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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심신문제, 상호작용을 옹호하여 5장 상호작용과 인식

이윤진이카루스 2021. 11. 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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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상호작용과 인식

 

 

 

여러분:

 

나의 강좌들의 주제가 심신문제임을, 그리고 세계 3과 창발하는 진화 및 언어의 진화 이론이 심신문제의 잠정적 해결책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주요 수단으로서 작용할 수 있음을 여러분이 망각하지 않았기를 나는 희망한다. 오늘의 강좌에서 나의 의도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개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내가 여러분에게 제안하려는 잠정적 이론이 잠정적일뿐만 아니라 가령 물리학 분야에서의 이론과 비교되어 그다지 큰 이론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미리 알리겠다. 그러나 그것은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이고 그것은 나의 기대들을 넘어선 정도로 몇 가지 시험들을 통과했다.

철학사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아는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된 모든 것이 얼마나 매우 불만족스러운지는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제공할 것이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특정 초기 시도들과 비교해서일 뿐이다.

우리 자신의 정신을 포함하여 우리 정신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극도로 모호하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우리의 물리적 행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훨씬 더 명백하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그 지식이 훨씬 더 밀접하게 연구되었던 이유이다.

행동주의(behaviourism)’이라는 용어는, 대부분의 그런 용어들처럼, 모호하다. 그것은, 행동에 집중하여 인식 상태들에 관하여 괘념하지 않는 결정을 의미하거나 혹은 그것은, 더 근본적으로, 인식 상태들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 이론은 물리주의(physicalism)’더 오래된 용어는 유물론(materialism)’이다 또한 지칭되고 그것은 매우 편리한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채택하면 매우 많은 난제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의 유일한 결점은, 그것이 허위라는 것이다. 인식의 상태들은, 모호하고 기술하기가 어렵고 심지어 그것들의 존재로 인하여 난제들이 발생할지라도,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체의 일반적인 구조 및 위상에서 물리주의나 유물론이나 근본적 행동주의와 유사한 몇 가지 포괄적인 철학적 이론들이 다시 말해서, 반증될 수 없을지라도 허위인 이론들 있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더 멀리 나아가기 이전에 여기서 이 상황을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반증될 수 없는 이론은 틀림없이 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반증될 수 없는 이론들 중에서 한 가지는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다. 유아론은, 나 그리고 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세상의 나머지는 여러분 모두와 나의 육체 또한 포함하여 나의 꿈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나의 꿈일 뿐이다. 이 이론은 여러분에 의하여 반증될 수 없다. 여러분은 나에게 여러분의 존재를 확신시킬 것이다.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고함을 지르고 아마도 나를 때릴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물론 유아론은 결코 반증될 수 없다. 이유인즉 명백하게, 여러분이 고함을 지르고 있고 나를 때리고 있음을 내가 꿈꾸고 있다고 내가 항상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유아론적 신념을 반증할 수 있을 터인 여하한 것도 발생한 수 없다는 것은 내가 그런 신념을 지니고 있다면 분명하다. 물론 나는 이와 같은 견해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 중 누가 유아론자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내가 그 사람을 반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 나는 유아론자가 아닌가? 유아론이 반증 불가능할지라도, 그 이론은 허위 이론이고 나의 견해로 그 이론은 터무니없는 이론이다. 우리는 그 이론을 반증할 수 없지만 우리는, 매우 비결정적일지라도, 그 이론에 반대하여 매우 훌륭한 논증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 가지 그러한 논증은,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 한 저서에서 말하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쉴프[Schilpp]의 생존 철학자들의 장서[Library of Living Philosophers]에서 러셀 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러셀은, 자신을 확신하는 유아론자라고 그리고 자신이 유아론에 관여 결정적인 증거를 담은 저서를 저술했다고 러셀에게 말하는 어느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보고한다. 그녀는, 자신이 자신의 원고를 보낸 모든 출판업자들이 그 원고를 거부했다고 분노하여 불평하고 그래서 자신이 러셀에게 자신을 위하여 개입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 이야기에 대한 농담은 물론, 출판업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아론자는 출판업자들에 관하여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유아론자는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에게 개입할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물론 유아론이 반증되지 않는다. 이유인즉 문제의 그 여성이 그것은 모두 그녀의 꿈의 한 부분이었다고 답변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저서가 출판되는 것을 보는 것은 혹은 더 정확하게, 그녀의 저서가 출판되는 것을 꿈꾸는 것 그녀의 꿈 소망이었다고 그리고 그녀의 저서가 출판된 것은 그녀가 꿈꾼 적이 없는 그녀의 고민 꿈이었다고.

유아론에 반대하여 유사하게 비결정적인 논증은 그러나 나에게는 충분히 훌륭한 논증 이것일 터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거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듣거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볼 때, 저 작품들이 내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어떤 작품을 아주 매우 멀리 초월한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인식한다. 그러나 유아론에 따르면 오직 내가 존재한다 그래서 이 작품들을 꿈꾸면서 나는 사실상 이 작품들의 창조자이다. 이것은 나에게 전혀 수용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정신들이 틀림없이 존재하여 유아론은 분명히 허위라고 나는 결론을 내린다. 분명히 이 논증은 비결정적이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논증은 나에게 충분히 훌륭하다. 사실상 유아론을 진지하게 신뢰하기 위하여 우리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되어야 할 터이다. 이런 종류의 비결정적 논증은 인식공격성(ad hominem) 논증으로 불린다. 저것은 결정적인 논증이 아니지만, 말하자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의 매력발휘이다.

내용에서 유아론과 매우 다르지만, 자체의 논리적 구조에서 매우 유사한 이론이, 비엔나의 철학자 요세프 포퍼-린코이스(Josef Popper-Lynkeus)가 쓴 짧은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들에 의하여 작은 소크라테스로 별명이 붙은 어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에서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자기와 논쟁하자고 도발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반증하라고 요청하는 논지는, 작은 소크라테스인 자기가 불멸한다는 것이다. ‘나를 반증하려고 해봐라고 그는 말한다. ‘당신은 나를 살해함에 의하여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아마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나를 반증할 수 있다는 당신의 가설을 내가 잠정적으로 수용할지라도 당신 자신의 반증을 근거로 당신의 반증이 나를 반증하기에는 너무 늦게 올 것이다.’

이 논증은 비엔나에서 알려졌는데 그곳에서 포퍼-린코이스의 작품이 널리 읽혔다. 비트겐슈타인은 작은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논증의 반증불가능성에 매우 감명을 받아서 자신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에서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뿐만 아니라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그것을 수용했다. 비트겐슈타인과 반대로, 우리 모두가 현재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영원히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나는 반증불가능성에 의하여 큰 감명을 받지 않는다.

유아론의 또 다른 해석본은 버클리 주교(Bishop Berkeley)의 철학이다. 버클리는 유아론자가 되기에는 너무 겸손한 사람이고 너무 훌륭한 영국인이다: 다른 정신들에게, 존재하기에 자기 자신의 정신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그러나 오직 정신들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신체와 물질적 세계의 존재는, 하느님의 개입에 기인하여 통일된 모든 정신들이 꿈꾸는 일종의 꿈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신 속에서를 제외하고 즉, 세상을 감지하는 우리의 경험에서를 제외하고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여전히 달리 말해서, 유아론에서 물리적 세계가 나의 꿈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물리적 세계는 우리의 꿈이다. 그러나 버클리의 이론이 과대망상적은 아닐지라도, 버클리 주교는 또 다른 인식공격적(ad hominem) 논증에 의하여 틀림없이 흔들렸다: 그의 이론은 기독교와 양립될 수 없다. 이유인즉 기독교는, 우리는 순수한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구체화된 정신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육체 고통의 실재를 가르친다.

