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

왕양명의 양지(良知) 선험론, 치양지(致良知)는 경험론, "앎은 행함의 시작이고, 행함은 앎의 완성(知者行之始, 行者知之成)”는 사실주의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5. 13:27

[쿠오바디스와 행로난](15) 삶 속에서 놂을 통해 배우는 이, 그에겐 모든 벗이 스승이다

김월회 |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입력 : 2016.10.14 19:12:00 수정 : 2016.10.14 19:27:54

ㆍ‘삶-앎-놂’의 삼위일체

주희가 일상적으로 노닐며 천리를 체득한 곳으로 알려진 중국 무이산 계곡의 아홉구비는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라는 이름의 관념산수화로 중국은 물론 조선의 사대부들에게까지 널리 확산된다. 국내에 현존하는 ‘무이구곡도’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부분, 159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주희가 일상적으로 노닐며 천리를 체득한 곳으로 알려진 중국 무이산 계곡의 아홉구비는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라는 이름의 관념산수화로 중국은 물론 조선의 사대부들에게까지 널리 확산된다. 국내에 현존하는 ‘무이구곡도’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부분, 159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대 중엽 무렵, 왕기(王畿)라는 학자가 있었다. 호방한 성품이었던 그는 학자랍시고 재고 다니는 이들을 보면 심사가 몹시 뒤틀렸다. 천하를 “병이 깊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게” 한 데 일조한 이들을 용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 동네 사람인 왕양명도 같은 이유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놂터’로 특화된 왕양명의 마당

주지하듯 왕양명은 명대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훗날 성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양명학을 정립한 대학자였다. 그러나 왕기의 눈에는 도긴개긴으로 보였던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양명의 마당을 목도했다. 안 그래도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시끌벅적함에 종종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그날도 양명과 제자들은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왕기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곳엔 예상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스승은 제자와 허물없이 투호놀이를 하고 있었고, 일군의 무리는 합창을 하고 있었다.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는 이들도 있었고, 한가로이 산책하는 자들도 있었다. 각 잡힌 위계질서 속에 정좌하고 앉아 근엄한 듯 경전을 강독하는, 그런 여느 학당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당혹스러웠다.

그때 양명 제자의 말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당신이 보고 있는 모습은 양명 선생의 마당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얼마 후 그는 자청하여 양명의 제자가 됐다.

그를 끌어들인 것은 양명의 마당에 가득했던 놂이었다. 입신과 출세를 향해 특화된 서원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생기발랄함이었다. 이는 양명의 지론 덕분이다. 그는, 사람은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누구나 양지(良知)를 지닌다고 여겼다. 그것은 태어날 때 이미 갖추어져 있는 앎으로, 천리 그 자체인 마음의 본체라고도 했다. 하여 양지가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이 온통 천리가 된다. 양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된다는 얘기다. 길거리에 가득한 이들 모두가 성인이란 명제도 그래서 나왔다.

따라서 공부는 내 안에 깃든 양지를 참되게 발휘하는 일과 다름없다. 양명은 이를 “양지를 이룬다”는 뜻에서 “치양지(致良知)”라 불렀다. 살면서 생계에 쪼이고 세파에 치여도, 양지는 그저 때 타고 가려질 뿐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 사람은, 설령 인격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완성돼 있다는 뜻이다. 인격적 하자 따위는 양지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 초래됐을 뿐, 사람이 본성적으로 모자라서 그리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치양지란 양명의 공부는 성리학의 그것과 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이러했다.

성리학은 성현의 말씀을 단계적으로 익힘으로써 내 안에 갖춰져 있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하늘로부터 온 선한 본성이 내 안에 있어도 바깥에서 천리를 밝혀 주는 성현의 말씀을 내 안으로 들여오지 않으면, 나는 늘 결여 상태로 있게 된다.

