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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소재·부품 강국이 됐을까? /중앙일보

이윤진이카루스 2019. 8. 2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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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소재·부품 강국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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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08:1038,631 읽음

우리는 어떻게 일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약하고 일본이 강한 분야에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부분은 어디일까요? 일본이 제조업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을 알아보았어요


전면전으로 치닫던 한일 경제전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모습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하면서도 ‘개별허가’ 품목을 따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도 허용했다. 한국 정부도 당장 일본을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하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보고 있다. 그러면서 기업의 부품·소재 국산화를 지원하는 대책을 연일 내놓고 있다.

기업들도 대체 수입선 확보, 국산화 등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글로벌 전문화·분업 시대에 모든 부품·소재를 국산화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지만 핵심 부품·소재에 대한 기술력은 확보할 필요도 있다. 특히 반일이 아닌 극일을 위해 일본이 어떻게 부품·소재 강국이 됐는지 살펴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을 대목은 없는지 분석할 만하다.

스페이스X는 팰콘9 로켓에 도레이의 탄소섬유를 사용하고 있다. 도레이는 탄소섬유 분야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한다. / 사진:플리커

일본은 수치심의 나라다. 수치심은 가정·회사·국가·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못했을 때 생기며, 이는 일본 특유의 ‘와(和)’를 깨뜨렸다고 생각한다.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의 말마따나 이런 수치심과 열등감은 국가 통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의 개화기 국제사회에서의 ‘변경(邊境)성’에서 비롯된 수치심은 일본이 비주체적 열등의식에 빠지게 했다. 미국 페리 제독에 떠밀린 강제 개항,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 아편전쟁 이후 홍콩 할양,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 등은 일본에 큰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계몽사상가들이 등장해 ‘탈아론(脫亞論)’과 ‘화혼양재(和魂洋才)’ 이념을 설파하며 일본의 변신을 주문했다. 특히 일본 입장에서 산업기술은 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한 지름길이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간 기술 개발에 천착한 원동력이 됐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화학·기계·소재 분야에서 오랜 노하우를 쌓았다.

1960~80년대 일본은 ‘설계·개발→부품→조립·제조→판매→애프터서비스’로 나뉜 글로벌 가치사슬의 중간 단계인 부품·조립·제조를 담당했다. 미국은 앞단과 말단인 설계·개발·판매·애프터서비스에 집중했다. 일본은 부품·조립·제조 분야를 독식하며 미국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글로벌 가치사슬은 ‘역스마일커브’ 형태였다. 80~90년대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대만 등의 약진으로 글로벌 분업구조가 세분화하며 가치사슬은 설계를 비롯한 핵심 기술과 판매망 같은 플랫폼을 장악한 나라가 돈을 더 잘 버는 ‘스마일커브’ 형태로 바뀌었다.

2000년대 세계화 조류 속에 철저한 분업주의 바람이 일며 한국·대만 등에 자리를 뺏겼다. 제조업 신흥 강자들은 일본으로부터 소재·부품을 들여와 경제성 높은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데 능했다. 이에 따라 일본도 원천기술 개발과 플랫폼 확장에 나섰지만 주도권 확보에 실패했다.

예컨대 일본은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세계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기술 신화를 썼지만 사업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다. 일본 기업은 반도체와 관련해 3만개 넘는 특허를 보유했지만, 통신·설계 등 340여 핵심 특허를 가진 인텔에 밀렸다.

미츠비시·소니 등은 70~80년대 기술 표준에 천착했지만 대부분 좌절하고 말았다. 소재·부품·중간재 시장을 독식하던 일본은 소재 납품처로서도 설 자리가 좁아졌다. 일본 경제에 “뭘 해도 안 된다”는 열패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20년간 늪에 빠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역스마일커브’ 수익 구조에서 경쟁력 유지 안간힘

그러던 일본이 반격에 나섰다. 한국에 소재·부품 수출을 제한하면서 반도체 등 한국의 핵심 산업에 타격을 주려고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자국 우선주의에 일본도 편승했고, 첫 타깃으로 한국을 저격했다. 자유무역의 평화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한국으로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다.

이제 판은 흔들렸다. 한국으로선 자체 기술 경쟁력 향상과 수입선 다변화 등 조달 능력 강화가 절실하다. 그러나 화학·공작기계·계측·정밀소재 등 대부분 뿌리 산업의 한·일 간 기술력 격차는 상당하다. 그간 일본으로부터 기초소재·부품을 안정적으로 납품받아왔고, 부가가치가 적다고 기술 개발을 등한시한 결과다.

