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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에 무산된 요동정벌이 남긴 유산은...

이윤진이카루스 2011. 11. 26. 12:20

‘왕자의 난’에 무산된 요동정벌이 남긴 유산은…

명 강압에 격분한 정도전
장졸 훈련 등 정벌 구체화
사병철폐해 관군편입 뜻도

 

정도전 등이 구상했던 요동정벌 시도는 1397년(태조 6) 6월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초긴장 상태였다. 같은 해 4월, 명에서 돌아온 설장수는 주원장의 유시와 예부의 자문을 전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을 망칠 화근이므로 국왕은 빨리 그를 제거하여 나라를 보전하라’며 노골적으로 정도전을 성토했다. 또 표전 문제 때문에 붙잡아 두고 있던 정총, 노인도, 김약항 등을 ‘정도전의 패거리’라며 ‘화가 조선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명의 노골적인 강압에 격분한 정도전 일파는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태조를 설득하려고 부심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태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좌정승 조준이 이들의 기도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 명나라 기병의 모습. 정도전 등은 고토 회복의 열망을 바탕으로 명의 압박에 맞서 요동정벌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이미 전성기로 접어들어 있었고 조선보다 훨씬 강한 경제적·군사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정도전 등의 시도는 모험에 가까웠지만 명의 부당한 압력에 당당히 맞서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국강역의 변천>(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출판) 수록 도판
조준, 요동정벌론을 성토하다

명 강압에 격분한 정도전
장졸 훈련 등 정벌 구체화
사병철폐해 관군편입 뜻도

1397년 6월, 정도전은 군사 지휘의 요체를 담은 <진도(陣圖)>를 각 지방에 내려 보내 장졸들을 훈련시키도록 독려했다. 요동정벌 구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포석이었다. 태조는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그 필요성이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태조는 당시 와병 중이던 좌정승 조준에게 의견을 묻는다.

누워 있던 조준은 즉시 가마를 타고 입궐하여 정도전 등의 구상을 반박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하게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명)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거사해봤자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의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사대의 명분을 어기고, 이미 강성해진 명나라를 공격해 봐야 화를 부를 뿐이라는 것이 조준의 판단이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단행할 때 내세웠던 명분을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조준의 의견을 들은 뒤 태조가 기뻐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남은은 태조에게 ‘소소한 일을 담당하는 것은 능하지만 더불어 대사를 논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못 된다’며 조준을 성토했다.

 





요동정벌을 꾀하던 정도전 일파에게 조준의 반대는 뼈아팠다. 정도전과 조준은 태조 이성계가 신임하고 의지하는 양대 기둥이었다. 정도전이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공신이자 책사였다면, 조준은 태조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사회경제 정책을 주도해온 핵심 참모였다. 정도전은 일찍이 조준의 화상에 쓴 진찬문(眞贊文)에서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살핀 조준의 공덕은 천만년 동안 빛날 것’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요동정벌 문제를 계기로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 태종 이방원의 능. 이방원은 1398년 8월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 등을 제거했다. 그는 이후 명에서 벌어진 내전을 주시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부심했다. 문화재청 누리집
정도전의 구상과 정벌의 성공 가능성

좌정승 조준 반대 부딪히다
이방원에 축출당한 정도전
“대국 맞서 원칙 지켜” 평가

조준의 강력한 반대에 밀려 주춤했던 정벌 시도는 1398년 윤 5월 무렵부터 재연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명이 조선 사신 정총 등을 살해한 데다 이후에도 표전 작성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하는 등 압박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조선에서도 정도전 등의 정벌 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 등은 군사력을 정비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진도>를 강습하는 데 소홀한 내외 관리들을 엄중하게 처벌했다. 유비고(有備庫)를 두어 군량미 비축에 나서고 도성과 가까운 양주의 목장에서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태조 또한 관망하던 자세를 벗어던지고 정도전 등의 구상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시도했던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본래부터 고토 회복의 열망을 품었던 데다 명의 강압이 이어지자 정벌 실천의 의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정도전은 또한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공신과 종실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 원정에 필요한 군사력 확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병을 철폐하고 그들을 국군으로 편제하려 했다. 그것은 막 건국한 조선의 정치체제를 안정시키는데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요동정벌 구상이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요동정벌 시도에 반대했던 조준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정벌의 성공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선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강조했다. 건국 직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궐과 관아 등을 짓는 토목공사 때문에 백성들이 힘이 이미 고갈되었다고 진단했다. 또 건국 직후부터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기 때문에 원정에 필요한 군량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장졸들의 훈련 상태가 미흡했던 상황도 지적했다. 조준은 나아가 명이 이미 전성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선의 군사적 도전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정도전은 과연 그 같은 사정을 몰랐을까? 정도전은 자신이 쓴 진법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4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적은 병력을 공격한다’, ‘정돈된 군대로 어지러운 군대를 공격한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공격한다’, ‘훈련된 군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군대를 공격한다’ 등이 그것이었다. 당시 명과 조선의 전반적인 국력의 격차, 경제 전문가였던 조준이 분석한 현실, 나아가 정도전 스스로 제시한 ‘공격 원칙’ 등을 고려하면 요동정벌 시도는 모험이었던 셈이다.

 

꿈의 좌절과 조명관계의 안정 

정도전은 1398년 8월,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개국 과정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음에도 공신이 되지 못하고 왕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났던 이방원의 불만은 컸다. 논공행상과 왕세자 책봉을 주도한 정도전에 대한 원한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요동정벌을 계기로 사병까지 빼앗기고 무장해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이방원은 거사를 단행했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가장 신임하던 심복과 왕세자를 잃은 태조는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하야한다.

정도전의 죽음, 태조의 하야와 함께 요동 정벌의 꿈도 사라졌다. 동시에 정도전은 ‘역적’이자 ‘간신’, ‘목숨을 구걸한 비겁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곧이어 조선에게 강압을 일삼았던 주원장도 세상을 떠난다. 양국 관계를 긴장시켰던 두 장본인이 잇따라 사라진 것이다. 조명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정도전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토 수복을 열망했던 ‘민족주의자’였을까? 아니면 현실을 무시한 ‘모험주의자’였을까?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원명교체를 겪고 조선의 개창을 주도하면서 그가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확고한 원칙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정도전은 ‘대국’에 대해 공순히 사대할 것을 강조했지만, ‘대국’이 ‘소국’을 함부로 능멸하려 할 때는 당당히 맞서려 했고 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 노력했던 ‘원칙주의자’였다.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