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절대적 옳음의 기준은 없지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이윤진이카루스 2023. 1. 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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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적 옳음의 기준은 없지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이나 다른 권위가 특정 과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 명령이 옳다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권위의 표준들은 (도덕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수용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나이다. (), 그의 계명들이 훌륭하다는 조건으로만 훌륭하다; ()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옳은 것들을 명령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가 먼저 결정하지 (우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않는다면 신()의 계명들이 신()의 것이라는 이유로만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사실상 비도덕인 권위주의 채택 터이다.

타율성과 반대로, 이것이 칸트의 자주성(autonomy) 관념이다. 그리하여 권위, 심지어 종교적 권위의 도움을 받아도, 절대적 옳음이나 선함이라는 규제적 관념이 자체의 논리적 위상에서 절대 진리라는 규제적 관념과 다르다는 난제로부터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차이점이, 어떤 의미에서 표준들을 제시하고 토론하여 채택함에 의하여 우리가 표준들을 만들어낸다는 위에 언급된 사실의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들이나 적어도 진리에 더 근접하는 명제들을 우리가 찾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표준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옳거나 유효한 제안들을 혹은 적어도 낫거나 더 유효한 제안들을 찾을 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분명히 하기 위하여, 절대 진리라는 사실들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념을, 표준의 영역에 대한 일종의 모형으로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태도를 찾기를 넘어 발견하기까지 확대한다는 것은 오류일 터임이 나의 견해이다. 이유인즉 절대적으로 옳거나 유효한 제안들을 우리가 찾아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제안들을 확정적으로 발견했다고 스스로 확신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절대적 옳음의 기준이 있을 리가 없기 절대 진리의 기준보다 훨씬 덜 때문이다. 행복의 최대화가 기준으로서 의도되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참의 최소화가 공리주의 이념들 중 몇 가지 이념들에 대한 개선이라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비참의 최소화를 기준으로서 채택해야 한다고 내가 추천한 적이 틀림없이 없다. 사람의 행복의 최대화는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에 남겨져야 하는 반면 방지될 수 있는 비참의 감소는 공공정책의 의제에 (공공정책의 어떤 문제도 비참을 최소화하는 계산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 속한다고 나는 또한 제안했다. (기준으로서 사용된다면 최소 비참 원칙은 터무니없는 결과들을 낳을 터임 밝히고 나를 비판하는 저 사람들에게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그리고 다른 도덕적 기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절대적 옳음의 기준에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이 영역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사실들의 영역에서처럼, 우리는 발견을 이룩할 수 있다. 잔인성은 항상 나쁘다는 것; 잔인성은 가능한 곳에서 항상 방지되어야 한다는 것; 황금율은, 가능한 곳마다 다른 사람들이 대우 받기를 원하는 바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우함에 의하여 아마도 개선될 수 있는 훌륭한 표준이라는 것: 이것들은 표준들의 영역에서 발견들에 대한 기초적이고 극도로 중요한 사례들이다.

이 발견들로 인하여 무(: nothing)로부터 표준들이 생성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사실적 발견의 분야에서처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양시켜야 한다. 이것은 특수한 사실이다: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오류에 의하여 그리고 비판에 의하여; 그리고 사실들의 영역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표준들의 영역에서 잘 배울 수 있다는 것.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1971, 385-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