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희랍어 자료

에피알테스의 사법개혁, 그리스 민주주의를 완성하다 /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5. 10:22

국제유럽

에피알테스의 사법개혁, 그리스 민주주의를 완성하다

등록 :2016-08-04 20:57수정 :2016-08-04 21:13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15) 델로스 섬에서

그리스 델로스 섬의 폐허로 변한 집터의 모습. 델로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델로스 섬의 폐허로 변한 집터의 모습. 델로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재원 교수 제공

델로스에 가기는 쉽지 않다. 그 섬으로 가는 배가 미코노스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해도 만만치 않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섬에 온통 대리석으로 바닥을 깐 집터 폐허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강철이라도 녹일 듯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을 피할 곳이 없다. 게다가 무인도라 물을 구할 곳도 없고 관광지에는 널려 있게 마련인 식당도 카페도 없다. 로마 시대 때 조금 컸다고 자기들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한 로도스를 벌하기 위해 이 섬을 세금이 없는 자유무역항으로 만든 이후에, 델로스는 지중해의 노예시장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다. 이렇게 돈을 번 벼락부자들은 서로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열심히 대저택을 짓고, 집 구석구석까지 비싼 대리석을 깔았다. 세월이 지나고 그리스도교가 들어서 노예무역을 금지하자 섬은 하루아침에 몰락해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깔아 놓은 대리석들 때문에 델로스 섬 전체는 지금까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불모지로 남아 있다. 이 섬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태어난 곳이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모여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델로스 동맹이 맺어진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조차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이 섬을 순례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환경 파괴가 남긴 끔찍한 결과를 보라. 인간의 오만과 허영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소로운가?

그리스 델로스섬에 있는 원형극장 유적.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델로스섬에 있는 원형극장 유적. 유재원 교수 제공
페르시아 전쟁 후의 그리스 세계: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 제국

기원전 479년 8월27일,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이 보이오티아의 플라타이아이와 소아시아 사모스 섬 앞의 미칼레 해협에서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같은 날 동시에 승리를 거두면서 페르시아 전쟁은 끝났다. 이제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리스 본토 북부와 소아시아 지방에 남아 있는 페르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모든 그리스 폴리스를 해방하는 일만이 남았다. 기원전 478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왕이 이 일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거만하고 난폭한 태도에 분노한 다른 그리스 폴리스의 장군들은 그의 지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스파르타에서는 파우사니아스를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기원전 477년 모든 그리스인의 존경을 받던 아테네의 아리스테이데스가 앞장서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앞으로 그리스는 아테네가 이끄는 이 동맹을 중심으로 효과적으로 페르시아인들과 맞서기로 합의했다. 아리스테이데스의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 키몬은 장군으로 뽑힌 기원전 476년부터 기원전 465년까지 놀라운 군사적 재능을 뽐내며 그리스 세계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내쫓는 데 성공했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된 아테네는 키몬의 연이은 원정 성공과 아테네의 해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동맹국들의 분담금으로 엄청난 경제적 번영과 영광을 누렸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폴리스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가 된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에 민주정을 강요하고 탈퇴를 강제로 막는 등 점점 더 제국적으로 되어 갔다.

귀족들이 처음에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양 정책을 경계한 까닭은 이 정책이 시민계층의 정치적 의식과 영향력을 키울 것이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을 바탕으로 아테네가 제국으로 성장한 뒤 귀족들은 해양 정책만이 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지못해 채택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양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이것이 기원전 470년에서 460년 사이 아테네의 가장 큰 정치 현안이었고, 따라서 귀족파와 민주파는 이 정책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스 델로스 섬 옛 주택가로 가는 길의 모습. 델로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델로스 섬 옛 주택가로 가는 길의 모습. 델로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재원 교수 제공
기원전 470년~460년의 아테네의 정치 상황: 에피알테스의 사법 민주화와 키몬의 추방

아테네가 밖으로는 제국주의적 정책에 주력하는 동안 나라 안에서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제일 아래 계층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더 강력한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키워 갔다. 델로스 동맹이 가져온 번영은 가난한 시민들에게 선원이나 새로운 식민지 시민, 또는 새로운 건설을 위한 일자리 등을 풍부하게 제공하여 장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 주었다. 게다가 살라미스 해전 때부터 그 뒤의 성공적인 해외 원정에까지 선원으로 복무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전쟁의 승리와 아테네의 번영에 큰 공로가 있음을 잘 의식하고 있었기에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원전 471년 테미스토클레스의 도편 추방으로 거의 유일한 권력자가 된 키몬도 시민들의 이런 자부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원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고라에 세운 승전비에 아테네 시민들이 얼마나 결정적인 공헌을 했는지를 강조해 새겨 놓았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들의 공로에 걸맞은 정치적 권리를 누리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르콘을 비롯한 정부 관리직은 솔론의 법에 따라 상위 두 계급만 맡을 수 있었다.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 개혁으로 하층 시민계급은 민회에서의 ‘법 앞의 평등’과 ‘발언의 평등’은 얻었지만 ‘권리의 평등’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키몬은 자신이 누리던 절대적 인기와 권위로서 몇 년 동안은 시민들의 이런 요구를 막을 수 있었다.

