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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이윤진이카루스 2012. 2. 1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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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북한군이 쳐들어왔나? 느닷없었다

등록 : 2012.02.10 20:38 수정 : 2012.02.10 20:38

 

1971년 7월 미국의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오른쪽)과 태릉 육사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박정희.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군철수는 그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사진 출처 <73보도사진연감>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②유신전야
남북대화가 진행중이었고
미국과 중·소는 화해무드였다
무엇이 비상사태란 말인가
야당 도전자와 여당 후계자
그는 모두 용납할 수 없었다

1972년 10월17일 저녁 7시 대통령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중대한 결심”을 담았다는 이 선언을 통해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겠다고 밝혔다.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때로부터 치면 11년 반, 3선 개헌을 통해 7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으로부터 치면 15개월 만에 박정희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하여 다시 한번 헌정을 유린했다. 박정희는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갑갑한 외피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한 유신체제를 출범시키면서 종신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권좌에 앉은 채 죽었으니 종신집권의 허망한 꿈은 이뤘다 하겠으나, 국민들에게나 박정희 자신에게나 불행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10·2항명사건과 집권세력 내부 평정

박정희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일대 유신적 개혁’이 필요한데, “우리의 정치 현실을 직시할 때, 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 같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면서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한반도의 외부와 내부에 조성된 위기상황 때문에 유신이라는 비상조치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과연 우리는 박정희의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유신의 원인을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논쟁’이라 부를 것도 없이 싱겁게 결론이 내려졌다. 절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박정희가 내세운 위기란 과장된 것이고, 실제 위기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헌정 중단과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데 거의 이견이 없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13권짜리 전기를 쓴 수구논객 조갑제조차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특별선언문 어디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고 인정했다. 유신체제 출현의 근본 원인이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박정희에게 종신집권의 야욕이 없었다면 유신체제와 같은 독재체제가 튀어나와야 할 역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이 위험한 생각을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해 나갔는가는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유신체제의 출현을 정당화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1970년대 초반의 국내외 상황은 박정희 정권에 만만치 않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었다. 밖으로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동서 간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한국전쟁에서 맞붙었던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진행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안으로는 급속한 산업화가 빚어낸 온갖 사회경제적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한국 사회 내부를 들여다보자.

1971년 4월의 7대 대통령 선거와 5월의 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거센 도전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은 의석을 크게 늘리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직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3선 임기가 다하는 1975년 박정희는 여당의 후계자이든 야당의 도전자이든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야당에 정권을 내준다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 없고, 집권세력 안에서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세력 안에서 김종필이 2인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 공화당 안에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을 주축으로 한 ‘4인 체제’를 구축했다. 4인 체제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주)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 그의 절친한 친구로 5·16 직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었다가 처형당한 황태성 등과 함께 경북지방에서 좌익활동을 한 바 있었다. 세 사람의 운명은 1946년 10월항쟁을 거치면서 갈려 박상희는 총에 맞아 죽고, 황태성은 월북하고, 김성곤은 남쪽에 남아 실업가로, 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으로 정치자금을 주무르며 실력자로 부상한 김성곤은 1975년 박정희가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이원집정부제 개헌에 대한 구상을 다듬으면서, 지방의 시장·군수와 경찰서장 등에 자기 사람을 심는 데 분주했다.

박정희는 김종필 계열의 내무장관 오치성을 내세워 김성곤 등 4인 체제가 지방 요직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에 분노한 김성곤 등은 야당이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내자 이에 동조하여 오치성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이것이 유신 1년 전의 이른바 10·2 항명파동이다. 박정희의 특명으로 김성곤 등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데,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히는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10·2 항명사건으로 공화당 안에서 박정희의 친정체제가 확립되었다. 일개 육군소장이던 박정희는 5·16 군사반란 후 수많은 ‘반혁명사건’을 만들어 가며 군부 내 껄끄러운 선후배들을 제거했고, 제이피(JP)계와 4인 체제 사이의 이이제이, 3선개헌과 정보정치의 주역이었던 ‘날으는 돈까스’ ‘공포의 삼겹살’ 김형욱에 대한 토사구팽 등을 거치며 집권세력 내부를 완전히 평정했다.


수련의들의 파업과 법관들의 사표

야당인 신민당은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통해 만만치 않은 세력을 과시했지만, 정통 보수야당 한민당의 맥을 계승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도로 강한 보수성을 띠고 있었다. 한국의 야당은 계급적 기반에서 집권여당과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의 배분 과정에서 배제된 정치세력의 집합체였다. 이런 역사적 뿌리와 이념적 동질성 때문에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사꾸라’가 만발할 수 있었고, 야당의 당수였던 유진산은 ‘왕사꾸라’로 불리곤 했다. 유신 전야의 신민당은 진산파와 반진산파가 서로 따로따로 전당대회를 치를 만큼 분열되어 있어 대중들의 기대에 걸맞게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거나 수권세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런 야당과 의회를 “민족적 사명감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 온 대의 기구”라고 조롱했다.

