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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심신 문제, 상호작용을 옹호하여, 3장 세계 3과 창발하는 진화

이윤진이카루스 2021. 11. 9. 19:41

        

지식과 심-신 문제, 상호작용을 옹호하여, 3장 세계 3과 창발하는 진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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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세계 3과 창발하는 진화

 

여러분:

나의 첫 번째 강좌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심신문제(the body-mind problem)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 관련하여 내가 몇 가지 관념들을 제공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문제인 심신문제(the body-mind problem)를 설명했다. 나는 또한 여러분에게, 심신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내가 사용하기로 의도한 주요 관념을 말했다: 그것은, 자동차나 고층빌딩이나 서책 혹은 가장 중요하게, 문제와 이론과 같은 인간 정신의 산물들로 구성되는 세계로 내가 ‘세계 3’으로 칭하는 관념이다.

세계 3: 인간 정신의 산물들 (이론들)
세계 2: 정신적 (의식적) 경험들.
세계 1: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물리적 대상들

내가 인간 정신의 산물들을 실재적으로서 간주하는 것을 내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자체가 또한 물리적인 것들뿐만 ㅡ 고층빌딩과 자동차 같은 것들로 모든 사람이 ‘실재적’으로 부를 것이다 ㅡ 심지어 서책이나 이론. 이론 자체는 추상적인 것 자체인데 나는 실재적으로 간주하며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과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고 ㅡ 우리는 이론을 생산할 수 있다 ㅡ 이론은 우리와 상호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론을 실재적으로서 간주하는 것에 대하여 실제로 충분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또한, 세계 3과 특히 주로 이론들로 구성되는 그 세계의 저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영역을 ㅡ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 ㅡ 이해하려고 노력함에서 생물학적이고 더욱 특히 진화론적인 고찰들을 이용하려는 나의 의도를 여러분에게 말했다.
나의 두 번째 강좌에서 나는 주로 내가 세계 3의 ‘자주성’으로 부르는 것을 토론했다.
이것에 의하여 나는, 우리가 어떤 것을 ㅡ 가령 주택 ㅡ 생산하기 시작하자마자, 지붕이 함몰되어 우리가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우리는 계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 정확하게, 우리에 의하여 발견될 구조적 법칙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법칙들이고 자주적인 법칙들이다. 그래서 그것은 기하학과 관련되고 숫자 이론과 관련된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밝히려고 노력했다. 직각과 원 사이의 관계들은 의도되지 않고 예기치 않았다. 소수들(素數들: prime numbers) 또한 전혀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소수들은, 자연수들의 무한수열을 우리가 발명하고 생긴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이다. 이 발명은 반대로, 숫자들의 제한된 수열을 지닌 초기 문제들에 의하여 촉발되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발명은 발명보다는 더 많이 발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발명과 발견 사이의 차이점을 내가 강조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여러분에게 제 3 세계의 자주성을 설명하고 싶던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하여, 특정 문제들과 관계들이 우리 발명품들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이라는 것과 그리하여 이 문제들과 관계들이 발명된다기보다는 우리에 의하여 발견된다고 언급되는 것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는 소수들을 발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목적들과 관련하여, 발명과 발견 사이의 차이점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 두 가지는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는데 이유인즉, 모든 발명에 창조적 상상력의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에 모든 발명이 창조와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수들의 발견에도 또한 성립한다.
나의 마지막 언급들은, 지난 강좌 이후에 우리가 가진 토론에 의하여 촉발되고 나는 이 기회를 빌려서 우리가 지금까지 가졌던 두 번의 토론들이 얼마나 매우 훌륭했던지 말하고 싶다. 그 토론들을 정말로 높은 수준이었다 ㅡ 정말로 내가 경험한 최고의 토론들 중 몇 가지.
그것은 큰 즐거움이었지만 진지한 내용으로 돌아가자.
나는 원래 내가 ‘이론구조의 신화’로 칭하는 것에 관하여 오늘 토론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저 모든 것이 변했고, 이제 나는 먼저 세계 3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중요하다고 내가 느끼는 이유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조금 말하고자 한다. 이것을 목적으로 나는, 내가 ‘세계 3’이라는 명칭으로 다루려는 저 화제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들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말하려 노력하겠다.
그다음에 나는 진화론에 대하여 그리고 창발하는 진화에 대하여 조금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요점이 될 것이다.
나의 세 번째 요점은, 동물 수준으로부터 인간 언어의 진화가 될 것이고, 특히 언어의 인간적 기능들의 진화가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들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객관적 지식의 고유한 역할을 또한 토론하겠다.
나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요점은 참인 서술과 유효한 서술의 ㅡ 다시 말해서, 주관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객관적 의미에서의 진리인데 그것은 진실성이나 충실성에 해당한다 ㅡ 관념들이나 기준들의 창발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의 세계 3 이론에는 길고도 흥미로운 이전 내력이 있는데 그것을 다루려는 의도는 그러나 이 강좌 과정에서 나에게 없다: 그 내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세부사항들에 너무 깊이 빠지게 될 터이다. 세계 3과 유사한 어떤 이론을 믿었던 철학자들의 긴 명단 ㅡ 헤시오도스(Hesiod),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파메니데스(Parmenides);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플로티누스(Plotinus); 라이프니츠(Leibniz), 볼차노(Bolzano), 프레게(Frege); 아마도 후설(Husserl) ㅡ 가운데서 나는 세 명만 언급하겠다: 플라톤, 볼차노 그리고 프레게.
플라톤은 세 가지 세계들을 신뢰했다. 그의 첫 번째 세계는 그가 완전히 실재적이라고 ㅡ 그리고 정말로 신적인(神的인: divine) ㅡ 말한 유일한 세계로 내가 말하는 세 번째 세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는 문제들이나 논증들과 이론들도 담겨있지 않았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그 세계는 미(美: beauty) 자체나 선(善: Good) 자체와 같은 관념들로만 구성되었다. 이것들을 그는 ‘형상들(Forms)’이나 ‘이데아들(Ideas)’로 불렀다. 그것들에는 분명히 객관적일 의도가 있었고, 물리적 물체들이 우리의 눈에 가시적인 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우리의 지성적 직관에 가시적이었다.
플라톤의 두 번째 세계는 영혼이나 정신의 세계였는데 그 세계는 그가 말하는 형상이나 이데아의 세계와 유사했다: 우리의 탄생 이전에 우리의 영혼은 이 형상의 세계에 살아서 이 형상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의 탄생은 일종의 은총으로부터의 타락인데 우리가 물리적 물체들이라는 세 번째 세계에 들어가는 타락이다. 이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형상과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지식을 잊게 된다. 그러나 이 지식은, 철학적 훈련을 통하여, 우리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다시 잡힐 수 있다.
여러분은 일견 이것과 나 자신의 이론 사이의 유사점들과 차이점을 알 것이다.
한 가지 차이점은, 플라톤의 이론이 추락이나 퇴보의 이론이라는 ㅡ 우리의 타락에 대한 이론 ㅡ 것인데 반면 나의 이론은 세계 3을 향한 진화론적 상승의 이론이다. 이 차이점은 하찮지 않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플라톤의 첫 번째 세계의 구성원들과 나의 세계 3의 구성원들 사이의 차이점만큼 결코 중요하지 않다.
플라톤의 첫 번째 세계는 신격화된 관념들이나 신격화된 단어들로 구성된다. 나의 세 번째 세계는, 객관적 지식으로 구성된 그 영역에 관한 한, 이론들과 그 이론들에 덧붙여 열린 문제들 및 논증들로 구성된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언어의 두 가지 면에 대한 일람표를 여러분에게 제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일람표에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겪었다:


단어 서술

개념들 이론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 진리

 

이것에 관하여, 내가 왼편을 하찮은 것으로서 그리고 오른편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한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하여 여기에 플라톤이 주장하는 세계와 내가 주장하는 세계 사이의 가장 중요한 구분이 있다. 플라톤은 철학자 중에서 가장 훌륭했지만 일람표의 왼편을 전면에 ㅡ 즉, 단어 개념들과 의미 ㅡ 세우면서 그는 철학의 전체 전통을 혼란시켰다. 반(反)-플라톤주의자들(소위 ‘유명론자들[唯名論者들: nominalists]’) 포함하여 대부분은 이 전통에 휘둘렸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최근의 철학인 언어분석 철학이나 혹은 분석을 의미하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 단어들에 관한 철학이다 (‘단어들의 새로운 방식[The New Way of Words]’). 강좌 이후 우리의 토론에서 나는 기꺼이 이 주장들을 증명하겠지만 그렇게 하려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당장 내가 하고자 원하는 유일한 것은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철학자 볼차노는, 자신이 지칭하는 바와 같이 ‘본질적인 서술들’로 (Sätze an sich) 내가 말하는 세계 3에 해당하는 것을 채웠다. 이것은 나의 관점에서, 여러분이 나의 일람표의 왼편과 오른편을 기억할 때 알 것처럼, 엄청난 진보였다.
그러나 볼차노는, 자신이 말하는 본질적인 서술들의 세계의 위상에 의하여 크게 당혹했다. 이 세계가 실재적이라고 그는 제안했지만, 물리적 세계와 동일한 종류의 실재성은 전혀 지니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 세계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하여 설명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가 극도로 분명하고 명료한 작가였기 때문에 이 난제들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다. 따라서 볼차노의 본질적인 서술들의 세계는 실제로 실재적이 아니라 단지 한 철학자가 지닌 상상력의 발명이나 허구라는 인상이 만들어졌다.
거의 동일한 것이 철학자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 1902년 프레게는, 사고의 심리학적인 면과 논리적인 면을 우리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심리학적인 것