페르시아 대항 위한 델로스 동맹
아테네 경제적 번영 가져왔지만
제국화로 귀족파와 민주파 대립

민주파 에피알테스 사법 민주화
귀족들의 아레이파고스 무력화
시민들의 총회인 민회에 권력 이양
그리스 민주주의 완성시켜

결정적인 변화는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65년, 스파르타에 국가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큰 지진이 나자 헤일로타이가 반란이 일으켜 제3차 메세니아 전쟁이 터졌다. 이때 키몬은 스파르타가 멸망하면 그리스 세계 전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스파르타를 돕기 위한 파병을 해야 한다고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했다.

반대로, 에피알테스를 비롯한 민주파 지도자들은 스파르타가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약해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귀족들과 달리 그리스 세계를 스파르타와 함께 나눠 갖기를 바라지 않았다. 특히, 당시 아테네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에온과 소아시아 남부의 에우리메돈 강에서 페르시아군을 크게 물리쳤기에 전 그리스 세계의 유일한 패권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상태였다. 키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스파르타를 돕기 위한 파병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성공은 반스파르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아테네에서 인기가 별로 없었다. 이렇게 키몬의 정치적 몰락은 시작되었다.

기원전 462년, 키몬이 헤일로타이의 반란으로 내전에 휩싸인 스파르타를 돕기 위해 4천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로 출정하자 이를 계기로 키몬에 대한 민주파의 정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선 키몬을 뇌물 수수죄로 고발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시작으로 민주파는 정권 쟁취를 위한 공세를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바로 그해에 민주파의 우두머리 에피알테스는 행정 수행상의 부패와 월권을 트집잡아 아레이오파고스 의원 다수를 재판에 회부하여 제거하고 재판권을 500인회와 민회에 넘기는 법안을 제안했다. 또 재판은 매일 추첨으로 배심원들을 뽑아 만든 민중 재판소가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아레이오파고스는 살인, 방화, 상해, 신성모독과 같은 중범죄만 심판하는 법원으로 기능을 제한했다. 민회는 에피알테스가 제안한 법안을 쉽게 승인했다. 키몬의 부재가 결정적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에피알테스는 귀족들의 정치적 보루인 아레이오파고스의 정치적 권한을 모두 빼앗았다. 이렇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

에피알테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자료가 거의 없어 알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생각이 깊고 매수가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다만, 그는 당시 최고의 선생들에게서 철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난했지만 심지어 친구들에게서조차 조그만 선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철저한 민주파였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파고스의 해체를 이끌었는데, 그 까닭은 이 귀족 집단이 공금을 올바로 쓰지 않고 유용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공직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많은 귀족을 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부정을 저지른 귀족들로서는 그의 강직함과 정의로움이 두려웠을 것이다. 예전부터 귀족파 집단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과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비밀 행동파 조직이 있었다. 아레이오파고스의 해체 직후에 이들이 움직인 것 같다.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는 암살당했다.

에피알테스의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펠로폰네소스에서 급히 돌아온 키몬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그는 함께 원정을 갔던 중무장 병사들이 아테네 본국의 정변을 보며 느낀 감정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군이 더 이상 아테네 시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함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분노하여 클레이스테네스 민주개혁 체제가 인정한 아레이오파고스의 옛 권한과 영광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해 있었다. 그가 얻은 것은 민중들의 반감뿐이었다. 민중의 미움을 사게 되자 그의 예전의 승리와 공로는 잊히고 오히려 그의 친스파르타적 성향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461년 “민중 혐오”와 “친스파르타적 성향”이라는 죄명으로 키몬의 도편 추방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아테네의 귀족파는 지도자를 잃었던 반면, 민주파는 암살당한 에피알테스의 뒤를 이어 페리클레스라는 출중한 지도자가 출현한다.

에피알테스의 사법 민주화의 의미

솔론의 개혁 이후 민회는 일종의 상고법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솔론은 매년 선출되는 9명의 아르콘(집정관)과, 이전에 아르콘을 지냈던 사람들로 구성된 아레이오파고스가 내린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시민이 민회에 재심을 신청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르콘은 선출직이었는데 투표는 권위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돈을 가진 귀족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기원전 487년부터는 아르콘을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뽑게 되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제비뽑기는 신의 결정이라고 믿었기에 이런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렇게 뽑힌 아르콘들도 일단 아레이오파고스의 일원이 되면 바로 기득권 세력에 합류하여 가진 자들의 편이 되는 일이 많았고, 또 부패하는 경향도 보였다. 특히, 아레이오파고스는 아르콘의 부패나 비리를 심판하는 탄핵권을 갖고 있었는데 아레이오파고스 자체가 전현직 아르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비행을 덮어주는 데에만 열중했다. 말하자면 ‘전관예우’를 한 셈이다. 에피알테스의 사법개혁은 바로 아레이오파고스의 이 탄핵권을 박탈하고 이 기능을 시민들의 민회에 넘긴 것이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사회적 저명인사의 압력이나 부자들의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게 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리는 좀 더 민주적인 사법제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또 일반 시민들의 상식과 정서를 벗어나는 법 해석과 집행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법이 민주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공정하고 정직하게 해석되고 적용되지 않는다면 사법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에피알테스의 사법개혁이었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