반면에 양명이 보기에 스승과 제자는 양지가 이미 갖춰져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그들 사이에 엄격한 위계를 둬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없어진다. 공부의 요체는 타고난 양지를 스스로 밝히는 데 있다. 스승의 가르침이나 경전은 어디까지나 치양지를 위해 요청될 뿐, 그들이 치양지보다 우선되거나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공자는 “학예에서 놂(遊於藝)”을 환기하고, 사람들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 후 함께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일상을 꿈꿨다. 놂이 꽤 오래전부터 검증돼온 어엿한 공부였다는 얘기다. 엄숙하게 정좌한 채로 경전을 달달 외우고, 낡은 격식에 맞춰 글을 짓는 것만이 유일한 공부가 아님을 공자가 밝혀놓았음이다. 그러한 놂이 일상이 됐던 곳이 양명의 마당이었다. 하여 여느 배움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참된 ‘놂터’였던 것이다.

■놂은 일상에서 ‘한몸’이 행하는 것

괴테와 함께 문명을 떨쳤던 프리드리히 쉴러는 “사람은 놀이에서만 진정한 사람”이란 화두를 던졌다. 그가 보기에 사람의 근원에는 유희라는 ‘가장 사람다운’ 본성적 움직임이 있었다. 곧 사람은 ‘놀이하는 사람(homo ludens)’이었다. 사람은 본성 차원에서 육체와 정신의 분리가 무의미해진다. 한자 ‘身(신)’이나 ‘己(기)’는 사람을 육신과 정신의 조합으로 보는 관념이 생성되기 이전, 더는 쪼갤 수 없는 ‘한몸(一體)’으로서의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놂은 바로 한몸 차원에서 수행된다. 어린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 한 아이에게 배당된 노릇은 아빠였다. 놂이 지속되는 한, 놀이판에서 그 아이는 어디까지나 아빠다. 육신이 어린이인 채 정신만 아빠 역할을 함이 아니다. 그냥 자신이 온통 아빠라고 여기며 놂에 집중한다. 그렇지 않으면 놂은 깨진다.

양명이 ‘지행합일’, 그러니까 지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은, 달리 말해 앎과 삶이 ‘한몸 됨’을 참된 앎으로 제시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가 놂을 통해 이루어지듯 양지 또한 그러한데, 놂은 이처럼 한몸을 기본단위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로움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삶터에서 이것저것 따지느라 의로움을 행하지 않는다면, 양명이 보기엔 의로움을 모르는 것이었다. 앎은, 그것이 어떤 유형의 앎이든 스스로 자기 몸에 새겨야만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래서 “앎은 행함의 시작이고, 행함은 앎의 완성(知者行之始, 行者知之成)”(<전습록>)이란 양명의 통찰은 통렬하다.

같은 맥락에서, 놀이한다고 하여 일상을 떠나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자하가 스승 공자의 아우라를 등에 업고 “처소를 쓸고 닦는 일, 사람을 대하는 일, 일상적 몸가짐” 모두가 공부라고 잘라 말한 것처럼, 양명도 일상에서 생계를 꾸려가며 살아감이 공부라고 보았다. 물론 놂의 태도가 기반이어야 했다. 일상생활이 그 자체로 공부가 되려면, 생활과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있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고기들은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물결을 거스르지만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중국 난통(南通)박물관 소장.

물고기들은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물결을 거스르지만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중국 난통(南通)박물관 소장.

무슨 고차원적 얘기를 함이 아니다. 물고기가 떠내려가지 않으려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지만 유유자적함을, 팔이 어깨 관절을 매개로 몸통에 붙어있지만 몸통과 무관하게 움직임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러면 삶터가 놂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삶터가 그 자체로 배움터라는 주장이다.

이를 두고 왕기는 “백성의 일상생활이 곧 도”라고 정리했다. 스승 양명의 화두 “생활하면서 공부한다”는 뜻의 “사상마련(事上磨練)”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혹, 그건 근대가 되기 전에나 가능했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이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의는 자못 크다.