이 모든 이론들은 반증될 수 없고 이 사실은 몇몇 철학자들에게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 큰 감명을 주었던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들도 마찬가지로 반증될 수 없을 따름이다 틀림없이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실. 내가 흔히 표현한 바와 같이, 반증불가능성이 이론에서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반증불가능성은 장점이 아니라 악덕이다. 이것이 그 문제를 표현하는 아주 좋은 방식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세부사항에 다소 집착하는 나의 이전 제자가 나의 언명을 비판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내가 그것에 의하여 의미하는 바를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어떤 이론이 반증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인상을 남기지만 이론에 대하여 틀림없이 우리가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의미한다.

유아론과 버클리의 이론 관념론(idealism)’으로 지칭되는 모두가 심신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두 가지 이론 모두가 몸체들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유물론이나 물리주의나 근본적 행동주의 또한 심신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반대가 되는 책략에 의하여 그렇게 한다. 정신은 없다고, 정신적 상태들이나 인식의 상태들이 없다고 그 이론들은 말한다. 그래서 그 이론들은, 지능이 없다고, 지능인 양 행동하는 예를 들어 다소 지능적인 언어적 발화 혹은 더 정확하게, 언어적 소음에 의하여 몸체들만 있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다시, 반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시, 그 이론에 반대하는 인신공격적(ad hominem) 논증이 있다. 그 논증은 이렇다. 우리는 물리주의자에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이론을 누구에게 집중하는가? 나의 신체에게? 혹은 다소 지능적인 나의 행동에게? 나로부터 언어적 발화를 꺼내는 것이 귀하의 목표인가? 나를 확신시키는 것이 도저히 귀하의 목표일 수 없다. 나의 신체가 다소 지능적인 언어적 소음을 내도록 만드는 것이 기껏해야 당신의 목적일 수 있다: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언어적 소음에 관한 이 모든 소란은 왜인가? 혹은 진리 및 허위 같은 것이 있는가? 그러나 진리 및 허위에 관한 모든 말이 단지 언어적 행동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왜 언어적 행동에게 끝없는 이 모든 논증을 할 수고의 가치가 있어야 하는가?’

이 언급들로 인하여 물리주의가 반증될 수 있다고 나는 제안하지 않는다. 구식인 우리 비-물리주의자들이 아마도 물리주의에 대한 인신공격적 비판으로서 묘사할 나의 저 언어적 행동을 이용하여, 더 멀리 계속할 물리주의자들의 언어적 소음에 내가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물리주의에 대하여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말했기 때문에. 컴퓨터들에 관하여 내가 한 마디 말하는 것이 그만큼 좋을 것이다: 우리의 두뇌 혹은 아마도 우리의 정신이 컴퓨터이거나 역순도 성립할 것이라는 주장에 관하여; 그리고 컴퓨터에게는 우리 자신의 두뇌와 마찬가지거나 우리의 두뇌보다 훨씬 나은 두뇌가 있다는, 정색하고 언급되는 비평에 관하여.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의 연필은 나보다 영리하다.’ 그가 의미한 바는 물론, 자신의 연필을 사용하여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결과들을 자신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적으로 옳다: 이것이, 우리가 연필을 만들어 사용하는 바로 그 이유이다. 우리가 연필을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사용하여 더 멀리 나아갈 수 없을 터라면 우리는 연필을 사용하지 않을 터이다.

컴퓨터에게도 물론 동일하게 성립한다. 컴퓨터는 명예롭게 된 연필에 지나지 않는다: 더 크고 낫고 더 강력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믿을 수 없이 비싼 연필. 이 믿을 수 없이 비싼 초강력 연필이 평범한 연필보다 영리하지 않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 초강력 연필을 만들지 않을 터이다.

물리주의는 요컨대 분명한 것을 , 정신적 상태들의 존재나 인식의 존재 부인한다. 정신적 상태들의 분명한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이론들 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이 수용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먼저 데카르트의 이론이 있다. ‘본질(substance)’에 대하여 말하기를 회피하는 다소 현대화된 형태로서, 데카르트의 이론은 정신적 상태와 신체적 상태가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그리하여 상호작용론(interactionism)’으로서 묘사된다. 신체 상태들은 시공간에 놓이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서 상호작용이 발생하는지의 문제가 떠오른다. 데카르트의 답변은: ‘두뇌 안에서, 소위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 안에서였다. 데카르트의 이 답변은 조롱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매우 유사한 답변을 제안하겠다.

상호작용론에 대한 대안은, 신체적 상태와 정신적 상태가 상호작용하지 않고 병행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심신병행론(body-mind parallelism)’으로 불린다. 그 이론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유명한 형태는 스피노자에게서 기인하는데, 정신과 물질이 동일한 것의 두 가지 면모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달걀껍질 한 조각을 내부로부터 바라보면, 그 조각은 오목하다. 우리가 동일한 조각을 외부에서 바라보면, 그 조각은 볼록하다. 그러나 볼록과 오목은 동일한 것의 모습들이다. 우리가 실재를 내부에 본다면 그것은 정신이고 우리가 실재를 외부에서 본다면 그것은 물질이라고 스피노자는 제안했다.

이것은 교묘한 이론이고 이것은 혹시 참일지도 모른다. 전자(electron)에게 의식이 부여되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전자들의 내력이 어떠했든 모든 전자들은 정확하게 같다. 다시 말해서, 전자들은 자체의 내력에 의하여 틀림없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병행론을 전제하면, 전자들에게 의식이 있다할지라도 전자들에게는 어떤 기억도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이것은 의미한다. 이제 기억이 없는 의식은 의식의 섬광으로서 구성될 터이고 각각은 최소한의 시간 길이동안 지속하여 각각은 다른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을 터이다. 그런 형태의 의식은 합당하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의식은, 우리가 의식으로 지칭하는 것과 전혀 다를 터이다. 이유인즉 의식은 전적으로, 너무 짧지 않은 시간을 통한 의식 상태의 연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나는 병행론이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행론의 변종으로서 간주될 그래서 더 진지한 이론이 있다. 그 이론을 부수현상론(咐隨現象論: epiphenomenalism)’이라는 추잡한 이름을 지니고 다음과 같이 기술될 것이다.

마찰 때문에 모든 시계는 얼마간의 열(: heat)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계의 작동과 관련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부산물이다: 생산되는 적의 양의 열을 주목하지 않고 우리는 시계의 구조를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시계에 의하여 생산되는 열과 같이 무관한 현상은 부수현상으로 불린다. 심신문제와 관련하여 부수현상설은, 정신이 정말로 존재하지만 부수현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 물리주의나 유물론이나 행동주의는 의식의 존재를 부인할 때 틀렸지만 그 존재를 무시함에서 옳다는 것. 이유인즉 정신이 현상이라면, 중요성을 띠는 모든 것이 행동주의적 용어들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수현상설에는, 물리의 세계가 완벽하다는 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조금이라도 설명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원칙적으로 순전히 물리학적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신념이 심신병행론에서와 공통적으로 있다.

