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옳음의 기준은 없지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신(神)이나 다른 권위가 특정 과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 명령이 옳다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권위의 표준들은 (도덕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수용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나이다. 신(神)은, 그의 계명들이 훌륭하다는 조건으로만 훌륭하다; 신(神)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옳은 것들을 명령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가 먼저 결정하지 (우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않는다면 신(神)의 계명들이 신(神)의 것이라는 이유로만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ㅡ 사실상 비도덕인 권위주의 채택 ㅡ 터이다.
타율성과 반대로, 이것이 칸트의 자주성(autonomy) 관념이다. 그리하여 권위, 심지어 종교적 권위의 도움을 받아도, 절대적 ‘옳음’이나 ‘선함’이라는 규제적 관념이 자체의 논리적 위상에서 절대 진리라는 규제적 관념과 다르다는 난제로부터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차이점이, 어떤 의미에서 표준들을 제시하고 토론하여 채택함에 의하여 우리가 표준들을 만들어낸다는 위에 언급된 사실의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들이나 적어도 진리에 더 근접하는 명제들을 우리가 찾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표준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옳거나 유효한 제안들을 ㅡ 혹은 적어도 낫거나 더 유효한 제안들을 ㅡ 찾을 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분명히 하기 위하여, 절대 진리라는 ㅡ 사실들에 대한 대응이라는 ㅡ 관념을, 표준의 영역에 대한 일종의 모형으로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태도를 찾기를 넘어 발견하기까지 확대한다는 것은 오류일 터임이 나의 견해이다. 이유인즉 절대적으로 옳거나 유효한 제안들을 우리가 찾아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제안들을 확정적으로 발견했다고 스스로 확신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절대적 옳음의 기준이 있을 리가 없기 ㅡ 절대 진리의 기준보다 훨씬 덜 ㅡ 때문이다. 행복의 최대화가 기준으로서 의도되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참의 최소화가 공리주의 이념들 중 몇 가지 이념들에 대한 개선이라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비참의 최소화를 기준으로서 채택해야 한다고 내가 추천한 적이 틀림없이 없다. 사람의 행복의 최대화는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에 남겨져야 하는 반면 방지될 수 있는 비참의 감소는 공공정책의 의제에 (공공정책의 어떤 문제도 비참을 최소화하는 계산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 속한다고 나는 또한 제안했다. (기준으로서 사용된다면 최소 비참 원칙은 터무니없는 결과들을 낳을 터임 밝히고 나를 비판하는 저 사람들에게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그리고 다른 도덕적 기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절대적 옳음의 기준에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이 영역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사실들의 영역에서처럼, 우리는 발견을 이룩할 수 있다. 잔인성은 항상 ‘나쁘다’는 것; 잔인성은 가능한 곳에서 항상 방지되어야 한다는 것; 황금율은, 가능한 곳마다 다른 사람들이 대우 받기를 원하는 바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우함에 의하여 아마도 개선될 수 있는 훌륭한 표준이라는 것: 이것들은 표준들의 영역에서 발견들에 대한 기초적이고 극도로 중요한 사례들이다.
이 발견들로 인하여 무(無: nothing)로부터 표준들이 생성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사실적 발견의 분야에서처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양시켜야 한다. 이것은 특수한 사실이다: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오류에 의하여 그리고 비판에 의하여; 그리고 사실들의 영역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표준들의 영역에서 잘 배울 수 있다는 것.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385-38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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