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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그날을 말하다 <중>

이윤진이카루스 2011. 5. 13. 09:59

정치
종합

[50년 맞은 5·16 <中>… 젊은 장교들의 整軍운동, 그리고 JP] 중정 요원 20명 이끌고 장도영 계엄사령관 잡으러 갔지 그가 말하더군 "왜 이제 왔어?"

  •  입력 : 2011.05.13 03:00 / 수정 : 2011.05.13 09:02

3·15 선거 부정 - 방첩대가 주로 한 짓인데 투표용지 통째로 바꾸고는 110% 달성했다고 자랑
整軍운동 - 송요찬 총장에게 말했어 "그만두고 나가십시오" 그 다음날 사표 내더군…
헌병대에서 700명 동원해 박정희 뒤 캐겠다고 하기에 결국 나도 옷 벗었어
5월 16일 새벽 - 의정부서 대포 끌고 오는데 미군 헌병들이 있는 거야 무술병사로 제압하라고 했지 그런데 손 흔들며 보내주더군

12일 오후 김종필 전 총리를 다시 만났다. 다음 달에 돌이라는 외증손자를 안고 있었다. 첫 인터뷰가 게재된 후 안부 전화를 수십 통 받았다면서 즐거워했다. 김 전 총리는 이전 인터뷰를 보완하고 새 내용을 추가했다.

◆계급장 뗀 군복

―5·16 당일 군복 입고 다녔습니까?

"권총 차고 반(半)군복 입었지."

―반군복이 뭡니까.

"계급장 뗀 군복이니까 반군복이오."

―권총은요?

"콜트 45구경. 물통처럼 시꺼먼 권총 있어요."

―젊은 장교들의 정군(整軍)운동이 5·16으로 귀결된 셈인데, 명분이 뭐였습니까?

"3·15 부정선거로 국가가 흔들렸어요. 4·19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생명을 내걸었잖아요. 군인들도 적잖이 책임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내보내야 한다 해서 정군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그 당시 장군들을 '똥별'이라고 불렀다면서요.

"정군 대상으로 추려진 장군들은 전쟁 중에도 공병들의 불도저·GMC(트럭)를 빼돌렸고, 전방 진지에서 소나무 베어 후방 제재소에 팔아먹고, 병사들 휴가 보내면서 또 빼먹고 그랬어요. 우리가 다 알거든요. 별을 달고 도대체 독도법(지도 읽는 법)을 몰라요. 5만분의 1 지도에서 간격이 몇 개면 거리가 얼마다 하는 것을 몰라요. 이런 사람들 전부 옷 벗고 나가라, 하는 것이 정군이에요. 그게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죠."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정군운동을 하면 군 수사기관이 가만있었습니까?

"처음엔 CIC(방첩대)에 잡혀 갔어요. 이소동 방첩대장이 '그만큼 했으면 됐다. 그만하라'고 해요. 난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겠다'고 했어요. 그땐 분위기가 그랬어요. 내가 '나를 가둘 게 아니라 참모총장을 만나게 해달라' 했어요. 며칠 후 껌껌한 저녁에 송요찬 참모총장이 오라고 해요."

―묶여서 갔습니까?

"아니요. 당당하게 군복 입고 갔지요. 연병장에는 동기생들이 모여들고 있었고요. 송 장군이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물어요. '다 아실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만두고 나가십시오' 했지."

―중령이 중장에게 참….

"안색이 영 달라지데요. 한참 있더니, '나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어.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라면 되나. 여유를 좀 줘야지. 나도 생각이 있어' 하는 거예요. 내가 '하루 이틀 자꾸 시간 끌면 결심이 흐려져 안 됩니다. 오늘 결심하시죠' 했어요. '2·3일 여유를 줄 수 없나. 내 자네들 요구를 들어줄게' 하더군요.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 그 다음 날 사표 냈어요."

12일 오후 서울 자택에서 다시 만난 김종필 전 총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5·16얘기를 나누던 끝에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이탈리아 피자에 대한 얘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내가 옷을 벗은 진짜 이유

―왜 유독 송 장군이었나요?

"이유가 있었어요. 3·15 선거 때 송 장군이 1군 사령관이었는데, 선거가 끝나고 육군본부에 들어서서 당당하게 큰소리로 '1군 산하에서는 110% 달성했어' 하는 겁니다. 아주 완벽을 기했다는 거지. 110%가 말이 됩니까."

―3·15 부정이 어느 정도였는데요?

"방첩대가 주로 한 짓인데, 천장에 붓두껍을 매달아 놓고 찍었거든. 병사의 손이 야당 후보로 향하는지 여당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야당 쪽으로 가면 웬 놈이 붓두껍을 매단 위에서 뭐라고 하는 겁니다. 여당 쪽 찍으라는 거지요. 전원 찬성표로 미리 찍어놓고 따로 투표를 시킨 다음, 그 투표지는 몰래 다 태워버리기도 했어요."

―김종필 중령도 송 장군과 함께 전역했습니까?

