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의 교훈
자유와 민주국가에 관한 두 가지 대담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
칼 포퍼는 반세기 이상 자유 옹호자로서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한 공정한 비판가로서 알려졌다. 그는 모든 지식 분야에서 ㅡ 종교, 민족주의, 이념 ㅡ 유행 타고 반(反)-계몽주의적인 것에 대하여 쉬지 않고 반대했으며, 마르크시즘에 대한 심층적이고 영향력 있는 비판적 저술가였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금세기의 교훈에서 그의 목표는 우리 사회의 폭력 증가와 이기주의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인데, 폭력과 이기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환경, 인구 그리고 부패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을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사회가 유발하는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가? 동시에 세계 평화를 위한 길을 닦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민주주의 체제를 보전할 수 있는가? 포퍼는 철학자가 정치에 개입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는 우리가 모두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라고 분명하게 요구한다. 내일의 세상을 창조할 것은 우리의 행동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저서의 대담은 원래 이탈리아의 언론인 지안카를로 보세티(Giancarlo Bosetti)와 실행되어 여기서 패트릭 카밀러(Patrick Camiller)의 의하여 번역되었다. 이 저서는 또한 텔레비전의 위험 요소와 텔레비전을 만든 사람들의 책임에 대한 이전에 없던 영어로 된 새로운 대담을 포함한다.
금세기의 교훈
자유와 민주주의 국가에 관한
두 가지 대담
칼 포퍼
목차
서문
지안카를로 보세티 1
대담 I (1991년)
1 평화주의, 전쟁, 공산주의와의 조우 13
2 마르크시즘에 대한 주요 비판 19
3 1962년: 사하로프, 흐루쇼프와 소비에트의
쇠퇴 22
4 오늘날의 정치 의제: 법치와 어린이 31
5 역사주의에 반대하여 한 번 더: 미래는 열려 있다 40
대담 II (1993년)
6장에 대한 서문
지안카를로 보세티 49
6 ‘우리는 3차 세계대전의 위험에 빠져있다’ 51
7장에 대한 서문
지안카를로 보세티 56
7 ‘텔레비전은 인류를 타락시킨다. 텔레비전은
전쟁과 같다’ 58
8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과 실행에 대한 반성 65
9 자유와 지식인의 책무 81
주석 92
인명 색인 95
*역자 주해: 목차의 쪽수는 원전의 내용이고 번역에서 달라질 수 있음.
서문
지안카를로 보세티(Giancarlo Bosetti)
이 대담의 한 시점에서, 우리는 런던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작은 서리(Surrey)주의 마을인 켄리(Kenly)에 있는 칼 포퍼의 자택에서 긴 대담의 절반쯤에 왔다. 그가 마르크시즘에 대한 자기 비판의 핵심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탁자에서 일어나 나에게 거실 겸 서재로 들어오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몇 권의 책이 여전히 펼쳐지고 책으로 뒤덮인 그랜드피아노를 돌아서 갔다. 그 책 중 가장 두꺼운 책들은, 그러나, 금속 지지대 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그가 당시 어떤 작업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달라이 라마의 자서전, 쿠바 미사일 위기)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호기심에 서적들의 이곳저곳을 보았다. 그러나 포퍼는 나의 팔을 끌어, 금박 가죽으로 제본된 많은 19세기 영국 및 독일 서적들을 포함하고 있는, 마르크스에게 할당된 서가 근처의 방 뒤쪽으로 데려갔다. 거기는 89세의 철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모든 언어로 된 책으로 보관하고 있던 곳으로부터 반대편 끝에 있는 서재의 가장 낡은 지역이었다. 그는 자신이 17세부터 연구했던 자본론(Capital) 몇 권을 나에게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우리가 탁자를 떠났던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다음에 꺼낸 것은 작고 얇은 책이었다: 1913년에 발간된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의 영어본. 그는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쪽들을 빠르게 넘기더니 117쪽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지 봅시다.’ 그는 마르크스가 1847년 파리에서 1년 전 프루동(Proudhon)이 집필한 빈곤의 철학(Philosophy of Poverty)에 반대하는 비판으로서 책의 마지막 구절 중 한 구절을 소리 높여 읽었다. 주제는 무산자 계급인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이었는데 그것은 ‘필수적으로 새로운 사회 창조를 암시했다’. 이것이 발생하기 위해서:
이미 획득된 생산력과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는 더 이상 나란히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 계급으로서 혁명적 요소들의 조직은, 낡은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생성될 수 있던 모든 생산력의 존재를 전제한다.
