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형성
3. 실재의 형성에 관하여
I
실재의 형성으로서 간주될 것은 세계 1, 세계 2 그리고 세계 3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다수의 정보교환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로 구성되는 상호작용을 그 기제들 내부에서 우리는 시행착오의 방법을 사용하여 조작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보교환 기제들의 이 나선형에 의식적으로 개입한다. 우리는 ㅡ 인간 정신, 우리의 꿈, 우리의 목표 ㅡ 작품의, 산물의 창조자이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작품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것은 사실상 인류에게서 창조적 요소이다: 우리가, 창조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변형시킨다는 것. 그리하여 실재의 형성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자체의 국면들 세 가지 모두인 이 세 가지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과정; 그리고 세 가지 세계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상호작용들이나 정보교환 기제들의 이 나선형은 우리가 이론들을 개발함에 의하여 그리고 우리의 꿈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한 가지 사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새를 형성하여 창조하고 발명한 것이다: 우리 모두 오늘날 비행기로서 알고 있는 것을 형성하여 창조하고 발명한 것. 하늘을 나는 것을 야기하는 것은 날고자 하는 꿈이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역사 개념이 틀림없이 시사할 것처럼 그리하여 돈을 벌겠다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함이 중요하다.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과 (그의 형제를 나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들과 많은 다른 사람은 비행을 꿈꾸어 자신들의 꿈을 추구하면서 의식적으로 목숨을 걸었다. 그들을 고취한 것은 소득을 얻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새로운 자유에 대한 ㅡ 우리의 생태적 지위의 확대에 대한 ㅡ 꿈이었다: 오토 릴리엔탈이 자기 생명을 잃은 것은 나은 세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세계 3은, 세계 2의 비행하려는 꿈을 실현하려는 시도인 실재의 형성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결정적 요소는 계획, 묘사, 가설, 시도, 사유 그리고 교정이다; 한 마디 말로서, 비판을 통한 시행과 오류의 제거 방법.
이것은 나선형의 정보교환 기제(機制: mechanism)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구자들과 발명가들의 세계 2가 또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창발하는 문제들과 무엇보다도 세계 3인데 세계 3은 세계 2에 부단히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꿈은 어느 날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까지 세계 3에 의하여 부단히 수정된다.
비관론자들은 나에게 지적하기를, 독일 글라이더 조종사인 오토 릴리엔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새와 같이 비행하는 방식을 꿈꿨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만든 에어버스를 볼 수 있었을 터라면 공포에 휩싸였을 터이다.
우리의 개념들이 우리가 그 개념들을 상상하는 바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틀림없이 실현되지 않는 한, 이 비평은 옳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평은 틀렸다. 정확하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릴리엔탈이 비행하기를 원했던 방식으로 오늘날 비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글라이더 클럽에 합류할 필요만 있다. 그에게 용기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어렵지 않다. 에어버스나 보잉 747로 비행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글라이더와 그 비행기들이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이렇게 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글라이더보다 혹은 철로나 선박 또는 자동차보다 그 비행을 선호하는 이유들. 심지어 대형 항공기에 승객이 꽉 차서 여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에게 많은 새로운 가능성과 새롭고 귀중한 자유가 많이 생겨났다.
II
대형 항공기는 의심할 바 없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릴리엔탈이 꿈을 꾼 결과들이지만 아마도 예견될 수 없는 결과들이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과학적 지식 그리고 우리의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는 우리의 꿈과 우리의 소망 그리고 우리의 발명품의 미래 결과들을 식물이나 동물보다 더 잘 예측할 수 있지만 많이 더 잘 할 수는 없다. 우리의 행위들이 야기하는 이 예견할 수 없는 결과들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얼마나 없는지를 깨닫기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여전히 시행과 착오이다: 흔히 위험하고 훨씬 더 위험한 착오 ㅡ 때때로 인류에게 위험한.
정치적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 특히 위험하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환경 탐구와 같이 나은 세상에 대한 탐구가 (내가 옳다면) 생명의 모든 본능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본능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우리 세상의 향상에 우리가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옳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들과 행위들의 결과들을 우리가 예견할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서는 (최악의 경우에 혹시 우리의 생명을 제외하고)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희생하라고 설득하거나 심지어 격려할 권리가 또한 우리에게 없다 ㅡ 심지어 우리를 완벽하게 확신시킨 (아마도 우리의 무지 때문에 불합리하게) 이념이자 이론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그런 권리가 없다.
아무튼 나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탐구 일부는, 이념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세상의 탐구를 본질로 한다.
III
나는 나의 강좌의 끝에 왔다. 나는 최종적인 낙관적 심사숙고 한 가지만을
추가하고 싶은데 그 심사숙고로써 나는, 나의 친구 존 에클스(John Eccles) 경과 내가 함께 저술한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에 대한 나의 글을 또한 끝냈다.
내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윈의 선택인 자연선택과 선택압력이라는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피투성이 생존투쟁과 결합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심각하게 수용되어야 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인간 의식의 그리고 정신의 그리고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의 창발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변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될 수 없는 이론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론들 사이에 맡겨둘 수 있다. 이전 시대에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제거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대신 이론이 죽도록 할 수 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ㅡ 자연선택의 관점 ㅡ 정신의 그리고 세계 3의 주요 기능은, 그것들이 의식적 비판의 사용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론지지자들을 죽이지 않고도 이론들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합리적 비판을 비-폭력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생물학적 발전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우리의 언어 발명과 후속적인 세계 3의 발명을 통하여. 이런 방식으로 자연선택은 자체의 원래 틀림없이 다소 폭력적 특징을 극복하거나 초월한다: 세계 3의 창발과 함께 최고의 이론들, 최고의 적응들을 심지어 폭력 없이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제 우리는 비-폭력적 비판을 이용하여 허위 이론들을 제거할 수 있다. 틀림없이, 비-폭력적 비판은 여전히 이용되지 않는다: 비판은, 심지어 종이 위에서 싸울 때도, 통상적으로 여전히 반쯤 폭력적이다. 그러나 폭력적 비판을 위한 생물학적 이유들은 더 이상 없고 그런 비판에 반대하는 이유들만 있다.
그리하여 현재 지배적인 반쯤 폭력적 비판은 이성의 발전에서 일시적 단계일 수 있을 터이다. 세계 3의 창발은, 비-폭력적인 문화적 진화가 유토피아적 꿈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선택을 통하여 세계 3이 창발한 생물학적이고 전적으로 합당한 결과이다.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목표로써 우리의 사회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은 단순히 꿈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하여 가능하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분명히 필요하고 객관적이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 1996년, 26-29쪽 ㅡ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상대론은 죄악이다 (1) | 2025.09.05 |
|---|---|
| 인간 언어로 인류가 창조되었다 (0) | 2025.09.05 |
| 현대 물리학 역사를 단순화하면 (0) | 2025.09.05 |
| 다윈론에 대한 반박 (1) | 2025.09.05 |
| 실재의 형성 (0) | 2025.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