"아니요. 참모총장이 먼저 나가고 나는 방첩대에서 석방됐는데, 해가 바뀌어 헌병대에서 나를 또 잡아갔어요. 정월달이라 엄청 추운데 다 떨어진 모포 2장만 줘요. 그 담요에 허연 이들이 왔다갔다했어요. 이를 악물고 헌병감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요. '나는 현역 장교다, 잘못이 있으면 군법회의에 회부해라' 그랬어요. 헌병감 조흥만 장군이 왔더군요. '별로 좋은 소식은 가져오지 못했다'면서 '수뇌부는 네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네 뒤에 네가 존경하는 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분에게 여파가 미치지 못하게끔 네가 옷 벗고 나가라' 그래요. 나는 '못하겠다' 버텼죠. 그랬더니 'CID(범죄수사대)에서 700명을 총동원해 박정희 장군의 뒤를 캘 것이다. 그분이 다시 당할 텐데 그래도 좋으냐' 그래요. 얼마 뒤 내가 헌병감을 만나서 '박 장군에게 부당한 일이 없을 것이란 보장을 해라. 내가 그만두겠다' 했죠. 헌병감이 '나를 믿어라' 그래요. 내가 옷을 벗은 것은 1961년 2월 15일이고, 정식 예편발령은 3월 15일에 났어요."

◆혁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어

―송 장군의 다음다음 후임이 장도영 장군이군요. 5·16 혁명공약도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고요. 장 장군과 박정희 소장은 인연이 깊나요?

"나이는 박 대통령이 6살 위입니다. 그런데 장 장군이 박 대통령 보직을 봐 드렸어요. 9사단이 대구에서 창설될 때 첫 사단장이 장 장군이었는데, 그때도 박 대령을 참모장으로 데려갔어요."

―5·16 직후 장 장군 명함이 많았죠?

"그분은 혁명에 대해서 불분명한 태도였는데도 호신(護身) 차원에서 직책을 5개나 가졌어요.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장관, 육참총장, 계엄사령관 등이에요. 자기가 하겠다니까 박 소장은 그냥 놔두었고요."

―왜 장 장군을 몰아냈습니까?

"그때 군대 내 상당수가 이북 출신이었어요. 장 장군이 자꾸 이북 출신 장군들 포섭하고, 집에서 안 자고 서울 중앙청 총리 집무실 옆 별실에 기거하면서 헌병 배치하고 그랬어요. 자기 주변에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죠. 박 소장이 신경 안 쓰는 사이에 장 장군은 최고회의 핵심들을 60%가량 손아귀에 넣고 군·행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안 되겠다, 이러다간 박 소장 결딴난다, 내 생각대로 해야겠다, 결심했죠."

―어떻게 했습니까.

"중앙청으로 갔어요. 먼저 중앙정보부 요원 20여명이 헌병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장 장군 사무실로 쳐들어갔어요. 그 앞에서 '죄송합니다. 댁에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했죠. 그런데 장 장군이 앉아 있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제 왔어?' 그래요. 그게 1961년 7월 2일 밤 11시쯤입니다. 약식 군법회의도 형식적으로 거치고, 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니까 미국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박 대통령도 알았습니까.

"보고 안 하고 했습니다. 박 부의장이 놀라 가지고 '왜 그렇게 했어?'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혁명을 수행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했죠. 그 후 박 부의장이 최고회의 의장이 됐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숭고했던 순간

―피 흘리는 무력 충돌은 어떻게 피했습니까?

"일이 되려고 했던 거지요. 의정부에서 서울 가는 길목에 미 1군단 헌병들이 6명씩 보초를 서고 있어요. 의정부 방면에서 6군단 포병들이 중포(重砲)로 무장하고 새벽에 서울로 들어가는데 그들이 저지하면 큰일인 거예요. 내가 그랬죠. '무술하는 병사를 10명쯤 스리쿼터(4분의 3t 트럭)에 싣고 선두에 세워라. 미군 헌병들이 막으면 그들을 스리쿼터에 납치해서 데리고 와라. 절대 총 쏘면 안 된다.' 근데 막상 초소 앞을 지날 때는 훈련 가는 것으로 알았던지 통과 수신호를 해주어서 무사히 서울까지 들어올 수 있었어요. 무슨 일이든지 일이 되려면 그래요."

5·16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모처럼 맞은 망중한(忙中閑). 해변 휴양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상의를 벗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이 왼팔을 들어올려 뭔가를 설명하자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환한 미소로 듣고 있다.
―5·16은 일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6·25 때도 5·16 때도 모두 생명을 내던지고 일을 했어요. 나중에 무슨 비난이 오건 말건 이건 해놓아야겠다 하는 것이 5·16이었습니다. 한일회담도 그랬어요. 요즘 서울 남산공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요행히 그런 고비들을 넘어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나도 늙었나 봅니다. 5·16이란 6·25전쟁에서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위해 두 번째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볐던, 어떤 의미에서 숭고했던 순간이에요."

―'김종필 전 총리'하면 일반 국민에겐 '영원한 이인자'라는 인상이 깊습니다. 본인은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일부러 비켜간 것입니까.

"박 대통령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정말로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도와드리는 사람이 있어야겠다 생각했어요. 나는 그런 자세로 시종일관 도와드렸어요. 그 이상 다른 거 하려고 안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