‘총체적 혁명’의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적대감의 종식을 예고했던 이 유명한 구절로부터, 포퍼는 ㅡ 마치 자신이 그 구절에서 번갯불을 본 것처럼, 전체 이론적 구조물을 허물 수 있는 주요 문제가 순식간에 마르크스의 머릿속에 나타났던 것처럼 ㅡ 한 가지 정확한 요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이 3 행을 읽었다: ‘낡은 사회가 몰락한 다음에 새로운 계급 권력에서 정점을 이루는 새로운 계급 지배가 있을 것을 이것이 의미하는가?’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갈등의 종식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민주주의와, 반대의 자유와 그 자유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것이라는 원리와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그 질문은 아마도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의 핵심을 포함한다. 그러나 의문부호 다음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을 따름이다: ‘아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단지 한 가지 질문으로 이 방대한 문제를 겨우 건드렸다. 그다음 그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ㅡ 설명을 내놓지도 않고, 심지어 이유를 밝히려고 그런 확신에 찬 예측에 대한 근거를 밝히려고 노력하지도 (그가 그랬어야 하는 바와 같이) 않고. 우리는 이제 마르크스의 답변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안다’라고 포퍼가 말했다.
포퍼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하여, 정치적 기획을 역사법칙의 지식에 근거시키는 여하한 주장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했다. 열린사회에 대한 이론가로서, 그는 1989년 및 1991년에 벌어진 사건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확인됨을 보았다. 공산주의 이념이 ㅡ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평화 강령을 높이 타고 ㅡ 자신을 ‘쥐덫’으로 유인한 짧은 기간 이후인 1919년, 17세에 그는 먼저 자신의 비판을 언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대담에서 자기 삶의 단계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대담은 새로운 자료로써 자신의 자서전에 제시된 설명을 마무리 짓는다. 그의 비판은 1945년에 최초로 발간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 이미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포퍼의 정치적 관념에 관한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에 있는 주요 요점을 검토하는 것에만 놓여있지 않다. 내가 그와 함께 대담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이다: 한 가지 이유는 역사와 관련되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정치이론과 관련된다.
역사와 관련된 이유는, 1989년 이래 10월 혁명 직후 지금은 실제로 정치 사상의 전체 범위를 가로질러 널리 공유되는 용어들로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한 철학자를 내가 다루기로 생각했던 문제와 관련된다. 공산주의 정권은, 포퍼가 젊은 시절에 태어나 그의 긴 생애 동안 거의 그가 90세가 되도록 살아남았다; 그리고 매우 일찍부터 그는 공산주의의 내부에 구현된 오류의 본성에 관한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포퍼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그가 여러 해에 걸쳐 저 모든 사람을, 특히 반대 신념을 굳건히 지켰던 지식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였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이론에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 근거한 매우 긴 경험이었고 그 이론의 힘과 오류에서 포퍼는 설명하는 수단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론의 바로 그 지구력이 포퍼 내부에서 일종의 숙명론이나 좌절을 유발하지 않았던지 알고 싶었다. 결국 오류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오류를 이해해도 무슨 소용인가?
