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와 영국 철학자
그리고 특히 피히테와 쉘링(Schelling) 및 헤겔과 같은 특정 철학자들이 지성인의 정직성을 약화시키기 시작한 이래, 지성인 대부분이 망각하는 경향을 지녔던 의무인 심각한 의무를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예언자로서의 자세를 결코 취하지 말라는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이 의무에 반하여 특히 독일 철학자들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 그들이 우주 및 삶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예언자들로서, 종교개혁가들과 같은 것으로서 보이기로 기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심 없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끊임없는 수요가 불행하게도, 공급을 창조한다. 예언자와 지도자가 요청되었다; 예언자와 지도자가 발견되었다. 특히 독일어에서 이 반응이 초래한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다행히도 영국에서는 이런 것들이 인기가 덜하다. 두 가지 언어로 된 문헌에서 내가 상황을 비교하면, 영국에 대한 나의 찬사는 무한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계몽사조가 영국의 지성적 냉철함을 ㅡ 영국의 지성적 풍조의 무미건조함인데 그 무미건조함은 영국의 물리적 기후와 그렇게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ㅡ 유럽대륙으로 이전하려는 시도로써 볼테르의 저서 영국민족에 관한 서한(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과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이 무미건조함이자 냉철함은 자기 동료 인간에 대한 존경의 산물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동료 인간에게 자신의 관념을 팔아먹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을 동료 인간에게 부과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독일이라는 영역에서 불행하게도 상황이 그렇지 않다. 독일에서는 모든 지성인이 자신의 세상에 대하여 궁극적 비밀 모두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독일에서는 철학자뿐 아니라 경제학자와 의사 특히 심리학자 및 정신과 의사는 종교를 창립하는 사람이 된다.
이 두 가지 태도를 ㅡ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의 태도와 자칭 예언가의 자세 ㅡ 구분하는 특징이 있는가? 있다: 그 특징은 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의 다른 방식이다.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말하는 반면, 예언은 깊고 어둡고 웅장하게 말한다: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이해되기를 바란다. 이런 면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가장 위대한 거장이다. 심지어 우리가 버트런드 러셀과 의견을 같이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그를 항상 칭찬한다. 그는 항상 분명하고 간단하며 강력하게 말한다.
왜 계몽사조는 언어의 단순성을 그렇게 크게 귀중하게 여기는가? 왜냐하면 계몽사조는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계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계몽사조의 사도인 참된 합리주의자는 심지어 설득하기를 원하지 않고 또한 심지어 확신시키기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의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사람의 독립성을 너무 높이 존중하여 중요한 문제에서 그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반론과 비판을 원한다. 그는 논쟁의 흥미진진함을 일깨워서 자극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그에게 귀중한 것이다.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그가 진리에 더 잘 접근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이런 과정과 같은 것을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형성된 견해가 그에게 오류로 보일지라도 그는 그 과정을 존중한다.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이 통제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설득하기를 원하지도 않은 이유 중 한 가지 이유는 이렇다: 논리학이나 수학의 협소한 한계 안에서만 논리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안다.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강력한 논증을 제시할 것이고 우리는 항상 다양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을 제외하고 우리의 논증은 결코 확정적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논증의 그리고 근거의 무게를 평가해야 한다; 그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무게를 지니는지 우리는 항상 결정하거나 판단해야 한다; 제시된 견해에 찬성하는 논증과 근거 혹은 그 견해에 반대하는 논증과 근거를 우리가 항상 결정하거나 판단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리 탐구와 의견 형성에 항상 자유로운 결정이라는 요소가 담긴다; 그리고 인간의 의견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이 자유로운 결정이다.
계몽사조라는 철학은, 존 로크(John Locke)의 철학으로부터 개인적 의견에 대하여 이 높은 존중을 채택했다. 그것은 영국과 대륙의 종교 전쟁 및 종교갈등의 직접적 결과라고 우리가 추측할 것이다. 이 갈등들로 인하여 종국적으로 종교적 관용이라는 이념이 태어났는데 그 이념은, 흔히 주장되는 바와 같이 (예를 들어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에 의하여) 전혀 부정적 이념이 아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이념은, 권태의 표현만이 아니고 공포에 의하여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려는 시도가 가망 없는 일임을 인정하는 표현만이 아니다. 반대로 종교적 관용은, 강요된 종교적 순종이 가치가 없다는, 자유롭게 수용된 신앙만 귀중할 수 있다는 긍정적 통찰의 산물이다. 이 통찰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진솔한 신앙을 존중하게 되고 개인과 그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최종적으로, 이마누엘 칸트의 ㅡ 계몽사조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철학자 ㅡ 말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진다.
