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15) 델로스 섬에서
그리스 델로스 섬의 폐허로 변한 집터의 모습. 델로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델로스섬에 있는 원형극장 유적.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델로스 섬 옛 주택가로 가는 길의 모습. 델로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재원 교수 제공
아테네 경제적 번영 가져왔지만
제국화로 귀족파와 민주파 대립 민주파 에피알테스 사법 민주화
귀족들의 아레이파고스 무력화
시민들의 총회인 민회에 권력 이양
그리스 민주주의 완성시켜 결정적인 변화는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65년, 스파르타에 국가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큰 지진이 나자 헤일로타이가 반란이 일으켜 제3차 메세니아 전쟁이 터졌다. 이때 키몬은 스파르타가 멸망하면 그리스 세계 전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스파르타를 돕기 위한 파병을 해야 한다고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했다. 반대로, 에피알테스를 비롯한 민주파 지도자들은 스파르타가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약해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귀족들과 달리 그리스 세계를 스파르타와 함께 나눠 갖기를 바라지 않았다. 특히, 당시 아테네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에온과 소아시아 남부의 에우리메돈 강에서 페르시아군을 크게 물리쳤기에 전 그리스 세계의 유일한 패권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상태였다. 키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스파르타를 돕기 위한 파병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성공은 반스파르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아테네에서 인기가 별로 없었다. 이렇게 키몬의 정치적 몰락은 시작되었다. 기원전 462년, 키몬이 헤일로타이의 반란으로 내전에 휩싸인 스파르타를 돕기 위해 4천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로 출정하자 이를 계기로 키몬에 대한 민주파의 정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선 키몬을 뇌물 수수죄로 고발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시작으로 민주파는 정권 쟁취를 위한 공세를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바로 그해에 민주파의 우두머리 에피알테스는 행정 수행상의 부패와 월권을 트집잡아 아레이오파고스 의원 다수를 재판에 회부하여 제거하고 재판권을 500인회와 민회에 넘기는 법안을 제안했다. 또 재판은 매일 추첨으로 배심원들을 뽑아 만든 민중 재판소가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아레이오파고스는 살인, 방화, 상해, 신성모독과 같은 중범죄만 심판하는 법원으로 기능을 제한했다. 민회는 에피알테스가 제안한 법안을 쉽게 승인했다. 키몬의 부재가 결정적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에피알테스는 귀족들의 정치적 보루인 아레이오파고스의 정치적 권한을 모두 빼앗았다. 이렇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 에피알테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자료가 거의 없어 알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생각이 깊고 매수가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다만, 그는 당시 최고의 선생들에게서 철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난했지만 심지어 친구들에게서조차 조그만 선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철저한 민주파였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파고스의 해체를 이끌었는데, 그 까닭은 이 귀족 집단이 공금을 올바로 쓰지 않고 유용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공직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많은 귀족을 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부정을 저지른 귀족들로서는 그의 강직함과 정의로움이 두려웠을 것이다. 예전부터 귀족파 집단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과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비밀 행동파 조직이 있었다. 아레이오파고스의 해체 직후에 이들이 움직인 것 같다.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는 암살당했다. 에피알테스의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펠로폰네소스에서 급히 돌아온 키몬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그는 함께 원정을 갔던 중무장 병사들이 아테네 본국의 정변을 보며 느낀 감정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군이 더 이상 아테네 시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함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분노하여 클레이스테네스 민주개혁 체제가 인정한 아레이오파고스의 옛 권한과 영광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해 있었다. 그가 얻은 것은 민중들의 반감뿐이었다. 민중의 미움을 사게 되자 그의 예전의 승리와 공로는 잊히고 오히려 그의 친스파르타적 성향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461년 “민중 혐오”와 “친스파르타적 성향”이라는 죄명으로 키몬의 도편 추방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아테네의 귀족파는 지도자를 잃었던 반면, 민주파는 암살당한 에피알테스의 뒤를 이어 페리클레스라는 출중한 지도자가 출현한다. ■ 에피알테스의 사법 민주화의 의미 솔론의 개혁 이후 민회는 일종의 상고법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솔론은 매년 선출되는 9명의 아르콘(집정관)과, 이전에 아르콘을 지냈던 사람들로 구성된 아레이오파고스가 내린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시민이 민회에 재심을 신청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르콘은 선출직이었는데 투표는 권위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돈을 가진 귀족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기원전 487년부터는 아르콘을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뽑게 되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제비뽑기는 신의 결정이라고 믿었기에 이런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렇게 뽑힌 아르콘들도 일단 아레이오파고스의 일원이 되면 바로 기득권 세력에 합류하여 가진 자들의 편이 되는 일이 많았고, 또 부패하는 경향도 보였다. 특히, 아레이오파고스는 아르콘의 부패나 비리를 심판하는 탄핵권을 갖고 있었는데 아레이오파고스 자체가 전현직 아르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비행을 덮어주는 데에만 열중했다. 말하자면 ‘전관예우’를 한 셈이다. 에피알테스의 사법개혁은 바로 아레이오파고스의 이 탄핵권을 박탈하고 이 기능을 시민들의 민회에 넘긴 것이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사회적 저명인사의 압력이나 부자들의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게 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리는 좀 더 민주적인 사법제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또 일반 시민들의 상식과 정서를 벗어나는 법 해석과 집행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법이 민주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공정하고 정직하게 해석되고 적용되지 않는다면 사법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에피알테스의 사법개혁이었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