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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 삶과 앎이 분리된 학교를 한탄하다…우린 어떤가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22. 08:55

[쿠오바디스와 행로난](16) 세네카, 삶과 앎이 분리된 학교를 한탄하다…우린 어떤가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ㆍ문제는 학교 교육

로마 제정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는 로마의 학교가 덕성이나 사람다움에 대한 교육을 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과 앎의 합일, 일치를 강조했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그는 네로에게 자결 명령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대 작가들은 그의 죽음을 많은 작품으로 남겼다. 사진은 스페인 화가 산체스가 1871년 그린 ‘세네카의 죽음’. 원래 제목은 ‘정맥을 자른 후 친구들의 슬픔과 분노 속에서 욕조로 들어가는 세네카’다.

로마 제정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는 로마의 학교가 덕성이나 사람다움에 대한 교육을 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과 앎의 합일, 일치를 강조했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그는 네로에게 자결 명령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대 작가들은 그의 죽음을 많은 작품으로 남겼다. 사진은 스페인 화가 산체스가 1871년 그린 ‘세네카의 죽음’. 원래 제목은 ‘정맥을 자른 후 친구들의 슬픔과 분노 속에서 욕조로 들어가는 세네카’다.

결국은 학교 교육이 문제였다. 로마인들이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고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문(법)학을 로마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아마도 아리스타르쿠스의 학문적 맞수였던 크라테스 말로테스였다. (…) 그는 (로마 근교의) 팔라티움의 하수구에 빠지면서 그만 정강이가 부러졌다고 한다. 그는 사절 기간, 부러진 다리가 다시 이어지는 동안에도 내내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성실하게 또 지속적으로 강의를 했고, 이것이 우리 로마인이 모방하게 되는 선례가 되었다(<로마의 문법학자들>).’ 그리스 방식의 학교가 로마에 도입된 것은 스토아 철학의 대가였던 크라테스(기원전 3세기)의 부러진 다리 덕분인 셈이다.

■로마의 교육 열풍, 대치동과 닮아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렇게 촉발된 로마인들의 교육열은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후끈 달아올랐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70~122년)의 말이다. ‘이후 문(법)학에 대한 호의와 관심이 높아져 갔는데, 저명한 인사들도 자신들이 문(법)학에 대해 뭔가를 저술하는 것을 꺼려 하지 않았다. 문(법)학을 배우려는 학생들로 가득찬 문(법)학 학교가 20곳이 넘게 성업했던 시기가 로마에 있었다고 전한다. 문(법)학 선생들의 몸값과 강의료도 천정부지에 이르렀다고 한다(<로마의 문법학자들>).’

로마 학교 풍경의 한 장면.

로마 학교 풍경의 한 장면.

전혀 낯설지 않게, 자연스럽게 서울 대치동의 거리가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를 강타한 교육 열풍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사교육 광풍과 실제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다. 포에니전쟁이 끝나자, 로마를 이끌 사람으로 전쟁기술에 뛰어난 이들보다 말재주(oratio)로 사회 갈등과 내분을 통합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말 잘하는 사람(orator)’이 출세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로마인들은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교육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일부 ‘금수저’ 집안은 그리스에서 최고의 학자들을 개인교사로 모시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자식 교육을 그리스 출신 노예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자식 교육을 노예에게 맡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교육열이 높아짐에 따라 로마의 학교에서는 이런 장면까지도 흔했다고 한다. 노예 교사가 자식을 두들겨 패도 부모들이 이를 수긍하고 인정하는 장면들 말이다. 수에토니우스의 말이다. “오르빌리우스의 신랄함은 학생들을 다룰 때도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예컨대 호라티우스는 그를 ‘미친 몽둥이(狂木)’라 부른다. 아울러 도미티우스 마르수스도 쓰기를, ‘누가 되었든 오르빌리우스는 몽둥이와 채찍으로 (휘갈겨) 큰 대자로 눕혔다네”(<로마의 문법학자들>)라고 했다.

정복당한 노예가 정복한 주인을 정복한 셈이다. 사실, 로마인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교육할 만한 지적 역량을 지닌 사람들도 아니었다. 정신의 양식인 인문학을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연구해본 적도 없었고,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라틴어 텍스트도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문화의 선진국인 그리스의 텍스트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리스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아야 대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인들을 노예가 아닌 선생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노예 교사들이 담당한 것은 대개는 문법 교육이었다. 그런데, 인문학의 여러 하위분야 중에서 소위 정답이 있는 과목이 바로 문법 교육이다. 노예들이 주도한 수업은 그리스어를 문법과 어법에 맞게 말하고 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법 교육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 방식은 소위 ‘주입식 교육’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앎과 삶을 분리시킨 로마 학교

노예 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로마의 학교 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세네카의 말이다. ‘자네는 교양 교육에 대한 내 생각을 알고자 하네. 나는 돈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은 그 어떤 것도 존중하지도 귀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네. 이런 학문은 돈벌이에 불과하네. 단지 잠시 유용할 뿐이네. (…)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을 행할 수 없는 동안만, 딱 그동안에만 기대어야 하는 것들일세. 그것들은 단지 우리를 돕는 기초 도구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 자신의 활동 자체는 아닐세(<서한>).’

