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노략질’ 왜구가 해외진출 개척자라고?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⑥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Ⅰ)
여말선초 왜구 때문에 골머리 중국서는 원대 이후 인식 악화 ‘왜노’ ‘광노’로 지칭하며 증오 | |
“동쪽으로 큰 파도 바깥에/ 왜노(倭奴)가 있는데 성품이 완악하다오/ 일찍이 성인의 교화를 받은 적 없어/ 언제나 흉악하고 간사하다오/ 도둑질과 노략질로 이웃나라 침범하여/ 바닷가 산기슭에서 삶을 훔치니/ 원컨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어/ 죄를 묻고 개선하여 돌아오소서.” 일본을 ‘왜노’라 부르고 ‘완악’, ‘흉악’, ‘간사’, ‘도둑질’, ‘노략질’ 등 부정적인 단어로 그들의 특성을 묘사한 뒤 주원장에게 일본을 토벌하라고 권하고 있다.
조선과 중국의 부정적인 왜구 인식 권근의 시에 보이는 부정적인 대일인식은 왜구(倭寇)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둑질, 노략질이 상징하듯이 우리가 아는 왜구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한반도 주변을 침략했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말한다. 근해에 쳐들어와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육지에 상륙하여 관아나 마을을 습격하여 물자를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했던 집단이 바로 왜구였다. 왜구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보면 ‘왜(일본인)가 구(쳐들어와 노략질)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1223년(고려 고종 10) 5월22일의 고려사에 “갑자, 왜가 금주를 구하다(甲子 倭寇金州)”라고 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일본 해적들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왜구’라는 명사로 굳어져 간 것으로 여겨진다. 왜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지녔던 것은 중국인들도 비슷했다. 당대와 송대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의 일본 인식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원대 이후 왜구의 침략과 피해를 경험하면서 일본에 대한 인식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원나라 문인 황진성(黃鎭成)은 ‘도이행’(島夷行)이란 시에서 왜구에 대한 공포심을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도이의 출몰은 날아다니는 송골매와 같으니/ 오른손엔 칼을 잡고 왼손엔 방패를 들었다네/ 큰 배와 빠른 배가 바다 위를 내달리면/ 화인(華人)은 아직 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네.” 일본 해적에 대한 공포심은 격한 증오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원대의 문인 왕을(王乙)은 절동(浙東) 지방을 노략질했던 왜구를 ‘광노’(狂奴)라 지칭하고 ‘왜구의 해골이 담긴 술잔을 한입에 들이켜고 싶다’며 증오심을 드러낸 바 있다.
여말선초 왜구 때문에 골머리 일본인들의 긍정적인 왜구 인식 조선인이나 중국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이 왜구를 보는 시각은 독특하다. 우선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왜구를 ‘중세 시기 일본인의 해외 진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일 관계사의 권위자인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는 “일본인의 해외 진출은 국제관계의 틀을 넘어 왕성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해상(海商)으로, 때로는 해구(海寇)로서 활약하여 동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고 강조했다. 왜구 대신 ‘해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침략’ 대신 ‘해외 진출’, ‘제해권’ 등의 표현을 써서 왜구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려고 했다. 왜구를 이렇게 긍정하려는 시각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두드러진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는 “해적이라 비웃지 말라. 파도의 건아, 만리의 대해를 개척한 자, 통상식민의 선구인 자. 보라. 오늘날 해상의 대왕인 영국인도 해적의 자손이 아닌가”라며 왜구의 행적을 영국의 해상 활동에 빗대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구에 대한 긍정과 미화는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케코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직후인 1938년 <왜구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상하이는 왜구 이전에는 저습한 지역의 가난한 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왜구가 자주 황푸강 부근에 상륙하자 성곽이 필요해져 1554년 성을 쌓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일본군이 다시 공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마주친 것은 여하튼 얄궂은 것이다. (…) 금일 전쟁터가 된 곳은 과거 모두 왜구들의 전쟁터였다. 일본인이 강남에서 활약하는 것은 거의 숙명적인 것이 아닐까.”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 등 강남 지방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왜구는 이제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운명적인 전범(典範)’으로까지 승화(?)되는 것이다. 왜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별반 좁혀지지 않았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왜구 집단을 ‘일본인뿐 아니라 고려·조선인과 중국인들도 포함된 다국적 해적 집단 혹은 해적 활동’으로 정의한다. 특히 금년에 문제가 된 지유사판 중학교 역사 교과서는 “왜구란 일찍이 원의 습격을 받았던 쓰시마(對馬島)·이키(一岐)·마쓰우라(松浦) 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해적집단으로 일본인 이외에 조선인 피차별민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구의 구성원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또 주목되는 것은 ‘원의 습격’을 거론하고 있는 점이다. 1274년과 1281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했던 것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왜구 활동을 벌였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일본에선 긍정적 인식 적지 않아 왜구의 침략과 고려의 고뇌 침략해 왔던 시기에 따라 살펴보면 왜구는 크게 13세기의 왜구, 1350년 이후의 왜구, 조선시대의 왜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1223년 처음으로 나타나 1265년까지 이어졌던 ‘13세기 왜구’의 침략은 다른 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100여명 정도의 인원이 2~3척의 배를 타고 경상도 연안을 노략질하다가 돌아가는 정도였다. 1350년(충정왕 2) 이후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시기의 왜구는 많을 때에는 수천 명의 병력이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한반도의 거의 전 지역을 침략했다. 연안과 내륙에 상륙한 뒤 사람을 죽이거나 납치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왜구가 지나간 지역에는 닭과 개도 남지 않고 연해 수천 리에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는 것이 당시의 참상이었다. 왜구의 침략 때문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고, 남해와 서해 연안의 고을 가운데는 치소(治所)를 내륙 지역으로 옮기거나 치소 자체가 아예 없어지는 곳이 나타났다. 왜구 선단의 위협 때문에 조운선의 운행이 어려워지면서 관리들의 녹봉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났는가 하면, 심지어 조정에서는 왜구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할 때 이성계가 ‘왜가 요동 원정을 틈타 쳐들어올 수 있으니 원정이 불가하다’(倭乘其虛 不可)라고 설파했던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왜구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고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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