칸트에 따르면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람과 그의 신념을 존중하는 의무를 의미한다. 칸트는 충분한 이유를 들어, 영어로 황금률(Golden Rule)로 지칭되는 것과 이것을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그는 또한 이 원칙과 자유라는 이념의 밀접한 관련성을 인정했다: 필립(Philip) II세로부터 마르키 포사(Marquis Posa)에 의하여 요구되는 (쉴러[Schiller]의 작품 돈 카를로[Don Carlos]에서) 사상의 자유; 결정론자였던 스피노자가 양도 불가능한 자유로 믿었던 사상의 자유인데 독재자가 우리로부터 강탈하려고 시도하지만 강탈할 수
없는 자유.
이 마지막 요점에 관하여 우리는 스피노자의 의견에 더 이상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사상의 자유가 결코 완벽하게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참이지만,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이 없다면 참된 사상의 자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는 적어도 매우 큰 정도까지 억압될 수 있다. 우리의 이념 중 어느 이념이 타당한지를 알아내는 시험에 우리의 사상을 부치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비판적 토론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의 초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자유가 없으면 참된 사상의 자유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치적 자유는, 개별적 사람 각각에 의하여 그의 이성을 철저하게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전통에 의해서를 제외하면 확보될 수 없는데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려는, 그 자유를 위하여 싸우려는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하여 희생하려는 전통적 의지가 없으면 확보될 수 없다.
합리주의가 모든 전통과 충돌한다고 자주 주장되었다. 합리주의가 각각의 전통 및 여하한 전통도 비판적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참이지만, 궁극적으로 합리주의 자체가 전통에 근거한다: 비판적 사유의, 자유로운 토론의, 간명한 언어의 그리고 정치적 자유의 전통.
나는 여기서 합리주의와 계몽사조에 의하여 내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시도했고, 나 자신을 슈펭글러 및 헤겔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하기를 내가 원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합리주의자로 선언해야 했고 오랫동안 폐기되었고 철저히 유행에서 멀어진 철학적 운동인 계몽사조의 마지막 느림보 지지자로 선언해야 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것이 다소 지나치게 긴 도입부가 아닌지 물어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여러분은 여기서 서양과 서양이 신뢰하는 것에 관하여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 나는 나 자신과 내가 신뢰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얼마나 더 길게 여러분의 인내심을 남용할 예정인지 여러분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이미 우리의 주제의 한 가운데 있다. 내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합리주의와 계몽사조라는 철학이 유행이 지난 이념들이라는 것과 서양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 이념들을 신뢰한다는 것이 우스울 터임
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지성인 대부분이 저 이념들을 경멸할지라도, 합리주의는 적어도 합리주의 없이 서양이 심지어 존재할 수도 없을 터인 이념이다. 이유인즉 서구 문명이 과학과 불가분하게 연결된다는 사실보다 우리의 서구 문명에 더 특징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은, 자연과학을 산출한 그리고 이 과학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유일한 문명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그리스 고전적 철학자들의 합리주의가 직접적으로 산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고전적 철학자들.
나를 오해하지 마시라: 서구 문명이 합리주의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나의 논지가 아니다. 나중에 나는 서구의 믿음들에 관하여 더 많이 말하겠다. 우리 서구 문명이 역사적으로 말해서 주로 그리스인들로부터 계승한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나는 여기서 서술하고, 나에 앞서서 다른 사람들이 서술했던 것처럼, 싶을 따름이다. 슈펭글러가 말하는 서양이나 우리가 말하는 서양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주로 우리의 서양 전통에 합리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
합리주의를 설명하려고 시도함에서, 나의 동기는 유행하는 특정 반(反)-합리주의적 운동들로부터 나 자신을 거리를 두고자 하는 소망뿐 아니라 많이 남용된 합리주의적 전통을 여러분 앞에 놓으려는 시도이기도 한데 그 합리적 전통은 우리의 서구 문명에 아주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서구 문명을, 합리주의적 전통이 지배적 역할을 수행한 유일한 문명으로서 우리가 규정할 정도까지 아주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서양을 말할 때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합리주의를 말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합리주의가 그렇게 자주 왜곡되고 오해되기 때문에 나는 합리주의를 옹호해야 했다.
그리하여 내가 서양을 말할 때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아마도 설명했다. 그러나 서양을 말함에서 나는 주로 영국을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부언해야 하겠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영국에서 살기 때문에만 그렇지만 다른 이유들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영국은 홀로서 히틀러와 맞설 때 항복하지 않은 나라이다. 그리고 내가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제 선회하면, 영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는 저것들을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합리주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이 그리스 합리주의에 의하여 창조되었을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과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반대로, 합리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낡은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과학에 관해서, 많은 서양인에게 과학은 처음에 기묘한 것이 되었고 원자폭탄 이후 나중에 기괴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날 신뢰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구는 무엇을 신뢰하는가?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년, 206-9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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