주관적인 사과 과정들,
혹은 사고 행위, 혹은
주관적 의미에서의 사고
논리적인 것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
혹은 사고 행위의 내용들,
혹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 논리적 탐구[The Thought: A Logical Inquiry]’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그가 ‘세 번째 영역[the third realm]’으로 (das dritte Reich) 칭하는 것을 ㅡ 즉, 객관적 의미에서의 사고 영역 ㅡ 도입하는 1919년까지 그의 연구로부터 거의 소외되어 있었다.) 프레게가 말한 세 번째 세계 혹은 ‘세 번째 영역’은, 개념들로 그리고 참이고 허위인 명제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문제들과 논증들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 세계에 속하는 듯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볼차노처럼 프레게가 자신의 세 번째 영역이 실재적이라고 주장했을지라도, 이 주장을 증명하는 데서 볼차노보다 더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프레게의 세 번째 영역이 많은 우군을 얻지 못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그 영역은, 그 영역을 허구로서만 간주한 적대자들을 정말로 얻었다.
이 세 가지 세계들 모두에 대한 적대자들의 명단은 매우 길다. (그 명단은, 그 세계들에 대한 우군들의 명단보다 훨씬 더 길다. 유명론자들 학파 전체가,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부터 계속해서, 그 명단에 속한다; 또한 데카르트, 홉스, 로크, 버클리[Berkeley], 흄[Hume] 그리고 밀[Mill] 또한; 러셀은 틀림없이 객관적 진리를 신뢰하지만, 그의 입장은 모호하다; 그리고 뷜러[Bühler]와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언어학도가 세 번째 세계 이론들에 반대하는데 뷜러는 너무 명시적이지 않다. 헤겔과 후설[Husserl]은 심리학주의에 속하고, 그들과 함께 딜타이[Dilthey] 및 다른 정신과학자들[Geistewissenschaftler] 또한 그렇다.)
나는 여러분에게, 특히 나의 첫 번째 강좌에서 내가 언급한 현대 철학에서의 두 가지 강력한 일원론적(一元論的: monistic) 경향들을 상기시킬 것이다. 모든 것을 정신적 상태들로 환원시키려고 시도하는 ㅡ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경험들만 안다고 주장하면서 ㅡ 정신에 관한 철학자들이 있다. (이 견해에 대한 최근이면서 다소 위장된 ‘언어적’ 해석본으로서 나는 자체를 ‘현상주의[現象主義: phenomenalism]’로 부른 학파를 언급했다.) 그리고 유물론적[唯物論的: materialistic]이거나 물리학주의적[physicalistic]이거나 행동주의적[behaviourist] 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직 물리적 상태들만 ㅡ 사람들의 물리적 행동을 포함하여 ㅡ 있다고 그리하여 이 물리적 상태들에 정신적 상태들도 있다는 전제를 ‘추가하는’ 것은 불필요한 복잡성이라고 주장한다.
이 일원론적(一元論的: monistic) 학파들 모두는 물론, 세 번째 세계를 추가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불필요하며 망상적이라고 의견으로 모은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심지어 극소의 생존하는 이원론자들(二元論者들: dualists)도 ㅡ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세계를 신뢰한다 ㅡ 동의하는 듯이 보인다.
나 자신이 (적어도) 세 가지 세계들의 존재를 제안하는 다원론자(多元論者: pluralist)임을 여러분이 알기 때문에, 일원론자들과 내가 의견을 달리하는 것에 관하여 내가 다시 상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왜 내가 세계 3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1933-4년 이래 나의 저술들에서 객관적 지식의 위상을 강조하고 그 지식을 주관적 지식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의 무망함을 강조하는 지식론을 내가 지지했을지라도 겨우 1966년에 처음으로 ‘세계 3’이라는 명칭을 왜 사용했는지를 설명하고 싶다.
세계 3에 대하여 서술하려는 데서 나의 망설임은, 내가 허풍뿐만 아니라 허풍을 닮거나 허풍과 연계된 의심이 드는 어떤 것도 혐오하는 사실 때문이다. 세계 3의 위상과 세계 2에 대한 세계 3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나에게 없다면 그것 모두는 철학자의 환상과 너무 많이 닮은 듯이 들렸다고 나는 느꼈다. (볼차노와 프레게의 이론들은 많은 다른 철학자들에게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꿀이 벌들의 산물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계 3에 속하는 대상들은 인간의 산물이라는 다소 ‘개괄적’이지만 단순한 언명을 내가 발견하기 전에 나는 세계 3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때도 나는, 내가 ‘세계 3’이라는 명칭을 학술회의들이나 강좌들에서 자주 사용했을지라도, 또 1년 동안 그 명칭을 인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두 가지 결정적인 통찰로 인하여 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는 격려를 받았는데 왜냐하면 그 통찰로 인하여 세계 3이 허풍만이 아니라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 아주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먼저 세계 3이 자주적일지라도 그 세계는 사람이 만든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 세계도 완전히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우리가 그 세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 주고받기(give and take)가 있고, 일종의 정보교환(feedback) 효과가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두 번째, 세계 3과 밀접하게 유사한 것이 이미 동물 왕국에 존재했다는 것과 그리하여 문제 전체는 진화론에 비추어 탐색될 수 있다는 통찰.

이로 인하여 나는 오늘 강좌의 두 번째 요점에 도달한다. 일반적인 진화론에 대하여 나는 몇 가지 말을 언급하고 싶다.
자연선택에 의한 다윈의 진화론이 가장 큰 중요성을 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이론이, 많은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이론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모호함이 있다. 예를 들어, 그 이론은 유전 그리고 변이가능성(mutability)으로 ㅡ 즉, 어린이들은 대부분의 요점들에서 부모를 닮는데 어린이들과 부모가 인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것을 초월하기도 하기 때문에 ㅡ 작용한다: 어린이들 또한 개별적인 특질들에서 부모들을 닮는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부모들과 다소 다르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더 많이 달라지고 다른 경우들에는 달라짐이 적다. 그리하여 진화론은, 한편으로, 유전 물질에 대하여 높은 등급의 안정성을 전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특정 정도의 변이가능성을 전제한다. 두 가지 전제들은 틀림없이 옳다. 그러나 그 전제들로 인하여 우리는, 편리할 때마다, 어떤 현상은 유전적 안정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또 다른 현상은 변이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설명에서, 심지어 전제들이 분명히 참일 때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설명의 불만스러움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전제로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사실에 놓여있다: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그리고 심지어 발생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많을 것을 설명하면, 우리의 실제 설명들은 의심스러워진다.
그 이론의 또 다른 약점은 이렇다. 다윈은 우리가 ‘진화론적 상승’으로 부를 것을 ㅡ 즉, 오랜 기간에 걸친 하등 형태의 생명체로부터 고등 형태의 생명체로의 창발(創發: emergence) ㅡ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용어사용법을 이용하여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을 말한다면 다윈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표현될 것이다: 모든 돌연변이나 생명체의 형태들 가운데서 오직 최적자(the fittest)만 생존하기 때문에 진화론적 상승이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명제를 추가한다는 조건으로만 이것은 진화론적 상승에 대한 설명으로서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등 형태에는 하등 형태보다 더 적응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명제는 ㅡ 주로, 고등 형태에는 하등 형태보다 더 적응 경향이 있다 ㅡ 분명히 옹호될 수 없다. 사실상 우리는, 하등 형태들 중 몇 가지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ㅡ 고등 형태의 발흥 오래 전부터 ㅡ 생존했다는 것과 이 하등 형태들이 여전히 생존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생존하는 하등 형태들의 오랜 후에 출현한 그리고 상당한 기간 동안 생존한 많은 고등 형태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이유를 모르지만, 그 고등 형태들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하여 ㅡ 즉, 훨씬 더 하등 형태들에 의하여 ㅡ 죽임을 당했을 개연성이 높다. 아무튼 이 고등 형태들은 많은 하등 형태들보다 적응성이 부족하다. 이 고찰로 인하여, 고등 형태의 생명체와 적응성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은 진지하게 옹호될 수 없고 매우 모호한 연관성에는 설명으로서 많은 가치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적응성에 의한 특정 설명 방식은 훨씬 더 나쁘다. 그 후 생물학자들은, 자기들이 통상적으로 어떤 종(種: species)을 검사함에 의하여 그 종이 얼마나 적응적인지를 발견할 수 없음을 오랫동안 느꼈다. 그들은 검사에 의하여 두 가지 경쟁하는 종들(種들: species)의 적응성을 또한 비교할 수 없다. 두 가지 경쟁하는 유형들 중 어느 유형이 숫자에서 증가하고 어느 종이 감소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그들의 적응성을 결정하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자들이 (특히 피셔[Fisher]) 더 자주 생존하는 유형들을 ‘더 적응적’으로서 어쩔 수 없이 정의(定義)해야 한다고 느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한 때 유망한 설명적 이론으로 보였던 것은 완전히 공허해진다. ‘최적자(the fittest)만 생존하기 때문에 진화에는 고등 형태들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는 서술은 설명처럼 귀에 들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최적자(the fittest)’를 그것을 정의하는(定義하는: defining) 표현으로 대체하면, 우리는 다음을 얻는다: ‘진화에는 고등 형태들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더 자주 생존하는 형태들은 더 자주 생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왜냐하면’이라는 표현은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로 퇴보한다. 그러나 항진명제는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모든 항진명제는, ‘모든 탁자는 탁자’나 ‘오래 사는 사람들은 오래 사는 사람들’와 대등하다. (부언하여 이런 종류의 퇴보는, 정의[定義: definition]가 우리의 설명에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면, 빈번하게 발생한다.)
최적자(the fittest)에 의한 설명에는 예언적 힘도 없다. 이유인즉 다음 세대에 지금까지 생존하거나 적응하는 유형이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다면 그 유형은 새로운 환경 조건들 몇 가지에 대하여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환경은 물론 부단히 변하는데 왜냐하면 진화 자체가 그 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적응은 항상 존재하는 환경에 상대적이라는 것과 우리가 단지 ‘여기서 지금 적응하는 것이 여기서 지금 생존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판명된다.
이론은 온건하게 표현하면 완전히 성공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나는 이 요점들을 언급한다. 이론은 틀림없이 진화론적 상승을 설명할 수 없다. 이론이 혹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형태들의 전체적인 증가이다. 그리고 유전에 보태어 변이가능성의 도움을 주로 받아서 이것을 이론은 설명하는데, 그것은 다소 모호한 종류의 설명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유전공학에 의하여 인구를 향상시키려는 우생학자들(優生學者들: eugenicists)의 꿈을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내가 간주함을 여러분이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유전적 질환을 감소시키려는 부드러운 조치들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긍정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인류에게 좋다고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무엇이 점점 더 나은 유전적 유형들일 것임을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이 유형들이 다른 유형들보다 나을 터인 환경을 누가 예견할 수 있는가? 몇몇 사람들이 유전학에 조금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만 인류에게 간섭하도록 허락한다는 관념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어리석다.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우리는 다윈과 그 후계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나는 다시 말하고 싶은데 이유인즉 그들은 적어도 몇 가지 극도로 흥미로운 문제들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중요한 것들이 진화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직관적 확신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는 분명히 이룩될 많은 것이 여전히 있다.
이제 나는 우리의 오래된 4 단계 도식