내가 나의 세계 3 이론에 의하여 싸우려고 시도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의 완벽함이라는 이 견해이다.

 

세계 3: 이론들, 객관적 문제들

세계 2: 행동하려는 의향들

세계 1: 물리적 상태들

 

세계 3에 존재하는 소수(素數: prime number) 이론의 문제들과 같은 객관적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런 문제가 발견되면 세계 1에서 크고 명백한 변화들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세계 1은 폐쇄되거나 완벽하지 않고 세계 2가 매개체로서 활동하면서 세계 3을 향하여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부수현상론은 틀림없이 잘못되었다: 정신이나 의식은 무의미한 부수현상일 리가 없다.

부수현상론에 대한 나의 배척은, 진화론적 접근방식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정신이나 의식이 부수현상이라면, 왜 그것이 틀림없이 진화했는가? 왜 그것이 고등동물들과 관련하여 틀림없이 점점 더 현저해졌겠는가?

이 질문으로 인하여 반대로, 정신이나 의식과 생명체의 생리에 대한 정신이나 의식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생물학적 관점을 채택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정신의 생물학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생명체와 관련하여 정신은 무슨 일을 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로 인하여 나는 내가 혹시 정신에 대한 그리고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지칭할 것에 다다랐다.

의식의 세계는 세계 1이나 세계 3만큼 동질적이 아니라는 언급으로 나는 시작하겠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의 의식 상태와 우리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의식 상태 사이에, 우리 모두에게 알려진 동일한 정도의 차이점이 있다. 생생하고 잘 기억된 꿈과 우리가 가장 희미하게 기억하는 꿈 사이에 유사한 차이점들이 있다.

동물의 의식에 대하여 우리는 물론 아는 게 매우 적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와 잠잘 때 꿈에 의하여 잠을 설치는 것으로 보이거나 아니면 깊은 잠에 빠져있거나 동물들의 행동은, 개들(dogs)과 다른 고등동물들에게도 또한 다양한 수준의 의식 상태들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의 행동과 충분히 유사하다.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이자 기본적인 추측은 다음과 같이 언명될 것이다. 신체와 정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다소 오해를 야기하는데, 이유인즉 동물 왕국에는 많은 다양한 종류들과 수준들의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하등 수준들이 때때로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예를 들어 꿈속에서나 최면상태에서 발견될 수 있다.

나의 두 번째 추측은 이렇다. 우리는 완전한 의식과 , 인간 의식의 최고 형태 크게 다를 하등 형태들을 구분할 수 있다.

이제 이 다양한 수준의 의식에 있는 생물학적 중요성에 관하여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게다가 여기서 모든 것은 사변적이다 심지어 의식의 하등 혹은 동물적 형태도. 결국 근본적인 행동주의자들이나 물리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항상 의식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변을 선호하는 확신적인 논증들은, 이 분야에서 가까운 장래에 발생한다고 기대될 수 없다.

그러나 이론들은 항상 추측성이고, 적어도 나의 추측들 중 몇 가지에는 시험될 수 있는 결론들이 있다.

의식의 생물학적 중요성이라는 문제에 추측성으로 답변하기 위하여, 나는 두 가지 관념들을 소개하겠다: 통제의 위계(hierarchy of controls)라는 관념과 적응적 통제(plastic control)라는 관념.

모든 고등 생명체들에게서 우리는 통제의 위계를 발견한다. 생명체의 심장박동과 호흡 및 균형을 규제하는 통제들이 있다. 화학적 통제와 신경적 통제가 있다. 치유과정들에 대한 통제가 있고 성장에 대한 통제가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든 동물에는 동물적 움직임 대한 핵심적 통제가 있다. 이 통제는 위계에서 최고위치인 듯이 보인다. 정신적 상태들이 이 핵심적이고 최고인 통제 체제와 관련된다고 그리고 이 체제를 더욱 적응적으로 만드는 데 그 상태들이 도움을 준다고 나는 추측한다. 어떤 것이 별안간 우리의 눈으로 다가올 때 우리가 눈을 깜빡거리도록 만드는 것과 같은 통제를 나는 -적응적(non-plastic) 통제라고 부른다. 가능한 반응들이 가능성들의 넓은 범위를 포함할 때 나는 적응적 통제(plastic control)’를 말한다.

나의 다음 추측은 이렇다. 움직이는 모든 동물에게는 눈(eye)이나 촉각과 같은 정교한 경고 체계들이 있다. 움직이려는 , 특히 먹이를 찾아서 환경을 탐사하려는 타고난 충동이 또한 있다. 그 경고 체계는 매우 전문화되어 있다. 그 체계는, 나무에 부딪히는 위험과 다가오는 적에 대한 위험과 같은 위험들에 대하여 경고를 한다. 그 체계는, 먹이로 사용될지도 모르는 대상과 같은 다가오는 기회에 대하여 또한 경고를 낼 것이다. 위험사항들과 위험한 대상들을 생물학적으로 부정적으로 칭하고 기회들을 생물학적으로 긍정적으로 칭하자. 대부분 동물들의 기관들(器官: organs)은 이 등급들을 구분하도록 구축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 기관들은, 자체가 마주치는 자극들을 해석하거암호 해독한다. 그러나 이 해석 혹은 암호해독 체계는 신체 구조적으로 그리하여 유전적 토대가 있다 처음에는 적응적이라기보다는 경직되어 있어서, 창문유리에 부딪히며 비행하는 곤충들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특이한 상황들을 참작하지 않는다. 나의 추측은, 창발하는 진화에 의하여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사건들에 대한 혹은 초기의 후퇴나 전진에 대한 동물의 기대를 반영하는 모호한 느낌들이 먼저 나타난다는 것과 창발하는 진화에서 추가적인 조치들에 의하여 이것들이 고통과 쾌락의 느낌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주로 선행적인 특징을 띤다. 그다음에 그것들은, 동물에게 도달하는 신호들을 해석하고 암호 해독하는 체계적이고 추가적이고 더 높은 수준의 , 신호 기관들 자체가 제공하는 저 체계를 넘어서 해석하거나 암호 해독하는 체계의 토대가 된다. 그리하여 두 번째 세계는 첫 번째 세계로부터 창발할 것이고 우리는 이미 세 번째 세계가 두 번째 세계로부터 어떻게 창발할 것인지를 알았다.

