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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개인 어느 쪽이 우선? /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26. 22:41

문화책과 생각

국가와 개인 중 어느 쪽이 우선하는가

등록 :2016-08-25 20:00수정 :2016-08-25 20:19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8) 아벨라르두스

강의하는 아벨라르두스, 프랑수아 플라멩(1856~1923), 파리 소르본대학.
강의하는 아벨라르두스, 프랑수아 플라멩(1856~1923), 파리 소르본대학.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사드 배치 문제처럼 국가의 정책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나라 국민의 상당수는 국가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쓰라린 체험들 때문에라도 개인의 권리가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는 대다수 국민이 아무 잘못도 없이 국가정책의 실패를 통해 쓰라린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을 무시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렇게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공간과 시간을 넘어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서두의 질문은 철학적으로 보면 “보편과 개체 중 우선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보편논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편을 강조하면 개인보다 국가의 역할을 앞세우기 쉽고, 개체를 강조하면 국가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보편논쟁의 기원과 발생

보편과 개체의 우선성에 대한 문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상반된 견해 안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3세기경 포르피리오스가 <범주론 입문>(Isagoge)에서 “유(類)와 종(種)은 실재하는가?”와 같은 일련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철학적 중요성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로마 최후의 철인 보이티우스가 주목할 만한 답변들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이후 철학이 쇠퇴하면서 해결되지 못한 채 중세에 전해졌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12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이다. 소위 ‘보편논쟁’을 직접적으로 촉발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변화된 상황이었다. 초기의 주요 교회들이 서구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유일하게 로마교회가 전체 교회의 머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시대적 맥락에서 “로마로 상징되는 보편교회와 구체적인 개별교회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교회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밖에도 삼위일체론, 원죄론, 구원론 등의 다양한 주제가 보편논쟁을 더욱 중요한 쟁점으로 만들었다.

초기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 대부분의 학자가 보편이 개체에 앞서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플라톤적 ‘보편실재론’을 옹호했다. 이에 따르면 ‘동물’ 같은 유(類) 개념이나 ‘인간’ 같은 종(種) 개념은 정신 밖에 자립하는 하나의 실재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 논리학자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1120?) 등은 오히려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보편이란 단지 “음성의 떨림” 또는 인간 이성이 만들어낸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견해는 ‘유명론’(唯名論)이라고 불렸다. 두 진영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을 해결한 이가 아벨라르두스(Abaelardus, 1079~1142)였다.

로마의 보편교회냐 개별교회냐
어디가 진정한 ‘교회’인지 논쟁

12세기 스타강사 아벨라르두스
모든 논쟁 이긴 최고의 논리학자

연애 스캔들로 학문적 업적 훼손
그의 방법론 ‘신학대전’에도 계승

아벨라르두스의 주저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 일부. (1851)
아벨라르두스의 주저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 일부. (1851)
논쟁으로 명성 얻은 아벨라르두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벨라르두스는 15살 무렵부터 로스켈리누스 등 유명한 논리학 교사를 찾아다니며 유명론을 포함한 논리학을 탐구했다. 자신감에 찬 그는 지방에서 개인학교를 열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마침내 아벨라르두스는 파리에도 진출하여 개인학교를 열었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자,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학교의 ‘샹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 ?~1122) 밑에 학생 신분으로 등록했다. 아벨라르두스는 기욤이 제시한 보편실재론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한 뒤 공적인 논쟁을 벌여 스승에게 승리했다. 이 승리에 만족하지 못한 아벨라르두스는 당시에 유명한 교사들과 계속 논쟁을 벌였다. 그는 이와 동시에 논리학 주해 집필과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다른 교사들이 아벨라르두스가 제시한 이론을 공격하면, 아벨라르두스는 새롭게 발전된 이론으로 응수했다. 결국 아벨라르두스는 모든 논쟁에서 승리했으며, 젊은 나이에 ‘최고의 논리학자’라는 명성과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아벨라르두스는 보편논쟁의 상반된 입장에 대한 해결책으로 ‘온건실재론’을 제시했다. 아벨라르두스에 따르면 보편적인 용어는 의미를 가진 말이고 일차적으로 개념을 표시한다. 이 보편 개념은 현실적인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수많은 개체 속에 있다. 이 본질을 우리 지성이 파악함으로써 보편 개념이 생긴다. 아벨라르두스는 보편 개념은 오직 정신 속에 존재하지만 개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을 지시한다고 주장해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을 아우르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는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유사했다. 당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명제론>만 서방세계에 알려져 있었는데, 아벨라르두스는 오로지 논리적 사유를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로써 보편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가 제시한 ‘온건실재론’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고, 14세기 윌리엄 오컴이 변형된 유명론을 내놓을 때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논리학 분야를 평정한 아벨라르두스는 당시에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인정받던 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랑의 안셀무스에게서 신학을 배웠지만 스승의 교육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 스승은 개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교부들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벨라르두스는 논리학 지식을 신학에 응용함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신학 분야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스승으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주저인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에서 신학적인 쟁점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성경과 교부들의 다양한 견해 중 상반된 주장들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대비된 권위들 중 어떤 것이 더욱 타당한 근거를 지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해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서신, 트루아 시립도서관, MS(수사본) 802.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서신, 트루아 시립도서관, MS(수사본) 802.
사랑으로 닥친 불행과 학문적 재조명

이런 뛰어난 업적에도 아벨라르두스는 오랫동안 중세철학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이유가 그의 자서전 <내 불행의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벨라르두스는 신학 공부를 마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신학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금세 학생들이 몰려들어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때 그는 노트르담대성당 참사위원 풀베르투스(Fulbertus)의 청에 따라 그의 조카딸 엘로이즈(Heloise)의 개인교사 역할도 맡았다. 그런데 그는 스무 살가량 어린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임신시키고 말았다. 결국 아벨라르두스는 엘로이즈를 자신의 고향 브르타뉴로 데려가 아들을 낳게 한 뒤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의 배신에 진노한 풀베르투스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를 거세해버렸다. 그때부터 아벨라르두스의 개인적인 명성은 철학이나 신학 작품보다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에 더 집중되었다.

아벨라르두스는 12세기 최고의 교사로 많은 학생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지도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를 비롯한 많은 적대자가 있었다. 그들은 아벨라르두스가 논리학에서 배운 방법론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비롯한 모든 신앙의 감독관 노릇을 한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비판자들은 그의 방법론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그렇다와 아니다>에서 사용한 방법은 중세 대학 설립 이후에도 정규 토론과 자유 토론 등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 집필에 사용한 학문 탐구 방법도 이것이다.

아벨라르두스, 쥘 카벨리에, 1853년 이전, 루브르박물관.
아벨라르두스, 쥘 카벨리에, 1853년 이전, 루브르박물관.
아벨라르두스는 20세기 들어 중세학자들에게 “12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재평가받으며 집중 연구되고 있다. 또 그가 남겨놓은 개인적인 편지나 자서전은 “12세기 르네상스” 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평가받는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국가와 개인의 우선성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아벨라르두스가 제시한 ‘온건실재론’에 대한 평가도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벨라르두스는 화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의견 차이를 치열한 지성적 토론으로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의 진지한 학문적 자세와 열린 마음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충돌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리라 기대해 본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