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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컬럼 임진왜란 - 평양성 탈환, 명군이 죽인 자의 절반은 조선인

이윤진이카루스 2012. 6. 10. 08:23

"평양성 탈환, 명군이 죽인 자의 절반은 조선인”

등록 : 2012.06.08 20:07 수정 : 2012.06.08 20:07

 

1593년 1월6일부터 벌어진 평양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 이 전투에서 명군은 남병과 그들의 장기인 화포, 화기를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조선은 일방적인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진주박물관 간행)에서 전재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18) 명나라 파병의 빛과 그림자

1592년 7월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했던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참패하자 명 조정은 충격에 휩싸였다. 명은 일본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동도 이제 안전하지 않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1592년 8월 명은 병부우시랑 송응창(宋應昌)을 비왜경략(備倭經略)에 임명하여 북경 주변과 요동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도록 했다.

명은 논란 끝에 조선에 다시 대군을 보내기로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당시 영하(寧夏), 섬서(陝西) 일대에서는 몽골 귀화인 출신 장수 보바이(

拜)가 반란을 일으켰다. 명은 이여송(李如松) 등을 보내 진압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들여보낼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원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명은 평양 패전을 계기로 포병과 화기수(火器手)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기병만으로는 조총을 가진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포병과 화기수들은 주로 복건, 절강 등 남방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병(南兵)이라 불렸던 그들을 조선까지 파견하려면 최소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일 남병을 이동시키는 동안 일본군이 요동으로 진입해 온다면? 명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고니시 “명과 일본이 조선을 나눠갖자”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응급조치를 취했다. 무뢰배 출신의 책사 심유경(沈惟敬)에게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함을 주어 조선으로 들여보냈다. 심유경은 1592년 8월 17일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허풍을 늘어놓았다. “황제께서 조선이 지성으로 사대한 것을 가상히 여겨 70만의 대군을 뽑아 곧 들여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 병법을 모르기 때문에 직접 평양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정탐한 뒤에 거사하겠다”고 강조했다. 선조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에게 명군을 속히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9월1일 심유경은 평양 강복산(降福山) 근처 부산원(釜山院)이란 곳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회담했다.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조선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저희가 조선에서 길을 빌려 조공을 바치려 했음에도 조선이 병력을 동원하여 항거함으로써 문제가 생겼다”며 침략을 조선 탓으로 돌렸다. 심유경은 다시 “이곳은 천조(天朝)의 지방이니 너희는 물러가서 천조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응수했다. 깜짝 놀란 고니시가 지도를 꺼내 보이며 “이곳은 분명 조선 땅”이라고 하자 심유경은 “조선은 항상 이곳에서 황제의 조칙을 맞이한다. 비록 조선 땅이지만 상국과의 경계이니 너희들은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논란 끝에 두 사람은 향후 50일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한다.

심유경은 11월26일 평양성으로 들어가 고니시와 다시 만났다. 포로로 잡힌 임해군 등을 석방하고 철수하라고 심유경이 다시 요구하자 고니시는 할지(割地) 문제를 들고나왔다. 대동강을 경계로 명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하자는 내용이었다. 양자의 회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조선은 할지 문제가 거론되자 바짝 긴장했다. “일본이 서울과 평양 일대를 명에 넘기려 한다”는 풍문까지 떠도는 와중에 조선은 심유경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심쩍은 눈으로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할지는 실행되지 않았다. 유세객 심유경의 활동이 남긴 성과는 컸다. 기만적인 협상을 통해 휴전을 이끌어내고 일본군을 평양에 묶어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명은 심유경의 활약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조선 또한 최악의 위기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조선을 원조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석성(위)은 조승훈의 패전 이후 일본군의 요동 진입을 몹시 우려했다. 그는 일본과의 협상을 위해 책사 심유경을 들여보냈는데 심유경은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담판을 벌여 잠정적인 휴전을 이끌어냈다. 제독 이여송(아래)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야전군사령관이었다. 철령 출신으로 조선족이었던 그는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조선으로부터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진주박물관 간행)에서 전재
명 심유경과 일 고니시의 담판
50일 휴전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이여송은 5만대군을 이끌고
평양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은 위기를 벗어났지만
명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알력다툼을 벌이던 명 지휘부는
자신의 공로를 뽐내기 위해
조선인을 죽이고 머리칼을 잘라
일본군으로 둔갑시켰다

