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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자유조선’ 크리스토퍼 안에 “북한 암살 조심하라”/국민일보

이윤진이카루스 2021. 4. 29. 05:58

FBI, ‘자유조선’ 크리스토퍼 안에 “북한 암살 조심하라”

입력 : 2021-04-29 05:07/수정 : 2021-04-29 05:49

 

 

 

 

 

<‘자유조선’ 크리스토퍼 안, 한국 언론 최초 인터뷰>

◆ 글 싣는 순서
① 타이페이 공항서 벌어진 김한솔 구출 작전 ‘36시간’
② 첩보영화 같은 스페인 북한대사관 진입사건의 전모
③ 이라크 참전·MBA학위 ‘한국계’ 미국인, 자유조선 택했던 이유
④ 북한 암살 우려에다 스페인 송환 재판…그가 털어 놓는 심경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이 미국 해병대 부사관으로 이라크에 파병됐던 2006년 진급했을 때 모습. 사진 출처는 크리스토퍼 안 변호인단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 옷가게 사장의 장남, 미국 해병대 부사관, 경영학 석사(MBA) 학위, 한때 직원이 18명이나 됐던 경영 컨설팅 기업의 사장.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41)이 걸어왔던 길이다. 안정적이던 인생 항로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바로 자유조선이다.

그는 2019년 2월 22일 스페인 북한대사관 진입 사건에 참여했다. 크리스토퍼 안과 그의 변호인단은 “탈북을 요청했던 북한 외교관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신변을 우려해 ‘위장 납치극’을 원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사법당국과 미국 검찰은 “크리스토퍼 안과 자유조선 회원들이 스페인 북한대사관에 불법으로 진입해 대사관 직원들을 불법 폭행·감금하고 컴퓨터 등 물품을 훔쳐 달아났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스페인 사법당국은 그의 송환을 요구했고, 이에 응한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체포했다. 보석으로 풀려난 크리스토퍼 안은 지금 스페인 송환 여부가 달린 법정 싸움을 진행 중이다.

특히 크리스토퍼 안의 신변에 대한 우려는 높다. 미국 법원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크리스토퍼 안에게 북한의 암살 위험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크리스토퍼 안은 “FBI가 2019년 4월쯤 나한테 북한의 암살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스페인에 송환될 경우 북한에 의한 납치 또는 암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크리스토퍼 안에게 ‘LA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건실한 기반을 구축했는데, 왜 자유조선 작전에 참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 선택은 두 가지다. 구하러 뛰어드느냐, 그냥 지켜보느냐. 나에겐 참혹한 인권상황에 빠져 있는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어 “사람들은 북한을 말할 때 핵무기만 얘기한다. 북한은 폭탄만 있는 나라가 아니다.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북한 인권을 방치하면서 어떻게 보편적인 인권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크리스토퍼 안이 지난 20일(현지시간) LA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며 밝힌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옮긴다.

 

크리스토퍼 안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한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있다.

 

 

LA폭동…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 미국에 이민 왔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미국에 왔다. 아버지는 나에게 스포츠를 많이 시키며 미국식으로 키우고 싶어 했는데, 어머니는 LA에서도 과외를 많이 시키는 ‘한국 맘’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미국에서 살면 백인 중심적 사회에서 버텨야겠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 감사하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가 먼저 옷가게 직원으로 일을 했고,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가 LA 한인타운에 옷가게를 개업했다. 처음에는 잘 됐던 것 같다. 아버지가 어떻게 뚫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시 중국의 공장으로부터 독점적으로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받았다. 큰 집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2년에 LA 폭동이 일어났다. 내가 11살 때다. LA 폭동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LA 한인타운 약탈·방화 사건’이다. 많은 한인 가게들이 불에 타 재만 남았다. 아버지 옷가게는 불타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한인 상가에 손님이 끊겼다. 전부 망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집도 팔아야 했고, 조그만 월세로 옮겼다.

LA 폭동은 미국 정부가 한인사회를 희생시킨 것이다. 아무도 한인들을 돕지 않았다.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인식을 갖게 됐다. 나는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북한 사람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했던 북한 주민들을 위해 나섰던 것이다.

LA 폭동 이후 우리 가족의 생계는 힘들어졌다. 아버지는 구덩이에서 나오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데, 내가 외할머니(현재 99세), 어머니(현재 71세), 남동생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 지냈다. 어머니가 ‘학교는 꼭 다녀라’라고 해서 그때부터 수업을 마치고 옷가게 일을 도왔다.

중국 공장 측에는 1년 동안 아버지 별세를 숨겼다. 중국 공장에서 전화 연락이 오면 내가 ‘아버지가 잠시 나가셨다.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까먹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하고 물으며 옷가게 일을 이어갔다.”

