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종필 전 총리는 지난 8일 인터뷰에서“의치 때문에 발음에 불명확하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일인다역을 하듯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며 3시간 동안 1961년 5월 16일과 그 전후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때로는 격정이 밀려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권총 차고 집 나서는 순간
'5·16' 바로 전날 오전 9시쯤. 김종필 중령은 부인 박영옥(박정희의 질녀)씨의 배웅을 받으며 "마지막 될지 모르는" 길을 나선다. "청파동 집에서 나오는데, 그 사람이 울지도 않아요. 하도 기가 막히는지. 집사람이 심부름을 잘했어요. 동지들 만나는데 연락 같은 것을 해주곤 했죠. 그때 집 사람이 임신 일곱달째예요.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내가 그랬거든. 신의 가호가 있으면 또 만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총살된 아주 볼품없는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저녁 실패하면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놓인다. 당신 배 속에 있는 놈이, 자고로 유복자는 사내라고 하니, 남자일 거다, 네 아버지가 허투루 죽지 않았다, 긍지를 갖도록 잘 키워라. 그리고는 배를 좀 만지다가 나왔죠. 그 사람이 잘 울지도 못해요. 멍하니 있어요. 우리 집이 숙명여대 정문 앞인데, 밑에 철길 있는 곳까지 내가 내려오니까 그때야 그 사람이 길 한복판에 서서 울고 있어요." 또 김 중령은 5·16 기본계획을 혼자 만들었다고 했다. "누구한테 보여줄 사람도 없었어요. 같이할 사람도 없었지만 조심하느라 그렇기도 했지요. 밤늦게 쓰고 나면 마누라에게 남기지 말고 태우라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