P → TT → EE → P를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싶은데 혹시 다윈론에 대한 다소 개선으로 판명되기를 내가 희망하는 관점이다.
나는 원래 여러분에게, 그 도식을 이론 형성에 대한 도식으로서 설명했다: 우리는 문제들로써 시작한다, 우리는 잠정적 이론들을 제시한다, 그다음에 새로운 문제들이 출현한다. 이제 나는 이것을 훨씬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겠다 ㅡ 즉, 다음과 같이: 모든 생명체들은 항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들은 문제에 직면하여, 그들은 항상 문제를 풀고 있다 ㅡ 심지어 여러분이 잠을 자면서도 여러분을 문제를 풀고 있다. 내가 이와 같이 조용히 서있을 때, 일종의 시행착오와 정보교환(feedback) 방식에 의하여 내가 너무 왼쪽으로 멀리 가고 너무 오른쪽으로 멀리 가는 것을 막아서 그리하여 나를 곧게 유지하는 수백 가지의 근육들이 나의 몸 안에 있다. 내가 분명히 조용히 서있는 동안 생리학자들은, 나를 곧은 자세로 유지시키기 위하여 나의 몸 안에서 작동중인 엄청난 양의 자동비행 장치가 실제로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움직이고 있지 않고 다만 조용히 서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은 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논지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항상 문제를 풀고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 생명체의 한 부분도 문제를 풀고 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 사실 자체를 ㅡ 생명체들이 문제를 풀고 있다 ㅡ 자연선택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발육의 매우 초기에, 생명체 진화의 매우 초기에 문제를 풀고 있지 않던 저 생명체들은 제거되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는 문제를 풀고 있는 생명체들만 있다.
내가 그것을 처음에 단순한 방식으로 ㅡ 즉, 생명체들은 문제를 풀고 있다 ㅡ 표현했을지라도 나는 실제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싶다.
진화계보(evolutionary tree)를 여러분이 기억한다면, 우리는 생물학자들이 ‘생물 분류(phylum groups)’로 부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과(科: families), 속(屬: genera), 종(種: species) 그리고 개체(individuals). 이 분류의 각각은 문제를 풀고 있다고 그리고 자체의 문제들을 풀면서 그것들 모두는 TT들을 제시하고 잠정적 시도들인 TT들은 다양한 수준들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개체들로써 시작하려고 시도하겠다. 개체 자체는, 오류제거에 의하여 자체가 교정하는 시도들을 부단히 내놓으며 ㅡ 인간만이 아니라 아메바나 박테리아와 기타 등등도 ㅡ 이 시도들은 행동적 시도들이다. 아메바는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고 ㅡ 각각은 위족(僞足: pseudopodia)을 내민다, 기타 등등 ㅡ 이 모든 행동적 움직임들은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시되는 잠정적 시도들이다: 때때로 먹이 문제들, 때때로 또 다른 동물로부터의 도피. 때때로 또 다른 아메바로부터의 도피, 기타 등등. 그리하여 생명체 개체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잠정적 행동을 내밀며 이 모든 것은 잠정적이고 오류제거의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여러분은 항상 새로운 문제들을 경험한다. 나는 이것을 다소 더 완벽하게 토론하겠다. 그러나 나는 먼저 한 가지 명칭을 도입하고 싶지만 ㅡ 직관적 선명성을 위해서만 ㅡ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터이다: 개체의 적응에서 ‘선봉’은 개체에 의하여 시험된 다양한 행동 유형들이다. 말하자면 개체는 이 행동 유형을, 여러분이 좋다면 그 개체가 자체의 환경을 정복하거나 자체의 환경에 침투하거나 혹은 여러분이 지칭하고 싶은 여하한 것을 시도하는 자체의 선봉들로서 사용한다. 그리하여 행동 유형들은 개체가 내미는 실험들이거나 선봉들이거나 여러분이 지칭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유사한 방식으로, 개체들은 종(種: species)에 의하여 사용되는 선봉들이다 ㅡ 시행착오 선봉들이거나 잠정적 시도들. 종(種: species)이 ㅡ 추상적인 것이고 저 종(種: species)의 모든 개체들 ㅡ 있다. 그러나 종(種: species)이 이용할 수 있는 유전 물질을 혼합함에 의하여 종(種: species)은 개체들을 생산한다. 종(種: species)은, 개체들의 모든 종류의 잠정적 형태들을 생산한다. 이것은, 다시, 완전히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은 아니다. 행동적 시도들은 우연적도 아니고 무작위적도 아니라고 내가 말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매우 빠르게 어떤 것들은 제거되고 또한 그것들은 항상 어떤 확정된 문제와 연계되며 이것으로 인하여 물론 무작위성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종(種: species)에 의한 개체의 생산도 유사하다. 이것은 다시 무작위적이 아닌데 왜냐하면 특정 유전적 유형들이 자연선택에 의하여 혹은 다른 수단들에 의하여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큰 숫자의 다양한 개체들이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 개체들 각각을 여러분은, 자체의 환경을 정복하기 위하여 종(種: species)에 의하여 사용되는 시도나 선봉이나 여러분이 지칭하고 싶은 것으로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 관념들을 다원론의 일반화로서 사용한다. 우선, 우리가 삶을 위하여 투쟁한 것, 생존을 위하여 투쟁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해결할 구체적인 문제들이 또한 있다. 예를 들어 직립을 유지하는 문제는 생존 문제만이 아니다. 내가 앉는다고 내가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또한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다양한 문제들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직립 문제가 한 가지일 터이고 바로 지금 나의 사례와 병행할 터인 다른 문제들은 곧추 앉는 법과 서는 법을 선택하는 데 있을 터이다. 그러나 물론 다양한 개체들인 항상 직면하는 많고 많은 문제들이 있고 이것들은 행동적 문제들이다. 그리고 종(種: species)이 직면하는 많고 많은 적응의 문제들이 있고 종(種: species)은 선봉들을 사용하고 유전자들은 다양한 종(種: species)을 사용한다. 진화계보(evolutionary tree)의 몸통으로 우리가 돌아온다면, 진화가 전개한 이 형태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 환경과 세상 및 심지어 지구 너머로 침투하려고 시도하는 현재 살아있는 선봉들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것은, 생명체들은 부단히 생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다윈적 관념의 일반화이다. 나의 이론에 따르면, 생존 문제들이 아닌 문제들이 많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거나 잎사귀를 내밀 때, 땅의 돌이나 바위에 의하여 그리고 빛에 접근하는 환경에 의하여 제기된 고유한 지역적 문제들을 나무는 해결한다. 생명체는 특정 종류의 먹이에 대하여 선호를 전개할 것이지만 다른 종류들을 먹고 생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호된 먹이를 얻으려면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가 그것은 반드시 생존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특정 먹이에 대한 선호를 전개할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가령 먹이가 얻기 쉽거나 그와 같은 것이 때문이다.
아무튼 선호는, 심지어 먹이가 더 이상 얻기 쉽지 않은 이후에도 지속될지도 모른다. 이런 종류의 먹이를 선호하는 것은 새로운 행동 특질이었고 이 새로운 행동 특질은, 그런 특질이 전개되었던 환경이 변했을지라도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물론 생명체에게 새로운 문제가 된다. 선호되는 먹이를 얻으려면 생명체에게 문제가 생기는데, 특히 환경이 변하고 선호되는 먹이를 얻기가 쉽지 않게 될 때 그렇다. 선호되는 먹이가 실제로 드물게 될 때 그것은 생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이런 종류의 생명체들이 선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혹은 그 생명체들이 저 선호를 고수하는지는 그 생명체들에게 실제로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이제 생명체가 저 선호로부터 벗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생명체가 일종의 특화를 개발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생명체는 이제 이 먹이에 대하여 전문화되었다. 이 전문화는 전통일 (그리고 그것이 전통뿐이라면, 생명체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것이고 혹은 그 전문화는 유전적 특질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ㅡ 다시 말해서, 그 전문화는 세습적 특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 실제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행동적 선봉은, 말하자면, 전개 전체의 실제적인 선봉이다. 그것은, 우리가 침투하려고 시도하는 실제적인 들어가기이다. 그래서 행동은 몸 구조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생물학자들이 놓친 요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화의 설명과 관련하여, 주요 요점은 실제로 행동적 선봉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것을 따른다. 특히 우리가 선호하는 것들은 결정적이다. 두 번째 요점: 행동적 특질이나 행동적 특화가 오래 지속되면 ㅡ 전통이 되면 ㅡ 이 특질에 대하여 내가 ‘세습적 고착(hereditary entrenchment)’으로 지칭하는 것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이 전통일 따름이라면, 여러분의 특화에서 여러분은 완성을 실제로 이루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항상 다른 것들도 또한 수행할 수 있어서 이 가능성들이 한 가지 것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완전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특화가 돌연변이들을 통하여 유전적으로 고착되면, 이 돌연변이들은 전통에 의하여 이전에 이룩된 저 한 가지만 수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특화는 일종의 완전성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 혹은 심지어 상당히 먼 장래에 특화의 세습적 고착은 생존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리하여 상당한 시간 동안 세습적인 고착은 실제로 우성(優性)이 되어 생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습적 고착은, 환경이 변할 때, 죽음의 함정으로 판명될 것이다. 여러분이 특정 방식으로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에만, 가령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음식만 먹을 수 있기 때문에만 음식 공급이 끊어질 때 여러분은 당황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특질의 세습적 고착으로 인하여 실제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상황이 생길 것이다.
아주 고도로 적응된 특정 종(種: species)이 정말로 매우 성공적인데 너무 특화되었기 때문에 환경 조건들의 다음 주요 변화에서 실제로 사멸할 것이라고 여러분은 실제로 말할 수 있다 ㅡ 여러분은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실제로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언제 환경이 변할지 여러분은 알지 못하지만, 이 생명체가 너무 특화되었고 실제로 지금 너무 성공적이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있지만 그 생명체의 성공이 오해를 낳는다고 그리고 그 성공은 첫 번째 기회에 ㅡ 즉, 환경적 조건에서 최초의 커다란 변화에 ㅡ 사라질 것이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있다.
이제 나에게는, 내가 다윈과 어디서 달라지는지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일종의 요약문이 있다.

