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태영호 前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남북, 북·미 정상회담 평가올 상반기 서점가의 가장 큰 화제작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쓴 《3층 서기실의 암호》다. 출간 세 달 만에 10쇄를 찍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책은 단편적인 북한 실상이 아닌 다양한 권력 심층부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당 중앙위 3층에 있는 서기실은 북한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치행위를 가리킨다. 그만큼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태 전 공사는 북한 내 금기어로 통하는 ‘서기실 비밀’을 과감하게 풀어헤쳤다.
북한에 태 전 공사는 눈엣가시다. 국회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 태 전 공사를 향해 북한은 5월16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 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 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강연에서 태 전 공사는 김 위원장의 행보에 대해 ‘쇼맨십’에 불과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태 전 공사를 향한 북한의 비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악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비난을 퍼붓고 있다.
시사저널은 7월24일 서울 용산에 위치한 본사 사무실에서 태 전 공사와 2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주제는 비핵화 해법부터 북한의 대남전략, 태 전 공사의 사생활까지 다양했다. 인터뷰에서 태 전 공사는 “한·미 양국과의 대화 분위기 조성은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전략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태 전 공사는 “11월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성과를 얻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조급증 때문에 미국 외교가 북한 전략에 말려들었다”면서 “지금이라도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북한 비핵화라는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시간 넘게 이뤄진 태 전 공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①남북, 북·미 정상회담 평가, ②北 김정은 체제 실상, ③태영호의 남한 생활 등 크게 세 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시사저널 이종현
어떻게 지내나.
“그다지 바쁘진 않다. 언론과 인터뷰하거나 대학이나 교회를 돌아다니며 현 상황에 대해 강연한다. 또 남북한 대학생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남북동행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남북동행아카데미란 어떤 모임인가.
“남북한 학생들이 함께 모여 통일 대비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몰랐던 걸 배우는 시간이다. 젊은이들이 남북한의 동질성이 무엇이고 이질적인 게 뭔지를 찾는 자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반응은 어떤가.
“북한이라는 사회는 폐쇄적이기 때문에 살았던 사람조차 잘 모른다. 그래서 탈북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살아온 실상을 알려준다. 한국 대학생은 북한 대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책이나 언론보도로밖에 알 수 없었던 북한 사회를 알게 된다. 종종 한국 대학생 중엔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북한에 그런 정치·경제·사회·문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한국 대학생들은 북한은 사람이 살고 국가가 있고 지도자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초적인 인권이나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북한 대학생들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그런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느냐’ ‘그런 곳에 250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수십 년 동안 봉기 한 번 안 일어나고 사회가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느냐’고 말한다.”
북한을 어떤 사회라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조차 무시당하는 사회다. 한국 사회와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이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은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만을 모든 사람이 믿게 하고, 이와 관계되지 않은 일체의 책 등을 보면 감옥에 간다.”
우리가 북한 정치나 사회 시스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면.
“한국에선 북한 정권의 양면성, 이중성을 잘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실례를 들면, 북한엔 두 가지 법률 구조가 존재한다. 하나는 헌법에 기초한 법률 구조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 보여주지 않는 당 내부 규정이다. 둘 중 내부, 당 규약,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의 어록 등은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한국 학자들은 외부에 드러난 북한 헌법이라든가 신문, 북한 지도자의 공개적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 단적으로 당 내부의 목표는 아직도 ‘적화통일’이다. ‘한국과 우리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이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무조건 섬멸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김정은이 판문점에 와서 한 말들은 ‘위장평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북한 정책은 한국과 평화롭게 살고 연방제를 통해 평화롭게 통일하려는 거로구나’라고 착각한다.”
■ 남북, 북·미 정상회담 평가
이날 태 전 공사는 통일 운동을 북한 노예해방혁명에 비유했다. 이를 위해 태 전 공사는 대북제재는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의 소프트파워 역량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태 전 공사는 지난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판문점 선언에서 북한의 진정성이 느껴졌나.
“그런 건 없다. 노동신문을 보면 지금도 (신문의) 반 이상이 반제(反제국주의)계급교양을 강화하라는 내용이다. 북한이 말하는 반제계급교양 강화란 미제(미국)에 대한 반대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높이기 위해 교양사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 단일팀이 탁구경기를 했다고 하는 건 노동신문 구석에 작게 나간다. 반대로 반제계급교양을 강화해야 한다는 기사는 길게 실린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지금 한국과의 교류는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일 뿐이며 거기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신문은 매일 남한은 섬멸해야 할 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북한의 진짜 의도는 뭐라고 보나.