비상한 상황에서 동물은 자체가 수신하는 신호들을 흔히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암호 해독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잠정적 해석들이 가령, 후퇴와 전진 사이에서 혹은 공포감과 용기 사이에서 주춤거리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상황에 대한 선행적이고 잠정적인 해석들이 진화할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운동들이라기보다는 운동들에 대한 초기 신경감응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선행적이다. 이것은 결정적인 단계일 터이다. 그 단계는, 실제적인 운동들 자체를 즉각 실천하지 않고 가능한 운동들이가 가능한 반응들을 잠정적으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이런 종류의 과정에서 생물학적 이점은 분명한 듯이 보이고, 실제적인 운동들을 실천하는 위험을 겪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행동의 다양한 가능 노선들 및 상황에 대한 그 노선들의 적합성이 시험될 곳에서 한 가지 단계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는 틀림없이 일종의 상상력이 포함될 터이다: 운동들의 기대된 결과에 대하여 상상된 예상과 생물학적으로 부정적으로 상상되고 예상된 결과들로부터의 위축 및 생물학적으로 긍정적으로 상상되고 예상된 결과들의 수용과 함께 결과적인 행동. 그리하여 이것은, 의식이 신체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이 선행적으로 시험하기는 초기의 잠정적 운동들이나 운동 기관들의 초기 신경감응과 관련된다고 추측될 것이다. 신호들의 해석 및 암호 해독이 생명체의 일반적인 상태와 , 생명체의 반응 예상들이나 생명체의 반응하려는 의지와 밀접하게 관련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거의 운동들을 야기할 이 신경감응들로 인하여 수용된 신호들에 대하여 변화하고 잠정적인 해석들이 유발될 것이다. 그리하여 굶주리고 공격적인 심리상태에 놓인 동물은 자체의 환경 전체를, 가령 배부르거나 놀랐거나 부상당한 동물과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전자(前者)는 자체의 환경을 가능한 음식 공급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후자(後者)는 도피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 수준에서의 의식은, 쾌락과 고통 및 활동과 호기심 그리고 모험과 후퇴 혹은 도피라는 일반적인 감정들에 고착된 해석 및 행위와 관련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생명체에게서, 환경적 상황과 생명체 자체의 행동 반응들 모두의 전개에 대한 더 잠정적일 뿐만 아니라 나은 예상들에 의하여 생명체의 핵심적 통제 체계가 확대된다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개괄한 것은, 인간의 정신 및 인간의 자아에 대한 나의 새로운 추측성 이론에 관한 일종의 일반적인 진화론적 배경이다. 그러나 이 이론으로 나아가기 전에, 정신적 상태와 신체적 상태 사이의 관계는 이 이론에 따라서 통제하는 체계와 통제되는 체계 사이의 관계와 특히 통제되는 체계로부터 통제하는 체계로의 정보교환(feedback)으로써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나는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상호작용이다.

이제 나는 인간의 의식으로 온다. 인간의 의식에는, 더 현저한 고통 느낌으로 섞인 모든 종류의 모호한 감정들과 같이, 아주 많은 하등 형태의 잔류물들이 담겨있다. 사실상 인간은 예를 들어 예리한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모두를 동시에.

그리하여 인간의 의식은 고도록 복잡한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유명한 관념은 너무 단순하다. 모든 종류의 수준에서 의식이 있다 높고 낮은 수준들인데 낮은 수준들은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으로 몰래 점차 변한다. 다른 한편으로 흐름이라는 관념은 시간의 이론에 다시 말해서 시간은 흐른다는 이론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을 때, 특히 우리가 서술이나 논증의 형태로 우리의 사고를 언명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가 완전한 의식을 혹은 의식의 최고 상태 이룩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혼잣말을 함에 이것이 부인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때때로 그렇게 하는 바와 같이 의하여 우리가 이것을 조용히 실행하든 아니면 우리가 친구들과 어떤 흥미로운 문제를 토론하든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종이 위에 표현하든, 사고나 논증이 의식의 최고 수준에서 발생한다는 것에는 의심이 있을 리 없다. 분명하게 생각함에서, 우리가 의식적임을 우리는 실제로 안다.

이제 나는 완전한 의식에 대한 그리고 자아에 대한 나의 이론의 정식화로 온다. 나에게는 다섯 가지 논지들이 있다.

 

1 완전한 의식은 세계 3안에 안착한다 , 완전한 의식은 인간 언어 및

인간 이론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완전한 의식은 주로

사고과정들로 구성된다. 사고 내용이 없으면 사고 과정이 없고, 사고

내용은 세계 3에 속한다.

2 특정 세계 3 이론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없으면, 그리고 정말로 이

이론들을 직관적으로 당연시하지 않으면 자아는 불가능하다. 문제의

이론들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일반적인 물리적 물체들에 관한,

사람들과 그들의 신체들에 관한, 시공간에서 확대되는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특정 신체들에 관한 그리고 깨어있는 상태나 잠든 상태의 특정

규칙성들에 관한 이론들이다.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자아는 외부로부터 우리 자신의 견해를 이룩하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객관적인 구조 안에 위치시킨 결과이다. 그런 견해는, 서술적 언어의

도움을 받아서만 가능하다.

3 완전한 의식의 위치 혹은 사고하는 자아의 위치에 대한 데카르트의

문제는 결코 터무니없지 않다. 나의 추측은, 두뇌와 자아의 상호작용은

언어중추(speech centre)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나의 다음 및 마지막

강좌에서 나는 이 추측에 대한 몇 가지 실험적 시험들을 언급하겠다.

4 자아나 완전한 의식은, 우리의 움직임들 몇 가지에 적응적 통제를

행하고 있는데 그 움직임들은 그렇게 통제된다면 인간의 행위들이다.

많은 표현적 움직임들은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무의식적 통제로

가라앉을 정도로 그렇게 잘 습득된 많은 움직임들도 또한 그렇다.

5 통제의 위계에서, 자아는 최고의 통제 핵심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아가

반대로 세계 3 이론들에 의하여 적응적으로 통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통제는, 모든 적응적 통제들처럼, 주고받기(give-and-take)이거나

정보교환(feedback) 유형이다. 다시 말해서, 통제하는 세계 3 이론들을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변화시킨다.

 

나는 이제 오래된 심신문제를 , 신체와 정신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는 지의 문제와 심신병행론 간략하게 되돌아보겠다. 답변은 창발하는 진화에 의하여 주어진다. 창발하는 참신한 구조들은 항상, 그 구조들이 출현하는 물리적 상태들의 기본구조와 상호작용한다. 통제하는 체계는 통제당하는 체계와 상호작용한다. 정신적 상태들은 생리학적 상태들과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세계 3은 세계 2와 상호작용하고, 세계 2를 통하여 세계 1과 상호작용한다.

다음 주 나의 마지막 강좌에서 나는 자아, 합리성 그리고 자유에 대하여 말하겠다.

 

토론

 

질문자 1: 귀하에게는 다섯 가지 가설들이 있고 내가 네 번째 가설과 첫 번째 가설을 놓쳤을까 나는 우려한다.

 

포퍼: 첫 번째 가설은, 완전한 의식이 세계 3 안에 안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의식은 인간 언어 및 이론들의 세계와 밀착되어 있다 완전한 의식은 주로 사고과정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사고 내용이 없으면 사고과정이 없고 사고과정은 세계 3에 속한다. 그래서 그것은, 논증을 지닌 논지이다. 그리고 그 논지는, 완전한 의식이 세계 3 안에 안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착되어(Anchored)’는 물론 은유이고 그 은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안착에 의하여 내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는 논증을 나는 제시하겠다. 그러나 안착은 다른 논지에서 더 완벽하게 설명된다. 귀하는 다섯 번째나 네 번째를 알고 싶은가? 어느 것인가? 네 번째.