포퍼는, 다시 역사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검토하는 한 가지 요점을 지적함으로써,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실상 어떤 사람은 그를 자기 적(敵)들의 시체가 떠내려가기를 강둑에서 기다리던 사람으로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습의 어떤 부분도 포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시체도 적(敵)도, 그리고 특히 강(江)도 포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시체도 포퍼에게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비폭력을 문명의 주춧돌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적(敵)도 포퍼에게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역사와 정치학의 친구-적(敵) 양극화가 정확하게 그가 마르크시즘에 대항하여 견지하는 주요한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江)도 아닌데 왜냐하면 포퍼는 알려진 근원과 입구를 지닌 운하로서 역사 관념이 무수한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원하는 만큼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강(江)이나
강(江)과 같은 것은 항상 은유일 따름일 것이다. 역사에 실재성이
없다. 여러분은 과거에 있던 것을 연구하지만, 그것이 끝났음을
고려하면 여러분은 그것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나 혹은 여러분 자신이
그것과 함께 헤엄치기 위해서 어떤 것도 예견할 수 없다.
열린사회라는 관념과 대응하는 것은 열린 미래라는 포퍼의 관념이다. 많은 것이 과거로부터 습득될 수 있지만 사건을 예견하는 방식으로서 우리가 과거를 미래 속으로 투사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없다. 역사의 미래 과정을 안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현재의 도덕적 책임감은 공허해지고 사람들은 어떤 일이 발생해도 발생할 ‘운명’의 대리인으로 변신한다. 이유인즉 포퍼의 근본적 반(反)-역사주의인 인간적 사건의 ‘방향’에 대한, 역사에 대한 ‘의미’라는 바로 그 관념이 ‘위험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폭력과 전횡의 합법화를 ㅡ 우리에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 ㅡ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퍼가 다음과 같이 말할 위치에 놓이기를 거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그것이 그와 같이 끝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건들의 과정에서 겸손이나 당황의 표현 문제가 아니다: 포퍼는 공산주의의 몰락에 진정으로 만족했다. 그에게 요점은, 더 정확하게, 역사의 물결을 타는 자신감이 정치에서뿐 아니라 모든 인간적 영역인 심지어 예술에서도 자체가 드러나는 곳마다 투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문제를 주조하는 것에 권한을 부여하는 역사‘법칙’과 목적론을 토대로, 현재 상황을 폐지하는 실제적 운동으로서 공산주의에 대하여 신념을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은 그것의 거울에 비친 상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의 종말은 역사의 다른, ‘참된’ 법칙의 성취가 아니다.
우리가 반(反)-역사주의적으로서뿐 아니라 반(反)-숙명론적으로서 아마도 기술할 이 입장을 지지하여 포퍼는 면밀한 고찰을 받을만한 대담에서 두 가지 진술을 내놓는다. 먼저, 소비에트 정권은 아마도 훨씬 더 길게, 아마도 영원히 지속되었을 것이다; 소비에트 정권은 어떤 법칙이나 운명이 아니라 자체의 붕괴를 초래한 일련의 명백한 사건이었다 ㅡ 그리고 자신들이 위험에 처한 실생활의 사람들이 결정한 명백한 결정이었다. 두 번째, 마르크스주의적 이념과 공산주의 정권의 존재로 인하여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자 반(反)-공산주의적 이념이 필연적이 되었고 금세기의 수십 년간에 걸쳐 ‘어떤 의미에서 두 가지 모두 완벽하게 미친’ 두 가지 이념 사이에 대립이 전개되었다. 이 마지막 주장은 탐구에 관한 몇 가지 가능한 방향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념에 ‘광기’의 요소가 있다고 합의된다면 ㅡ 포퍼가 마르크스주의에 귀속시키는 책임을 묻지 않고 ㅡ 마르크스주의적 기획에 의하여 고무된 정권의 최종적 파산으로 인하여 세계가 반대 이념에 넘어가야 한다는, 적어도 충돌이 진행 중이던 때 세계가 넘어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의미가 아니다. 공산주의와 같기는커녕 반대로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좌파-민주주의 운동에 대항하여 싸우는 반(反)-공산주의를 반동적이고 보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우리가 무시할지라도, 포퍼의 진술에 의하여 진보적 사유가 10월 혁명 이후에 점차 퇴조하던 기능을 전제하고 있거나 다시 전제하고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포퍼의 관념과의 만남이 아마도 오늘날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한 두 번째 이유에 우리가 다다른다: 즉, 우리가 그의 진보주의 안에서 정치와 좌파의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의 개요를 발견하려고 아마도 노력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에 우리가 다다른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라는 긴 막간이 가능한 다른 길을 가렸을지도 모르고, 자유의 원칙을 사회 해방과 융합할 수 있는 주요 정치적 대안들이 반(反)-공산주의적 진보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에 의하여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지도 때문이다. 아마도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진보적 특징을 지닌 좌파가 ㅡ 지금까지 유토피아적에 미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ㅡ 지금 가능한 영역에 들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포퍼는 자신이 공산주의와 결별한 이후의 기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를 배척한 후에도 몇 년 동안 사회주의자로 남았다;
그리고 개인적 자유와 결합된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평등적 사회에서 겸손하고,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은 영위한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서 나는 이것이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유가 평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평등을 실현하려고 시도하면 자유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유를 잃으면 심지어 자유를 잃은
사람들 사이에 심지어 평등도 없게 될 것임을 알았다.
