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GMO, 의심나면 기다려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 2016.10.06 21:15:01 수정 : 2016.10.06 21:17:24
예전에 우리 동네에 월남전 참전군인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걸핏하면 술상을 엎고 난리를 부려서 심한 골칫덩이였다. 술집에 그가 나타나면, 다들 피했다. 주인은 어떻게든 달래서 얼른 내보내려고 비위를 맞추곤 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술을 거의 못 마시게 됐고, 한동안 안 보이더니 소식이 들려왔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고통과 싸우고 있다. 고엽제라는 보이지 않는 ‘적’이 그를 무너뜨릴지는 몰랐을 것이다.
일본의 패망, 한국전쟁 연간에 포로들이 받은 세례는 DDT였다. 옷을 모두 벗기고 뿌연 분말을 뿌려서 이 같은 해충을 ‘박멸’하는 것이 연합군의 중요한 방역사업이었다. 우리 위 연배들, 그러니까 나이 육십 무렵의 선배들은 초등학교에서 DDT 세례를 받았다. 우리 누이들도 학교에서 하얀 가루를 타왔다. 어머니가 누이들과 내 머리칼 사이를 차곡차곡 헤집어가며 그 가루를 뿌리던 것이 기억난다. 얻어오는 건 물론이고, 약국에서 사다가 뿌리기도 했다. 머리에 기생하던 이가 우수수 죽어서 떨어졌다.
학교 앞 가게 같은 곳에서 우리는 늘 과자 나부랭이 군것질을 사먹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예뻐서 우리를 유혹했다. 적색2호 같은 인공색소가 쓰이지 않게 된 것도 근자의 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색소를 먹고 또 먹었다.
우리 아버지는 보습학원 같은 내부공사를 하고 철거하는 일을 하셨다. 가끔 나도 따라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용돈을 얻었다. 철거작업을 하면 노랗고 까슬까슬한 보온재가 잔뜩 나왔다. 마스크도 쓰지 않고 나는 그걸 치웠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업이었으니, 늘 유리섬유를 만지고 그 가루를 들이마시고 살았다. 우리가 늘 다니던 지하철역에도 이 섬유가 쫙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원인? 그런 걸 알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청년이 되어 동네 친구들이랑 고기를 구워 먹었다. 삼겹살이 막 유명해지던 시기였다. 고기를 끊고, 불판은 그냥 흔한 동네 공사판에서 주워왔다. ‘스레트’라고 부르는 슬레이트였다. 골이 있어서 기름이 잘잘 잘 흘러 누구나 탐내는(?) 불판이었다. 게다가 열전도도 은근해서 고기가 맛있게 익었다. 인기 ‘짱’이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기는 하다. 담배는 한때 몸에 좋은 약이었다.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갓난아기들이 있는 방에서 그냥 줄담배를 피웠다. 지하철역에서도 피웠고, 아기들이 탄 버스나 비행기에서도 당연히 피웠다. 치명적인, 지금은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해야 할 유해물질들이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암을 유발하고 사람을 죽이는 물질이라고 해서 이제는 모두 금지되거나 경원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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