학교가 더 이상 덕성(virtus)과 사람다움(humanitas)이 아니라 돈만 숭상하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세네카의 한탄이다. 사실, 자유 교양의 이념을 생존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놓는 노예 교사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생존을 위해서 돈을 중시하는 노예 교사들을 딱히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노예 교사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결국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로마에는 수많은 학원들이 성업했고, 학원들간 경쟁도 치열했다. 그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예 교사들은 한편으론 생존을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학원의 소위 특성화를 위해서 문법 교육의 체계화와 전문화를 시도했다. 이런 시도들은 문법 교육의 발전에는 분명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교육의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뭔가 부족하다. 이는 오늘날 한국의 학원들 상황과 매우 유사한데, 지식과 정보의 전수는 되지만 그것이 교육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교육 내용의 문제로 이어진다. 세네카의 날선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스의 나이를 따지는 것이. 아마도 너는 물을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방황한 곳이 어디인지를 말이다. 탈선하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대신에, 오디세우스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어느 곳을 방황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 밖의 어느 곳인가를 학교에서 가르친다. (…) 마음 안에서 온갖 폭풍우들이 우리를 매일 흔들고 끊임없는 걱정들이 오디세우스가 겪었던 온갖 불행으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 여기에는 사람의 피를 목말라 하는 괴물이, 무시무시한 속내를 감춘 매혹적인 목소리의 요물이, 난파선과 숱한 재난들이 있다. 차라리 나에게 가르쳐라. 조국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이토록 명예롭고 훌륭한 덕성에 설령 배가 난파되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살아남아 항해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서한>).’

세네카는 로마의 학교가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삶과 앎을 분리시키는 연습을 교육하는 곳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인문학, 학교 교육 비판에서 탄생

사정이 이쯤 되면, 삶과 앎의 분리가 가져오는 문제점,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문제, 다시 말해 교육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들을 던지는 시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로마의 경우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이 키케로(기원전 106~43년)다. 그는 문법학·논리학·수사학 같은 개별 학문들에 대한 학문체계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서 과연 사람이 행복해지고 공동체가 번성할 수 있는지, 나아가 교육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날카로운 물음을 던졌다. 그는 수사학의 발견, 배치, 표현, 기억, 전달과 개념들을 잘 안다고 해서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의분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이론적으로 “분노란 마음의 격동 혹은 복수를 통해서 자신의 화를 치료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내릴 줄 안다고 해서, 그러니까 어떤 이가 분노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그 분노가 요구하는 실천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가 분노가 무엇인지를 개념적으로 정의내리지 못한다 해서 그 사람이 화를 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앎과 함의 분리는 안된다는 것이 키케로의 핵심 논지였다. 키케로의 이런 생각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지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만, 키케로에게 앎과 함의 분리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공동체의 붕괴, 곧 로마 공화국의 몰락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의식에서 키케로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교육을 제안한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이다. 키케로의 말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목적에 봉사하는 모든 학문은 서로가 서로를 묶는 공통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고, 마치 혈연에 의해 연결된 것인 양 상호 결속되어 있다(<아르키아스 변호>).’

인문학의 모태가 무엇인지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한편으론 당시 유행한 로마 학교의 교육방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앎과 함의 분리를 연습하는 학교 교육에 맞서 앎과 함을 결합시키려는 열망이었다.

■문제의 해법은 책읽기

중요한 것은 해결 방법이었다. 키케로는 ‘오랫동안 숙고하고 그 방도를 찾아서 이리저리 모색’했다. 키케로의 깊은 고민 끝에 나온 해법이 책읽기이다. 너무도 평이한 해법이어서 좀 허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시각일 뿐이다. 키케로의 시대에는 라틴어로 쓰여진 책이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책을 쓰고, 또 책읽기를 제안한 것은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방안이다. 책읽기가 로마에서 교육의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키케로가 죽은 이후 현실화된다. 그의 바람대로, 로마에도 마침내 읽을 만한 라틴어 책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고, 책읽기가 결국은 교육의 핵심 방법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는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35~96년)의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교육을 위해서 무엇을 읽히고, 어떻게 읽히며, 왜 그 책을 읽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통해 선정된 책들을 학교에서 읽고 따지는 것이 교육의 기본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른바 ‘고전(classica)’ 읽기 교육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결국 인문학과 고전 교육의 탄생은 당시 로마의 잘못된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 대안에서 나온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0211906005#csidx59bcf9e0dfedcb4bfc0b43d2a69be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