아마도 포퍼는 자신이 1974년에 서술한 저 단어들을 여전히 지지할 것이다: 사회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결합시키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담으로부터 그가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묵살하지 않는 듯이 ㅡ 즉, 자유와 평등 사이의 균형에 관하여 질문하는 대신 우리의 질문을 시장(market)과 사회적 개입 사이의 균형에 맞춘다면 ㅡ 보일 것이다. 그의 관점은 그렇다면 자유방임적 진보주의와 아주 거리가 먼 듯이 보인다. 법치가 순조롭게 시작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개혁 이전에 고르바초프(Gorbachev)가 모스크바에 주식시장을 개설하려고 시도한 것에 대하여 포퍼가 비판한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비폭력적으로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돕기 위하여 대중매체의 검열에 대하여 그가 도발적으로 요구하는 강력하게 개입주의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 문제에 관한 ㅡ 국가와 시장 사이의 균형 ㅡ 포퍼의 생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 행동의 개입주의적(interventionist)이자 민주주의적이고 점진주의적 관념에 호의적으로 이미 보였지만 이 대담에서 그가 표현한 강력한 제안만큼 정치적 의제에 대한 강력한 제안을 그 저서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을 터이다. 사실상 이 새로운 제안들은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정부의 종말-지향적 기능을 (원자무기 폐기, 인구 억제, 교육) 전제하는데, 그 기능은 ‘열린사회’와 아니라 공적 행동 분야를 제한하는 데 열중하는 진보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 이 차이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본성에 의해서 뿐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 체제의 종말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종말이 공공의 삶에서 그리고 관념들의 수준에서, 특히 진보적 이론의 광대한 분야에서 주요 결과를 야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으로 포퍼와 유사한 인물인 이사야 베를린(Isaiah Berlin)의 최근 진술에서 훨씬 더 명확해졌다. 베를린은 포퍼보다 7세 아래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충성하는 짧은 기간을 겪지 않았다. 그가 어린이였을 때 그의 가족은 러시아의 민주주의적 2월 혁명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지만, 볼셰비키의 집권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베를린의 태도와 자신의 정치적 사유의 진보는 스티븐 루크스(Steven Lukes)와의 대담에서 이제 충분히 재구축되었다. 관념에 대한 그 역사가가 최초로 적극적(positive) 자유와 소극적(negative) 자유를 구분했던 “자유에 대한 두 가지 개념”에 관한 유명한 논문에, 행동하고 존재하는 적극적(positive) 자유에 집중한 정치적 기획의 위험 요소에 반대하여 ㅡ 다시 말해서, 어떤 특성과 내용이 인간의 존재에 귀속되어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위험 요소에 반대하여 ㅡ 경고하는 주요 의도가 있었다. 베를린의 주요 목표는 정확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이었고 그 기획에 반대하여 베를린은 소극적 자유의 방어벽을 (궁극적으로 자유방임적 경제와 일치하는 제한의 저 부재) 옹호했다. 네 편의 논문을 쓴 베를린에게, 그렇다면, 균형은 결정적으로 소극적(negative) 자유의 편으로 기울었다; 공산주의 정권은 제거될 주요 위험 요소였고 모든 악에 책임이 있는 것은 적극적(positive) 자유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적극적(positive) 자유는 소극적(negative) 자유만큼 고귀하고 근본적인 이상이라고 나는 더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라고 선언한다. 19세기 진보주의의 주요 주창자인 베를린에게도 정치적 행동에 실질적 목표와 내용을 부여하는 일은 (좌파의 특징적 접근방식인) 권력의 횡포들에 대항하여 개인적 자유의 원칙을 옹호하는 것만큼 필수적이다.
