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론에 대한 반박
다윈론은 통상적으로 잔인한 철학으로서 간주된다: 다윈론은 ‘이빨과 발톱이 빨간 자연’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일반적 생명체들에게 자연이 적대적 위협을 가하는 그림. 나의 주장은, 이것이 다윈론의 편향된 견해라는 것인데 그 견해는 다윈 이전에 존재했던 이념들에 (맬서스, 테니슨[Tennyson], 스펜서[Spencer]) 의하여 영향을 받았고 다윈론의 실제 이론적 내용과 거의 관계가 없다. 다윈론이 소위 ‘자연선택’을 크게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윈은 맬서스에게서 영향받았는데 맬서스는 인구증가가 식량부족과 결합하여 잔인한 경쟁인 최강자의 선택과 그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전멸을 야기할 것임을 밝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맬서스에 따르면, 심지어 최강자들도 경쟁에 의하여 압력받는다: 최강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발휘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리하여 이 해석을 토대로, 경쟁은 자유의 제약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밝혀질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유를 확대하기를 추구한다: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체장애자들과 같은 개별적 인간을 위한 장소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생태적 장소들의 발견 및 건설과 함께, 생계유지의 새로운 수단들과 그 수단들과 함께 생명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의 발견을 선호하는 과정으로서 경쟁은 분명히 간주될 수 있다.
이 가능성들은, 증가된 선택의 자유와 더 많은 자유라는 대안적 결정들 사이에서의 선택을 수반한다.
그 두 가지 해석은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해석은 비관론적이다: 자유의 제약. 두 번째 해석은 낙관론적이다: 자유의 확대. 두 가지 해석 모두는 물론 과도한 단순화이지만 진리에 대한 훌륭한 근사치로서 간주될 수 있다. 두 가지 해석 중 한 가지 해석이 나은 해석이라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쟁 사회의 커다란 성공과 그 성공이 가져온 커다란 자유의 확대는 낙관론적 해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 해석은 나은 해석이다. 그 해석은 진리에 더 가깝다, 그 해석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부로부터의 압력인 개인적 주도권과 새로운 가능성 탐색 및 새로운 자유 탐색 그리고 이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활동이,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보다 더 효율적인데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에 의하여 더 약한 개체들이 제거되고 심지어 가장 강한 자의 자유가 축소된다.
이 언급들 내내 나는, 인구증가 때문에 발생하는 압력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제 다윈의 진화론을 자연선택을 통하여 해석하는 문제는 내가 보기에 맬서스의 이론을 해석하는 문제와 아주 유사하다.
오래되고 비관적이고 여전히 수용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적응에서 생명체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생명체들은 매우 이질적 개체군(個體群: population)을 구성하는데 그 개체군으로부터 경쟁이자 생존투쟁에 의하여 다른 개체들이 제거됨에 의하여 (대체로) 최고로 잘 적응된 개체들이 선택된다. 선택압력은 외부에서 온다.
모든 현상, 특히 적응 현상은 이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을 참고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통상적으로 크게 강조된다. (유전자 집합)의 변화 가능성인 돌연변이들을 제외하여 내부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나의 새로운 낙관론적 해석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활동을 강조한다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에 완전히 몰두한다. 그들의 첫 번째 문제는 생존이다. 그러나 가장 다양한 상황들에서 발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구체적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한 가지 문제는 나은 생활 환경을 찾는 것이다: 더 큰 자유를 찾는 것; 나은 세상을 찾는 것.
이 낙관론적 해석에 따라서, 강력한 내부 선택압력이 매우 초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자연선택을 통해서이고 (우리가 상상할 바) 외부적 선택압력을 통해서이다; 생명체들이 자기들의 환경에 발휘하는 선택압력. 이 선택압력은, 우리가 새로운 생태적 지위 탐색으로서 해석할 종류의 행태로서 드러난다. 때때로 그것은 심지어 새로운 생태적 지위의 건설이 된다.