1 나의 문제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다윈이 주로 생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말 하는 반면, 나의 문제들은 소통하는 것이나 특정 종류의 먹이를 얻는 것과
같거나 유사하고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이다.
2 오류제거의 방식은 개체들의 생존투쟁으로 그 개체들 중 몇몇의 조기
사망으로 끝날 뿐만이 아니다. 그 방식에는 예를 들어, 구체적인 목적을
이룩함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행동의 예방이 포함되기도 한다.
3 새로운 형태들의 창발 이론이 주어진다: 새로운 형태들은 출현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들로서 설명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말로 새로운 것의, 참신한 것의 출현.
이제 나의 처음 두 가지 강좌들에서, P가 P와 일반적으로 매우 다를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았다. 이 특정 도식으로부터, 참신한 것이 진화
내부에서 출현할 수 있고 틀림없이 출현함을 우리는 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태들의 창발에 관한 이론이 생긴다.
4 행동에 의하여 그리고 행동의 발견들에 의하여 진화에서 이룩된 주요
역할이 강조된다: 행동은 진화의 실제적인 선봉이다.
5 새로운 행동 목적들, 선호사항들 그리고 재능의 전개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이 강조된다.
6 행동 형태들의, 행동 가능성들의 범위를 넓히거나 좁힘에 의하여
그리고 행동의 유전적 토대를 넓히고 좁힘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도
또한 강조된다. 각각은 매우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ㅡ 내가 앞에서 든
사례를 여러분이 기억한다면 ㅡ 구체적인 선호가, 내가 ‘유전적 특화’나
‘유전적 고착’의 과정으로 지칭할 것을 통하여, 품종이 선호한 종류의
먹이 외의 다른 먹이로 생존할 수 없는 그 품종의 능력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생존 문제가 정말 된다.

이 단순한 사례는 매우 중요하고 우리는 그 사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그 사례들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다시 생명체 개체로써 시작하겠다. 개체의 거의 고유한 유전적 구성은, 종(種: species)에 의하여 수행되는 문제-해결 시도로서 간주될 것인데 각각이 다소 다른 유전이나 유전적 구성을 지니면서 다양한 개체들의 넓은 영역을 낳는다. 이 다양한 개체들 각각은 잠정적 시도로서, TT로서 간주될 것이다. 잠정적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어 제거된다면, 유사한 유전적 구조로써 새롭게 시도하는 개연성은 다소 감소될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다윈론이다 (혹은 지금 그것이 지칭되는 바와 같이, ‘새로운 종합[the new synthesis]’). 우리는, 종(種: species)이 자체의 환경에 침투하거나 그 환경을 정복하려고 시도함에서 생명체 개체를 이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생명체 개체의 행동을 바라볼 수 있다. 행동은 유전에 의하여 ㅡ 즉, 유전적 구성에 의하여 ㅡ 부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행동에는 특정 범위나 영역이 있을 것이다: 유사하거나 다른 문제 상황들에 놓인 개체의 의향에서 가능한 다양한 행동 반응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 행동 반응들 각각은 TT로서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체 개체는, 오류제거에 의하여,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을 ㅡ 우리의 사례에서는 선호된 먹이를 얻는 방식 ㅡ 배울 것이다. 그리하여 행동은 생명체 개체의 선봉이어서 우리에게는:

행동: 개체 = 개체: 종(種: species)이

생긴다. 그러나 개체에 의한 혹은 몇 가지 개체들에 의한, 한 가지 종류의 먹이에 대한 선호의 전개는 특정 문제 상황에 대한 행동적 해결책이기도 했다. 이 선호는, 저 종류의 먹이가 상대적으로 풍부했기 때문에만 혹은 다른 많은 이유들 때문에만 채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호가 전통에 의하여 유지되는지 혹은 유전적으로 고착되는지가 결정적이다.
나는 전통을, 다른 행동 형태들이나 해결책들이 생명체의 유전적 구성의 관점에서 이용될 수 있을지라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변하지 않는 행동 형태로서 말하겠다. 그리고 다른 형태들이 이용될 수 없다면 ㅡ 즉, 생명체의 유형이 유전적으로 특화되었다면 ㅡ 행동하는 한 가지 방식은 유전적이나 세습적으로 고착되었다고 나는 말하겠다.
그리하여 특화는, 끊어질 수 있는 전통의 문제이거나 끊어질 수 없는 세습적 고착의 문제일 것이다 ㅡ 왜냐하면 행동이 다소 경직되게 세습에 의존할 것인 반면 세습은 개체의 행동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4단계 문제해결 도식으로 선회하여,
나는 요약할 것이다. 유전나무(genetic tree)를
보자.

개체들이나 종(種: species)이나 속(屬: genera)
혹은 문(門: phyla) ㅡ그것들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행동이나 혹시 전통은 TT
즉, 개체의 선봉이다. 개체들은 반대로 종(種:
species)이나 품종(品種: race)의 TT나 선봉이다.
종(種: species)은 속(屬: genera)의 TT나 선봉이다.
기타 등등.

이제 나는 새로운 문제로 선회한다: 행동적 전통은 유전적 고착의 ㅡ 다시 말해서, 품종(品種: race)에서 종(種: species)의 유전적 변화의 ㅡ 선봉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전에 전통이었던 것의 이 유전적 고착은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ㅡ 이유인즉 전통에서 기인하는 상당히 경직된 행동적 형태가, 통상적으로, 유전적 특화에서 기인하는 형태보다 (아마도 훨씬 더 경직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확화게 유사한) 다소 덜 성공적일 것이다. 이것은, 특화가 한 단계 더 멀리 옮겨진 사실에 기인할 따름이다: 다양한 행동 형태들이 개체에게 여전히 가능하다면, 이 가능성으로 인하여 행동의 완성이 조금 방해를 받는다. 이제 효율의 증가로 인하여, 우연히 행동을 유전적으로 고착시키는 돌연변이들이 성공할 개연성이 생긴다. 선호하는 먹이를 특화하는 돌연변이들에게는, 당분간 특화되지 않은 유형들보다 유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종(種: species)의 유전적 구조는 변할 것이고, 돌연변이 유형들의 빈도는 개체군에서 증가하여 반전이 종(種: species)을 멸종으로부터 구하기에는 불가능하거나 어렵거나 너무 느리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고착은, 잘 알려진 세습적 구조이다. 새로울 것은, 이 구조가 통상적으로 고도로 성공적일지라도 매우 위험한 사건이라는 논지이다. 사실상 그것은 종(種: species)에게 죽음의 덫이다. 종(種: species)이 이런 방식으로 더 성공적이나 ‘생존에 더 적응하게’ 될지라도, 환경적 조건과 유관한 다음 변화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되기 마련이다 ㅡ 예를 들어, 고도로 특화된 먹이 공급이 고갈될 때.
그리하여 나의 이론에서 예측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적응의 관념이 나에게 없을지라도, 장기적 예측을 위하여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부적응의 관념을 정말 나에게 있다. 그 관념은 다음과 같다: 특화의 모든 유전적 고착은 당분간 그리고 아마도 장래 오랜 기간 동안 극도로 성공적일지라도, 결국 치명적이기 마련이다.
유전적으로 고착된 특화의 반대 경우들은, 행동 형태들을 가능한 한 넓게 지닌 종들(種들: species)이다. 그들에 대한 전망이 더 장밋빛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어떤 것도 예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종들(種들: species)에 치명적일 예상될 수 없는 가능한 많은 변화들이 (예를 들어 새로운 바이러스의 진화) 항상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례는 레바논의 삼나무이다. 그 나무들은 잘 적응했고 알맞았다 ㅡ 배 건조를 위한 그 나무들의 적합성을 이용하려는 인간이 개발한 세계 3계획까지. 이로 인하여 그 나무들은 실제로 박멸되었다.
이 이론의 관점에서 유전적 상승에 대한 오래된 다윈의 문제는 어떻게 보이는가? 먼저, 그 문제가 잘못 표현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일반적인 유전적 상승과 같은 것은 없다. 새로운 문제들이 출현해서 해결되어 새로운 문제들로 다시 이어지는 것처럼, 증가된 다양성을 향한, 점점 더 다양한 종들(種들: species)을 향한 경향과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유전 나무를 수평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4 단계 도식으로 인하여. 새로운 문제가 일반적으로 옛 문제들에게 매우 느슨하게만 의존할 것임이 분명해진다: 잠정적 해결책들로 인하여 새로운 상황이 생긴다. 게다가, 다른 종들(種들: species)에게서나 물리적 환경에서의 변화 때문에, 외부 환경이 변할 것이다.
연관성의 느슨함은, 새로운 문제와 같은 것이 존재한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 새로운 문제는 실제로 새로울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4 단계 도식으로 인하여 참신한 것의 창발이 이해 가능하게 된다. ‘창발하는 진화’라는 용어는 비판적인 사상가들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허세 용어들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었는데 완벽하게 냉철하고 구체적이 되었다고 언급될 것이며 우리의 이론 때문이고 우리의 4 단계 도식 때문이다. 이유인즉 단순한 용어 대신에 이제 우리에게는 창발하는 진화에 대한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 생명체들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보다 복잡한 생명체들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복잡성의 증가는, 우리의 창발 이론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는 증가된 다양성의 결과로서 이해될 것이다.
증가된 복잡성과 같은 것은 적응성이나 부적응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전적으로 분명하다. 이유인즉 정말 큰 운석의 충돌과 같은 실제로 재앙적인 환경 변화가, 지역의 복잡한 생명체들 모두를 파괴하기 마련인 반면, 그 재앙적인 환경 변화로 인하여 많은 단순한 생명체들이 생존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나는 이 강좌에서 더 많은 것을 실행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늦어지고 있어서, 우리는 아마도 인간 언어의 진화와 진리 관념들 및 유효성을 다음 시간으로 넘겨야 한다. 그러나 다시 요약하여, 우리의 이론은 ㅡ 우리의 4 단계 도식에 근거한 ㅡ 문제해결을 통한 창발하는 진화에 대한 이론이다. 진화론적 참신성의 창발은, 새로운 문제들의 출현에 의하여 설명된다. 그 이론은 모든 생명체들과 종들(種들: species)을 (그리고 심지어 모든 생물들), 부단히 문제해결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간주한다. 문제들은 다양한 수준들에서 해결된다: 개체는,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식에 의하여 새로운 행동 형태들을 창안한다; 품종(品種: the race)이나 생물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유전적 형태들을 창안함에 의하여 새로운 개체들인데 그 형태들은 새로운 돌연변이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유전적 구조들이다.
변하는 세상에서, 종들(種들: species)의 진화에 폭넓은 유전적 토대가 있어서 다양성이 부여된 개체들의 넓은 범위와 행동의 넓은 범위가 허용된다면 종들(種들: species)에게 유리할 것이다.
이 확대는, 단순한 생존보다 더 구체적인 새로운 선호사항들과 새로운 목표들의 창안에 의하여 때때로 성취될 것이다. (나의 스펜서 강좌[Spencer Lecture]를 참조하라.) 그러나 그런 새로운 목표들로 인하여, 특화를 통한 세습적 행동 가능성들이 또한 위축될 것이다.
다윈론과 몇 가지 다른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문제는 아주 구체적이고, 생존 문제에 느슨하게만 연결될 것이다. (2) 오류제거의 방식은 개체들 사이의 생존경쟁일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구체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행동의 예방이기도 하다. (3) 새로운 형태들의 창발 이론이 주어진다: 새로운 형태들은 출현하는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들로 설명된다. (4) 진화에서 행동에 의하여 그리고 행동적 발견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주요 역할이 체계적으로 강조된다. (5) 새로운 행동 목표들, 선호사항들 그리고 재능들의 전개에 의하여 진화에서 수행되는 역할이 강조된다. (6) 진화에서 행동 형태들의 영역을 넓히고 좁힘에 의하여 그리고 행동의 유전적 토대를 넓히고 좁힘에 의하여 수행된 역할이 또한 강조된다.

