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3)비정규직인 나와 부자인 그에게 나라는 평등하지 않다
이주영·장은교·김형규·박광연·최민지 기자 young78@kyunghyang.com
입력 : 2016.10.18 22:36:00 수정 : 2016.10.18 23:53:03
ㆍ붕괴된 공동체…‘각자도생’ 시대
ㆍ의지하지 말라…국가는 ‘가진 자’만을 떠받든다
1993년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한국경제에 대해 시장주의 경제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도성장과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 분배를 동시에 이룬 국가라고 세계은행은 평가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성장률은 연 10%에 육박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때에도 매년 7~8%대의 성장세를 유지했다. 전쟁 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자원도, 기술도 없이 출발한 산업화는 오로지 노동력에 기댔다. 경제가 성장하자 국민소득도 늘어났다. 1961년 100달러도 안됐던 1인당 국민소득은 50여년간 300배 이상 불어났다. 높은 성장률은 고용 증가와 임금 상승의 원동력이 됐다. 특별한 분배 정책이 없어도 초스피드 성장 자체가 어느 정도의 분배를 보장해줬다.
압축 성장에 대한 경고음이 나온 것은 ‘동아시아의 기적’이라고 평가받던 무렵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는 1994년 “아시아 국가의 경제 성장은 기술 진보 없이 값싼 노동력과 정부 주도의 자본 투입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하며 조만간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3년 뒤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내부 식민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폭염이 한창이던 지난 8월, 대전에서 하루 새 홀로 사는 노인 세 명이 잇따라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하나같이 심각하게 부패되거나 잘 먹지 못해 마른 상태였다. 두 달 전 강원도에선 아내가 숨지자 거동을 못하던 70대 남편이 아사 직전 구조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 특권층·중산층이 아니라면 노인으로 산다는 건 징벌에 가깝다. 지난해 1245명이 무연고로 사망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자살과 노인 빈곤율 모두 1위이다. 노인 빈곤율은 49.6%(2013년 기준)로, 노인 절반이 빈곤의 나락에 떨어져 있다.
높은 노인 빈곤율은 낮은 수준의 공적연금과 관련이 깊다. OECD 국가 노인가구는 소득의 59%를 공적연금에서 얻는다. 한국 노인의 소득 대비 공적연금 비중은 16.3%다. 공적연금만 받아선 생활이 안되니 고령자도 일을 놓을 수 없다. 한국 노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1.4%(2013년 기준)로, OECD에서 두 번째로 높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는 고도성장이 빚어낸 샴페인 잔을 일거에 깨뜨렸다. 외형적 확장 외에는 거의 아무런 제도적 정비 없이 달려온 고속 성장의 민낯은 거칠었다. 성장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임금상승률도 급락했다. 성장률 하락은 분배 악화로 이어졌다. 노동 시장도 분절됐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중소기업에 다니다 대기업으로 옮기는 것도, 돈 모아 집을 사는 것도 제법 가능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이런 일은 힘들어졌고 소득 격차가 벌어져 양극화가 심화됐다. 중산층은 와해됐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정부가 뒤로 물러선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다. 민주공화국의 위기는 양극화에서 시작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정치적 측면에서는 민주공화국의 틀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지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계층 분화나 양극화가 심화됐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계층 이동이 굉장히 어려워졌고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강하게 굳힐 기회가 됐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로 가고 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
정부는 청년 일자리 예산으로 매년 2조원 이상을 쏟아붓지만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기 바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9.4%를 기록했다. 9월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잠재적 실업자를 고려하면 체감실업률은 2~3배 더 높다. 장관, 국회의원, 법조인 자녀들이 ‘부모 스펙’을 이용해 취업 특혜를 받았다는 소식은 청년들을 절망케 한다.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은 우리로 하여금 민주공화국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 사회현상이다. 나라의 미래를 담당해야 할 젊은이들이 사회를 지옥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전근대적인 신분주의가 깊게 뿌리내렸다는 현실 인식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현상이다.”(김호기 연세대 교수)
불평등을 보여주는 통계는 차고 넘친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의 ‘한국의 개인소득 분포: 소득세 자료에 의한 접근’ 논문을 보면 2010년 20세 이상 성인인구 3797만명 중 상위 10%(10분위)는 전체 소득의 48.05%를 가져갔다. 이들의 평균소득은 8085만1000원으로, 전체 소득자 평균소득(1682만5000원)보다 4.81배 많다. 하위 70%(1~7분위)가 갖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8.87%다. 이들이 버는 돈을 다 합쳐도 상위 10%가 버는 돈의 절반도 안된다.