나의 네 번째 논지는, 자아나 완전한 의식이 우리의 움직임들 몇 가지에 적응적 통제를 행한다는 것인데 그 움직임들은 그렇게 통제될지라도 인간의 행동들이다. 많은 표현적 움직임들은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또한 무의식적 통제의 수준으로 가라앉은 정도로 잘 학습된 많은 움직임들 또한 그렇다. 잘 학습되어 무의식적 통제의 수준으로 가라앉은 움직임들 가운데서 나는 자전거 타기를 아까 언급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혹시 흥미로운 것을 추가할 것이다: , 우리가 특정 운동들을 습득하여 그 운동들이 의식적 통제의 수준 이하로 가라앉는다면, 우리가 그 운동들을 의식적으로 추적하려고 노력하는 경우 우리는 매우 자주 그 운동들을 아주 심하게 방해하여 중지시킨다. 나는 이것을 지네 효과(centipede effect)’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거미와 지네에 대한 매우 멋진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거미가 지네에게 이것 봐, 나에게는 다리가 겨우 8개야. 나는 8개의 다리는 운용하지만 자네는 백 개야. 자네가 매순간 자네가 지닌 백 개의 다리 중 어느 것을 움직일지 아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상상할 수 없어.’ 그래서 지네가 그것 아주 간단해라고 말했다. 그 후 지네는 몸이 마비되었다. 이제 지네 효과는 매우 실재적인 효과이다. 바이올린 연주자 아돌프 부슈(Adolph Busch)여러분 몇 명은 아마도 그의 이름을 알 텐데 그는 약 12년 전에 사망했고 나의 친구였다 자신이 예전에 취리히에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고 나중에 바이올린 연주자 후버만(Huberman)이 와서 그에게 특정 악절을 어떻게 연주했는지 물었다. 부슈는 그것이 아주 간단했다고 답했다 그다음에 자신은 그 구절을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운지법이나 무엇이든 방해를 받아서 그는 그 악절을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었다. 저것은 매우 흥미롭고 실제로, 무의식적이 되는 이 과정의 기능을 보여준다. 분명히 그것은, 의식이 다른 것들을 따르게 만들기 위하여 말하자면 우리가 의식의 기록을 당분간 지우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귀하가 바이올린으로 어떤 곡을 아주 잘 연주해서 연주기법과 관련된 운지법 및 모든 것이 무의식 속으로 내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생리 속으로 가라앉을 때 귀하는 곡 전체의 연주에 집중할 수 있다. 귀하에게는 그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 곡의 모든 극적인 요소들로써 그리고 그 곡을 연주하는 방법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고, 귀하는 곡 전체를 염두에 두고 그 곡을 전개할 수 있다. 그리고 저것이 기능이다 귀하가 자동차 운전을 잘 배워서 다양한 움직임들과 기타 등등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물론 훨씬 더 중요한 교통 상황에 귀하가 완전히 주목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래서 이 모든 사례들에서 귀하는, 다른 통제들이 잠재의식과 무의식으로 가라앉는 반면 의식적 통제는 최고의 통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최고의 통제만 완전히 의식적 행동으로 남아서 우리가 행하고 있을 것을 우리가 안다고 우리는 또한 말할 수 있다.

 

질문자 2: 우리 모두는, ‘고등하등그리고 그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 기량이 매우 많이 의식적 투쟁일 때, 명시적으로 의식적이 되는 행위가 피아노 연주나 귀하여 언급하고 싶은 여하한 것과 같은 기량 숙달되어 그 다음에 말하자면 잠재의식의 한 부분이 되고 우리가 기량으로 우리는 그것을 기량으로 부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잘 실행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부르는 것이 되는지 이유가 나는 궁금하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평범한 언어로 우리가 의식보다 하등에 관하여 보통 말하는 것과 같이 저 의식보다 하등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우리가 저 영역 밖으로 어떤 것을 움직여 명백함으로나 귀하가 의식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옮길 때 그것이 어설픈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포퍼: 통제의 위계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등이다. 통제 체계에 대하여: 예를 들어 자신의 균형을 잡은 법을 배워야하는 어린이를 고려하자. 나 자신을 균형 잡는 데 내가 주의하여, 예를 들어, 귀하에게 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필요는 나에게 없다. 나의 균형에 관하여 내가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나는 심지어 나의 균형을 잃지 않고 나의 발을 들 수 있다. 물론 나의 발을 드는 것은 의식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내가 이 움직임을 실행하는 동안 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다. 동물적 통제의 일반적인 위계적 특징으로 인하여 이것들이 실제로 하등임은 상당히 분명하게 밝혀진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또 다른 통제 아래에 놓인다. 특히 뭔가가 잘못되어 그것들이 휘청거리고 기타 등등하여 상호작용이 상당히 격렬해지고 그것이 다시 의식적인 행동이 될지라도, 특정 수량의 상호작용은 물론 항상 있다. 그러나 고등 통제가 항상 독특한 , 최고의 통제 반면, 그것은 동일한 수준에서 일련의 통제들 중 한 가지 통제일 가능성이 더 높다. 말하자면 저것은 중추이다. 저것이 실제로 요점이다. 이 하등 통제들 중에서 특정 모호한 감정들이 여전히 항상 떠올라서 이 고등 통제들을 방해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 연주자는 음악 한 곡의 운지법에만 집중할 수 없다 그는 그의 활을 또한 다루어야 한다. 부슈(Busch)의 문제가 운지법의 문제일 따름이었지 오른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바이올린 연주자의 경우에 왼손과 오른손이 어느 시점까지 독립적으로 통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움직임들이 어느 정도까지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두 가지 통제들일 것이다 다소 동일한 수준에 있지만 중추 통제인 주요 통제 아래.

 

질문자 2: 혹시 내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귀하가 어떻게 이것을 도식적으로 수행할 터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제안하는 바, 틀림없이....

 

포퍼: 일종의 피라미드?

 

질문자 2: 틀림없이 기량을 포함하는 또 다른 수준. 다시 말해서, 나는 저것을 두 번째 수준에 놓고 싶지 않고 심지어 두 번째와 세 번째 수준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서도 표현하고 싶지 않다. 나는 기량들을 네 번째 수준에 놓고 싶다.

 

포퍼: 귀하는 여기 이것에서 의미하는가?

 

세계 3: 이론들, 객관적 문제들

세계 2: 행동하려는 의향들

세계 1: 물리적 상태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세분할 수 있다. 숙달된 기량들이 우리의 생리에 통합되는 한, 그 기량들은 두 번째 수준에 속한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기량들은 다시 말해서, 기량의 규칙들 물론 명시적으로 세 번째 수준에 속한다. 예를 들어 언어를 생각하라. 이제 영어에서의 나의 기량은 매우 나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규칙들을 실제로 숙달한다면 그에게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온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의식적으로 단어들과 문법 규칙들을 탐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의 내용에 집중하고, 그것은 흘러갈 따름이다. 그러나 그가 따르는 규칙들은 세계 3에 속한다. 그 규칙들은 이제 세계 2에 통합되지만 귀하는 그 규칙들을 명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귀하가 그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만든다면, 그 규칙들은 세계 3에 속한다. 특히 귀하가 그 규칙들을 언명한다면 그 규칙들은 세계 3에 속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 규칙들이 언명될 수 없고 학습의 대상인 한일지라도, 그 규칙들은 세계 3에 속한다. 물론 귀하는 그 이상의 세계들을 지닐 수 있다. 나 자신은 예를 들어 목표 구조기량 구조를 구분했다. 요점은,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정도로 겹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세계 3에 속하고 세계 2에서 이해되고 파악되며 의향들에서 두 번째 세계에 통합된다. 그런 중첩들은 크게 유행하지 않는다. 현대 철학의 동기들 중 한 가지는, 이 중첩들을 피하는 것이다. 귀하가 혹시 알다시피 몇 가지 단어들이 아니라 한 단어만을 가지는 것이 실증주의와 현상주의의 동기이다. 한 단어가 또 다른 단어를 재현하는 것, 저것은 지독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한 단어만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들이 복잡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린이가 언어를 배울 때 어린이는 문법을 명시적인 규칙들로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가 모방과 타고난 능력을 먼저 혼합하여 통합하는 어떤 종류의 문법이 있어서 그다음에 결국 의향적인 일을 만든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어린이가 이런 방식으로 통합하는 객관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세계 3에 속하는 것이다. 저것이 충분한가? 물론 귀하는 세분할 수 있다. 나는 저 의미에서 다원주의자이어서 오직 세 가지 세계들만 있다는 이론은 선호하여 나는 결코 싸우지 않을 터이다. 귀하는 원하는 만큼 그 세계들을 세분화할 수 있고 그 세분화들은 특정 문제들에 대하여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단순화로서, 이 세 가지 세계들이 아주 유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저것보다 더 많이 과도한 단순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상당히 유명한 기호논리학자에 의하여 나는 질문을 받았다 이 세 가지 세계에 대한 이론이 진지하게 고려되기 이전에 내가 공리체계를 통하여 세계 3 관념을 설명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세계 3을 전혀 저만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 3은 우리가 특정 관계들을 보는 데 도움을 주는 은유이다. 귀하는 그런 것들을 공리화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표지판들이고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공리적 형태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질문자 3: 의식의 기능이 대안들을 고찰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행동에 어떤 형태를 아무리 상세하거나 숙련되었을지라도 따르는 것이 포함될 때 고려할 대안들이 없다면 그 행동이 의식의 수준 아래에 있을지라도 그 행동이 낫게 작용한다는 언명을 귀하는 수용할 터인가?