동유럽에서 1989년의 역사적 변혁은 그리하여 정치사상에 중요한 결과를 미친 듯이 보인다. 권위적 정치 체계와 계획 경제에 의하여 대표되는 위협의 종식은 또한, 진보 사상 대부분에 퍼져있던 사회 및 경제에서 정치적 간섭에 대한 저 혐오감을 종식시켰던 듯하다. 공적/사적 양극성(兩極性: polarity)은 더 이상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하여 덧씌워지지 않는다. 확실히 서구 사회주의적 및 민주주의적 운동에 의하여 (그리고 일반적 좌파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사회적 및 정치적 요구는 동구와 집권 공산당의 정책에서 계획 경제와 아주 다른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적 행동의 영역을 확대하라는 많은 요구가 공산주의 영향권으로 유인되어 사멸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행되어야 할 다양한 정치적 결정 사항의 포기를 의미할지라도 그 많은 요구는 권위적인 것으로서 배척되었다. 태동하는 전체주의 및 개인적 주도권과 개인적 자유의 질식이라는 위협과 함께,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그림자가 어떻게 완전 고용이나 노동보호 혹은 사회보험 정책에 드리워졌는지는 알기는 매우 쉽다. 그리고 특정 개인적 이해관계가 의도적으로 이 연대를 가꾸었다는 사실이 ㅡ ‘공산주의’ 위협이 기껏해야 복지-국가와 재분배 조치의 확대를 포함할 때 ㅡ 자체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하여 실천한 일은 없다. 왜냐하면 자기장(磁氣場)에 공산주의 정권이 존재하여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정치적 행동과 비행동, 국가와 시장,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추(錘: pendulum)의 진동이 근본적으로 방해받았기 ㅡ 이상적 상황과 비교하여 ㅡ 때문이다. 반대 방향으로의 영향이 또한 있었는지는 (서구국가들의 정책에 대한 동유럽 정권의 직접적 영향과, 무엇보다 서유럽 노동운동의 고무적인 부분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역할 ㅡ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 신화의 매력을 포함하여) 당연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될 요점은 진보적 사유란, 그 용어의 더 가장 넓은 의미에서, 현재 상황에서 개입주의를 향하여 더 쉽게 움직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ㅡ 마치, 유익하게 보일지라도 이전에는 점유하기에 너무 위험하게 여겨지던 공간 속으로 움직이는 것이 마침내 가능한 것처럼.