지금 여기를 보자. ‘100세 시대’란 말로 대변되는 고령사회가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한 가지 생업으로 생애가 지탱되던 시절도 흘러가고 있다. 제2의 직업, 아니 제3의 직업이 절실한 시절이 되었다. 인생 2모작, 3모작 같은 말이 일상적으로 들려온다. 지금처럼 대학이 ‘제1직업’을 위한 교육에 머문다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교육이 여전히 대입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미래는 없다는 경보다. 이젠 학교라는, 일상과 떨어뜨려 마련한 공간에서 수행되는 학교교육만으로는 안 된다는 경고다. 학교교육을 없애자는 무책임한 발언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삶터에서 수행되는 사회교육을 근간에 놓고 그 위에서 학교교육의 위상과 내용을 다시 짜자는 제언이다.

예컨대 양명과 제자들이 실천했듯, 일상에서 생활과 함께하는 공부의 수단은 놂이다. 하여 학교교육도 놂을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 놂은 머리에서 ‘알고 있음’만을 추구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것은 한몸이 ‘할 줄 앎’을 도모하기에 그렇다. 글을 알고 음을 알며 꼴을 아는 단계에서 글을 갖고 놀 줄 알고 음을, 또 꼴을 갖고 놀 줄 아는 단계로 접어들 필요가 있다. 이 놂 속에서 타인과 만나고 놂의 지속을 위해 절차탁마하며, 개체로서의 사람은 남들과 더불어 즐길 줄 아는 몸으로 변이된다. 양명이 말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밝히고 함께 이루는 공부”는 그저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었음이다.

그래서 놂에서 만나는 이들은 다 벗이고 동시에 스승이었다. 나에겐 스승이란 없나니 있다면 스승 같은 벗이 있을 뿐이라는, 왕기의 후예 이지의 고백은 그래서 힘차다. 양명이 자기 마당에서 제자들과 허물없이 놀았듯이 이젠 학교교육도 스승 위주가 아니라 ‘사우(師友)’, 그러니까 ‘스승벗’ 중심으로 거듭나야 하는 까닭이다.

■살구나무 밑, 마당 그리고 산책길

양명이 마당에서만 놀았던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훗날 ‘행단(杏壇)’이라 칭해진, 삶터 주변의 살구나무 밑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라면 가리지 않고 더불어 담론하며 놀았듯이, 양명도 산수자연을 다니며 학문을 논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벗, 제자들과 기껍게 놀았다.

여기서 양명의 공부는 주희의 공부와 만난다. 전 호(10월8일자)에서 안재원 선생께서 소개해주셨듯이, 우연히 만난 파이드로스와 주저 없이 도심을 벗어나 성벽 밖으로 산책을 떠난 소크라테스와도 만난다. 또한 도산서원을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조성한 이황과도 만난다.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뒤도 돌아보고 옆도 살펴본다. 그렇게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며 이치를 음미해본다. 그러는 사이에 지난날 고통스럽게 공부해도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 왕왕 자신도 모르게 마음과 눈 사이에서 명료해진다. 주자가 ‘백록동’ 시에서 “심오한 근원은 본디 한가함 속에서 터득되고, 오묘한 쓰임새는 원래 즐거운 곳에서 나온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리라.(<도산전서(陶山全書)> 권3).

책과 치열하게 씨름하던 서재를 벗어나 벗, 제자들과 삶터를 거닌다. 그 놂에서 불현듯 앎을 깨우친다. 주희가 그랬듯이 이황도 그렇게 놀았다. 그렇게 더불어 놂의 순간만큼은 공자와 제자들,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 그리고 주희와 양명, 이황과 그들의 제자들은 현대 건축가 루이스 칸의 통찰처럼,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와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어떤 나무 밑에서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런 학교, 곧 놂터를 빚어냈던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0141912005#csidx15704e68446986987911a7427df7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