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플라톤은 절대정치의 귀족적 형태에 대한 이론가였다. 정치이론의 근본적 문제로서, 그는 다음 질문들을 제시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누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가? 다수들, 군중, 대중, 혹은 소수들, 선출된 자들, 엘리트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수용되자마자, 그렇다면 분명히 한 가지 합리적 답변만 있을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 말고, 정말로 아는 사람들인 현자들; 군중이 아니고 극소수의 최고들. 저것이 최고인 사람들에 의한 통치이론인 귀족의 통치이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대한 이론가들이자 이 플라톤적 이론에 대한 위대한 적대자들이 ㅡ 루소와 같은 ㅡ 플라톤의 문제 서술을 부적당한 것으로서 배척하는 대신 그 문제에 대한 서술을 채택했다는 것이 다소 기묘한데 이유인즉 정치이론에서 근본적 문제는 플라톤이 언명한 것이 아님이 전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나 ‘누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권력이 정권에게 허용되어야 하는가?’나 더 정확하게, ‘어떻게 우리는, 심지어 무능하고 부정직한 통치자들이 너무 많이 해코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정치 제도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이다. 달리 말해서, 정치이론의 근본적 문제는 견제와 균형의 문제로, 정치권력과 그 권력의 자의성 및 남용이 통제될 수 있고 순치될 수 있는 제도들의 문제이다.
서양에 사는 우리가 신뢰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는, 권력이 이런 의미에서 제한되고 통제되는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신뢰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는 전혀 이상적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발생해서는 안 되는 많은 것이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잘 안다. 정치에서 이상들(ideals)을 갈구하는 것은 어린애 짓이어서 서양에 사는 합리적인 성숙한 사람은, ‘모든 정치적 행위는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는 (비엔나 시인 칼 크라우스[Karl kraus]를 인용하여) 것을 안다.
우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유형의 정권이 있을 따름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통치자들을 피통치자들이 제거할 수 있는 정권의 유형과 유혈에 의해서만 통치자들을 피통치자들이 조금이라고 제거할 수 있는 정권의 유형. 이 정권의 유형 중 첫 번째 유형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두 번째 유형을 우리는 전제정치나 독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명칭은 여기서 실제로 중요하지 않고 사실들만 중요하다.
서양에 사는 우리는 이런 냉철한 의미에서만 민주주의를 신뢰한다: 정권의 최소 악이라는 형태로서의 민주주의. 이것은 또한, 민주주의와 서양을 구하려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물론 때때로 시험된 저 모든 다른 정권의 형태들을 제외하고, 최악의 정권 형태이다’라고 윈스턴 처칠은 예전에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주주의를 신뢰하지만, 민주주의가 민중이 통치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도 나도 통치하지 않는다; 반대로 당신과 나 모두는 통치 당하고 있는데 때때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통치 당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평화롭고 효과적으로 정권을 반대함과 양립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정치적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형태의 정부로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신뢰한다.
나는 위에서,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의 허위적 질문이 정치철학자들에 의하여 분명하게 배척된 적이 없다는 불행한 사실을 언급했다. 루소가 동일한 질문을 했지만 반대가 되는 답변을 제시했다: ‘민중의 의지가 ㅡ 소수의 의지가 아니라 다수의 의지 ㅡ 통치할 것이다’; 그 답변은 ‘민중(The People)’을 그리고 ‘민중의 의지(The Will of the People)’를 신화적으로 신격화하는 일을 초래하기 때문에 위험한 답변이다. 마르크스 또한 완전히 플라톤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가 통치할 것인가, 자본가들인가 무산자들인가?’ 그리고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답변을 제시했다: ‘다수; 소수가 아니다; 자본가들이 아니라 무산자들이 통치해야 한다.’