일본의 실리콘웨이퍼 세계 시장점유율은 60%에 이른다. 불화수소는 약 70%,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는 90%가 넘는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일본 대비 한국의 중소제조업(매출액 5억원 초과~1500억원 이하)은 일본보다 기술 수준이 평균 1.8년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재·부품 분야에서 일본이 지위는 확고해 보인다. 일본이 막강한 기술 경쟁력을 갖춘 것은 정부의 전방위 지원과 대·중소기업 간 안정적 협업 구조와 축적된 경험, 처리공정에 대한 철저한 비밀주의 등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일본에서는 한때 모노즈쿠리라는 말이 구식 취급을 받던 때도 있었다. 일본 경제가 잘 나갔고, 세계적으로 정보기술(IT) 붐이 일던 1980년대에 그랬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어려움에 빠진 한편 1990년대 일본 자동차 산업의 부활로 후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더불어 1999년 3월 ‘제조 기반 기술진흥 기본법’이 통과되면서 고급 기술을 뜻하는 긍정적 용어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기본법을 통해 설계·압축형성·압출성형·기계 등 26개 분야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경제산업성 장관 주도로 특정 연구·개발(R&D) 등 계획을 수행하고 기술자 연수, 특허권 관리 지도 등의 지원을 하는 한편 이를 백서 형태로 매년 점검하고 있다.

기본법에는 “취업 구조의 변화, 해외의 공업화 진전 등 경제의 다양하고 구조적 변화로 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의 저하와 쇠퇴가 염려된다.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의 계승이 힘들어지고 있다”고 명시했다.

R&D 비용 대거 지원, 인력 확보, 집적화 정책도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에 선정된 산업과 기업에 대한 지원은 상당하다. 경제산업성이 6월 11일 내놓은 ‘2019년 모노즈쿠리 백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기업의 R&D 비용을 법인세액의 25% 한도로 세액을 공제해주고 있다. 추가로 연구비 증액에 따라 6~14% 공제 혜택을 부여하고, 시험 연구비가 평균 매출액의 10% 넘을 경우 세액공제의 상한을 최대 10%로 높여준다.

국책 연구기관이나 대학, 중소기업 등과 특별 시험 연구에 나설 경우 비용의 20~30%를 공제해 준다. 중소기업의 경우 기본 공제율 12%, 세액공제 상한을 법인세액의 25%로 유지시키는 한편 시험 연구비가 5% 넘게 증가할 경우 공제율을 최대 17%, 세액공제 상한을 10% 추가로 높여준다.

이런 지원 덕에 제조업 11개 부문의 비교우위지수에서 일본은 9개 부문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다. 특히 기계부품과 비금속 광물 부문은 한국을 두 배 수준으로 압도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 제조업 경쟁력은 90년대 글로벌 가치사슬 변화와 일본의 중장기 기술 육성 전략이 들어맞은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모노즈쿠리 기반 산업을 인재 확보와 고용 안정, 직업 능력 개발·향상, 노동 능력 평가와 노동 조건 확보, 산업 집적 유지, 중소기업 육성, 자율주행자동차·로봇 등 전략 분야 육성, 학교 육성, 생애학습 진흥, 국제협력 등으로 분야를 체계적으로 나눠 자금·제도·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모노즈쿠리 기본법을 통한 지원 말고도 문부과학성, 국토교통성, 후생노동성 등 부처별 지원도 전방위로 펼치고 있다. 일본은 2016년 ‘중소기업 경영강화법’을 도입해 중소기업이 시설·기구 등에 투자할 경우, 융자와 함께 고정자산 세금을 절반으로 깎아줬다. 2016년 7월부터 1년간 이 제도를 적용받은 사례는 2만4331건에 달한다. 2016년에는 ‘지역미래투자 촉진 사업’을 실시해 사물인터넷(IoT) 시스템이나 산업용 로봇 도입을 지원했다.

IT 전문가를 파견해 중소기업의 IT 투자를 돕기도 한다. 기업의 R&D 의욕을 북돋기 위해 사업 승계를 희망하는 가족이 있을 때 단독 상속을 가능하게 했고, 양도세·상속세 부담으로 경영승계가 힘든 경우 납세를 유예해 주고 있다. 일본이 노벨화학상 부문에서만 8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것도 모노즈쿠리라는 문화적 토대와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정부의 노력 덕이 컸다.

원천 기술에 자금 집중, AI·IoT 등 신기술 투자도 늘려

일본 신에츠의 실리콘웨이퍼. / 사진:신에츠

최근에는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술(ICT) 변화에 발맞춰 관련 기술·소재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생산 체제 변화를 위한 일손 부족 극복에 힘을 쏟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 수출 제한을 둔 고도 부품·소재에 대해서는 강점을 살려 차별화에 나설 방침이다.