이 내부로부터의 압력은 지위들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생활방식과 환경의 선택으로서 간주될 행태의 형태들로 이어진다. 이것은 친구들 선택, 공생(共生: symbiosis)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마도 생물학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배필의 선택을 포함한다고 틀림없이 생각된다; 그리고 특정 종류의 먹이, 특히 태양광선에 대한 선호.
그리하여 우리에게 내부적 선택압력이 있다; 그리고 낙관론적 해석은 이 내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을 적어도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만큼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생명체들은, 심지어 스스로 생명체의 변화를 겪지 않고도, 새로운 지위를 탐색한다; 그리고 생명체들은, 자기들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선택된 지위의 선택압력인 외부적 선택압력의 결과로서 나중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과 내부로부터의 선택압력 사이에 상호작용들의 원(circle) 혹은 더 정확하게 나선형이 있다고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이다. 두 가지 해석에 의하여 다르게 답변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 원이나 나선형에서 어느 고리가 능동적이고 어느 고리가 수동적인가? 옛 이론은 능동성을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 안에 둔다; 새로운 이론은 내부로부터의 선택압력 안에 둔다: 선택하는, 능동적인 것은 생명체다. 두 가지 해석 모두는 동일한 객관적 내용에 대한 이념적 해석들이자 이념들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두 가지 해석 중 다른 한 가지 해석에 의해서보다 한 가지 해석에 의하여 더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자체의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승리로서 간략하게 서술할 터이다. 본질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ㅡ 물론 가설적으로 ㅡ 바와 같이 모든 생명이 점진적으로 진화한 원초적 세포가 있었다. 다윈론의 진화론적 생물학에 따르면 이것은, 자연이 극도로 잔인한 끌(chisel)을 사용하여 생명체를 다루었다는 가설에 의하여 제일 잘 설명되는데 그 끌(chiesel)은 그다음 우리가 놀라는 모든 생명체의 적응을 조각했다.
그러나 이 견해를 부인하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지적할 것이다: 원초적 세포는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는 모두 그 원초적 세포이다. 그것은 심상(image)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며 더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진리이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매우 간략한 설명만 제시하고 싶다. 세포에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죽음이고, 두 번째 세포분열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융합이다: 또 다른 세포와 합치는 것인 결합인데 그 결합으로 인하여 거의 항상 분열이 일어난다. 분열이나 결합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번식의 과정이고 하나의 살아있는 세포가 거의 동일한 두 개의 살아있는 세포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는 원래 세포가 살아서 계속되는 것이다. 원초적 세포는 수십 억 년 전에 나타났고 원초적 세포는 수십조 세포들의 형태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세포는, 지금 살아있는 모든 세포 중 각각 하나의 세포 안에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생존한 적이 있는 모든 것과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원초적 세포가 분열을 일으킨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원초적 세포로 구성되는데 그 세포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것들은, 생물학자가 논쟁할 수 없는 문제들이고 어떤 생물학자도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나의 현재 신체의 원자 하나도 30년 전 나의 몸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30년 전과 동일하다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유전자 동일성[genidentity]) 우리는 모두 원초적 세포이다.
‘이빨과 발톱’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환경에 대한 그림 대신, 작고 하찮은 생명체가 수십억 년 동안 생존에 성공하고 자체의 세상을 정복하여 개선하는 데 성공한 환경을 나는 본다. 그러므로 생명체와 환경 사이에 투쟁이 있다면 생명체가 승리했다. 다윈론에 대하여 다소 수정된 이 개념으로 인하여 옛 이념에 대한 견해와 완전히 다른 개념 즉, 생명체의 활동과 생명체의 나은 세상 탐구 덕분에 생명체에게 점점 더 쾌적하고 점점 더 많이 호의적이 된 세상에 우리가 산다는 견해가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누가 이 견해를 인정하고 싶을까? 오늘날 모든 사람이 세상이 그리고 ‘사회’가 전체적으로 사악하다는 설득력이 있는 허구를 신뢰한다;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모든 사람이 하이데거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을 신뢰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나 사악함에 대한 그릇된 신뢰 자체가 사악하다: 그 신뢰로 인하여 젊은이들이 낙담하고 의심과 절망 그리고 심지어 폭력에 잘못 발을 들여놓는다. 이 그릇된 신뢰는 본질적으로 정치와 관련될지라도, 다윈론에 대한 옛 해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뢰에 기여했다.
