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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전사’로 불리길 원했던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킬로스

이윤진이카루스 2011. 8. 6. 09:14

‘마라톤의 전사’로 불리길 원했던 ‘비극의 아버지’

고전 오디세이 37 아테네의 자유 위해 싸운 작가 아이스킬로스

» 빌헬름 폰 카울바흐가 그린 <살라미스 해전>(1868년 작품).
비극경연대회서 모두 13번 우승을 차지하였고, 평생 90편의 비극을 썼다. 하지만 그는 비극시인으로서의 화려한 이력보다는 마라톤 전투에 참가하여 아테네의 자유를 지켜냈던 사실을 더 자랑스럽고 소중한 명예로 여기며 살았다.

페르시아의 침략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제국의 다레이오스(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본토로 정예군을 보냈다. 600여척의 군함에 실린 3만여명의 페르시아 군대는 에레트리아를 손에 넣고 마라톤으로 향했다. 하늘을 찌를 듯 기세가 등등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무장 보병 1만명을 마라톤 평원의 서쪽 끝에 배치했다. 그리스 본토 북부의 많은 도시국가들은 다른 방향으로 전진해오던 페르시아 군대에 저항하다 이미 함락되거나, 싸움을 포기하고 페르시아에 복속된 상태였기에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라케다이몬 인(스파르타 인)들이여. 아테네 인들은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헬라스(그리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국가가 이방인들에 의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옆에서 바라만 보지 않기를 간청합니다.”(헤로도토스의 <역사> 중)

밀티아데스와 아테네 시민의 투쟁

하지만 스파르타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늑장을 부렸다. 지원군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아테네는 외롭게 페르시아의 대군과 결전을 벌여야 했다. 전투에 참가한 아테네의 장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페르시아 군대의 수와 위용에 겁을 먹고 싸움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밀티아데스 장군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그는 결정권을 쥐고 있던 칼리마코스에게 말했다. “아테네를 노예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아테네의 자유를 보전하여 불멸의 명성을 남길 것인가는 이제 그대에게 달렸소. 우리가 페르시아와 싸워 승리를 거둔다면, 조국은 자유를 지키고 헬라스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오.” 칼리마코스는 결전을 결정하고 밀티아데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아테네 시민들은 편안한 굴종 대신 고통스러운 투쟁을 택하고, 중무장 보병의 대열에 서서 페르시아 군을 향하여 거침없이 돌진했다. 페르시아의 자랑이었던 기병대와 궁수 부대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테네 보병들이 짜놓은 대열의 단단한 방패와 날카로운 창에 밀리고 쓰러졌다. 그 수는 6400명이나 되었다. 반면 아테네의 희생은 192명에 불과했다. 페르시아 인들은 충격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감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력에 자부심을 느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자리를 지켜야만 위력을 발휘하는 중무장 보병의 새로운 전술은 아테네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 자유로운 시민은 제 몫을 자발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한다는 원칙을 뼛속 깊이 새겨 넣었다. 35살의 나이로 마라톤 전투에 참가했던 한 용사는 평생 자신이 ‘마라토노마코스’(‘마라톤의 전사’란 뜻)라고 불리길 원했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자신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아이스킬로스, 에우포리온의 아들이며 아테네 사람인 그는 풍성한 밀이 자라는 겔라스 땅에서 죽어 이곳 무덤에 잠들다. 마라톤의 숲은 그의 유명한 용맹함을 말해줄 것이며, 머리를 길게 기른 메디아 인(페르시아 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승리의 감격 무대에 올린 아이스킬로스

