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mysticism)의 정체
맥타가트(McTaggart)가 자신의 탁월한 연구 신비주의(Mysticism)에서 (S. V. 킬링[Keeling] 편집, 1934년, 특히 47쪽 이하, 그의 철학적 연구[Philosophical Studies] 참조) 밝힌 바와 같이, 신비주의의 근본적 관념은 두 가지이다: (ɑ) 신비적 결합(mystic union)이라는 교설 다시 말해서 평범한 경험의 세상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실재의 세상에 더 큰 통합이 있다는 주장 그리고 (b) 신비적 직관(mystic intuition)이라는 교설로 다시 말해서 평범한 경험에서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보다 ‘알려진 것을, 알려지는 것에 더 가깝고 더 직접적 관계로 가져오는’ 아는 방식이 있다.‘ 이 두 가지 특징 중에서 신비적 결합이 더 근본적’이라고 맥타가트는 올바르게 주장하는데 (48쪽) 왜냐하면 신비적 직관이 ‘신비적 결합’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훨씬 덜 근본적인 세 번째 특징은 (c) 신비적 사랑(mystic love)이라고 우리는 부언할 것인데 그것은 신비적 결합과 동시에 신비적 직관의 사례이다.
이제 그리스 철학사에서 신비적 결합이라는 교설이 파르메니데스에 의하여 하나(one)라는 그의 전체론적 교설에서 (현재 장의 주석41과 비교하라) 최초로 분명하게 주장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것을 맥타가트가 알지 못했다); 그다음 신비적 직관과 신성한 것과의 교감이라는 정교한 교설을 추가한 플라톤에 의하여 주장되었는데 (8장과 비교하라) 그 교설과 관련하여 파르메니데스에게 바로 최초의 시작이 있다; 그다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예를 들어 영혼에 관하여(De Anima), 425b30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된다: ‘실제 듣기와 실제 소리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 국가(Rep.), 507c, 이하, 430a20 그리고 431a1과 비교하라: ‘실재적 지식은 그 대상과 동일하다.’ (영혼에 관하여[De Anima], 404b16 및 형이상학[Metaphysics], 1072b20 그리고 1075a2를 참조하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 45b-c, 47a-d; 메논[Meno], 81a, 이하; 파이돈[Phaedo], 79d와 비교하라); 그리고 그다음에 신(新)-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데 그들은 신비적 사랑이라는 교설을 상술하고 그 교설에 대한 시초만 플라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철학자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국가[Rep.], 475 이하의 교설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 교설은, 전체론 및 신성한 진리에 대한 철학자의 교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사실들과 우리의 역사관련 분석을 고려하여, 신비주의를 닫힌사회의 붕괴에 대한 전형적 반발 중 하나로서 우리가 해석하게 된다; 자체의 기원에서 열린사회를 겨냥하고, 종족적 통합이 불변하는 실재로서 드러나는 천국의 꿈으로의 도피로서 기술될 반발.
이 해석은, 베르그송의 도덕성과 종교의 두 가지 기원(Two Sources of Morality and Religion)에서 그의 해석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이유인즉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도약을 이룩하는 것은 신비주의라고 베르그송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충분히 다용도여서 어떤 정치적 노선으로도 작동한다고 물론 틀림없이 인정된다 (제이콥 바이너[Jacob Viner]가 한 서한에서 나에게 친절하게 지적한 봐와 같이); 그리고 심지어 열린사회의 사도들 가운데서도, 신비론자들과 신비주의 대표들이 있다. 틀림없이 플라톤뿐 아니라 소크라테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은 것은 낫고 덜 분할된 세상에 대한 신비적 영감이다.*
19세기, 특히 헤겔과 베르그송에게서 우리가 진화론적 신비주의를 발견한다고 언급될 것인데 그 신비주의는 변화를 극찬함에 의하여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변화에 대한 증오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형태의 신비론의 기본을 이루는 경험은, 변화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두 가지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동일한 듯하다. 두 가지 형태의 신비주의 모두는 사회적 변화의 무서운 경험에 대한 반발들이다: 전자(前者)는 변화가 중지될 것이라는 희망과 연결된다; 후자(後者)는 실재적이고 본질적이며 환영받는 것으로서 변화를 다소 발작적으로 (그리고 틀림없이 양가적[兩價的: ambivalent]) 수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1971년, 314-5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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