포퍼가 이 대담에서 열거하는 오늘날에 관한 정치적 우선 사항은 공적 행동에 대하여 실제로 주요 합법성을 띠는데, 특히 비폭력에서 교육에 관해서이다; 그가 아동들이 언론검열에 의하여 보호되기를 요구하기까지 가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았다. 그의 정치적 결론이 수용되지 않을지라도, 그의 ‘진보적 본성’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그가 이 요구를 하게 되는 그 움직임은 중요하다. 개인이 폭력으로부터 보호되기를 보장하는 권위로서뿐 아니라 또한 폭력에 반대하는 일반적 혐오감과 폭력을 피하는 일반적 합의에 근거한 문명화적 과정의 결과로서 법치국가라는 개념에 의하여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시민이 일반적으로 행동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자녀를 양육하는 문화와 형성적 발전 및 윤리적 규범에 비추어 문화와 형성적 발전 및 윤리적 규범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포퍼에게 법치가 절대적 우선 사항이다: 일반적 합의를 위반하는 사람들의 백분율이 특정 한계를 넘어서면, 법치국가 자체가 위험에 빠지고 심지어 붕괴할 것이다. 사회 안에서 폭력이 널리 퍼지고 폭력을 제거하려는 일반적 합의가 약할수록, 억압적 유형의 정치적 조치 채택이 더욱 필요해질 것이다. 폭력 제거는 ㅡ 포퍼가 법치국가의 특징으로서 간주하는 ㅡ 그런 조치를 통하여 촉진될 것이지만 비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옹호하고 가꾸는 길이 진보적 관점과 더 일치하는 듯이 보인다. 포퍼는 언론검열을 포함하는 매체에 대한 단호한 통제가 타락 과정을 중단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ㅡ 그리고 그 통제가 법치를 뒷받침하는 교육 정책과 병행해야 한다고 ㅡ 생각한다.
그러므로 법치라는 개념은, 문화와 윤리에 대한 세대-교차적 계층화라는 의미에서, ‘사회적 본질(social substance)’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법치를 보호하면 법치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하는 사회적 본질을 재구성하여 갱신하는 정치적 행위가 합법화된다. 동일한 표시에 의하여 법치라는 개념이 문화적 과정의 모든 기초적 요소까지 확대될 수 없는지 질문되어야 한다: 사회적 관계에서 비폭력에 대한 시민의 자세뿐 아니라 공적 생활에 참여하는 데 조건을 형성하는 소득과 문화, 정보 및 시민정신의 최소한 제공까지도 확대될 수 없는지 질문되어야 한다. 법치에 대한 지지, 법치의 사회적 토대에 대한 방어 및 발전, 문화적 과정의 진척 ㅡ 이것들은 아마도 정치적 행위의 모든 목표를 정의(定義)하는 방식을 표시할 것이다. 좌파 자신의 사유인 새로운 토대를 근거로 좌파의 역할을 정의(定義)하는 통합을 좌파 자신이 탐색하면, 포퍼가 법치에 관한 이 여러 쪽에서 전개하는 논증에서 적어도 방법론적으로 유용한 것이 발견될 것임은 불가능하지 않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몰락과 그 유토피아의 목적이었던 역사적 실험의 실패와 동시에, 대안적 사회에서 좌파의 구원이라는 관념의 포기가 불가피해 보인다. 과거에는 좌파가 공적 행동을, 참신한 도덕적 자원으로써 사회에서 구체적 개선사항에 대한 약속으로써 그리고 남녀가 자기들의 즉각적 이해관계와 동일시될 수 있을 따름인 목표보다 더 넓은 목표를 추구하는 데 추진력으로써 장착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포퍼가 여기와 다른 곳에서 제시하는 관념들에 대한 심사숙고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더 합당하게 정의(定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법치에 대한 그의 개념은, 시민권의 성취와 발전을 위하여 애쓰는 대리인인 권리를 촉진하는 힘으로서 좌파에 대한 관념과 유용하게 비교될 것이다.