“북한은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단 한 번도 ‘북한이 비핵화를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북한은 글을 중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와 선언문이나 합의문을 채택할 때 자신이 할 수 없는 단어는 넣지 않는다. 의지가 있었다면 조건부로나마 비핵화를 발표했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러지 않고 ‘한반도의 비핵화’라고 했다. 이건 대단히 넓은 범주다. 여기엔 남한, 미국, 북한 세 나라가 할 일이 모두 포함돼 있다. 폭도 매우 넓어 1~2년 내 할 수 없는 이야기뿐이다.”
회담 전후를 비교하면 달라진 점도 있지 않은가.
“달라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2013년 3월 김정은이 병진 노선을 채택할 때부터 지난해 말까지 북한의 핵전략은 공개적 방식으로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었다. 인도·파키스탄 식이다. 원래 북한은 경제제재를 받더라도 10년 동안 참고 견딜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핵보유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국제사회의 엄청난 제재가 들어오면서 이 상태가 유지되면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핵무기를 숨기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북한은 지금도 ‘우리가 핵을 가진 것은 우리 뜻이 아니다. 외부세계가 핵을 갖도록 몰아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외부 환경만 바뀐다면 북한은 당연히 핵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선(先) 적대시 정책 포기, 후(後) 비핵화’다. 달리 표현하면 ‘선 신뢰관계 구축, 후 비핵화’다. 그러나 적대시 정책 포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든다. 신뢰 구축 등을 이야기하면 조였던 목을 놔주게 되는데 김정은은 지난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봐야 하는가.
“그렇다. 싱가포르 회담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공식적 북핵 해법은 ‘선 진정성 있는 비핵화, 후 대화’였다. 그런데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나고 이 구조가 확 바뀐다. 합의문을 보면 ‘북한과 미국은 신뢰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한반도의 비핵화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고 돼 있지 않은가. 신뢰 구축을 앞에다 두고 뒤에다 비핵화를 놓은 것이다. 트럼프나 폼페이오(미 국무장관)는 외교문서의 합의가 가진 의미를 잘 모르고 회담을 끝냈다. 그런 뒤 폼페이오는 ‘후속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북한에 갈 것이다. 북한에 가면 비핵화의 구체적인 일정, 시간표, 방식 문제를 논의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 가보니까 한 장의 종이를 놓고 양측 간 생각 차가 천지차이였다. 북한이 폼페이오에게 ‘그건 강도짓이다’라고 하자 폼페이오는 ‘내가 강도면 세계가 강도다’고 말했다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록 미국은 북한 논리를 반박하는 성명 하나 못 내고 있다.”
미국이 북한 전략에 말려든 이유가 뭘까.
“전문 외교관 말을 듣지 않은 게 원인이다. 미국 외교관들은 북한 수법을 잘 안다. 내가 알기로 성 김(주필리핀 미국대사) 대사도 싱가포르에 가기 전날까지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이런 문건에 절대 동의하면 안 된다’는 게 성 김의 주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합의문 내용 읽어보면 미국 말투가 아니라 북한 외교관들이 쓰는 모든 말투를 그대로 옮겨온 느낌이다.”
트럼프가 북한과 합의를 서두르는 것 같나.
“11월 중간선거 앞두고 트럼프의 정치적 욕망이 작용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미국 우선주의는 정치외교학적 관점에서 고립주의다. 트럼프는 동맹국의 이익과 상관없이 오로지 미국 이익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트럼프의 실수며 그의 철학이 반영된 행동이다.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북한을 옹호하지 않나.”
북한도 트럼프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나.
“물론이다. 공산국가들은 특징이 있다. 한국, 미국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정권이 수시로 바뀐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분석한 뒤 새롭게 전략을 짠다. 공산국가는 이와 다르다. 당에서 하나의 전략, 전술을 내세우면 끝장 볼 때까지 10년, 20년간 계속 추진한다. 결국 공산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 부딪치면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항상 변화된 상황을 먼저 인정하고 판을 다시 짠다.”
자유민주체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봐야 하나.
“1947년 트루먼이 발표한 정책 핵심은 미국이 아시아 동맹국과 손잡고 공산주의 남하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중국, 북한,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 공산당 전략은 1940년대 말부터 수십 년간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전략을 짤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 1969년 전략을 대폭 수정한다. 그게 바로 닉슨 독트린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에 손을 든 거다. ‘20년 동안 해 봤는데 이제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베트남(월남)과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내준 거다. 오늘(7월24일) 아침 CNN에 대만 외교부장이 나와 인터뷰했는데 ‘이제는 대만 사람들도 미국이 대만에 대한 군사 보호를 포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하더라. 아마 조금 있으면 ‘트럼프 독트린’과 같은 새로운 독트린이 나올 거다. 한반도 내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판을 새롭게 짜자고 말이다. 한국에는 대단히 위험한 현실이다.”
