 8경’을 통해 지금은 온전히 느끼기 힘든 서촌의 아름다움을 상상했다.
답사팀의 발걸음은 천민들의 애환이 담긴 택견수련터를 거쳐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궁궐을 나와 살았던 비해당터로 향했다. 정치에 관심을 버리고, 인왕산 기슭에서 평안하게 살고자 했으나 형 수양대군에 의해 최후를 맞은 그의 비애가 서린 곳이다. 예전 옥인아파트를 철거하면서 옛 모습을 살린 수성동 계곡엔 겸재 정선이 남긴 진경산수화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에 등장하는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김 이사는 “저만한 장석을 옮겨 이 계곡에 다리를 놓을 정도면 상당한 권세가가 아닐 수 없다”면서 “어쩌면 저 다리는 안평대군이 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놓여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옛 인왕동 길을 따라 내려온 일행은 1941년 윤동주 시인이 두 달간 머물며 시를 썼던 하숙집과 2013년 문을 연 박노수 미술관을 거치며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감상했다. 박노수 미술관 앞에선 1791년 유둣날(음력 6월 보름) 열린 중인들의 시 모임 ‘송석원 시사회’와 그날의 기록을 남긴 이인문, 김홍도의 그림 ‘송석원 시회도’, ‘송석원 시사야연도’에 얽힌 이야기가 계속됐다. 중인들이 시를 읊는 모임을 하고, 당대 최고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할 만큼 그들의 비중은 커져 있었고, 서촌 또한 왕이나 사대부들의 전유물이 아닌 민중들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12시30분을 넘겨 시장기를 자극했다. 통인시장 안쪽으로 들어가 40년 역사의 아담한 백반집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맛있게 점심을 한 답사팀은 새롭게 힘을 내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일행이 처음 멈춰선 곳은 옥인동 92번지의 한 치킨집과 거기에서 마주 보이는 편의점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 방원의 터전이었고, 그 너머는 둘째 부인 강씨 소생 방번의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왕위를 두고 이복형제들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인 ‘1차 왕자의 난’은 바로 이곳 어디쯤에서 일어났을 일이었다.
옥인동 92번지에 살던 현순 목사와 그의 딸 현 엘리스가 맞은 현대사 질곡 속에서 피할 수 없었던 얄궂은 운명 앞에선 모두가 숙연해졌다. 옥인동 56번지에 살았던 이여성(본명 이명건)과 그의 동생 이쾌대 화백, 그리고 그의 두 친구 ‘약수’ 김두전, ‘약산’ 김원봉에 얽힌 사연도 깊이를 더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만난 3개의 커다란 돌기둥 앞에서 김 이사는 “이완용에 버금가는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이 이 일대에 2만평을 차지하고 벽수산장이란 초호화 건물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진입로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조금 더 오르면 조선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 지은 정자 청휘각 터로 추정되는 시원한 숲길을 만나게 된다. 청휘는 ‘비갠 뒤의 맑은 햇살’이란 뜻으로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을 통해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옥류동의 끝입니다. 이 다음엔 청풍계가 이어지는데 사대문 안 조선시대 공식 지명 중 유일하게 ‘계곡 계(溪)’자가 붙은 곳이 이곳입니다.”
맹렬히 달려드는 산모기를 쫓으며 숲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과연 지형이 급격히 바뀌는 계곡이 나타났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의 저택이 아래에 있고, 일부 구간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계곡 끝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서 있고, 그 길을 건너니 한쪽 뒤로 물러나 있는 창의문이 일행을 반긴다. 창의문은 고려시대 개성에서 남경(한양)으로 들어오던 고갯길에 훗날 세운 북문으로 조선시대 8개 문 중 유일하게 자리와 원형이 그대로 보전돼 있다.
“인조반정 때 반군들이 연신내에 모여 있다가 이 문을 통과해 궁궐로 향했습니다. 고려 때부터 난 길이니 최소 900년, 어쩌면 1000년 이상 된 옛길을 지금 여러분은 걷고 있는 겁니다.”
아쉽게도 길은 조금 내려가 끊기고 많다. 옛길은 끊기고 새로 생긴 길 창의문로가 청와대쪽으로 향하고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빌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간 옛길은 자하문 터널을 빠져나와 경기상고로 향하는 큰 길과 만난다. “정선의 ‘백운동천’ 그림 중에서 나귀 타고 가는 사람의 자리가 바로 여기쯤인 것 같다”는 말에 답사객들은 또 한 번 웃었다.
오른쪽으로 약 50m쯤 올라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백운동천’ 집터에서 이날의 여정은 끝났다. 청계천의 또 다른 원류, 백운동 물길의 발원지이기도 한 이곳은 조선시대 개화파 관료로서 70세 넘어 전 재산을 처분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한 동농 김가진의 집이 있던 곳이다. 결국 상하이에서 사망한 그, 상하이와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돕다가 대전 현충원에 묻힌 며느리 정정화, 평양 납북 재야인사 묘역에 묻혀 있는 아들 김의한 등 일가족의 기구한 운명 앞에 답사객들은 고개를 숙였다. 어서 통일이 와야 한다는 기원도 함께했다.
답사를 끝내니 오후 4시가 훌쩍 넘었다. 스마트폰 앱에선 1만3000보 이상, 10㎞ 가까이 걸었다고 알려준다. 서촌의 남쪽 끝에서 시작해 잠시도 쉬지 않고 걸어온 여정은 시대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이었고 서촌에 살다간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는 공감여행이었다. 서촌에 어린 정서는 이미 답사객들의 몸에 흠씬 배어있었다.
하루 종일 열정적인 ‘강의’를 한 김창희 이사에게 박수를 보낸 일행은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아쉬움을 삭였다. 시원한 막걸리를 한 잔 더하며 못다 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심을 겨우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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