아이스킬로스(기원전 525~455). 그는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 가운데 첫 번째 작가다. 배우의 수를 둘로 늘려 그리스 비극을 본격적인 드라마로 만들었기에 비극의 아버지라 불린다. 하지만 그는 비극시인으로서의 화려한 이력보다는 마라톤 전투에 참가하여 아테네의 자유를 지켜냈던 사실을 더 자랑스럽고 소중한 명예로 여기며 살았다. 기원전 480년, 다레이오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를 공격했을 때에도 아이스킬로스는 45살의 나이로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했다. 이때 페르시아 군의 규모는 마라톤 전투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아테네를 기억하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며 아테네에 대한 보복과 그리스 정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크세르크세스 왕은 대규모 병력을 데리고 직접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육군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끌던 300명의 최정예 부대와 그리스 연합군을 섬멸하고 남하했다. 한편 살라미스에는 페르시아의 대규모 선단이 아테네 해군을 노리며 접근하였다. 3단 노의 전함이 1207척이었으며, 그 밖의 함선이 3000척이었다. 반면 아테네의 해군은 300여척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는 숫자로만 판가름 나지 않는 법. 용맹스러운 아테네 군은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페르시아 해군을 초토화시켰다.

그 기적 같은 현장에도 아이스킬로스는 있었다. 그는 굴종적인 페르시아 인에 대한 그리스 자유 시민의 승리라고 믿었다. 기원전 472년.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난 지 8년이 지난 디오니시아 제전에서 그는 <페르시아 인들>이라는 비극 작품을 무대에 올려 승리의 벅찬 감격을 발산하였다. 배경은 페르시아의 궁전. 다레이오스 왕의 아내이며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인 아톳사는 패전의 소식을 전하는 페르시아의 원로에게 물었다. “누가 저들의 목자로 군림하며, 누가 그 군대를 지배하는가요?” 원로는 대답했다. “저들은 그 어떤 사람의 노예로도 신하로도 불리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유시민이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후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떻게 침략하는 적들에게 저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전제적인 독재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유의 힘을 알 수가 없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레이오스 왕의 엄청나고 훌륭한 군대를 파괴할 만큼이나 잘 싸웠습니다.”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엄청난 선단 앞에서 그리스 인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자유의 이름으로. “오, 헬라스의 아들들이며, 가라!/ 조국에 자유를 안겨주어라, 아이들에게,/ 여인들에게 자유를 안겨주어라,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섬긴 신들의 성전에,/ 조상들의 무덤에! 그대들은 지금 이 모두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이렇듯 그리스 인들의 승리는 자유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아이스킬로스는 노래했다. 한편 페르시아 인들의 패배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매섭게 질책했다. 죽은 다레이오스 왕의 혼백이 아톳사에게 나타나 자연의 섭리조차 거슬러 나라를 말아먹은 크세르크세스의 행동을 비판하며 말했다. “내 아들이 그 일을 저지른 거요, 자기가 뭘 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치기어린 혈기를 부리면서!/ 거룩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노예처럼 밧줄로 묶어두려고 했소,/ 물의 흐름을, 보스포로스의 신성한 흐름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오,/ 물길의 리듬을 억지로 바꾸고, 망치로 벼린 족쇄를 물길에 채워 대군을 위한 대로를 만들었소./ 인간인 주제에 모든 신들을, 그리고 포세이돈을 힘으로 누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오,/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서. 정신이 병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을/ 내 아들이 했겠소? 두렵구려. 내가 애써 쌓은 부(富)가/ 먼저 달려든, 누군지도 모를 놈의 먹이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말이오.”(744~752)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몫 이상을 탐하거나 욕망하는 인간은 정의로운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생각이다.

»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이것은 비록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한 장면이지만,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만은 아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이런 생각을 자신의 <역사> 속에 담아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제 몫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정의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 몫을 넘어서 다른 이의 몫을 탐하는 것은 무례한 오만임을 실증하려고 했다. ‘많이 가진 자들이여, 더 많이 갖기 위해 약한 자들의 정당한 몫을 넘보지 말라.’그는 오만하게 팽창해오던 페르시아의 패배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은 페르시아의 힘이 헬라스 인들의 힘보다 훨씬 더 커지지 않고, 반대로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