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 신뢰하는 것
이제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선회하여, 우리가 제시할 수 있을 터인 많은 올바른 답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답변은 다음의 것이라고 우리가 아마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폭정과 압제 및 강압을 증오하고 우리는 모두 그것들과 싸우는 것을 신뢰한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고 여하한 종류의 협박에도 반대하고 특히 전쟁으로 위협하는 협박에 또한 반대한다. 우리는 원자폭탄의 발명이 끔찍한 재앙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이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우리가 믿는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신뢰하고 오직 자유만이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우리가 믿는다. 우리의 방향은, 협박에 굴복하여 자유를 대가로 평화를 사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의 문제서만 갈린다.
서양의 우리가 평화와 자유를 원한다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두 가지 모두를 위하여 가장 큰 희생을 치를 결의가 있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에, 내가 기술한 두 당파의 불화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 사실로 인하여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시대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인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그림은 매우 낙관적이어서 여러분의 신뢰를 잃을까 봐 여러분에게 그 견해를 감히 제출하지 못할 지경이다. 이유인즉 나의 논지는 이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시대는,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 최고의 시대라고 그리고 우리가 서양에서 살아가는 종류의 사회가 자체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존재한 최고의 사회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래 짧은 기간에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빈곤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아주 중요할지라도 우리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나는 전혀 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반면 나의 젊은 시절과 심지어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빈곤은 (특히 일자리가 없는 결과로서) 여전히 그 한 가지 사회적 문제였다. 빈곤이 사라진 것에 (불행하게도 서유럽에서만)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중에서 생산 증대가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세 가지 원인을 주로 지적하고 싶은데 그 세 가지 원인 모두는 우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이유인즉 그 원인들이, 서양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신뢰하는지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1. 우리 시대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식량이 있는 한 아무도 틀림없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서, 심지어 도덕적으로 자명한 것으로서 확립했다. 그리고 또한 빈곤에 대한 싸움이 우연에 맡겨져서는 안 되고 그 싸움이 모든 사람의, 특히 잘 사는 사람들의 기본적 의무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또한 결정했다.
2. 우리 시대는 모든 사람에게, 삶에서 가능한 최고의 기회를 (‘기회의 평등’) 부여하는 원칙을 신뢰한다. 계몽사조의 시대처럼, 우리 시대는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을 신뢰하고 페스탈로치(Pestalozzi)와 함께 지식을 통한 궁핍과의 싸움을 신뢰하고 그리하여 우리 시대는, 고등교육이 필요한 능력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고 올바르게 믿는다.
3. 우리 시대는 대중에게서 새로운 요구과 소유욕을 부추겼다. 이것은 분명히 위험한 상황전개이지만, 그것이 없다면 대규모 빈곤이 불가피하다. 이것은 18세기 및 19세기의 개혁자들에 의하여 일찍 인식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돕지 않고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하려는 욕망과 의지는 그들에 대한 지원이 확보되기 전에 일깨워져야 함을 그들은 알았다. 이 통찰은 예를 들어, 클로인의 주교(Bishop of Cloyne)인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에 의하여 분명하게 언명되었다 (이것은, 마르크시즘이 채택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장한 저 진리 중 한 가지 진리이다).
대중적 신념에 관한 이 세 가지 조항은 ㅡ 빈곤에 대한 싸움, 보편적 교육, 그리고 욕구에 대한 인식과 수요 증가 ㅡ 매우 의심스러운 전개상황를 초래했다. 빈곤에 대한 싸움은 몇몇 국가에서, 예를 들어 병원과 전체 의료업을 집어삼키는 기괴한 관료체제를 낳았는데 명백한 결과는 복지를 위하여 쓰인 돈의 일부만 실제로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복지국가를 비판할지라도 ㅡ 그리고 우리는 복지국가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ㅡ 복지국가란 매우 인간적이고 매우 칭찬받을만한 도덕적 신념에서 유래한다는 것과 빈곤과의 싸움에서 심각한 물질적 희생을 치를 결의가 있고 그리하여 자체가 지닌 신념의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자체가 지닌 도덕적 신념을 위하여 그렇게 심각한 희생을 치를 결의가 있는 사회는 자체의 이념을 실행할 권리를 지닌다. 그리하여 복지국가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이 이념들을 이룩하기 위한 나은 방법들을 밝히는 것을 겨냥해야 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기회균등과 동등한 권리라는 이념도 몇몇 국가에서 유사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들을 낳았다. 우리 세대의 가난한 학생에게 지식을 위한 싸움이 모험인데 극기와 희생을 요구하고 그로 인하여 독특한 가치에 도달한 지식이 생겼다. 나는 이 태도가 퇴조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교육에 대한 새로운 권리로 인하여 다른 태도가 생겼다. 이 권리가 당연시된다; 그리고 희생 없이 우리의 몫으로 우리가 받는 것을 우리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교육에 대한 권리를, 학생에게 주는 선물로 만들어서 사회는 학생에게서 독특한 경험을 빼앗았다.
