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념과 신념은 옳은가?
우리들의 관념들 및 신념들이 옳은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이미 2,500년 전에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딜스-크란츠[Diels-Kranz], B, 16, 15):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신들(gods)은 납작코에 검은색이라 말하고
반면 트라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들이 벽안에 붉은 머리털이라고 말하네.
그러나 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이 있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터이고
사람처럼 조각할 수 있을 터라면 말은 자신의 신들을
말처럼, 그리고 소는 소처럼 그릴 터이지; 그리고 그것들 각각은
신들의 몸체들을 각종 자신들과 닮게 조성할 테지.
그래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전통과 자신의 양육에 따라서 자신의 신들(gods)과 자신의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본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이 주관적 편견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이 논증은 다양한 방식들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종이나 우리의 국적 혹은 우리의 역사적 배경이나 우리의 역사적 기간 혹은 우리의 계급이익이나 우리의 사회적 서식처나 우리의 언어 혹은 우리의 개인적 배경지식은 객관성에 대한 극복될 수 없거나 거의 극복될 수 없는 장애물이라고 주장되었다.
이 주장이 근거하는 사실들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편견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주장 자체나 그 주장의 상대주의적 결론들을 수용할 필요가 없다. 이유인즉 무엇보다도 비판적 사고라는 수단 그리고 특히 비판을 청취하는 수단에 의하여 우리는 단계적으로 이 편견들을 얼마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세노파네스는 편견적인 덜한 정도로 사물들을 보는 자기 자신의 발견에 의하여 틀림없이 도움을 받았다. 두 번째, 가장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진리에 더 근접하는 데 관심을 갖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여 서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유용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문화적 및 언어적 장애물들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극복 불가능하지 않음이 밝혀진다.
그리하여 모든 분야에서 크세노파네스의 발견으로부터 진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만심을 버리고 비판에 열린 자세를 취하는 것. 그러나 비판을 향한 발걸음인 이 발견을 상대주의를 향한 발걸음으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 또한 가장 중요하다. 두 명의 상대방들이 의견을 달리한다면, 하나나 나머지 하나가 틀리거나 둘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이것이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비판론자의 견해이다. 상대주의자가 의미할 것처럼, 두 사람 모두 동등하게 옳다고 그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의심할 바 없이 두 사람 모두가 동등하게 틀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등하게 틀렸다는 것은 동등하게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단어들로써 혹은 은유들로써 장난을 치고 있을 따름이다.
자기-비판적이 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커다란 전진 발걸음이다; 다른 동료가 옳을지도 ㅡ 우리 자신들보다 더 옳을지도 ㅡ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이것에는 관련된 커다란 위험이 포함된다: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 쌍방이 옳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태도는 우리에게 겸손하고 자기-비판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믿고 싶을 만큼 겸손하지도 자기-비판적도 아니다; 이유인즉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쌍방이 틀렸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기-비판은 태만에 대한 그리고 상대주의 채택에 대한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두 가지 틀린 것이 두 가지 옳은 것이 되지 않듯이, 두 집단이 논쟁한다고 해서 두 집단이 옳게 되지 않는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387-388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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