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이 많이 안다는 의미
먼저, 과학이 많은 것을 안다고 제안되었을 때, 이것은 옳지만 여기서 ‘지식’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데 크세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의도된 의미와 전혀 다르고 또한 현재 일상적 용법에서 ‘지식’이라는 단어에 부여된 의미와도 전혀 다르다. 이유인즉 ‘지식’에 의하여 우리는 통상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것을 내가 알지만,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라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 모순을 말하거나 자신이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서술 후반에서 철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여전히 확실한 지식이 아니다. 그 지식은 수정될 수 있다. 그 지식은, 시험될 수 있는 추측들로, 가설들로 ㅡ 기껏해야 가장 혹독한 시험에 부쳐졌지만, 여전히 추측일 뿐인 추측들로 ㅡ 구성된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고 그 요점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지식 부족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강조를 완전히 정당화하는 것이고 우리가 완벽한 진리를 발설할 때조차도 우리가 발설한 것이 참임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크세노파네스의 논평을 완전히 정당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점은 우리가 오늘날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반론에 추가되어야 하는데 다음과 같다: 거의 모든 새로운 과학적 업적에 비례하여, 과학적 문제에 대한 모든 가설적 해답에 비례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숫자와 그 문제들의 난도(難度)가 증가한다. 사실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해결책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한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와 가설적 지식이 유한한 반면 우리의 무지는 무한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것만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느끼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세계는 매우 구체적 의미에서 점점 더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나의 세 번째 요점은 이렇다: 크세노파네스나 소크라테스가 알던 것보다 오늘날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안다’를 주관적 의미에서 수용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옳지 않다. 아마도 우리 중 누구도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다양한 것을 안다. 우리는 특정 이론, 특정 가설, 특정 추측을 다른 이론과 가설 및 추측으로 대체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에 나은 것들로 대체했다: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임이라는 의미에서 나은 것들로 대체했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년, 197-8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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