소득이 한쪽으로 쏠리는 속도도 빠르다. 국회 입법조사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상위 10% 소득 집중도는 44.9%(2012년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미국(47.8%) 다음으로 높다. 1995~2012년 소득 집중도 상승폭도 15.7%포인트에 달해 비교대상 국가 중 가장 높다. 이 속도라면 2020년쯤 미국을 제치고 OECD에서 소득이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될 수 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상용 노동자 중 저임금 노동자(중위 임금소득의 3분의 2 미만을 받는 노동자) 비율도 미국 다음으로 높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보수는 절반밖에 받지 못한다. 삭발식을 치르고서야 언론의 조명을 받은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은 30년간 일해도 시간당 6030원밖에 받지 못했다.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이들에게 갖은 횡포와 성추행을 당했다. 비정규직이라서, 하청업체 직원이라서 겪은 차별이자 모욕이다. 뇌병변 2급 장애를 앓는 8세 아들을 맡길 데가 없어 화물차에 태우고 다니며 키우다 교통사고로 함께 숨진 일용직 노동자의 소식은 민주공화국에 사는 가난한 자의 삶과 죽음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사고 차량에서는 어린이용 카 시트도 발견되지 않았다.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너무 없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해결책 없이 그대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아 기운이 빠진다. 일을 하면 금전적으로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점점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다. 내년 계약에 대한 두려움이 벌써부터 밀려온다.”(비정규직 방과후 교사 정모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을 쓴 역사 교사 김육훈씨는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대거 계약직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꾼 것은 국가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며 “국가는 국민 모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때의 조치들은 국가가 견지해야 할 공공성을 크게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저임금을 줄이고 노동자 처우를 개선하려고 도입한 최저임금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년도 법정 최저임금은 시간당 6470원으로 올해보다 440원(7.3%) 인상됐다. 한 달 임금으로 환산하면 135만2230원. 1인 가구의 월평균 생계비(167만3803원)에도 못 미친다.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최저임금도 못 받는 ‘근로자 비율’은 11.8%(2013년 기준)다. OECD 26개국 중 세 번째로 높다.
■“국가가 곧 기업이 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역 인근의 ㄱ감자탕집은 24시간 영업을 한다. 80석 식당의 한 달 매출은 평균 1700만원 정도 되지만 월세 440만원(보증금 5000만원)에 인건비 등을 제하면 주인 부부 손에 쥐어지는 돈은 월 300만~400만원 남짓이다. 주인 ㄴ씨의 얘기다. “강남이라 다른 동네보다 임대료가 높다. 월세 내고 인건비 주면 수입이 안 나오니 손님 한 명이라도 더 받으려고 24시간 한다. 새벽 시간대 손님이 많을 때는 5~6팀, 적을 때에는 1~2팀이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난 추석 대기업 계열 대형마트들은 ‘추석 당일 정상 영업’을 했다. 명절 당일 영업하는 게 ‘정상’인 나라, 새벽에도 식당 문을 못 닫는 나라. 노동의 가치가 땅값보다도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땀 흘려 노력해도 부의 축적이나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시대엔 부동산 투자가 모든 사람의 로망이 됐다. KB금융연구소의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큰손’들의 재산 절반(52.4%)은 부동산이었다.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이 주로 찾았던 부동산 경매학원은 20대 대학생, 30대 직장인들로 붐빈다.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건물주’라는 답이 나온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풍자하듯이 세입자들의 입지는 취약하다. 저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건 대세가 됐다. 노무현 정부 때 1.66%이던 전셋값 상승률은 박근혜 정부 들어 18.16%로 10배 이상 높아졌다. 전세 비율은 1995년 29.7%에서 2014년 19.6%로 내려간 반면, 월세 비율은 같은 기간 11.9%에서 21.8%로 높아졌다. 이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의도한 방향이다. ‘최경환 경제팀’은 2014년 8월 부동산 대출 규제를 대폭 풀었고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내리며 손발을 맞췄다. 업자들도 “전세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제도”라며 전세 씨말리기에 힘을 보탰다. 이들에게 매달 임대료 대느라 허덕이는 서민들은 안중에 없었다.