매우 중요한 논지가 그 비관론적 이념의 일부를 형성하는데 즉,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적응과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체의 이 모든 (내가 생각하기에 놀라운) 발명품들은 오늘날 우리가 실험실에서 아직 재창조할 수 없는데 전혀 발명품들이 아니고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생명체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고, 그것 모두는 순전히 우연한 돌연변이들과 자연선택의 기제(機制: mechanism)라고 주장된다; 생명체의 내부 압력은 자기-번식 이상의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은 서로 대항하고 자연에 대항하는 정말로 맹목적 투쟁인 우리의 투쟁을 통하여 발생한다. 그리고 먹이로서 태양의 이용과 같은 것들은 (나의 견해로 놀라운 것들) 우연의 결과이다.
나는, 이것이 다시 한번 이념, 그것도 정말로 옛 이념의 일부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이념에, 이기적 유전자라는 허구와 (이유인즉 유전자들은 협동에 의하여 기능하고 생존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현재 새롭고 우활하게(naively) 결정론적인 ‘사회생물학’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부활한 사회적 다윈론이 속한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이념의 주요점들을 조합하고 싶다.
1. 옛 이념: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은 살해에 의하여 작용한다: 그 압력은
제거한다. 그리하여 환경은 생명에게 적대적이다.
새 이념: 내부로부터의 능동적 선택압력은 나은 환경, 나은 생태적 지위,
나은 세상에 대한 탐구이다. 그 압력은 최고로 생명에서
호의적이다. 생명체는 자체를 위하여 환경을 개선하고 환경이
생명에게 더 호의적이게 (그리고 인간에게 더 우호적이게)
만든다.
2. 옛 이념: 생명체는 완전히 수동적이지만 생명체는 능동적으로
선택된다.
새 이념: 생명체는 능동적이다: 생명체는 문제-해결에 부단히
몰두한다. 생명체는 문제-해결을 본질로 삼는다. 해결책은
흔히 새로운 생태적 지위의 선택이거나 건설이다. 생명체는
능동적일 뿐 아니라 그들의 활동은 부단히 증가한다.
(인간에게서 활동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ㅡ 결정론자들이
그렇게 하려는 바와 같이 ㅡ 특히 우리의 비판적인 정신적
활동과 관련하여 역설적이다.)
동물의 생명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면 ㅡ 우리가 상상할
바와 같이 ㅡ 그 환경은 많은 측면에서 상당히 균일적이었다.
그러나 동물은 (곤충을 제외하고) 육지로 올라가기 전에
척추동물로 발전했다. 그 환경은 생명체에게 동등하게
호의적이었고 상대적으로 차별이 없었지만 생명체 자체는
예견될 수 없이 큰 숫자의 다양한 형태들로 분화했다.
3. 옛 이념: 돌연변이는 순전히 우연의 문제이다.
새 이념: 그렇다; 그러나 생명체는 생활을 개선하는 놀라운 것들을
부단히 발명하고 있다. 자연, 진화 그리고 생명체는 모두
발명적이다. 그것들은, 발명가들로서, 우리가 실천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일한다: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식을 사용하여.
4. 옛 이념: 잔인한 제거 행위를 통한 진화에 의하여 도전받는 적대적
환경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새 이념: 최초의 세포는 수십억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살아있고 지금은
심지어 수십조로 복제되어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마다 최초의 세포는 그곳에 있다. 최초의 세포는 우리의
지구를 정원으로 만들었고 우리의 환경을 초록 식물들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최초의 세포는 우리의 눈(eyes)을
만들어 푸른 하늘과 별들을 보게 만들었다. 최초의 세포는
잘 작동하고 있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 1996년, 12-17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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