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연 기자의 新 강북 지도] (1) 빌딩 숲 사이 ‘산소’ 같은 골목
노정연 기자ㆍ충정로 옆 미근동 기찻길
ㆍ허름한 여관·쌀집, 그 옆에 레스토랑·카페…‘옹기종기’
낮 12시. 오전 내내 숨죽이고 있던 직장인들의 자유의지가 잠시 봉인에서 해제되는 시간.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5평 남짓한 작은 카레집 앞에 줄을 늘어선다. 그 옆 함박스테이크집도, 그 아래 덮밥집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테이블 수가 몇 안되는 아담한 식당들이다. 점심시간 인파로 불어나는 이 골목에서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5~20분 정도 일찍 나오시거나 아예 느긋한 마음을 갖는 것이 좋아요.”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하다 재작년 이 골목으로 옮겨 수제 함박스테이크 전문점 ‘비스테이크’를 연 배현진씨가 웃으며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충정로 6길, 경의중앙선이 달리는 기찻길 옆 점심 풍경이다.
고층빌딩과 사무실이 밀집되어 있는 서대문과 서소문 일대. 점심시간에 인파로 식당가가 북적이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싶지만 이곳은 좀 독특하다. 도심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기찻길을 따라 젊은 사장들이 운영하는 작은 맛집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허름한 동네 분위기와는 달리 세련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에 메뉴도 다양하다. 일본식 카레 전문점과 함박스테이크 전문점, 수제맥주를 함께 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베트남 쌀국수, 카페, 호프집…. 지은 지 40년이 넘은 서소문아파트 끝자락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채 200m도 안되는 길이 일자로 쭉 뻗어 있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찾아올까’ 싶지만 음식점 10여곳이 ‘당당하게’ 들어서 있다. 대부분 23~26㎡ 규모의 ‘한 뼘 가게’들로 20~30대 젊은 사장들이 최근 2~3년 사이 간판을 내건 집들이 많다.
이 오래된 골목에 처음 새바람을 몰고온 이는 카레집 ‘더 스푼’의 사장 이서령씨(36)다. 올해로 5년째 더 스푼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대학 졸업 후 줄곧 ‘꽃 파는 여자’였다. “2005년부터 이 골목에서 꽃집을 했어요. 오래하기도 했고, 뭐 새로운 게 없을까 찾아보다 카레를 생각하게 됐어요. 평소 지인들에게 맛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처음엔 꽃집 한쪽에 ‘소심’하게 카레집을 같이 열었다. 어머니대부터 꽃만 알고 살았으니 업종 변경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카레집 비중이 커지면서 5년 전 완전히 간판을 바꿔 달았다. 순하고 담백한 맛으로 인근 직장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더니 지금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기찻길 대표 맛집이 됐다.
뒤를 이어 지금은 골목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 ‘돈까스가 땡길 때’가 들어왔다. 여의도에서 음향감독 일을 하던 김준희 사장(40)이 2012년 돈가스집을 열었다. 순전히 “인근 회사에서 근무하던 와이프 때문”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파와 양파가 듬뿍 올려진 ‘파파까스’, 해장용으로도 인기가 많은 ‘돈까스라면’ 등 평범함 속에 비범한 맛을 알아챈 이들이 귀신같이 알고 드나들기 시작했다. 바삭한 튀김과 두툼하게 씹히는 고기에다, 밥은 원하는 만큼 밥솥에서 꺼내 먹는다. 점점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할 수 없어 2년 전 골목 안쪽으로 ‘확장 이전’했다.
‘돈까스가 땡길 때’가 옮겨간 자리에는 호프집 ‘아지트’가 들어섰다. 이 골목 최연소 사장인 스물여섯 살 한승석씨가 야심차게 문을 열었다. 어느덧 2년차가 된 기찻길 신흥 명소다. 매운낙지덮밥과 불고기비빔밥으로 점심 장사를 하고 저녁시간이면 호프집으로 변신한다. 오후 7시만 되면 직장인들이 그득그득 자리를 잡고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는 곳이다. 기찻길 식당들의 점심가격은 5000~6000원 선. 질 좋은 고기로 만든 수제 함박스테이크도 1만원 안쪽에 먹을 수 있다. 끼니 때 줄을 서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회전이 빠른 편이라 손님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저 멀리 남도에서 달려온 KTX, 새마을, 무궁화호를 비롯해 경의중앙선을 달리는 전철까지, 수많은 열차들이 하루 종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곳을 지나간다. 상행선과 하행선을 합해 하루 450여대에 달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임대료가 싸고 유동인구가 많지만 기차 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노후 주택이 밀집해 있어 ‘식당 자리’로는 눈여겨보지 않던 곳이다. 틈새지역에 전략적으로 상권을 만들었다 권리금을 받고 빠지는 이른바 ‘꾼’들도 고개를 저으며 지나쳤던 무용지대. 그랬던 곳이 신종 골목상권으로 변신하게 된 데는 가성비와 퀄리티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킨 메뉴들과 이곳만이 가진 남다른 분위기가 한몫했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 사이로 들려오는 기차 소리와 옛 정취 가득한 골목길이 고전적 매력으로 작용한 것. 오래된 여관과 ‘빙그레’ 간판을 단 우유대리점,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나른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쌀집의 간판엔 016 전화 국번이 적혀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들이 바쁜 도시의 일상을 잠시 잊게 한다. 오른쪽엔 쌀집, 왼쪽엔 고물상을 이웃한 ‘219-1’의 이한규 대표(31)도 이런 묘한 분위기에 끌려 기찻길 골목으로 들어온 케이스다. 인근 경기대에서 운영하는 수수보리아카데미에서 ‘술을 배운’ 그는 “상대적으로 싼 임대료와 한적함이 좋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진한 국물이 중독성 있는 로제파스타와 함께 곁들여 먹는 수제맥주가 일품이다.
점심 장사가 끝나고 2~3시간 정도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브레이크 타임에는 미근동 기찻길에도 고요가 찾아온다. 이곳 식당들은 대부분 주 5일 영업을 한다. 장사는 좀 되느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많이 벌진 않지만 먹고살만 해요”라며 베짱이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미근동 일대는 특별계획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된 탓에 변화에선 한 발짝 물러서 있다. 1980~1990년대 풍경을 간직한 채 화려한 주변 건물들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서소문 수산청과시장이 있었던 1960~1970년대엔 지금의 동대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붐비던 동네였다. “그땐 하루에 설렁탕을 1300그릇 팔았어.” 이 골목에서 6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 ‘형제옥’의 안주인 김미자씨(52)가 미근동의 ‘황금기’를 회상하며 말했다. 1988년 가게를 물려받은 남편 김상호 사장(56)과 김씨는 30년 가까이 미근동 기찻길의 역사를 지켜본 증인들이다. 25년 동안 새벽 3시 반에 문을 열다 아침 7시로 시간을 늦춘 건 채 5년이 되지 않았단다. 형제옥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미집’, 20년 넘은 ‘청기와 생고기’도 인근 직장인들이 손꼽는 단골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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