 

포퍼: 그렇다, 나는 수용할 터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에 관하여 더 많을 것을 말해야 하지만 저것이 주요한 것이다. 대안적인 가능성들이 있다. 이 대안적인 가능성들은 시험되고 그 가능성들의 결과들은 예상되며 이 예상으로 인하여 그다음에, 이 결과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 요구된다. 매우 자주 이 모든 것은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대안들의 결과들을 예상한다. 우리가 결과들을 예상하지 않는다면 대안들은 쓸모가 없고, 대안들의 결과들을 예상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 상상력이 그림 형태로 다소 하위 수준에서 실제로 작동한다고 나는 상상한다. 우리가 시각장애인들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림들이 실제로 의식에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데 시각장애인들은 우리가 지닌 것과 같이 틀림없이 시각적 그림들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어려움을 통과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과 정상인들 모두에 공통적인 것은, 이 결과들이 적어도 성공이나 실패나 고통이나 쾌락 혹은 그와 같은 것의 느낌들에 의하여 재현되어 그다음에 상응하는 행위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거의 완전한 의식의 완전한 의식은 아직 아니지만 그 의식에 근접하는 것 출현에 대한 실제적인 요점이다: , 우리가 이 대안들의 결과들을 상상한다는 것. 저것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상상력의 행동이고, 거기서 어떤 결정적인 조치가 완전한 의식을 향하여 이루어진다. 저것이 내가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다음에, 완전한 의식이 심지어 거의 완전한 의식 생물학적으로 귀중할 것이고 그리하여 추가로 전개될 것임을 우리는 이해한다. 이 이론은 물론 매우 모호하고 다소 난해한데 왜냐하면 의식의 하등 단계들에 관하여 동물적 단계들의 의식에 관하여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지극히 사변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매우 편리하지만 틀림없이 매우 허위인 물리주의나 행동주의를 우리가 수용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심신문제를 진화론적 관계들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문제를 진화론적 관계들로 본다면 데카르트가 스피노자보다 분명히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옳을지라도, 전자들(electrons)에게 자체의 주관적인 상태들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순간적인 의식은, 우리가 흥미를 갖는 것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져서 진화의 문제는 틀림없이 여전히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문제는 의식의 전자(electron) 상태에서 인간의 의식 상태로 우리가 이동하는가? 이다. 그리고 저것은, 진화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유사한 병행론적 이론을 수용할지라도, 모든 문제들이 남는다. 그 문제들은 어떤 정도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옳은지 그른지를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전자들(electrons)의 통찰에 관하여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인데 실제로, 심지어 전자들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의식은, 주관적 지식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지식과 같은 것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항상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하가 그 논증을 이해하기를 나는 바란다. 심신병행론이 있다면 정신과 신체가 정말로 병행한다면 연결된 기억은 일종의 기억일 터이고 이것은, 기억을 지닌 신체 체계에 대해서만 병행일 수 있다. 이제 많은 신체의 체계들에게는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자석들에도 기억이 있다. 아마도 모든 수정들(crystals)에게도 기억이 있고 자석들에게도 기억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아마도 결정체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체들에게는 어떤 정도로든 자체의 내력에 대한 기억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들은 더욱 부서지기 쉬운데 왜냐하면 결정체들과 유사한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전적인 특정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리적 의미로 기억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심신병행론이 옳다면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기억이 기껏해야 신체적 의미에서 기억이 있는 곳에서 출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전자들이나 원자들 수준에서는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 기껏해야 분자 수준에서 출현한다 상당히 분명하다.

 

질문자 4: 귀하의 이론으로 인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오이디푸스 이론을 언명하면 인간의 삶에서 그 콤플렉스의 효과의 종말이 암시되는가? 다시 말해서, 오이디푸스적 경향들에 대한 귀하의 지식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가 그 경향들에 반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고 제 3의 세계가 두 번째 및 첫 번째 세계에 급격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것은 의미할 터인가?

 

포퍼: 귀하가 원한다면.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르게 표현할 터인데 왜냐하면 나는 프로이트 추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세계 2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말할 터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신뢰되면 부분적으로 참이 되는 저 허위 이론들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귀하가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든 귀하의 방식으로 표현하든, 정신분석 이론으로부터 세계 2에 미친 매우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고 나는 말할 터이다. 이것에서 아무튼 우리는 동의한다. (: sex)에 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함에 의하여 우리는 성을 과도하게 강조한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성에 관하여 많이 언급될수록, 삶에서 성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세계에 미친 세 번째 세계의 영향 중 얼마간의 영향이다.

 

질문자 5: 이 목표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우리가 자아와 완전한 의식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귀하는 말할 터인가?

 

포퍼: 그렇다.

 

질문자 5: 자아는 세 번째 세계에 의존하는데 그 세계는 언어에 의존한다. 그리고 언어에는 유전적인 토대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논지에서 귀하는, 어떤 특정 그래요, 세 번째 세계에는 특정 이론들이 있고 귀하는 시간과 공간 및 물리적 대상들과 사람들 및 기타 등등을 언급했다 의존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귀하는 5번에서, 우리가 특정 세계 3 이론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제 귀하는 어떤 정도로든, 일반적인 구조로서의 언어는 유전적인 토대를 갖지만 언어 내부의 특정 객관화에는 유전적 토대가 없고 이 모든 것들은 그리하여 학습된다고 주장할 터이다....