임대소득은 대표적인 불로소득이다. 그런데 세금은 제대로 걷지 않는다. 현행법상 모든 주택임대소득은 원칙적으로 과세대상이지만 예외 조항이 너무 많다. 1주택 소유자는 주택 기준시가가 9억원을 넘지 않으면 아무리 월세를 많이 받아도 과세대상이 아니다. 연간 2000만원까지의 주택임대소득에 대한 과세는 정부가 비과세 특례 기한을 2년 더 연장하면서 내년에도 물 건너갔다. 전세 임대인의 경우 3주택 이상 소유자이고 전세보증금 총액이 3억원 이상인 경우에만 과세대상이 된다. 미국·일본 등에서 주택 수나 가격에 상관없이 임대로 발생한 소득에 모두 과세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는 매년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면서도, 이 같은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에는 손을 놓는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부동산은 그 자체로 부의 불평등 문제와 더불어 높은 자본소득(낮은 노동소득)의 문제를 제기한다. 높은 부동산 가격은 두고두고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소득 불평등을 더욱 압박할 것이다.”(이정우 경북대 교수)
경제활동으로 만들어낸 국가 소득은 가계, 기업, 정부에 분배된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는 가계와 기업에 분배된 소득 비중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가계소득의 몫이 지속적으로 줄어든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1990년부터 2014년까지 국민소득 중 가계소득 비율은 70.1%에서 61.9%로 8.2%포인트 감소한다. 이 기간 기업소득의 비율은 17.0%에서 25.1%로 8.1%포인트 증가했다. 임금·이자·배당과 같이 가계소득으로 분배돼야 할 몫이 줄어들고 기업 몫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7·4·7’ 공약(성장률 7%, 국민소득 4만달러, 7대 경제강국)을 내걸고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주도 성장의 과실이 국민 전체로 확산된다는 ‘낙수 효과’를 믿었다.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노무현 정부 때 도입한 종합부동산세도 부과 기준을 올리고 세율을 낮춰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기업과 자산가들에 대한 감세 조치였다.
선거 때 재벌 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강조한 정치세력들은 집권 후 친재벌로 돌아섰다. 대통령마다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밥을 먹으며 투자와 고용을 당부하는 장면은 익숙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규제는 암덩어리”라며 규제완화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강조했다. 기업 이윤은 국가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됐다.
“행정부나 사법부가 예전에는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는 게 문제였다면 지금은 국가권력이 자본의 영향에 좌지우지된다.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하승수 변호사)
대통령 사면권은 법원 판결을 없던 일로 해버리는 예외적 권한이다. 역대 정부는 때마다 재벌 총수들을 풀어줬다. 명분은 민생·경제 살리기였다. 효과는 없었다. 투자나 고용을 늘리더라도 반짝 이벤트에 그쳤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 명을 위한 ‘원 포인트’ 특사도 단행했다. 이 회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맡고 있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 법무장관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자”고 말했다.
낙수 효과는 실종됐지만 친재벌 정책은 그대로다. 롯데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한 제2롯데월드 신축은 군 항공기 안전 문제로 장기간 표류했으나 이명박 정부는 활주로 각도를 변경하고 롯데가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줬다.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지만 정부는 ‘증세 불가’ 도그마에 갇혀 있다. 기업들은 수백조원의 유보금을 쌓아 두고도 투자나 임금 인상에는 인색하다.
경제력 집중은 심화된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재벌에 속한 기업 24곳이 생산한 부가가치는 2011년 94조1000억원에서 2013년 119조원으로 늘었다. 삼성그룹 소속 9개사는 2013년 총 62조8000억원의 부가가치를 생산해 50대 기업이 생산한 부가가치의 37.1%를 차지했다. 범4대 그룹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자산 비중은 2000년 45.8%에서 2012년 말 69.7%로 약 1.5배 늘어났다. 매출액 상위 10대 기업이 각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 15.1%, 일본 22.0%, 프랑스 29.4%, 독일 30.1%이지만 한국은 47.1%에 이른다.
노동자나 소비자가 희생양이 된 사건에서 개입·조정 책임을 진 정부는 방관자로 전락했다. 생명이 걸린 문제도 외면할 때가 많았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기흥공장에서 2년간 일하던 황유미씨가 급성백혈병으로 스물셋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그해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한 뒤 백혈병이 직업병이었음을 인정받기까지 7년3개월이 걸렸다. 정부 집계에서도 사망자가 100명이 넘고 수천명의 피해자를 낳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위해성이 명백해질 때까지도 제조·유통 업체에 대한 제재나 피해자 구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지난달 정기회의에서 채택한 ‘유해물질 및 폐기물 처리 관련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의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산재보험 체계와는 별도로, 피해를 구제받아야 할 노동자·피해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1차적 책임 주체인 정부가 수행한 대책의 수준이 놀랄 만큼 낮다”며 “산재보상 청구인에게 부과된 과도한 입증 책임 때문에 보상을 받기 어려워지는 점을 우려한다”고 적었다.