올해 모노즈쿠리 백서에는 “신흥국들이 (일본의) 기술을 탈취해 고도 부품·소재를 만들며 리튬이온전지·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 등의 분야에서 시장점유율이 떨어졌다”며 “다만 이들 분야는 일본 제조업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에 고기능 부품·소재 분야에서의 강점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세계 시장에서 6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 제품은 총 270개이며, 이 가운데 부품·소재가 212개로 78.5%나 된다. 백서에 따르면 일본은 인력 확보를 통한 경쟁력 유지와 신규 비즈니스 모델 발굴로 이들 기초 부품·소재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적은 인력으로도 제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인공지능(AI) 공정 개발과 산업 모듈화에 힘을 쏟고 있다. 온도·습도에 따라 원재료의 상태를 자동으로 조절하거나, 각 공정에 자동 품질 검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여러 기업의 기술을 모아 생산 공정과 연구·개발(R&D)의 중복을 막는 ‘커넥티드 인터스트리즈’라는 생산 플랫폼화도 추진한다. 미국이 2016년 밝힌 ‘산업인터넷컨소시엄’(IIC), 독일이 2015년 내놓은 ‘인더스트리 4.0 실천 전략’과 비슷한 개념이다.

더불어 일본은 모노즈쿠리 경쟁력 강화의 일환으로 기초과학기술 개발에도 돈을 쏟아붓고 있다. 지난해 대형방사광시설(SPring-8)에 11억6200만엔을 썼다. X선 자유전자 레이저설비(SACLA)에 70억1900만엔, 대강도양자가속기설비(J-PARC)에 175억7500만엔, 혁신적 하이퍼포먼스컴퓨팅인프라(HPCI)에 127억8500만엔, 포스트 ‘쿄’(수퍼컴퓨터 프로젝트) 개발에 208억6000만엔, AI 기술과 모노즈쿠리 기술융합 연구 거점 확보에 194억9900만엔 등을 지출했다.

‘스리아와세’ 등 원·하청 간 끈끈한 협업 구조

일본은 이 밖에도 2005년 모노즈쿠리 국가전략 비전 채택, 2006년 중소기업 모노즈쿠리 기반기술 고도화에 관한 법률, 2007년 기술전략 지도 등을 구축해 경제 전반에 산업 기술 집중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중소기업-대기업 간 탄탄한 연대도 일본의 소재·부품 경쟁력을 높이는 한 축이다. 일본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에 계열 구조로 밸류체인에 해당하는 각각의 기업들이 수십~수백 년간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어왔다.

일종의 주종관계처럼 안정적 소재 개발 및 납품이 대기업의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지며 공생하는 ‘의리인정(義理人情)’ 관계가 산업계 전반에 형성돼 있다. 의리인정이란 일본 사회와 기업문화를 설명하는 데 쓰이는 말 중 하나다. 일본 봉건사회 속에서 형성된 개념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그에 대한 은혜를 갚으며 돌보는 것이 모든 관계의 전제다.

예컨대 전지 재료 회사인 ‘히타치카세이’가 2차전지 음극재 분야의 강자로 성장한 것은 수요처인 ‘산요’가 공고한 협력자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지 원하청 관계가 아닌, 기술 개발부터 소재가공, 조립, 공정에서의 업무 협의 및 미세 조정(스리아와세, 擦り合わせ) 등까지 긴밀하게 협력한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기업 간 신뢰가 생기면 개발 노하우는 물론 사업 전략까지 공유할 정도로 긴밀히 협력한다”고 설명했다.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본 소재 업체들은 제품 개발 초기부터 고객사와 협업하는 ‘ESI(Early Supplier Involvement) 전략’을 구사하고, 완제품 업체들은 암묵적 구매 약속과 기술·자금 지원으로 힘을 보탠다”고 말했다.

이렇게 개발한 소재·부품 기술 노하우를 철저히 감추는 있는 점도 일본이 기술 경쟁력을 지킬 수 있는 이유다. 후발주자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높은 진입장벽을 쌓는 것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다. 일본은 주요 소재 기업의 해외 매각이나 합작 투자를 배제하고 있다.

인력 유출도 통제한다. 원재료의 배합이나 처리 공정 등을 감춰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시도를 차단한다. 기초 소재 개발에는 다년간의 노하우가 절실한데, 일본 기업들은 기술 단계마다 ‘특허 장벽’을 쌓아 경쟁자의 진입을 원천봉쇄한다. 세계 액정 시장을 좌우하는 독일 머크도 이런 방식으로 한국·중국·일본 등의 추격을 뿌리쳤다.

기술기업 매각·투자 배제, 기술 ‘블랙박스’로 경쟁력 유지

박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는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 원동력으로 일본의 조기 퇴직 인력을 한국 기업이 대거 흡수한 것을 꼽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 기업에서는 소수정예 인력만 핵심 기술에 접근할 수 있으며 소재 분석을 통한 역설계를 피하기 위해 성분이 아닌 제조 노하우를 암묵지 형태로 블랙박스화했다”고 설명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한국은 기업 간 신뢰 기반이 약하고, 상대 기업을 꺾자는 승부 근성이 강해 소재·부품 개발을 위한 대·중소기업 간 협력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반도체 분야에서 탈일본을 선언한 한국이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