루소 및 마르크스와 반대로, 투표의 그리고 선거의 다수결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그리고 가능한 한 자유를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결정을 이룩해내는 방법만을 우리가 본다. 물론 다수들은 잘못된 결정에 흔히 도달하여, 우리는 소수들도 다수결이 뒤엎을 수 없는 권리와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내가 말할 것은, ‘대중(mass)’과 ‘엘리트’ 및 ‘대중들의 봉기’라는 유행 용어들이 플라톤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이념들로부터 유래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루소와 마르크스가 플라톤의 답변을 뒤집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적 답변을 뒤집었다: 그들은 ‘엘리트의 반란’에 의하여 ‘대중의 반란’에 대응하고 그리하여 플라톤적 답변과 통치해야 한다는 엘리트의 주장으로 복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접근방식 전체가 틀렸다. 하느님, 마르크시즘을 뒤집기만 하는 저 반(反)-마르크시즘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 따름이다; 심지어 공산주의도, 이탈리아와 독일 및 일본을 통치한 그리고 제거하기에 세계대전이 필요했던 반(反)-마르크스주의적 ‘엘리트’보다 결코 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투표가 전혀 교육받지 못한 도로 청소부의 투표보다 더 무게를 지니지 못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한가? 교육받지 못한 대중보다 더 멀리 보는 교육적 엘리트가 있어서 그리하여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더 큰 영향력을 지녀야 하지 않은가?’라고 교육받고 조금 교육받은 사람들을 계속 질문한다.
답변은, 교육받는 사람과 조금 교육받은 사람이 어떤 정도로든 더 큰 영향력을 정말로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저서와 논문을 작성한다, 그들은 가르치고 강의한다, 그들은 토론에서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정치적 당파의 구성원들로서 자기 영향력이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다.
이렇다고 해서, ‘도로 청소부’와 비교하여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닌 더 큰 영향력을 인정한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유인즉 현명한 자와 선한 자에 의한 통치라는 플라톤적 이념은 무조건 배척되어야 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결국 지혜와 어리석음을 누가 결정하는가? 가장 현명한 사람들과 가장 선한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받지 ㅡ 그리고 정확하게 현명하고 선한 사람으로서 인정받았던 저 사람들에 의하여 ㅡ 않았는가?
우리는, 지혜와 선함과 정직성 및 비이기적 업적을 판단하는 과제로 우리의 정치제도에 부담을 지울 것인가? 우리는 이 과제를 정치적 문제로 만들 것인가? 실제적 정치라는 문제로서, 엘리트라는 문제는 절망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엘리트들과 패거리들은 결코 구분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대중과 엘리트에 관한 이 모든 헛소리에 일말의 진실도 없는데 이유가 단지 이 ’대중‘은 실제로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직면하는 ㅡ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ㅡ 저 대중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구체적 대중이 아니라, 가령,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구성된 대중이다. 그러나 자동차 운전자도 오토바이 운전자도 대중의 구성원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는, 혼자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대항해서 거의 생존 투쟁한다고 아마도 우리가 말할, 치료 불가능한 개인주의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 (homo-homini-lupus)라는 개인주의적 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합당하다.
아니지, 우리는 대중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렇게 많은 개인이 희생을 각오하고 기꺼이 책임이라는 부담을 지려는 시대가 있었던 적이 없다. 이전에, 우리 시대의 비인간적인 전쟁들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영웅적 행위들이 있었던 적이 없다; ‘영웅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및 물질적 유인책이 더 적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양 국가들이 존경을 표하는 무명용사의 기념비는 서양이 신뢰하는 것의 상징이다 ㅡ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에 대한 우리 신뢰의 상징. 그가 대중에 속했던지 아니면 엘리트에 속했던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
우리 시대를 우리가 아는 최고의 시대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동료 인간에 대한 이 신뢰이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 신뢰의 진정성은, 우리 시대를 위하여 희생하려는 의지에 의하여 증명된다. 우리는 자유를 신뢰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동료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노예제도를 폐지한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회질서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최고의 사회질서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질서가 개선을 향하여 가장 호의적 의향을 지닌 사회질서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으로부터 우리가 동구로 눈을 돌리면, 아마도 우리는 화해적 생각으로써 끝낼 수 있다.
공산주의가 노예제도와 고문 행위를 다시 도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용납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동구가 자유를 ㅡ 모든 인류를 위한 자유 ㅡ 약속한 이론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발생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쓰라린 싸움에서 우리 시대의 이 최악의 악인 심지어 공산주의도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욕망에서 태어났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년, 219-222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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