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에 목숨 건 사내 마테르누스
고전 오디세이 46 ‘연설의 타락’과 타키투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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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세기 로마 광장에서 진정한 연설가는 검열에 손발 묶여 사라졌다. 마테르누스는 연설이 타락한 원인이 정치제도의 잘못에 있다고 확신해 수사학을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했다. 광장 대신 극장, 연설 대신 비극 서적을 택한 것이다. 타키투스 ‘대화’가 살아남게 된 결정적 한 수였을 것이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제정기에 출판된 서적들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주제가 하나 있다. 표현의 자유와 연설이 타락하게 된 원인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퀸틸리아누스, <숭고론>의 위(僞)-롱기누스가 이에 대한 글을 쓴 이들이다. 연설의 타락에 대한 주제가 이렇게 큰 인기를 끈 이유는,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libertas)와 직결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표현과 출판에 대한 검열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황제 가운데에는 자기가 자신을 검열관(Censor)으로 임용해 각종 표현과 연설을 직접 검열하고 조사하러 다닌 자도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라는 황제다. 이런 표현 환경의 변화 때문일까? 많은 지식인의 손발이 묶였고, 또한 대다수 연설가의 입은 굳게 닫혔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연설가는 로마 광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타키투스의 증언이다. 도대체 왜냐고? 옛날엔, 바로 몇 세대 전만 해도 탁월한 재능으로 빛나는 영광을 누렸던 뛰어난 연설가들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지금은, 특히 우리 세대에는 아예 그 씨가 말라 버렸고, 연설은 그 찬란한 빛을 잃어버렸으며, 아니 “연설가”라는 명칭마저도 이제는 지킬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이유를 말일세. 이제 “연설가”라는 명칭은 옛날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어버렸고, 요즘 사람들은 능란한 말솜씨를 부리며 법정에서 변론하는 이들을 “연설가”보다는 변호인 혹은 변호사 혹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 지경이 되어 버렸네. (<연설가에 대한 대화> 제1장, 이하 <대화>)
타키투스! 그도 이런 삼엄한 분위기에서 저술 활동을 한 역사가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문장가로, 이는 애매하고 중의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그의 문체에서 잘 드러난다. 이른바, “애매(曖昧) 문체” 현상은, 제정 시대의 저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어찌되었든, 이 시기에 저술된 책들은 공화정을 찬양하거나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퀸틸리아누스의 <로마 연설이 타락하게 된 원인들>이나 위-롱기누스의 <숭고론> 가운데에 망실된 텍스트의 내용을 추정해 보면, 대개는 황제정 비판과 공화정 찬양, 혹은 억압의 비판과 자유의 예찬을 담고 있는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책들은 조직적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결정적이었리라 추정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는 책이 타키투스의 <대화>다. 살아남게 된 <대화>에는 네 명의 논객이 등장한다. 대화의 사회자인 마테르누스, 메살라, 세쿤두스, 아페르가 그들이다.
황제가 직접 표현·연설 검열도
마테르누스는 황제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기원후 91년 앞에서 언급한 도미티아누스(기원후 재위 81~96) 황제에게 교수형을 당한 마테르누스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대화>에 묘사된 마테르누스는 이런 인물이다. 그는 성공한 변호사로 편안한 인생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정치적 주제를 다루는 비극 작가로 전업한 사람이다. 말투와 문체는 열정적이며 투쟁적이다. <대화> 전체를 주도하는 사회자로 “표현의 자유와 연설의 몰락에 대한 원인”이라는 의제로 대화를 이끄는 인물이기도 하다. 메살라는 시인이자 역사가였다. 특히, <대화>에서는 키케로의 문체를 예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대화>에서 공화정 시대의 로마 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중시하며 소위 옛 문체를 숭배하는 “상고주의”(archaismus)자이다. 세쿤두스는 퀸틸리아누스의 친구이고, 타키투스의 스승이다. 아페르는 변호사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이다. 그는 소위 문체 문제에 있어서는 “당대주의”(modernismus)를 표방한다. <대화>에서 그는 시대에 따라 청중의 귓맛과 독자의 눈맛은 바뀌기에, 키케로 같은 옛 시대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각기 자기 시대에 맞는 문체를 따라야 한다고 고집한다. 정치적으로는 명성과 부를 중시하고 제정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피력한다. 자, 사태의 핵심으로(in res medias!) 바로 가자. 연설이 타락하게 된 원인에 대한 네 사람의 입장은 이렇다. 마테르누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그 원인이 잘못된 교육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마테르누스는, 교육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 제도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반박한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 다른 대화자들은 교육을 통해 연설의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믿지만, 마테르누스는 교육에 그다지 큰 희망을 걸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설의 타락은 잘못된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표현 자유의 박탈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마테르누스는 자신의 주장을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데, 그의 결론은 수사학의 포기였다. 대신, 그는 이제 문학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마테르누스가 수사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더 큰 전제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단지 교육 방식의 개선만으로는 연설의 근본적인 질적 향상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한, 진정한 연설가 혹은 정치가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한적이지만 문학은 아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는 것. 이게 둘째 이유였을 것이다. 그나마, 극중의 허구적 인물의 입을 빌려 자유로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자유 연설이 금지된 광장(Forum)을 대신할 새로운 공간과 매체가 필요했는데, 그 공간이 극장이었고 그 매체가 비극 서적이라는 판단이 셋째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심지어는 생사를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친구들이 마테르누스에게 위험한 극작일랑 그만두고 안전한 수사학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 <대화>가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대화의 시작은 이렇다.
대화는, 마테르누스가 <카토>를 낭독했던 바로 그다음 날에 벌어졌다. 이것이 권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소리도 있고,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이런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작품의 줄거리 짜기에만 골몰해서 오로지 <카토>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 시내가 온통 이 이야기로 술렁일 정도였기에, 마르쿠스 아페르와 율리우스 세쿤두스가 그를 찾아왔는데, 이들로 말하자면 당대에 가장 잘나갔던 변호사들이었다. (<연설가에 대한 대화> 제2장)
문학 속 인물·풍자 통해 발언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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