이 두 가지 요점에 관한 나의 비평으로부터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나의 낙관론은 우리가 발견한 모든 해결책을 내가 칭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이 해결책을 시도하는 동기들을 내가 칭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기들이 기본적으로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서 틀렸음을 밝히는 것이 유행하는 비관론의 일부이다. 그러나 심지어 도덕적 위선자도 자신의 바로 그 항의에 의하여, 자기들이 수용한다고 주장하는 저 가치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신이 신뢰한다는 것을 증명함을 비관론자들은 망각한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커다란 독재자들도, 자유와 평화 및 정의를 자신들이 신뢰하는 양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들의 위선은, 저 가치들을 무의식적이고 비자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고 저 가치들을 신뢰한 대중들에 대한 비의도적 찬사였다.
이제 나는 나의 세 번째 요점으로 온다: 대중의 물질적 요구 증가. 여기서 폐해가 명백하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관념이 또 다른 자유의 이상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그리고 극기를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그리스적 및 기독교적 자유.
이것과 별도로, 물질적 수요의 증가는 바람직하지 못한 많은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룩한 것을 즐기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아서 능가하려는 야망. 그 야망은 만족 대신에 불만족과 질투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우리가 새로운 전개상황의 출발점에 있다는 것과 배움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대중이 지닌 새롭고 새로이 넓게 퍼진 경제적 야망은 아마도 도덕적으로 그다지 칭찬할만하지 않고 틀림없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그 야망은, 결국, 개인의 노력을 통하여 빈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대중의 이 경제적 야망은, 복지국가의 가장 의심스러운 특징 중 한 가지 특징을 중화시키는 가장 유망한 수단이기도 하다: 관료체제의 비대와 개인에 대한 관료체제의 통제 증가라는 의심스러운 특징. 개인적인 경제적 야망으로 인해서만 빈곤이 매우 드물게 되어서 빈곤에 대한 싸움을 국가의 주요 목표로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높은 생활수준이 실현되어야만, 옛날의 빈곤 문제가 아무 드믄 현상이 되어서 제한된 사회사업이 그 문제를 담당할 수 있어서 수많고 강력한 관료체제의 위험을 피할 있게 되어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이 고찰들에 비추어, 우리 서구 경제체제의 효율성은 내가 보기에 매우 중요하다: 빈곤을 드문 예외적 일로 만드는 데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우리의 자유를 복지국가의 관료체제에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제기된 교설에 반대해야 한다: 서구 경제체제와 동구 경제체제 사이에서의 결정이 궁극적으로 두 가지 경제체제 중 한 가지의 우수성에 의존할 것이라는 교설을 나는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유시장경제가 계획 경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독재체제 배격을 경제적 주장들에 근거시키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중앙 계획적 국가 경제가 자유시장경제보다 우수할지라도, 나는 계획 경제에 반대해야 한다; 계획 경제가 국가 권력을 독재체제 지경까지 증가시키기 쉽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나는 계획 경제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의 효율성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자유 결핍과 인간성 결핍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멸시해서는 안 되고 또한 팥죽 한 그릇에 그 자유를 팔아서도 (창세기 25장:34절) 안 된다; 또한 가능한 최고의 생산성에도 그 자유를 팔아서도 안 되는데, 자유를 대가로 효율성을 사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년, 215-9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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