토론

질문자 1: 귀하의 P → TT → EE → P 도식을 내가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칼 경(Sir Karl), 문제가 TT와 EE 모두로부터 출현할 것이라고 귀하는 주장한다. 이제 나는 TT로부터 어떻게 문제들이 출현하는지 알겠고 이 잠정적 이론 자체가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시험하기와 오류제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험하기와 오류제거가 끝난 후에 ㅡ 오류제거로 인하여 새로운 문제가 또한 생긴다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을 귀하는 다루지 않았다.

포퍼: 문제들은 TT와 EE 모두인 두 가지 장소 모두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오류제거가 또한 새로운 문제 자체로 이어진다는 것을 귀하는 알겠지요. 이 TT에서 어떤 오류가 제거된다면, P과 TT는 사라지고 옛 문제가 아닌 새로운 문제가 출현한다. 다시 말해서, 이 TT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거나 생명체가 아는 유리한 점이 적어도 우리에게 있다. 원래 문제로 인하여 이것은 해결책으로서 허용된다. 오류제거에 의하여 저것은 제거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문제가 출현한다, 즉: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다. 오류제거가 부정된다면 이것은 새로운 문제이다....

질문자 1: 칼 경(Sir Karl), 나와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에 관하여 확신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귀하가 EE보다 TT를 다소 더 완전하게 예시했기 때문이다. 그게 옳지 않은가? 귀하는 TT의 사례들을 제시한 만큼 완전하게 EE의 사례들을 제시하지 않았다.

포퍼: 아, 그래요, 오류제거의 전형적인 사례는 예를 들어 TT가 특정 먹이에 대하여 고착된 선호라면 ㅡ 그러나 그 선호가 고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ㅡ 그것이 특정 먹이에 대한 선호이고 먹이가 고갈된다면 먹이 고갈은 이 TT가 오류였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제거될 것이고 새로운 문제가 출현하며 그리고 이것은 더 이상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상당히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질문자 2: 그것을 인간의 문화에 대한 은유로서 사용하는 것은 ㅡ 새로운 형태들이 P에서 틀림없이 반드시 출현한다고 귀하가 말했을 때 ㅡ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인간사회나 인간의 문화에서 새로운 형태들이 반드시 틀림없이 발생한다고 귀하는 말하고 있는가? 내가 저 은유를 사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포퍼: 나는 반드시라고 말하지 않을 터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괜찮다. 새로운 형태들은 정말로 출현하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는 오히려 생각되어야 하기를....

질문자 2: 내가 묻는 한 가지 이유는, 칼 경(Sir Karl), 에리히 칼러(Erich Kahler)의 형태의 와해(Disintegration of Form)에 대한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검토서를 귀하는 보았는가? 그는, 새로운 형태들에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판단을 우리가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하여 ㅡ 다소 칼러와 의견을 달리하여 ㅡ 내가 희망하는 바, 귀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했고 내가 보기에 이것에서 귀하는 어떤 종류의 정성적 판단도 암시하지 않고 있다.

포퍼: 나는 정말 귀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질문을 설명해서 모든 사람이 이해하도록 귀하는 할 수 있을 터인가?

질문자 2: 나는 칼러의 저서 형태의 와해를 언급해야겠는데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ㅡ 주로 현대 예술 ㅡ 가치들의 와해에 대한 반영이라고 그는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곰브리치는 그 저서에 대한 자신의 검토서에서, 귀하를 이용하여 저것에 동의하며 어떻게 정확하게 동의하는지 나는 잊었다. 그러나 이 은유를 바라보면서 P 범주에서 창발하는 새로운 형태들에 정성적 변화가 있다는 암시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질문하고 있는 것은, 저것이 발생하는 순간이 있는가?

포퍼: 정성적 변화는 매우 자주 존재한다. 요점을 실제로 이렇다: P과 P는 매우 흔히 아주 느슨하게 관련되고, P과 P사이의 이 느슨함으로 인하여 어느 지점까지 P의 참신성과 그리하여 그것의 창발이 설명된다. 그리고 그것의 창발이 의미하는 바는, 이 과정에서 완전히 그리고 정성적으로 다른 것이 출현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에 대한 최고의 사례는, 과학의 진화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 이론에서 각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이후에 문제들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기억하라: 지구가 중심인가, 태양이 중심인가? 우리는 이것을 매우 멀리 지나갔다. 우리의 문제들은 매우 시급하지만 더 이상 이 특정 문제와 조금도 닮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들은 물론 이 문제로부터 출현했다. 오늘날 누가 우주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는가? 지구와 태양 기타 등등에 관하여 말할 것도 없다 ㅡ 문제 전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문제 대신, 아마도 지구상에 있는 우리의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의 은하계의 회전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들이 현재 우리에게 있다. 저것은, 오래된 문제와 유사하면서 완전히 다른 가장 가까운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은하계가 중심인지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은하계가 회전하는지 그리고 물론 다른 은하계들과 상대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은하계가 회전하는지의 문제 ㅡ 이 문제는 현존하는 문제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문제이다. 그러나 어떻게 완벽하게 그리고 모든 면에서 그것이 다른가. 중심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고 그 대신에, 그것이 중심인지 아닌지와 관계가 없는 회전 같은 문제. 그러므로 그것은 완전히 실제적인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변화이다. 이것은, 바로 현재 내가 이 특정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서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매우 좋은 답변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최고의 사례들은 항상 과학의 진보에서 유래하는데 왜냐하면 그 사례들이 최고로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질문자 3: 칼 경(Sir Karl), 다윈에 대한 귀하의 비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스펜서에 대한 귀하의 비판에 나는 동의하는데 스펜서는 다윈을 오해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다윈에 대한 귀하의 비판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먼저, 내가 보기에, 사람의 경우에서는 제외하고 다윈은 진화론적 상승을 설명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더 자주 자신의 저술 과정에 있고 매우 더 흔히, 다양한 생태적 환경에서 왜 우리는 다양한 형태들을 발견하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 있다 ㅡ 이것은, 진화론적 상승을 기술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포퍼: 다윈의 문제에 대한 귀하의 일반적인 기술에 나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ㅡ 이 문제들을 다윈이 지니고 있었다고 귀하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궁극적으로 설명하기를 원했던 것은 이것이다. 그것은 매우 분명하다. 다윈이 남긴 문제가 생명의 근원이라고 아주 자주 언급되었다. 귀하가 저것을 그에게 부여하자마자, 그가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진화론적....

질문자 3: 나는 그의 조부가 저 문제에 관심을 지녔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귀하가 알다시피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은 모든 것인 살아있는 단일 요소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이 저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내가 받는 인상이 아니다. 저것을 토대로 귀하가 그를 공격하고 싶어 한 이유를 나는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것은 실제로 하등 형태들이 아직 존재하는지의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생태학의 일반적인 구조에 자체의 위치가 주어진 자체가 생명체의 낮은 형태인 이유로만 혹은 자체가 보통 조우할 터인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이유로 생존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포퍼: 그렇다. 그러나 귀하가 알다시피 저것이 그러하다면 ㅡ 그러나 요점은 실제로 ㅡ 부언하여 내가 다윈에 관하여 말할 때 통상적으로 지금 ‘다윈론’으로 지칭되는 것을 나는 부분적으로 의미한다 ㅡ 즉, 헉슬리(Huxley)가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으로 불렀던 것과 지금은 유행 타는 생물학자들이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으로 부르는 것. 그것은 헉슬리의 이 저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저서를 귀하는 아마 알 것이다. 내가 다윈을 말할 때 몇 년 전까지 ‘신(新)-다윈론’으로 지칭되었다가 지금은 ‘새로운 종합’으로 지칭되는 것을 내가 의미한다고 나는 실제로 틀림없이 말했다.

질문자 3: 저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좋다.

포퍼: 생태학적 터전에 대하여. 귀하가 알다시피 몇 가지 하등 생명체들에 관하여 매우 기괴한 것은 그것들의 생태학적 터전이 거의 무한하다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선들이 도달했을 때 행성들과 달 및 별들의 감염에 관하여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이 들은 토론으로부터 귀하는 저것을 알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감염과 관련하여 충분히 조심하지 않을까 봐 우리는 염려한다. 이제 이것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몇 가지 하등 생명체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적응가능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가장 혹독하고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 수 있다. 우리가 우주선을 우리 주위에 둔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등 생명체들에게는 실제로 생태학적 터전이 없어서 그것들이 어디에서나 그리고 모든 곳에서 살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또한 매우 흥미롭다....

질문자 3: 그것은 단순한 실수일 뿐일지도 모른다.

포퍼: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 그것들이 냉동되어서 완전히 건조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살아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했다. 가장 극단적인 환경에서 그것들은 거의 무한하게 살 수 있다. 그것들이 우주선에 실려서 이런 형태로 고착될지라도 그것들은 우주 비행에서 완벽하게 잘 생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수가 아닐 터이다. 저것은 실수가 아니다. 저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저것이, 이 특정 문제가 최근 토론된 이유이다.

질문자 3: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실수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동일한 생명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도로 살균된 상황에서 과학적 목표들 위하여 제거되었지만 생존할 수 있는 다양한 변종들을 생산한 특정 유형들의 세균들에 관하여 특별히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저것은 동일한 유기체가 아니고 그것은 귀하가 말하는 P-P것과 아주 많이 동일하다.