민주주의, 매체 그리고 최소한이고 가부장적 국가의 구분에 관한 포퍼의 관념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이전에 발간되지 않은 두 가지 대화가 포함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s on the Theory and Practice of the Democratic State) (1988)’ 및 ‘자유와 지성인의 책무(Freedom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 (1989). 첫 번째 대화에서, 대담에서보다 더 확대하여 포퍼는 ‘인민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누가 다스리는가의 문제와 어떻게 정부가 실현되는가의 문제를 그가 유명하게 구분한 것을 다시 시작한다. 우리가 진보적 사상에서 이미 주목한 강조점을 고려하면, 칸트의 도움을 받아 포퍼가 자유 보호에 관한 소극적(negative) 개념과 상대적으로 큰 규모로 정부개입을 합법화할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쪽들에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 한편에 시민들에 대하여 행복의 규칙을 명령하는 공권력의 일탈적 사용에 반대하여 최소한의 국가라는 관념에 대한 근거가 충분한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에 자유를 근절하는 최대한이나 가부장적 국가의 침탈이 있다. 그러나 두 개념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서 포퍼는, 공적 행위가 도덕적 근거를 토대로 시민의 자유에 제한을 두는 것을 없앨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주장한다. 난점은, ‘불행하게도... 도덕적 이유 때문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상황이 가부장주의(paternalism) 없이 작동하지 않는’ 사실에 놓여있다. 안전띠 착용을 강제하거나, 공공장소에서 금연, 국가방위나 공공질서를 위한 대비, 혹은 복지국가를 위한 세금 인상의 문제이든, 정치적 행위는 불가피하게 추상적으로 생각되는 최소한의 국가로부터 멀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이 가부장주의의 규모를 ㅡ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정함으로써 ㅡ 억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도덕적으로 필요한 이상의 가부장주의는 안 된다.’ ‘가부장적 국가의 도덕적 주장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의 원칙적 우월성 대신 우리가 국가와 자유라는 낡은 대립을 사용하여 그리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반(反)-독재 통치를 사용하여 돌아오는’ 화해에 도달하기 위하여, ‘규제적 원칙으로서 만의 조건으로’라는 최소한의 국가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포퍼가 소비에트 연방의 쇠퇴와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의 역할을 (그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변화의 지지자가 되는 변화 이전에) 토론하는 우리 대담의 그 부분으로 인하여 상당한 격론이 발생했다. 사하로프에 대한 포퍼의 비난은 매우 심각하고 예기치 못한 것인데, 그가 사하로프의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1981년 뉴욕에서 행한 연설에서의 평가의 극적인 반전을 의미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흐루쇼프의 의도에 관한 그리고 사하로프가 핵물리학자로서 자신의 의무를 상상컨대 초월한 방식에 관한 그의 설명은 역사학자들 및 과학자들의 판단과 충돌했다. 그러나 포퍼가, 자신의 뉴욕 연설에서, 사하로프를 ‘위대한 사상가로서, 위대한 박애주의자로서, 위대한 영웅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찬양했던 일을 기억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 물론, 수소폭탄 제조에서 사하로프의 주요 역할이 이미 잘 알려졌지만, 포퍼는 그의 태도가 핵무기 개발에 대한 서구 원자력 과학자의 회보(Bulletin of Atomic Scientists)의 태도와 동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서구 과학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면서 그들이 인류에게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나타났다. 적어도 ‘1957년 이래 사하로프가 인류에게 가장 끔찍한 위험을 감소시키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 데 자기 일생을 바쳤다’라고 포퍼가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사하로프가 197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유에 여전히 동의했다. 게다가 그의 눈에는 사하로프가 관용적이어서 자신의 실수를 수용하는 사람의 바로 그 전형이었다; ‘자기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그의 능력은 ‘독단적 생각과 비판적 생각’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을 나타냈다. 자기 이론에 대하여 부단히 비판적인 이 자세는 불행히도 매우 드문데, 과학적 분야에서뿐 아니라 사회 및 정치이론에서도 사하로프에 의하여 표출되었다고 회자된다. 저 순간 포퍼는, ‘대형 폭탄(big bomb)’을 만드는 결정을 낳은 소비에트 토론에서 자기 입장에 (오펜하이머[Oppenheimer]라기보다 미국의 ’매파‘ 텔러[Teller]에 의하여 반영된) 대하여 더 분명한 관점으로 시작하여, 사하로프의 회고록으로부터 아마도 습득했을 것에 대하여 분명히 자신이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탈리아의 좌파 및 우파 문화 모두가 적어도 1974년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번역될 때까지 포퍼의 사상을 대했던 침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적 및 비-마르크스주의적 모두의 역사주의적 주도권(hegemony) 때문이었고 그 주도권을 포퍼가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탈리아와 다른 곳에서 좌파 문화가 스탈린주의의 부담으로부터 되는 데 걸렸던 긴 시간 때문이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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