※계속해서 ☞[태영호 인터뷰②] “北, 여전히 적화통일 꿈꿔”, ☞[태영호 인터뷰③] “정부·여당, 자유민주시스템에 더 당당했으면…”이 이어집니다.
김지영·송창섭 기자, 정리=유경민 인턴기자 young@sisajournal.com
북한에 태 전 공사는 눈엣가시다. 국회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 태 전 공사를 향해 북한은 5월16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 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 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강연에서 태 전 공사는 김 위원장의 행보에 대해 ‘쇼맨십’에 불과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태 전 공사를 향한 북한의 비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악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비난을 퍼붓고 있다.
시사저널은 7월24일 서울 용산에 위치한 본사 사무실에서 태 전 공사와 2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주제는 비핵화 해법부터 북한의 대남전략, 태 전 공사의 사생활까지 다양했다. 인터뷰에서 태 전 공사는 “한·미 양국과의 대화 분위기 조성은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전략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태 전 공사는 “11월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성과를 얻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조급증 때문에 미국 외교가 북한 전략에 말려들었다”면서 “지금이라도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북한 비핵화라는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시간 넘게 이뤄진 태 전 공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①남북, 북·미 정상회담 평가, ②北 김정은 체제 실상, ③태영호의 남한 생활 등 크게 세 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시사저널 이종현
어떻게 지내나.
“그다지 바쁘진 않다. 언론과 인터뷰하거나 대학이나 교회를 돌아다니며 현 상황에 대해 강연한다. 또 남북한 대학생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남북동행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남북동행아카데미란 어떤 모임인가.
“남북한 학생들이 함께 모여 통일 대비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몰랐던 걸 배우는 시간이다. 젊은이들이 남북한의 동질성이 무엇이고 이질적인 게 뭔지를 찾는 자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반응은 어떤가.
“북한이라는 사회는 폐쇄적이기 때문에 살았던 사람조차 잘 모른다. 그래서 탈북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살아온 실상을 알려준다. 한국 대학생은 북한 대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책이나 언론보도로밖에 알 수 없었던 북한 사회를 알게 된다. 종종 한국 대학생 중엔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북한에 그런 정치·경제·사회·문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한국 대학생들은 북한은 사람이 살고 국가가 있고 지도자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초적인 인권이나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북한 대학생들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그런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느냐’ ‘그런 곳에 250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수십 년 동안 봉기 한 번 안 일어나고 사회가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느냐’고 말한다.”
북한을 어떤 사회라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조차 무시당하는 사회다. 한국 사회와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이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은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만을 모든 사람이 믿게 하고, 이와 관계되지 않은 일체의 책 등을 보면 감옥에 간다.”
우리가 북한 정치나 사회 시스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면.
“한국에선 북한 정권의 양면성, 이중성을 잘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실례를 들면, 북한엔 두 가지 법률 구조가 존재한다. 하나는 헌법에 기초한 법률 구조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 보여주지 않는 당 내부 규정이다. 둘 중 내부, 당 규약,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의 어록 등은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한국 학자들은 외부에 드러난 북한 헌법이라든가 신문, 북한 지도자의 공개적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 단적으로 당 내부의 목표는 아직도 ‘적화통일’이다. ‘한국과 우리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이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무조건 섬멸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김정은이 판문점에 와서 한 말들은 ‘위장평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북한 정책은 한국과 평화롭게 살고 연방제를 통해 평화롭게 통일하려는 거로구나’라고 착각한다.”
■ 남북, 북·미 정상회담 평가
이날 태 전 공사는 통일 운동을 북한 노예해방혁명에 비유했다. 이를 위해 태 전 공사는 대북제재는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의 소프트파워 역량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태 전 공사는 지난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판문점 선언에서 북한의 진정성이 느껴졌나.
“그런 건 없다. 노동신문을 보면 지금도 (신문의) 반 이상이 반제(反제국주의)계급교양을 강화하라는 내용이다. 북한이 말하는 반제계급교양 강화란 미제(미국)에 대한 반대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높이기 위해 교양사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 단일팀이 탁구경기를 했다고 하는 건 노동신문 구석에 작게 나간다. 반대로 반제계급교양을 강화해야 한다는 기사는 길게 실린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지금 한국과의 교류는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일 뿐이며 거기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신문은 매일 남한은 섬멸해야 할 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북한의 진짜 의도는 뭐라고 보나.
“북한은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단 한 번도 ‘북한이 비핵화를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북한은 글을 중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와 선언문이나 합의문을 채택할 때 자신이 할 수 없는 단어는 넣지 않는다. 의지가 있었다면 조건부로나마 비핵화를 발표했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러지 않고 ‘한반도의 비핵화’라고 했다. 이건 대단히 넓은 범주다. 여기엔 남한, 미국, 북한 세 나라가 할 일이 모두 포함돼 있다. 폭도 매우 넓어 1~2년 내 할 수 없는 이야기뿐이다.”