 

포퍼: 아마도 몇몇은 그렇다. 물리적 대상들이라는 관념에는 다시 말해서, 자체 내부에 특정 불변수들(invariants)을 지닌 외부 세계라는 관념 유전적 토대가 있을 개연성 매우 높다고 나는 말하겠다. 동물들에게는 이미 그것이 있고 수백만 년 동안 장구히 있었다. 그래서 그것에 유전적 토대가 있을 개연성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움직이는 동물들은 바위에 부딪히는 것에 대하여 자신들 지킨다. 그래서 동물들에게 저것에 관한 이론이 있고 이것에 유전적 토대가 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또 다른 사례를 고려하라: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시계들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전적으로 토대를 갖춘 시간 감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또한 거의 틀림없이 유전적으로 토대를 갖춘 시간에 대한 이론은 없다. 이것에 의하여 나는 다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한, 동물들은 자신들이 시간을 통하여 과거로 확대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동물들에게 기억들이 있지만 그 기억들로 인하여 동물들은 다르게 행동할 따름이다. 아니면 혹시 동물들에게 꿈에 나타나는 그림들이나 그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동물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닌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들에 대한 의식은 없다. 자아라는 관념에서 이 이론은 타고난다. 그래서 이 이론에는 아마도 유전적 토대가 없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이론의 일부에는 내가 보기에 유전적 토대가 있다.

 

질문자 5: 그러나 저 이론이 허위로 판명되면 어떻게 되는가? 저 이론이 허위로 판명되는 것은 가능할 터인가?

 

포퍼: 그렇다, 귀하가 인간을 바다 속으로 던진다면 그 이론은 허위이다. 그 인간은 단단한 것을 잡으려고 시도할 것이지만 그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무엇인가를 잡아채려고 시도할 것이지만 그는 잡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이론은 허위로 판명된다. 바다 속에는 고체들이 없고, 고체들에 대한 유전적 토대 이론과 고체들의 중요성은 그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유사하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귀하가 그를 빈 우주 속으로 던진다면. 귀하가 그를 훈련시키지 않고 우주복을 입혀서 우주 공간 속으로 던진다면, 그는 단단한 것을 잡으려고 시도할 것이지만 그는 틀림없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이론에는 유전적인 토대가 있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허위로 밝혀질 것이다.

 

질문자 5: 그래서 우리는 적응적 통제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없을 것이다...?

 

포퍼: 물론 우주 비행사들로 인하여 그 이론은 이미 수정되었다. 그리고 우주비행사가 적절하게 훈련을 받았다면 그 수정은 심지어 그가 지닌 의향적 장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질문자 6: 그리고 저것에는, 그의 구성으로부터 이 유전자들을 배제시키는 변종이 발생한다면 그 구성이 유지될 터임은 필수적으로 수용될 터인가?

 

포퍼: 변종에게서 무슨 일이 발생하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변종에게서는 어떤 일도 발생할 것이다. 변종은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질문자 6: 그에게 필요가 없는 저 변종은 출현해서, 자신이 더 이상 사용하고 있지 않는 유전물질을 배제시켜서 사실상 반대로 훈련을 받는 수용될 개연성이 더 많은가?

 

포퍼: 저것은 수용될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는 바와 같이, 변종에서는 어떤 것도 발생할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정적일지도 모른다. 몇몇 변종들은 다른 변종들보다 더 빈번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발생할 것이고, 몇몇은 좋을 것이고 몇몇은 나쁠 것이다. 저것이 답변이 되는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나는 귀하의 질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자 6: 우주여행이나 다른 특이한 경험들이 혹시 인간의 구성에 미칠 효과들 중 몇몇을 나는 시각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귀하의 이론에 따르면, 행동이 먼저 오고 변종들이 모방한다. 이로 인하여 아마도 넓은 범위의 사념이 생길 터이다. 아닌가?

 

포퍼: 아니다. 행동이 먼저 오고 변종이 모방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음을 귀하는 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변종의 선택이 모방한다는 것이다. 변종은 어떤 시간에도 발생할 것이다. 변종들은 모든 시간에 발생한다. 그러나 변종의 선택, 채택된 행동에 강력하게 의존할 것이다. 귀하는 이해하는가? 그래서 우주여행이 더 일반적으로 수용될 때 신체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없애지 않을 터인 어떤 변종이 선택될 것임이 가능하다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선택되기 이전에 많은 것이 틀림없이 발생할 터이다. 이런 종류의 것으로 인하여 유전적 차이점이 만들어질 수 있기 전에 우주여행은 틀림없이 상당히 보편적이 될 터이다.

 

질문자 7: 몇몇 생리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쥐에게 미로 달리기를 가르치고 그다음에 쥐를 죽여서 쥐의 뇌를 꺼내어 분쇄하여 RNA를 추출하여 그다음에 그것을 다른 쥐들에게 주입하는 곳에서 그들에 의하여 실행되고 있는 몇 가지 실험들이 현재 있다. 그리고 그 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미로를 달린다. 귀하가 앞에서 공격하고 있던 이런 종류의 물리주의를 통하여 귀하는 이것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포퍼: 먼저 무엇보다도, 귀하가 혹시 알다시피 이 실험들은 엄중하게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실험들이 옳다고 전제하자. 잠재의식으로 가라앉는 것에 관하여 내가 말하고 있는 곳에서 이것은 화학반응의 전개에 대응할 터임을 그것이 의미할 터이다. 이것이, 이 실험들이 암시할 터인 것이다. 저것은, 어떤 것이 잠재의식으로 가라앉으면 나는 생리로 가라앉는 것을 말했고, 이제 생리는 화학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어떤 정도로도 나의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지 않을 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하여 다소 의심스럽다. 그 실험들이 아주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을 터인데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것이 이 학습된 형태들을 지닐 것이고 그것이 다른 것만큼 꼭 충분하게 신체의 화학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화학이라는 조건으로만 특정 큰 분자들이거나 어떤 것이든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게 투입될 수 있을 터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가능하지만 내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이 편형동물(扁形動物: flatworm) 실험들로서 시작되었다....

 

질문자 7: 그것은 호기심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그 실험은 실제로 정보 각인(imprinting information) 작업인데 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는 것이다. 도시에 이것을 수행하는 어떤 물리학자가 있다.

 

포퍼: 내가 뭐라고 말할까? 그것은 저 모든 것만큼 단순할 개연성이 높다. 그것은 저것보다 훨씬 더 복잡할 개연성과 귀하가 그것을 투입할 수 없는 개연성이 높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런 것들이 이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이전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질문자 8: 목표 구조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나는 원하는데 왜냐하면 목표 구조라는 관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듯이 보이고 다른 한 가지가 변종 자체의 흡수일 뿐인 반면, 한 가지는 변종의 거의 복제일 터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경우 귀하는 행동 체계로부터의 이탈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거의 변종이 행동할 터인 것과 적어도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할 터인 것. 그리고 이것은 더 자유로운 듯이 보인다. ‘목표 구조의 의미는 더 자유로운 듯이 보인다. 첫 번째 경우 적자생존이나 다른 것과 같은 여하한 종류의 개선 이론에 의하여 조건의 완화나 환경 자체의 완화를 통한 변종의 흡수를 귀하는 경험한다. ‘목표 구조의 이 두 가지 의미들이 양립될 수 있는가? 혹은 그것들이 양립될 수 있는 것 이상인가? 혹시 그것들은 상보적인가?