“공공성의 표상이자 골간인 국가까지 시장화돼서 국가가 ‘재산관리 국가’로 전락했다. 국가가 형평이나 공공성, 자유, 시민 권리의 보호가 아니라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박명림 연세대 교수)
■“신계급사회, 계층 이동 사다리를 치우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다. 고대 로마처럼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귀족공화국도, 중국처럼 권력이 내각이나 당에 집중된 ‘인민공화국’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삼권 분립과 인권 평등이 보장되는 나라다. 조선왕조 500년, 식민통치 35년이 끝난 뒤 들어선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마침내 공공 가치를 공유하고 균등한 권리를 누리며 주체가 되는 사회가 될 거라고 믿었다.
2016년 대한민국은 다시 봉건사회다. 학벌, 재산, 직업에 따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구분된다. 교육부 고위 관료는 “구의역에서 죽은 아이가 어떻게 내 아이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고, 계급과 신분을 구분 짓는 엘리트층의 의식체계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자기 자식은 이미 평등의 고원 위로 올라가 있다는 거다. 구의역 노동자의 죽음에 감정이입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아이(구의역 노동자)는 평등의 고원에 올라온 애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부정의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불행하거나 능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이택광 경희대 교수)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139명(46.3%)은 교수·법조인·관료 출신이다. 81명(27%)이 서울대를 나왔고, 141명(47%)이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고 사회 주류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몇 년 전까지도 국회에서 소수자를 대변했던 농민, 환경미화원 출신은 자취를 감췄다. 20대 국회 신규 재산등록 의원(154명)의 재산은 평균 34억2200여만원, 4명 중 1명은 재산이 20억원이 넘는다.
퇴직한 ‘전관’들에게 노후 걱정은 딴 세상일이다. 최근 5년간 공정위에서 4급 이상 고위직을 지내다 퇴직한 뒤 재취업한 사람 가운데 85%가 대기업이나 로펌행을 택했다(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의원).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는 공직에서 쌓은 다양한 특별수사 노하우를 ‘거물들’ 변호에 재활용하며 연간 100억원 가까운 소득을 거뒀다. 대기업이나 로펌이 고액 연봉을 주고 고문, 자문위원 등으로 전관들을 영입하는 건 이들의 ‘힘’이 로비 과정에서 통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공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정의다. 그런데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당장 욕을 먹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게 성공한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다. 절차를 무시하고 부패하더라도 돈 많은 것이 존중받는다.”(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
과거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교육은 계층 굳히기의 수단이 됐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의 ‘세대 간 계층 이동성과 교육의 역할’ 보고서에 따르면 최하위 25% 임금을 받는 아버지로부터 최상위 25% 임금을 받는 아들이 나오는 비율은 18%이지만, 최상위 임금을 받는 아버지로부터 최상위 임금을 받는 아들이 나오는 비율은 36%로 두 배 높다. 과거엔 집안이 가난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부모 경제력에 따른 교육 격차가 커지면서 계층 간 대물림을 공고화한다. 고시제도의 배타성을 보완하려고 도입됐지만 ‘금수저’를 위한 제도가 되어버린 로스쿨이 대표적인 예다. 로스쿨의 1년 등록금은 1600만~1800만원. 고위층 자녀가 로스쿨 졸업 후 취업 과정에서 부모 스펙의 도움을 받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교육 여건이 열악한 지역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서울대가 2005년 도입한 ‘지역균형선발’ 전형은 오히려 서울 학생들에게 유리하다. 올해 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서울 출신 학생은 4명 중 1명꼴이다(더민주 오영훈 의원).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등 사회적 배려자를 위한 전형인 ‘기회균형선발’로 입학한 학생은 2012년 5.8%(195명)에서 올해 2.9%(163명)로 줄었다.
“공화라는 말은 세습 귀족이나 왕이 없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 처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흙수저론이 나올 정도로 불평등이 심각하다. 교육, 복지, 노동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특정 계층에 편중된 부분이 있다. 경제적 불평등만이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정치에서 (민중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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