포퍼: 옛 유기체를 생산할 것은 유기체이고 저 정도까지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에는, 자체가 또한 옛 유기체라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귀하가 박테리아를 고려한다면, 그 박테리아는 보통 사멸하는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박테리아는 자손을 생산하고 그다음에 죽는 것이 아니라 자체 분열에 의하여 자손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하가 현대의 박테리아를 생각한다면 그 박테리아의 조상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박테리아가 유래한 원래 박테리아와 그 박테리아는 여전히 동일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귀하가 말하는 것에 정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터이다: 그것이 새로운 생명체는 아니지만 다소 변화된 형태로 매우 오래된 생명체이다. 극도로 오래된 생명체 ㅡ 생명체들만큼 오래된 것을 나는 의미한다. 개성이라는 문제는 박테리아와 관련하여 다르다. 그리고 이것에는 모든 종류의 국면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에서 주요 요점은 다음과 같다. 몇몇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시도했다: ‘사람을 보라!’ 그들에게는 객관적인 기준들이 ㅡ 윤리적 기준들이 아니라 생물학적 기준들 ㅡ 있는데 왜 사람이 생명체 중에서 최고의 생명인지의 생물학적 기준들. 분명히 사람은, 바로 최하위 생명체들을 제외하고 다른 생명체들이 적응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그래서 귀하가 모든 종류의 것들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은 복잡성의 기준이 아니다. 나는 생물학적 기준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다음번에 나는 세계 3의 도움을 받아서 다른 기준들을 제시하겠다. 특정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들보다 더 상위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기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들이 더 복잡하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지만, 더 큰 복잡성은 귀하가 원하는 것과 ㅡ 부적응, 기타 등등과 ㅡ 연관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생명체가 매우 복잡해질 때 거의 모든 유전자 돌연변이는 ㅡ 저것은 거의 모든 돌연변이를 의미한다 ㅡ 치명적이라 것을 나는 의미한다. 생명체의 복잡성 때문에, 돌연변이에 의하여 야기된 여하한 종류의 불균형이 치명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돌연변이들의 큰 다수가 치명적이다. 생명체의 변화에 관하여 귀하가 기술한 것으로 인하여 하등 생명체들이 지닌 더 큰 변화 가능성이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그 생명체들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물학적 관점에서 복잡성은 매우 큰 불이익이면서 반드시 이익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복잡성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에 달렸다. 물론 나는 복잡성이 나쁘다거나 그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잡성은 본질적으로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의미한다. 그래서 귀하가 기억하다시피, 나의 강좌에서 내가 진화 계보(evolutionary tree)를 취하여 수직 대신에 수평으로 표현한 작은 도식을 내가 제시하여 이처럼 표현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는 유일한 것은 증가한 다양성인데 그 다양성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새로운 복잡성을 의미한다. 귀하는 단순한 것들로써 시작하고 단순한 것들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들에 추가하여 귀하는 또한 복잡한 것들 얻는다. 그래서는 우리는 점점 더 높은 것이 아니라 증가된 다양성을 얻는다. 고등 형태의 진화를 말하는 것은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을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반면, 이것은 객관적 서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은 정당화될 것이라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물학적 관념이 아니다.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anthropomorphic)이 되어 사람을 어떤 정도로 최고의 동물로서 보는 것은 정당화될 것임을 나는 의미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생물학적 관념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 관념은 ㅡ 매우 오래되지 않았고 그것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ㅡ 생명체가 운석들을 통한 감염에 의하여 지구상으로 아마도 옮겨졌을 것이라는 관념은 매우 많이 살아있었다. 이 관념은 가령 약 100년 전에 ㅡ 혹은 조금 적게는 70년 전에 ㅡ 매우 많이 살아있었다. 그 관념은 지금 매우 많이 살아있지 않지만, 여전히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관점으로부터 또한 운석들이 조사된다. 운석들이 어떤 병균을 지구상으로 정말 가져오는지 아닌지에 관하여 의견들이 갈라진다. 그리하여 이로 인하여, 하등 형태들의 생명체에게 현재 인간의 손길을 벗어나는 범위인 가능한 아주 엄청난 범위를 우리가 정말 부여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마도 어느 날 우리는 저 면모에서 그들과 경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조금이라고 경쟁을 한다면 그들은 더 단순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그들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가령 특별한 재능들 및 그런 것들과 매우 많은 금전의 공급에 그렇게 의존하지 않는다.

질문자 4: 나는 의아한데, 다윈의 논지나 가설이나 혹은 귀하가 말하고 싶은 무엇에 동일한 비판을 ㅡ 그것이 너무 많이 설명하기 때문에 그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ㅡ 귀하는 겨냥할 터인가? 장이론(場理論: field theory)이나 일반 및 특수 상대성 혹은 그렇게 특화된 다른 이론에 귀하는 동일한 비판을 적용할 터인가?

포퍼: 오 아니다!

질문자 4: 한 가지 경우에 귀하가 그렇게 하지 않을 터인 이유와 다른 한 가지 경우에 귀하가 그렇게 할 터인 이유를 귀하는 어떻게 구분할 터인가?

포퍼: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의하여 이룩된 예측들이 매우 정확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귀하는 진화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떤 예측도 수행할 수 없다. 이제 나의 이론의 한 가지 유리한 점은, 그 안에 적어도 어떤 예측이 ㅡ 즉, 세습적으로 고착된 특화가 순간적으로 귀하가 원하는 만큼 성공적일 반면 환경이 변하면 그 특화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예측 ㅡ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세습적 특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이론이 또한 있다. 게다가 나의 형태 이론에는 몇 가지 다른 예측들이 있지만 나는 실제로 그것 모두로 지금 돌아갈 수 없다. 나의 형태 이론에서 주요한 것은, 돌연변이들이 이미 확립된 행동 형태들에 속한다는 조건으로만 그 돌연변이들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돌연변이에 선행하는 것은 행동 변화이고 돌연변이는 나중에 온다. 그리고 이것은 시험될 수 있고 지금까지 원칙적인 예측이다. 나는 귀하에게 한 가지 사례를 제공하겠다 ㅡ 우리는 실제로 이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ㅡ 매우 좋은 사례는 딱따구리의 부리와 혀이다. 미각의 변화인지 몸 구조의 변화인지 무엇이 먼저 왔는지 자문해보라 그러면 몸 구조의 변화가 미각의 구조 변화에 선행했다면 새로운 장치로 무엇을 할지 딱따구리는 알지 못했을 터임을 귀하는 즉각 알 것이다. 그 새로운 장치는 치명적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새로운 종류의 먹이에 대한 미각 변화가 먼저 온다면 그리고 딱따구리가 변화 때문에 부리를 가지기 오래 전에 나무를 쫀다면 딱따구리가 나무를 더 쉽게 ㅡ 더 효율적으로 ㅡ 쪼는 것을 돕는 돌연변이들인 이 돌연변이들은 즉각 선택될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일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며, 이것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진화에서 이끄는 것은 행동이다. 그리고 행동에서 이끄는 것은 새로운 목표들이고 그 다음은 새로운 재능들이고 세 번째 사례에만 몸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다. 몸의 구조적 변화는 나중에만 오지만 처음에 오는 것은 행동이고 이로 인하여 진화론적 경향들이 또한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그리하여 시험 가능한 이 이론에는 아주 많은 것이 있다. 나의 이론이 참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나의 이론은 시험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질문자 5: 저것은 라마르크(Lamarck)가 말한 것과 어떻게 다른가?

포퍼: 내가 어느 강좌의 어느 곳에서 서술했는데 몇 년 전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강좌에서 문제는, 거의 모든 이론의 배열로써 새로운 이론은 옛 이론을 모의 실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새로운 이론은 옛 이론을 모의 실험해서 그래서 어떤 면에서 다윈의 이론은 라마르크의 효과들을 모의 실험한다. 이미 다윈의 이론은 ㅡ 개략적으로 말해서, 이런 방식으로 다윈에 의하여 라마르크가 설명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매우 큰데 왜냐하면 나의 이론과 다윈의 이론에 따라서 행동 특징들이 세습되지 않는 한, 라마르크의 이론은 틀렸기 때문이다. 그 특징들은 선택 형태를 자극할 뿐인데 세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선택 형태이다. 다시 말해서, 행동이 실천하는 것은 새로운 생태학적 터전을 창조하는 것이다!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생태학적 터전을 창조하고 그다음에 선택 압력이 작용하여 이 터전이 채워진다. 다시 그것은 라마르크의 이론이 아니라 라마르크에 대한 모의실험일 따름이다, 전체의 것에서 저것은 정말 결정적인 요점이다. 귀하는 라마르크의 이론을 모의 실험해야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귀하가 하는가의 문제이다.
나의 이론의 한 가지 요점은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ㅡ 그것은 물론 과도한 단순화이고 그것은 일반적으로만 말한다 ㅡ 일반적으로 새로운 목표들이 먼저 오고, 새로운 재능들이 두 번째로 오고, 새로운 전통들이 세 번째로 온다: 그 다음에 귀하는, 선택 압력에 의하여 채워지는 생물학적 터전을 창조했다. 그리고 저것은 매우 위험하다.

질문자 6: 귀하가 이 새로운 목표들을 ㅡ 이 새로운 행동 형태들 ㅡ 말할 때 그 목표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엇이 그 목표들에 동기를 부여하는가?

포퍼: 도식으로부터: P → TT → EE → P.

질문자 6: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들은 ㅡ 가령 딱따구리의 새로운 목표 ㅡ 의식적인가?