 

포퍼: 내가 귀하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귀하가 구분하고 싶은 것은, 일종의 새로운 행동일 뿐인 목표 구조로부터 유전적으로 고착된 목표 구조이다. 딱따구리에 대하여 내가 든 사례를 다시 고려하자. 딱따구리의 발전에서 발생한 일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고 저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딱따구리가 먹이 취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먹이에 대한 새로운 선호가 전개되었다. 두 가지 일이 이제 발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선호는 유전적으로 고착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몇 가지 변종들이 아마도 두뇌에 미치는 신체의 영향들과 함께 나는 알지 못하지만, 저것과 같은 것 먹이 취향에서 지속적인 변화를 이룩할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그런 가능성은 발생하지 않고 가능한 행동의 범위 확대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분간 이것이 선호되지만, 나중에 선호되지 않는다. 그래서 특화인가 특화가 아닌가의 문제가 있다. 특화가 있다, 이 특화에 고착이 이어질 유전적 고착에 의하여 개연성이 있다. 이것은 행동이 변종의 선봉인 경우이다. 이것은 또한, 동물이 극도로 적응했을지라도 고착 때문에 환경에서의 급격한 변화들에 살아남을 것 같지 않다고 내가 생각하는 경우이다. 상황으로 인하여 가능한 생동이 더 많이 퍼진다면 다시 말해서, 통제의 적응성이 더 크게 퍼진다면 이것은 오히려 반대가 되는데 즉, 생존 개연성이 있는 동물은 심지어 상당히 급격히 변하게 된다. 저것이 귀하의 질문에 조금 답변이 되는가? 그리하여 목표 구조에서 가능한 두 가지 변화들이 있는데 두 가지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 이 경우에 먹이 취향의 변화로써 시작하지만 한 가지는 유전적으로 고착될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언어가 유전적으로 고착된 듯이 보일지라도 우리가 개발한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도구들 중 실제로 어떤 것도 조금이라도 유전적으로 고착된 듯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에 관하여 매우 두드러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저 의미에서 언어가 실제로 가능한 행동 역할들을 좁히기보다는 그 역할들을 확대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인간의 진화에서 결정적인 요인들 중 한 가지 요인이다. 언어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이 상상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열린 채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상상 가능한 방법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특히 언어로 인하여 아마도 추가적인 고착이 방지되었다. 저것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언어로 인하여 추가적인 고착이 생기지 않았다.

 

질문자 8: 언어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목표들과 가령 혹시 통제 적응성의 확대를 통해서만 이해되는 목표들 사이에 어떤 것이 없는가? 언어에 앞서는 기계들에 대한 멈포드(Mumford)의 이론을 나는 생각하고 있다 기계들에 관하여 말하고 기계들은 언어에 앞선다고 말하는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포퍼: 이것은 거의 틀림없이 허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질문자 8: 그렇지만 저 특정한 것에 귀하가 어떻게 답변할 터인지 나는 궁금하다? 그는 기계들을, 언어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목표들과 단순한 변종들이나 통제되는 확대 사이의 어느 곳에 둘 터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가 둘 것은....

 

포퍼: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것이 매우 늦게 오는 기계들을 선호하여 표현하는데, 특히 심지어 가장 간단한 기계도 유전적 고착의 징표를 보이지 않을 때 그렇다. 저것은, 그 기계들이 매우 늦게 온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 이론은 분명히 허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언어는 유전적으로 고착되어 그리하여 언어는 아마도 다른 기계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마도 먼저 언어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서술적 언어로써 우리에게는 이야기-말하기의 가능성에서 기인하는 상상력의 엄청난 진화가 생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가, 환경에 자체를 그렇게 완벽하게 조정할 도구들이나 귀하가 그렇게 부른다면 기계들의 넓은 범위의 가능성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도로 발전된 기계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들 중 한 가지는 에스키모의 사례이다. 에스키모들의 도구들을 특수하게 특화되어 있다. 에스키모의 작살, 에스키모의 카약 이것들 모두는 극도로 복잡하다. 카약은 거의 잠수함이다. 카약을 뒤집을 수 있고 카약을 타고 표면 아래에 있을 수 있고 기타 등등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은 특수하게 발전되어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것에는 유전적 토대가 없다. 그것은 모두 전통적이고, 다른 모든 종족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기계들과 매우 다르며, 우리가 아는 한 에스키모들이 살아가는 그리고 그들이 매우 오랫동안 살아오지 않는 특정 환경과 관련하여 매우 특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로 인하여 이 분야의 적응성이 밝혀지고 멈포드가 틀렸음이 드러난다.

 

질문자 8: 그가 자신의 논증들을 경험적 증거에 근거시킬지라도 그는 원칙의 문제로서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아마도 언어 자체가 심지어 매우 많이 기본적 수준에서 도구화될지라도 도구화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다른 영역들에서 또한 개진된 이론 나는 생각하고 싶다.

 

포퍼: 물론, 나는 언어가 도구적이라고 또한 생각한다. 언어는 도구적일 뿐만 아니라 도구는 정말 도구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들이 도구적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구주의 대() -도구주의라는 문제는, 이론들이 도구적인지가 아니라 이론들이 오직 도구적이고 다른 것은 아닌지 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이론들의 도구적 특징에 동의할 터이지만, 이론들은 다른 것이기도 하고 말할 터이다. 더 질문이 있는가?

 

질문자 5: 귀하에게 또 다른 질문할 예정이었다 그 질문은 너무 하찮을 것이다. 이 도식에 관하여, 병을 진찰하는 숙달된 내과의사 일에서 귀하는 이 세 가지 수준들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 나는 귀하에게 물을 예정이었다.

 

포퍼: 내일 학술회의에 오는 세 명의 내과의사들을 귀하는 실제로 볼 것이어서 우리는 아마도 거기서 그것을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내과의사의 기량이 크게 주로 세계 3 사건이라는 것은 이 경우에 특히 분명하다. 거의 완전하게 특히 진찰에서. 외과의사가 자신의 손가락 기량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그것을 또한 지닐지라도 그리고 심지어 진찰이 몇몇 외과의사들에게서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이고 거의 본능적이 될지라도. 말하자면 병실에 들어오면서 진찰을 냄새 맡을수 있는 몇몇 의사들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진찰에 대한 일종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진찰이 거의 완전히 숙달된 시행착오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찰은, 본질적으로 시행착오로부터 전개된 계획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많은 시행착오들이 그러한 바와 같이: 모두는 전혀 무작위적이 아니다 시행착오 경우이다. 의사는 질문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일종의 프로그램을 습득했다. 질문되는 나이와 기타 등등에 대한 몇 가지 매우 일반적인 질문들과, 그다음에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와 환자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및 기타 등등에 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질문들이 있다. 그리고 일종의 일상적인 절차에 의하여 어떤 것들이 배제된다. 그것은 주로 오류제거의 저서로부터 습득되거나 진료소에서 습득되는 체계적인 오류제거 방식 문제이다. 체계적인 오류제거 방식과 특별한 체계적인 오류제거에 의하여, 의사는 그리하여 작은 숫자의 가능성들에 도달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그리하여 과정은 통상적으로 다시 가령 혈액검사 혹은 여하한 것에 의하여 작은 숫자의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진찰이 남는다. 이제 물론 이 모든 것에는 인간의 생리가 합당하게 단순하다고 전제된다. 다시 말해서, 그 생리가 기대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면, 진찰은 오류일 것이다 그것은 발생할 수 있다. 저것이 개략적으로 절차이다. 이 절차에서 오류제거 방법들 몇 가지 자체가, 자주 실행되었다면, 거의 의향적이 된다. 그러나 어떤 것을 의향적이 되게 만든 것은 세계 3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자전거와 함께와 같이 일상적인 절차와 함께 세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