회담 전후를 비교하면 달라진 점도 있지 않은가.
“달라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2013년 3월 김정은이 병진 노선을 채택할 때부터 지난해 말까지 북한의 핵전략은 공개적 방식으로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었다. 인도·파키스탄 식이다. 원래 북한은 경제제재를 받더라도 10년 동안 참고 견딜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핵보유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국제사회의 엄청난 제재가 들어오면서 이 상태가 유지되면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핵무기를 숨기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북한은 지금도 ‘우리가 핵을 가진 것은 우리 뜻이 아니다. 외부세계가 핵을 갖도록 몰아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외부 환경만 바뀐다면 북한은 당연히 핵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선(先) 적대시 정책 포기, 후(後) 비핵화’다. 달리 표현하면 ‘선 신뢰관계 구축, 후 비핵화’다. 그러나 적대시 정책 포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든다. 신뢰 구축 등을 이야기하면 조였던 목을 놔주게 되는데 김정은은 지난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봐야 하는가.
“그렇다. 싱가포르 회담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공식적 북핵 해법은 ‘선 진정성 있는 비핵화, 후 대화’였다. 그런데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나고 이 구조가 확 바뀐다. 합의문을 보면 ‘북한과 미국은 신뢰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한반도의 비핵화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고 돼 있지 않은가. 신뢰 구축을 앞에다 두고 뒤에다 비핵화를 놓은 것이다. 트럼프나 폼페이오(미 국무장관)는 외교문서의 합의가 가진 의미를 잘 모르고 회담을 끝냈다. 그런 뒤 폼페이오는 ‘후속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북한에 갈 것이다. 북한에 가면 비핵화의 구체적인 일정, 시간표, 방식 문제를 논의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 가보니까 한 장의 종이를 놓고 양측 간 생각 차가 천지차이였다. 북한이 폼페이오에게 ‘그건 강도짓이다’라고 하자 폼페이오는 ‘내가 강도면 세계가 강도다’고 말했다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록 미국은 북한 논리를 반박하는 성명 하나 못 내고 있다.”
미국이 북한 전략에 말려든 이유가 뭘까.
“전문 외교관 말을 듣지 않은 게 원인이다. 미국 외교관들은 북한 수법을 잘 안다. 내가 알기로 성 김(주필리핀 미국대사) 대사도 싱가포르에 가기 전날까지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이런 문건에 절대 동의하면 안 된다’는 게 성 김의 주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합의문 내용 읽어보면 미국 말투가 아니라 북한 외교관들이 쓰는 모든 말투를 그대로 옮겨온 느낌이다.”
트럼프가 북한과 합의를 서두르는 것 같나.
“11월 중간선거 앞두고 트럼프의 정치적 욕망이 작용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미국 우선주의는 정치외교학적 관점에서 고립주의다. 트럼프는 동맹국의 이익과 상관없이 오로지 미국 이익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트럼프의 실수며 그의 철학이 반영된 행동이다.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북한을 옹호하지 않나.”
북한도 트럼프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나.
“물론이다. 공산국가들은 특징이 있다. 한국, 미국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정권이 수시로 바뀐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분석한 뒤 새롭게 전략을 짠다. 공산국가는 이와 다르다. 당에서 하나의 전략, 전술을 내세우면 끝장 볼 때까지 10년, 20년간 계속 추진한다. 결국 공산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 부딪치면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항상 변화된 상황을 먼저 인정하고 판을 다시 짠다.”
자유민주체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봐야 하나.
“1947년 트루먼이 발표한 정책 핵심은 미국이 아시아 동맹국과 손잡고 공산주의 남하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중국, 북한,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 공산당 전략은 1940년대 말부터 수십 년간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전략을 짤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 1969년 전략을 대폭 수정한다. 그게 바로 닉슨 독트린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에 손을 든 거다. ‘20년 동안 해 봤는데 이제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베트남(월남)과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내준 거다. 오늘(7월24일) 아침 CNN에 대만 외교부장이 나와 인터뷰했는데 ‘이제는 대만 사람들도 미국이 대만에 대한 군사 보호를 포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하더라. 아마 조금 있으면 ‘트럼프 독트린’과 같은 새로운 독트린이 나올 거다. 한반도 내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판을 새롭게 짜자고 말이다. 한국에는 대단히 위험한 현실이다.”
※계속해서 ☞[태영호 인터뷰②] “北, 여전히 적화통일 꿈꿔”, ☞[태영호 인터뷰③] “정부·여당, 자유민주시스템에 더 당당했으면…”이 이어집니다.
김지영·송창섭 기자, 정리=유경민 인턴기자 young@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