포퍼: 의식적? 의식에 관하는 나는 다음 두 번째 강좌에서 말하겠다. 그러나 그것을 개괄적으로 표현하면: 많고 많은 등급들의 의식이 있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하고 우리는 그것을 우리 내부에서 관찰할 수 있다. 꿈은, 귀하가 깨어있을 때 귀하의 의식과 다른 정도로 의식적이지만 꿈은 틀림없이 의식적이다. 그러나 꿈은 매우 다른 의미에서 의식적이다. 예를 들어 꿈에서 우리에게는 조직된 기억이 없다: 우리에게는 꿈 기억도 없고 실제적 기억도 없으며 기억이 없다 ㅡ 꿈이 기억에 의하여 제공될지라도. 그러나 귀하가 어떤 것을 기억한다는 것을 귀하는 꿈꾸지 않는다 ㅡ 또는 혹시 귀하가 그렇게 하지만 매우 드물다. 극도로 드물다. 꿈속에서 귀하는, 귀하가 깨어있을 때와 다른 시간과 공간 관계에 놓인다 ㅡ 시간 및 공간과 관련하여 완전히 다르고 특히 의식을 내가 토론하게 될 때 내가 지적할 것과 같이 시간에 대한 관계는 고등 형태의 의식에서 지극히 중요하다. 그것은 아마도 의식의 하등 형태들에는 전혀 없다. 그리하여 아마도 의식의 등급들은 거의 무한하게 많다. 그리고 하등 동물들에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하기 매우 어렵다. 제닝스(Jennings)는 하등 동물들의 행동에 관하여 이 책을 썼는데, 예를 들어 어떤 의미에서 아메바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아메바 사이의 추격에 대하여 매우 많은 생생한 예시들을 제공한다 ㅡ 그러나 확실히 정확하게 우리가 의미하는 바로서는 아니다. 매우 어렵다. 동물들의 의식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이 특정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다만 일종의 인상주의적(印象主義的: impressionistic) 접근방식을 취할 수 있다. 그 접근방식이 쓸모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에 답변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도식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정말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도식은 많은 방식으로 귀하에게 참신성을 정말로 설명한다고 나는 진정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귀하에게 한 가지 방식을 제시하겠다: 새롭게 TT가 창조되면 전체 상황이 변한다. 저것과 별도로, 상황 자체가 변하는데 왜냐하면 귀하가 상호작용을 하는 다른 동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환경은 부단히 변한다 ㅡ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지라도 태양-흑점의 주기가 변하기 때문에. 환경은 거기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날씨가 변한다, 모든 종류의 것이 변한다. 그러나 틀림없이 적응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항상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항상 변화들이 일어나고 이 변화들이 진행되는 방식들을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P과 P가 매우 느슨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참신한 것이 창발함을 의미한다. 앞서 나는 이 특정 문제에 ㅡ 즉, 창발하는 진화라는 관념은 항상 과학자들에게 다소 의심스러웠다는 ㅡ 관하여 많이 말했다. 사람들은 항상 ‘창발(emergence)’이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고 느꼈다. 이제 이 도식으로 인하여 실제로 그 개념에 명확한 의미나 명확한 요점이 생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참신한 것이 출현하는 ㅡ 혹은 귀하가 원한다면 창발하는 ㅡ 이유를 설명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그런 도식이 없었을 때의 창발하는 진화보다, 더 단단한 토대 위에 그 진화가 놓인다고 우리는 실제로 말할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지독히 어려웠다. 좋다, 귀하는 항상 돌연변이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귀하가 돌연변이들을 다루는 일을 실제로 바라보면 이것이 매우 실망스러운 것을 귀하는 알게 되는데 왜냐하면 동일한 돌연변이들이 항상 출현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들을 얻기 위하여 이용되는 주요 생명체인 초파리를 사용한 대부분의 실험에는 반복되고 반복되어 출현하는 모든 종류의 매우 잘 알려진 돌연변이들이 나타난다 ㅡ 그리고 이 잘 알려진 돌연변이들에게는 명칭이 있다. 그래서 결국 귀하는 다음과 같은 느낌을 가진다: 돌연변이를 통하여 어떻게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가? 그래서 돌연변이들은 새로운 것을 설명하는 수단으로서 다소 불만족스럽다. ‘오 그래,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돌연변이들이 나타나지’ 그리고 유사한 것을 귀하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환경의 변화가 ㅡ 특히 귀하에게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체계적일 ㅡ 일어나는 이유를 귀하가 지적한다면 귀하가 알다시피 그런 경우 새로운 목표로 인하여 모든 것의 변화가 체계적이 된다. 그것은 상당히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가령 새로운 먹이 선호 때문에 귀하에게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선택 압력은 이제 체계화될 것이고 그리하여 돌연변이들은 정말 유리한 점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좋은 사례는 딱따구리였다. 이 커다란 돌연변이들 모두가 치명적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사람들은 자주 질문했다. 치명적인 효과들을 지니지 않았다고 우리가 상정해야 하는 이 매우 작은 돌연변이들 어떻게 된 일인가 ㅡ 이 작은 돌연변이들이 더 큰 변화들을 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답변은: 체계적인 선택 압력이 있다는 조건으로만. 이제 이 선택 압력은 환경 변화에 기인할 것이거나 새로운 목표들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환경 변화에서도 귀하가 새로운 목표들을 재빨리 전개한다면 그것이 작용할 따름일 것이다. 며칠 전에 내가 대화를 나눈 한 생물학자는 매우 좋은 사례를 나에게 제공했는데 즉: 물고기들은 어떻게 다리들을 얻었는가? 답변: 바다의 특정 지역이 말라버렸을 때 그들은 작은 물웅덩이로부터 또 다른 물웅덩이로 틀림없이 시도하여 이동했고 어떤 물고기들을 여전히 그렇게 한다. 좋다. 환경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물고기들이 목표를 ㅡ 즉, 또 다른 물웅덩이로 옮겨가는 목표 ㅡ 지니고 이것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저 목표에 대응하지 않은 물고기들은 아마도 제거되었다. 목표를 지니고 정말로 대응한 물고기들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리고 저 새로운 목표와 동시에, 지상 운송에서 가장 하찮은 개선이 ㅡ 개선의 모든 요소와 동시에 ㅡ 즉각 커다란 새로운 추가사항일 터이다. 그래서 매우 작은 변화들이 이제 쌓이기 시작할 수 있지만, 커다란 환경 변화에 대한 반응이 행동 변화라는 조건만이고 행동 변화가 새로운 목표와 관련된 유형이라는 조건만이다. 물론 저것이 시행착오와 관련된 우연적인 행동에서 전개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것은 저 방식으로 발생한다.

질문자 7: 칼 경(Sir Karl), 이 공식이 완벽한지 내가 물어도 되는가? 첫 번째 문제 P을 그다음에 P를 생각하기보다 중간쯤으로 가서 P과 P 및 P를 제시하는 것이 낫지 않을 터인가?

포퍼: 나는 첫 번째 강의에서 그와 같은 것을 실제로 서술했다. 나는 귀하에게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칠판에 그것을 썼다.

질문자 8: 그렇다면 이것은 과도한 단순화인가?

포퍼: 물론 그렇다! 나는 그곳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과도한 단순화이지만 참신한 것의 창발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질문자 8: 그러나 귀하는 문제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사이비-문제들에 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이비-문제’라는 개념이 너무 단순하지 않았던지 묻고 싶다? ‘사이비-문제’가 항상 상대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할 때 절대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던지. 그리고 가령 P이 T에서의 문제라면 귀하가 아직 도달하지 않은 P은 저 상대적 의미에서 사이비-문제이기 때문에 귀하의 공식이 매우 암시적이 아닌지 ㅡ 그리고 P가 귀하의 문제일 때 T로부터 P과 P이 또한 사이비-문제들이 아닌지? 이제 그렇다면 시간착오에는 시간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귀하를 지나간 옛 문제이거나 그것은 귀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이다. 혹은 우리가 항상 환경 안에 놓인 생명체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상대성, 한 가지 환경에서 생명체에 관한 사이비-문제가 저 환경에서 어떤 다른 생명체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일 것인가 아니면 다른 환경에서 어떤 유사한 종류의 생명체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일 것인가?

