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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 호메로스의 ‘저승’ 지워버린 소크라테스

이윤진이카루스 2011. 5. 14. 06:13

호메로스의 ‘저승’ 지워버린 소크라테스
그리스·로마인들은 일찍부터 사람이 죽으면 가는 죽음의 세계를 상상했다.
호메로스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저승의 세계로 내려간다고 봤다면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한겨레
» 죽은 자들의 혼백이 내려와 머무는 죽음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 하데스. 그의 곁에는 저승세계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머리가 셋인 개 케르베로스가 서 있다.
[고전 오디세이]
그리스·로마인들이 상상한 사후 세계

음부로 내려간 예수

성경에는 예수가 죽은 지 삼일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났다고 적혀 있다. 이를 굳게 믿었던 예수의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으며, 음부로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곳으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750년에 공인된 ‘사도신경’에는 뜻밖의 구절이 있다. 예수가 죽은 뒤,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사자(死者)들의 세계, 즉 ‘음부(陰府)로 내려갔다’(descendit ad inferos)는 것이다. 왜 예수는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갔을까?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으나, 영으로는 살아계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獄)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베드로전서> 3장 18~19절) 예수는 죽은 자들의 영(pneuma), 또는 혼(psyche)에게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원한 삶의 세계로 건져 올리기 위해 저승의 세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기’, 즉 카타바시스(katabasis)다.

오디세우스의 카타바시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사람이 죽으면 내려가야 하는 죽음의 세계를 상상했다. 죽어야 갈 수 있다는 곳, 예수조차도 죽은 뒤에 내려갔다는 그곳. 그러니 살아 있는 사람이 산 채로 그곳에 내려갈 수는 없는 법. 그것이 엄연한 원칙인데, 그 원칙을 깬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채운다.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머리가 셋 달린 무서운 개, 저승 세계의 문지기 개 케르베로스를 데리러 하데스의 세계로 내려갔다. 포세이돈의 아들 테세우스도 하데스의 부인 페르세포네를 빼내오기 위해 하데스의 세계로 겁 없이 내려갔다.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전설의 시인 오르페우스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하데스를 찾아가 죽은 아내를 돌려달라고 애절하게 노래했다. 한편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의 카타바시스를 노래했다. 트로이아 전쟁의 패배 이후 새로운 트로이아를 건설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 아이네아스가 저승 세계를 찾아가 로마 건국의 사명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또 하나.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카타바시스 이야기. 그는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하데스의 세계로 모험을 감행했다. 이 모험을 노래한 시인은 서구 문학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호메로스다.

호메로스가 그리는 죽음의 세계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는 “수없이 많은 영웅들의 굳센 혼백(psyche)들을 하데스에게로 내던져 보냈으며, 그 자신들을 개들과 온갖 새들에게 먹이 거리로 만들고 있었으니…”(<일리아스> 1권 3~5행)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죽으면 모든 혼백은 바람 빠지듯이 몸을 빠져나와 하데스의 세계로 간다는 것. 예외는 없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세계로, 하늘 아래 땅 위, 태양이 빛나는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하데스’라는 말 자체가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그려주는 혼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이나 혼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맥 빠진 여운, 존재의 희멀건 한 그림자다. 힘과 활기가 없는 허깨비이며, 살아 있던 사람의 죽은 환영이고, 스산한 유령이다. 곧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연기 같은 것. 그런 혼백들이 우울하게 널려 있는 곳, 을씨년스러운 그곳이 죽은 자들의 세계, 하데스의 세계다.

그곳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죽은 어머니의 혼백을 만난다. 애통하고 동시에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를 붙잡아 안아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잡으려고 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녀의 혼백, 그녀의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혼백은 이렇게 말한다. “오 이런, 내 아들아…/ 바로 이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든 죽게 될 때 겪을 당연한 일이란다/ 힘줄은 더 이상 살과 뼈를 갖지 못하니까/ 타오르는 불의 강력한 힘이 그것들을 다/ 태워버리니까, 일단 생기가 상앗빛 뼈를 떠난 후에는/ 빠져 날아가는 혼백은 마치 꿈처럼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것이란다.”(<오디세이아> 11권 216~222행) 이것은, 죽으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존재의 빈껍데기, 진짜의 허상인 꿈과 같은, 허물처럼 남는 창백한 유령의 모습뿐이라는 절규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최고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의 혼백도 만났다. 아킬레우스의 혼백은 하데스의 세계에서도 강력한 통치자의 풍모와 위풍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없는 죽은 이들과 다 타버린 사람들의 유령들만이 사는 이곳”(475~6행)에서 “온통 파괴되어 버린 모든 죽은 자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차라리/ 살아서 농사꾼으로 다른 사람 밑에서 품을 팔고 싶소/ 살림살이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에 빌붙어 살아도 좋소.”(489~91행) 어떻게 영웅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불멸하는 명성을 얻기 위해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아낌없이 던졌던 아킬레우스가 아니었던가! 살아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절실함이 또렷하다. 삶에 대한 예찬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삶은, 삶의 한순간 한순간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죽은 아킬레우스는 사무치게 아픈 고백을 하였다.

‘영혼은 불멸하는 나’라는 소크라테스

기원전 399년 어느 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소는 감옥. 그는 사형선고를 받아 곧 사약을 마셔야 했다. 제자들은 스승을 구하기 위해 미리 손을 써놓고, 탈출 계획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도망가지 않고 죽겠단다. 무슨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의 삶은 결국 잘 죽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평생을 바쳐 갈고닦았던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었으므로. 그는 진심으로 죽고 싶단다. 죽음은 그에게 끝장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자유의 시작이란다. 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생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호메로스의 인간관을 지워야 했다. 아니 호메로스가 그린 혼백에 생기를 불어넣어 불멸하는 실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영혼으로 새롭게 그려내야 했다.

인간의 영혼은 호메로스가 말한 것처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유령이 아니다. 그것은 흩어지거나 닳지 않는다. 그것이 진짜 나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육체라는 감옥 안에 갇힌 영혼의 수감생활이다. 몸에서 벗어나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철학이란 육체적 감각과 욕망에서 영혼을 분리시키려는 수련이므로, 철학을 통해서만 영혼은 정갈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죽은 후, 깨끗한 영혼만이 육체의 모든 흔적을 씻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갈 수 있다. 더러운 영혼은 무거워 그곳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다른 육체를 입고 다시 이 땅에 태어난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최후를 <파이돈>이라는 작품 속에 담았다. 깜깜한 동굴 같은 곳에서 환한 바깥 세계로 올라가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할까?

»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되는 것 자체가 영혼의 카타바시스였다. 영혼은 원래 저 높은 이데아의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참모습이 가득한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을 통해 그는 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즉 아나바시스(anabasis)를 꿈꾼다.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사이. 그리스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 사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가운데에 두고 그려진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 사이에서, 인간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서구인들은 오랫동안 사유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여운이 끝내 남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는 사유 역시 꾸준하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으니까. 혼백? 영혼? 그런 것은 없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호메로스의 희미한 혼백을 아예 지워버리며,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던 것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