 

크리스토퍼 안이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외할머니·어머니·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는 크리스토퍼 안 변호인단

 

 

이라크전쟁 참전…그리고 외할머니


“나는 학생 시절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의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했는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가족을 보호하고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삶에서 자신감을 갖고 싶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미국 해병대원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자원했다.(그는 한국의 ROTC 제도와 유사한 미국 제도를 통해 대학에 다니면서 부사관 후보생이 됐다.)

나는 해병대 근무 경험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내 정체성(identity)이 해병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정규군 해병대가 아니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정기적으로 훈련에 참여하다가 유사시 전장에 투입되는 해병 예비병력(Reserve)이었다(그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해병대 소속이었다). 같이 훈련을 받았던 동료들이 이라크 팔루자로 파병돼 나도 이라크 파병을 신청했다. 그래서 2005년 여름부터 2006년 여름까지 팔루자에서 복무했다.

우리 가족에겐 숨겨진 얘기가 하나 있다. 같이 사는 외할머니가 6·25전쟁 때 얘기를 내가 어렸을 때 가끔 해줬다. 외할머니는 서울에 살다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 가던 도중에 이모를 잃어버렸는데 미군이 찾아줬다고 한다. 외할머니에게 그 미군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이라크 사람들은 나를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라 미군으로 봤다. 외할머니가 봤던 많은 미군처럼 말이다. 팔루자에서 내 친구들이 죽기도 했다. 나는 친구들이 죽은 길을 걸을 때마다 ‘너희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고 다짐했다. 또 ‘6·25전쟁 때 미군의 도움으로 한국이 훌륭한 나라가 됐듯이, 지금 너희들의 희생으로 이라크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라크에서 돌아와 해병대에서 제대했다. 내가 어느 정도 어른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안이 미국 버지니아대학 경영대학원에 재학했을 당시 한 모임에서 지도교수 부부와 함께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는 크리스토퍼 안 변호인단

 

 

자유조선…그리고 어머니


“이라크 전쟁에서 돌아오니, 내가 직접 경험한 이라크전쟁과 뉴스에서 나오는 이라크 전쟁이 다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라크의 일반 사람들은 적이 아니었다. 미국 정치권은 이라크 전쟁을 정치화했다. 민주당은 공화당을 ‘전쟁광’이라고 비난했고, 공화당은 민주당을 ‘비(非) 애국자’라고 공격했다.

그래서 참전용사들을 위한 사회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사태로 경제불황이 오면서 그 단체에 후원이 끊겼다. 고민하다가 버지니아대학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경영대학원에서 ‘혁신(innovation)’을 전공했다. 한 사람 또는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공부했다.

나는 LA로 돌아와 2013년 경영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스타트업이나 중견기업에게 사업 확장이나 위기 탈출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는 회사였다. 한때는 직원이 18명이나 됐다. 그러다가 다른 사업을 모색하고 싶기도 했고, 봉사활동도 하고 싶어서 2017년 회사를 팔았다.

(그는 자유조선과 관련된 활동을 ‘언제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피했다. 그러나 경영 컨설팅 회사를 차린 이후 자유조선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안은 ‘북한 고위직을 포함해 6명 이하의 북한 주민들을 구하는 데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내가 자유조선 활동을 했던 것을 몰랐다. 어머니는 스페인 북한대사관 진입 사건으로 내가 뉴스에 나온 이후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지금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아프게 만든 것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처는, 내가 자유조선 활동을 위해 집을 비울 때가 있으니 ‘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자유조선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을 대충 알려줬다. ‘위험한 일이냐’고 묻길래 ‘때로는 위험한 일도 있다’고 답해줬던 기억이 난다.

나는 위기에 빠졌던 북한 주민들을 살렸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에 내 행동에 대해선 후회가 없다. 오히려 그럴 수 있었던 기회를 가졌던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운이 나쁜 일이 발생한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에게 북한 암살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물었다.) 내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내 두려움이 표시가 나면, 처도, 어머니도, 외할머니도, 장인·장모도, 한국에 있는 친척들까지도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내게 ‘나는 북한 암살자들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런 걱정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까지 내 주변에서 특별하게 느껴질 만한 이상한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자유조선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린다.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각국 정부들이 못하는 일에 나선다는 옹호론도 있다. 반면, 돈키호테식의 위험한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오히려 북한 당국이 탈북자 단속을 강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찬반양론을 떠나 크리스토퍼 안이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국민일보는 <‘자유조선’ 크리스토퍼 안 인터뷰> 시리즈의 3회로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 탈북 사건을 다루려 했으나 사실관계가 불명확한 부분이 존재하는 상황과 관련된 이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로스앤젤레스·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79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