포퍼: 여기에 두 가지 다른 것들이 있다. 나는 귀하의 의견에 넓게 동의하지만, 문제들에 대한 문제를 ㅡ 문제들의, 특히 다양한 의미들의 다양한 종류들에 대한 문제를 나는 의미한다 ㅡ 전개할 시간이 나에게 없었다. 즉, 내가 생물학적 진화에 관하여 말하고 있던 ‘문제’의 의미는 ㅡ 우리 인간들이 저 불쌍한 동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안다. 물론 동물은 자체의 문제가 무엇이었던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문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ㅡ 동물을 사용할 수 없다.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상황이 어떠한가? 상황은 매우 유사한 것으로 판명된다. 과학자는 실제로 문제를 다루어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소급하여 ㅡ 사건 이후에 ㅡ 과학자에게 흥미를 부여했던 문제가 실제로 전혀 다른 문제였음을 우리가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매우 좋은 사례가 있는데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사례이다. 많은 다른 사례들이 있고 나는 귀하에게 또 다른 사례를 나중에 제공하겠다. 슈뢰딩거는,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어떻게 양자역학의 연속성 이론(continuity theory)을 제시할 수 있을 터인가? 연속성 수학을 통한 이론? 저것이 다소 그의 문제였고 저것은 파동역학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그다음 몇 년 후에 ㅡ 2년 후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에 관하여 다양한 논문들을 작성한 이후 ㅡ 막스 보른(Max Born)이 그것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다. 슈뢰딩거가 전하(電荷: electric charge)의 연속적 분포로서 간주했던 것은, 당시 특정 장소에서 전자를 발견하는 확률로서 해석되었다. 연속적으로 분포되었던 것은 더 이상 전하가 아니라, 어떤 곳에서 ㅡ 즉, 전자 ㅡ 전하를 지니는 확률이었고 전자들은 물론 연속적이라기보다는 불연속적이었다. 그리하여 슈뢰딩거의 문제는 어느 곳에서 사라졌고, 그 존재를 자신이 몰랐던 문제를 ㅡ 즉, 주어진 장소에 있는 전자의 확률이라는 문제 ㅡ 슈뢰딩거가 해결했다고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겨우 그 사건 이후에 보른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슈뢰딩거는 이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도한 적이 없었다.
이제 매우 유사한 사례가 케플러이다. 케플러는 세계의 조화라는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그는 그 문제에 대하여 아주 많은 일을 했고, 그가 말한 모든 것들은 극도로 흥미롭다. 그러나 그가 케플러의 법칙들이라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우리는 오늘날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미미했는지 대한 암시만이 그 자신의 문제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케플러의 제 2법칙은, 동경벡터(動徑벡터: radius vector)가 ㅡ 다시 말해서, 태양과 행성 사이의 직선 ㅡ 동등한 시간대에 동등한 지역들 위에 걸친다고 주장한다. 이제 귀하가 타원을 그린다면 ㅡ 여기에 태양이 있고 여기에 행성이 있다 ㅡ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ㅡ 다시 말해서, 다소 불변적인 속도로 움직인다면 ㅡ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가까이 있다는 조건보다 행성이 멀다는 조건으로 동경벡터가 훨씬 더 넓은 지역들 위에 걸칠 터임을 귀하는 알 것이다. 이제 케플러의 법칙이, 동등한 시간대에 그것이 동등한 지역들 위에 걸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태양으로부터 보다 가까울 때보다 멀 때 그것이 틀림없이 서서히 진행한다는 것을 귀하는 발견할 것이다. 이것을 케플러는 알았고 그리하여 그는 이 법칙을 표현했다 ㅡ 그 법칙을 그는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그 법칙이 그에게 충분히 조화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 그가 그 법칙을 언급했을 때, 태양으로부터 행성의 거리가 자체의 속도의 역비례 한다는 형태로 그는 그 법칙을 흔히 혹은 통상적으로 표현했다. 거리가 클수록, 속도는 더 작아진다. 이 특정 정식화가 수학적으로 옳지 않을지라도, 이것이 케플러가 태양을 언급한 방식이다. 유일하게 올바른 정식화는, 동등한 시간대에 동경벡터가 동일한 지역들 위에 걸친다는 것이다. 다른 정식화는 매우 개략적인 근사치이지만 그는 그 정식화를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그 정식화가 자신의 조화라는 관념에 대하여 충분히 단순하지 않았고 비례성(proportionality)이 더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올바른 법칙이 있었지만 그는 그 법칙을 틀린 형태로 매우 자주 표현했고 그 틀린 형태가 조화에 대한 그의 직관에 더 가까웠다 ㅡ 귀하는 아마도 그리스 시대에 조화와 비례성이 매우 밀접했음을 안다 ㅡ 그래서 비례성 법칙이 그가 찾던 세계의 조화에 훨씬 더 적합했다. 이제 이것은, 조화 법칙이 아니라 이 법칙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실제로 의식하지 못했다는 매우 분명한 징표이다. 뉴튼 이전에, 우리는 이 법칙이 매우 조화로운 법칙임을 알 수 없었다 ㅡ 탁월하게 단순한 뉴튼의 그 법칙 추론으로 인해서만 그 법칙이 얼마나 단순하고 조화롭게 도출될 수 있는지가 실제로 밝혀진다. 주어진 특정 중심으로부터 어떤 힘이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모든 순간에 대하여 이 법칙이 성립함을 뉴튼은 밝힌다. 힘이 강하거나 0(zero)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수인지, 약한지, 변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힘이 반발력인지 인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유일한 것은 중심을 향한 방향이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케플러의 제 2법칙이 출현한다. 그래서 그것은 극도로 일반적인 법칙이고 뉴튼에 의하여 매우 아름답게 도출된다. 그러나 케플러는 그 도출을 알지 못했고 그리하여 그는 그 법칙을 좋아하지 않았다 ㅡ 그 자신의 법칙을. 이제 이로 인하여, 문제 상황이 어떠한지 그리고 과학자가 해결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겨우 나중에 어떻게 우리가 실제로 알 것인지가 밝혀진다. 그러나 그 경우에 우리는 또한, 그에게 문제 상황이 무엇이고 이 두 가지 것들 사이에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제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가는, 문제 상황이 실제 객관적으로 무엇이었을 지와 완전히 다르다 ㅡ 그가 연구하고 있던 문제 상황. 저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사이비-문제들에 대한 귀하의 다른 질문은, ‘문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관한 질문이다 ㅡ 즉, 뒤에 깨닫고 본 관점으로부터, 그리고 특정 압력을 받아서 행동하는 사람이나 동물의 관점으로부터. 여기에는 말할 모든 종류의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문제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ㅡ 그가 문제를 아직 발견하지 않았다는 ㅡ 단순한 사실이 그것이 사이비-문제임을 의미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에게 매우 실재적인 문제이고 매우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아직 그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상 어떤 사람이 자신이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를 인지해서 정식화하는 것은 몇 년이 걸릴 것이다. 그는 사실상 그 문제를 전혀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에게는, 자신의 이론에 무엇인가가 틀렸다는 모호한 느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 모호한 느낌들을 여러 해 동안 지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ㅡ 혹은 그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을 허용할 방식으로 그 문제를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문제는 매우 중요할 것이고 그 문제는 전혀 시간착오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문제는, 그가 자신의 이론을 다루고 있는 시간에 그에게 매우 시기적절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다루고 있어야 했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귀하는 이해하겠지.
실제로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들이 있고 그것은 또한 구획설정(demarcation)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사이비-문제’라는 용어를 실증주의적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해야겠다. 예를 들어 카르납(Carnap)은 자신의 철학에서의 사이비-문제들(Pseudo-problems in Philosophy)을 말하지만 ㅡ 그것은 그의 저서 철학에서 사이비 문제(Scheinprobleme in der Philosophie)에 있다 ㅡ 그것은 또한 쉴프(Schilpp)의 저서에도 있다 ㅡ 카르납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사이비-문제들이라고 그리고 형이상학에 대한 서술들은 사이비-서술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상, 구획설정(demarcation)을 추구하는 ㅡ 형이상학을 제거하기 위하여 ㅡ 그의 이유였고 그것은 모두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문장의 의미는 문장을 검증하는 방법이라고 말했고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에서 과학은 언급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그리고 저것 이후에는 답변 불가능한 문제들이 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답변 불가능한 이 문제들은 ‘사이비-질문들’이나 ‘사이비-문제들’로 지칭되었고, 카르납과 다른 실증주의자들이 어떤 문제가 사이비-문제라고 말할 때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답변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ㅡ 그것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 ㅡ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가능한 답변이 검증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것 모두가 너무 단순하고 아마도 너무 절대적이기도 하다는 것에 귀하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 모두를 부인하는데 왜냐하면 우선 문장의 의미가 문장을 검증하는 방법이라고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고 우리가 형이상학을 제거할 수 있다거나 심지어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 내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 심지어 과학에도 해결될 수 없는 많은 ㅡ 틀림없이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한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어서 그것들의 해결책들이 검증될 수 없는 ㅡ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만 이 문제들은 사이비-문제들이 되지 않기에 나는 그것을 부인한다. 우리가 어떤 이론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을 결정할 수 없을지라도 그 이론은 참이거나 허위이고, 우리가 어떤 문제들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그 문제는 실재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만 그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편리하다. 심지어 원칙적으로도 무엇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간주될 터인지 나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커다란 창조성이 요구된다 ㅡ 해결책으로서 간주될 터인 것을 말하는 것뿐인데, 그것은 물론 실제로 해결책을 내놓는 것과 다르다. 귀하는 이해하겠지. 그것은 나의 능력을 벗어날 것이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혹시 심지어 영원히 모든 사람의 능력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결코 말할 수 없을 터일지라도 문제에는 여전히 해결책이 있을 터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경험과학의 문제들을 왜 구분하는가? 형이상학을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하는가? 내가 어떤 문제를 ‘사이비-과학적’이라고 부를 때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문제가 경험과학과 관련된 문제라고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일이 때때로 발생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한다고 제안된 이론이 실제로 관찰에 의하여 시험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이론이 참인지 허위인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가능한 관찰이 실제로 없다 ㅡ 이론을 제안하는 과학자가 사실상, 가능한 관찰이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예를 들어 프로이트(Freud)는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이 ㅡ 그가 과잉흥분(hysteria) 문제를 해결하려고 원래 제안한 ㅡ 경험과학의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관찰에 대비하여 그의 이론을 시험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을 통하여 어떤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고 ㅡ 이것들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프로이트 이론의 힘이라고 ㅡ 그것이 가능한 모든 관찰과 양립될 수 있다고 ㅡ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커다란 약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것을 시험하고 그리하여 그것의 오류들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내가 ‘사이비-과학적’으로 부르는 문제들이다 ㅡ 그리고 이론들. 사이비-과학적 이론이 경험적으로 언급되지만 그 이론이 관찰에 의하여 시험될 수 없다는 것을 ㅡ 그 이론이 참인지 허위인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데 관찰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 ㅡ 나는 의미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론이 참도 아니고 허위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고 ㅡ 이유인즉 프로이트의 이론이 시험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이론이 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ㅡ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다르다.
물론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관찰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는 문제들과 관찰에 의하여 시험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이 구분을 나는 제안하지 않았다 ㅡ 그리고 사이비-과학적 이론들이 무의미하다거나 그 이론들이 참도 아니고 허위도 아니라고 나는 틀림없이 제안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실제적인 문제를 ㅡ 즉, 관찰에 의하여 어떤 이론을 시험할지 못할지의 문제 ㅡ 나는 다루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다른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론이 관찰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미리 말할 수 있다면 많은 시간, 에너지 그리고 물론 돈을 그로 인하여 그는 절약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말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가능한 모든 관찰과 양립될 수 있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하여, 관찰사항들을 찾는 데 여러 해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아마도 이론을 반증할 관찰사항들로써 이론을 시험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이론을 반증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례는 헤겔이다.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은, 헤겔이 자신의 논문에서 행성 궤도들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헤겔은, 이것이 순수이성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분명히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케플러의 법칙들에 대한 선험적 증명을 제시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헤겔은 행성들의 숫자에 관하여 플라톤과 의견을 같이했고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단지 7개의 행성들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특히 화성과 목성 사이에 행성이 놓일 리 없다고 말한 ‘증명’을 실제로 세웠다. 이것은 18세기말에 매우 실재적인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매우 넓은 ㅡ 기대된 것보다 훨씬 더 넓은 ㅡ 격차가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천문학자 보데(Bode)가 이 격차를 주목했고, 그 사이 어느 곳에 놓여있는 행성이 아마도 있을 것이라고 많은 천문학자들이 추측했다. 당시 많은 천문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고 그들은 사실상 심지어 특별 조직을 구성했는데 화성과 목성 사이의 행성들을 찾기 위하여 그들은 그 조직을 ‘천체 경찰(Celestial Police)’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것은 사이비-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헤겔은 플라톤을 찬양해서, 관찰에 대비하여 자신의 ‘증명’을 시험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추측을 분명히 반증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행성을 있을 리 없다고 헤겔은 예언했다. 그리고 이것은 불행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예언을 공표할 때쯤 화성과 목성 사이에 관찰된 소혹성이 ㅡ 물론 작은 행성인 ㅡ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혹성은 ㅡ 지금 케레스 소행성(Ceres)으로 불린다 ㅡ 일찍이 헤겔이 자신의 논문을 완성한 동일한 해에 발견되었지만 헤겔은 그 소혹성에 관하여 알지 못했다. 훨씬 더 많은 소혹성들이 나중에 발견되었다 ㅡ 그리고 해왕성과 명왕성처럼 더 큰 행성들은 물론 훨씬 더 늦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헤겔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을지라도, 자신의 저서 철학총설(Encyclopedia)에서 행성들에 대하여 선험적인 설명을 제시하려고 여전히 시도했다.
아무튼 이것은, 내가 주지시키고 싶은 유형의 것이다. 헤겔은 물론, 자신의 이론이 경험적 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그는 그 이론을 관찰로써 시험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저것은 그가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사고방식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