보수적이고 분열된 야당은 시민사회의 각 세력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20년이 지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두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한국 사회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1일 자신의 세번째 임기를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6월16일부터 시작된 국립의료원 수련의들의 파업은 전국의 국립대학 부속병원 수련의들에게 급속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수련의 파업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7월28일에는 사법파동이 발생하여 전국의 소장 법관들이 사표를 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의사와 법관이라는 한 사회의 정점에 있는 엘리트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뿐이 아니었다. 8월10일에는 지금은 성남시가 된 광주대단지에서 주민 5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서울의 개발과 팽창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들과 전매 입주자들은 총선 때 공장을 유치하여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등의 장밋빛 공약이 전혀 지켜지지 않자 “배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 “토지불하가격을 인하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관공서와 차량을 불태우고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당시의 언론은 이들이 광주대단지를 공포와 무질서로 휘몰아 넣었다면서도 땅값 인상, 세금 공세에 겹쳐 심한 생활고에 지친 주민들의 축적된 비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고 동정을 표시했다.

9월15일에는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던 한진상사 노동자 400여명이 “밀린 임금을 지불해 달라”며 서울 중구의 KAL빌딩에 난입하여 방화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한편 8월18일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을 선두로 교수들은 대학자주화선언을 벌여 나갔고, 대학생들은 연초부터 격렬한 교련반대시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10월15일 박정희 정권은 경찰력만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수 없자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군을 출동시켰다. 서울 시내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진주하고 주요 대학에는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지고 학생 1900여명이 연행되고, 학내 서클 74개가 해산되었다. 전 회에 언급한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도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1971년을 뒤흔들었던 국내의 이런 저항은 1972년에 들어와 많이 약화되었다.

베트남전을 확대해간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과 달리, 1968년 대통령에 취임한 공화당의 닉슨은 1969년 7월 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은 “스스로가 자신의 방위에 대하여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이 정책에 따라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한반도에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도 시작되었다. 미군의 철수는 박정희 정권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북에 비해 수십배 이상의 국력을 보유한 오늘날도 남쪽 사회의 수구세력은 주한미군의 철수나 전시작전지휘권 이양 문제에 기겁을 하는데, 북쪽의 국력이 남쪽보다 앞섰던 당시 상황에서 미군 철수가 가져온 충격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특히 남쪽 사회는 아직 북쪽의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기습했던 1968년의 1·21 사건과 그해 11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00여명이 침투했던 사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71년 12월6일치 . 유신 전부터 박정희는 권력을 틀어쥐었다.(위 사진)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왼쪽)과 좌익 출신으로 여당 내 실력자였던 김성곤. 10·2 항명사건으로 김성곤은 중정에 끌려가 콧수염이 뽑히는 치욕을 당한다. 사진 출처 <박대통령의 입 9년>
체 게바라와 베트남전 제2전선

박정희와 한국군 장성들은 이북이 ‘수령님의 환갑잔치’(1972년)는 서울에서 하자고 떠들어댄다며 이를 직접적인 남침 위협으로 간주했지만, 미국의 판단은 달랐다. 휴전선에서의 충돌은 1965년과 1966년 각각 88건과 80건에서 1967년 784건, 1968년 985건으로 급격히 늘어났지만, 이것은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고, 1969년 하반기부터는 북쪽의 도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쿠바에서 2인자 역할을 하던 체 게바라가 불현듯 볼리비아로 떠난 것은 그의 연설 제목처럼 ‘둘, 셋 보다 많은 베트남을 만들어내자’는 의도에서였다. 박정희는 베트남은 한국전쟁의 제2전선이라며 5만 대군을 보냈는데, 김일성은 기백명의 게릴라로 한반도를 베트남전쟁의 제2전선으로 만들어 주월 한국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양치기 소년처럼 북쪽의 전면남침이 임박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은 유신이 선포된 1972년 10월의 한반도 안보상황은 한국한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중국과 소련 두 사회주의 강대국은 서로 반목하면서 각각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북이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 내지는 동조 없이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자신도 1971년 신년사에서 “올해부터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이지만 자신은 “이 시기가 결코 위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정도의 도전은 한국의 자주적 능력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반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1971년 12월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박정희는 최근(10월25일) 중국이 대만을 몰아내고 유엔에 가입한 것을 거론하며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시할 것이고,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2월27일 새벽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법은 지난 6일에 선포된 국가비상사태를 소급해서 법적으로 뒷받침했을 뿐 아니라 박정희에게 집회 및 시위의 규제,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는 문제에 관한 언론 및 출판의 규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의 규제 등을 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부여했다. 이 조치를 어기는 자는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유신 10개월 전, 이미 박정희는 모든 권력을 틀어쥔 것이다. 단 하나,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을 수 있게 해주는 ‘헌법’만 빼놓고….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가 유신에 대해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이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냉랭하게 말한 것은 그 당시 상황이 위기상황도 아니었고, 박정희가 이미 비상대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