승전보에 들뜬 선조는 명을 향해 큰절

1592년 11월 보바이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명 조정은 이여송을 제독(提督) 겸 어왜총병관(禦倭摠兵官)으로 임명하여 조선으로 출전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해 12월 이여송이 요양(遼陽)에 도착하자 조선은 사신을 보내 속히 진격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여송은 조선 사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을 침범한 왜노(倭奴)들을 쓸어버리고 필요하다면 일본까지 진격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여송은 12월25일 5만1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조승훈이 이끌었던 병력에 비하면 거의 15배나 많은 대군이었다. 요동, 광녕(廣寧), 선부(宣府), 대동(大同) 출신의 기마병인 북병(北兵) 이외에 상당수의 남병들도 함께 들어왔다.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도 이여송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1593년 1월6일부터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이여송은 조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평양성을 공격하기 직전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교란시키려고 시도했다. 1월5일 이여송은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일본군 진영에 보내 “황제가 강화를 허락했고 심유경도 곧 올 것”이라며 일본군 장수와 만나고 싶다고 통고했다. 고니시가 기뻐하며 부하 20여명을 보내자 사대수는 이들을 유인하여 사로잡았다. 그날 밤 생포된 일본군 몇 명이 탈주하여 명군의 진격 사실이 누설되자 이여송은 바로 공격에 나섰다.

평양전투는 화포와 조총의 대결장이었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

砲) 등 화포를 발사하여 평양성을 타격했다. 화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류성룡은<징비록>에서 “대포 소리에 땅이 진동하고 수십리 사이의 크고 작은 산들도 요동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여송은 성 아래로 바짝 다가가 싸움을 진두지휘했다.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이여백(李如栢) 등 부하 장수들도 분전했다. 명군에게 밀려 성문이 뚫리자 일본군은 내성(內城)의 토굴로 숨어들어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여송은 명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하여 고니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일본군은 결국 1월8일 밤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주한다.

명군은 일본군 1200여명의 목을 베고 전마 2900여필 등을 노획했다.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고니시 군이 평양에서 쫓겨나자 함경도에 머물던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도 고립되는 것을 우려하여 서울 쪽으로 철수 길에 오른다. 개전 이후 일방적으로 수세에 처했던 육전의 형세가 단번에 뒤바뀐 것이다.

조선 조정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승전 소식을 들은 직후 북경의 황궁을 향해 다섯번 큰절을 올렸다. 명군의 작전참모 격인 찬획(贊劃) 원황(袁黃)과 유황상(劉黃裳)에게도 두번 절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료들은 이여송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생사당(生祠堂), 즉 아직 살아있는 인물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자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평양대첩 덕분에 나라가 재조(再造)되고 억만년 동안 이어질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극찬이 이어졌다. 이여송은 이제 ‘조선을 다시 살린 영웅’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여송과 송응창, 기마병과 포병의 분열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조선은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명군이 전쟁을 주도하게 되면서 조선군은 작전권을 상실하고 명군 지휘부의 명령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평양전투 시작 직전 류성룡 등은 일본군이 패퇴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들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복병을 배치했다. 일본군을 요격하려는 깜냥이었다. 그런데 이여송은 고니시가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하자 중화(中和) 등지에 배치된 조선군에게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일(李鎰) 휘하의 조선군은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평양전투 당시 명군 지휘부 내부의 알력 때문에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희생된 사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명군의 최고사령관은 명목상으로는 제독 이여송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략 송응창으로부터 절제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철령 출신의 이여송은 본래 조선족으로 요동의 군벌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후광을 업은데다 영하의 반란을 평정하는 공까지 세운 터라 이여송의 위세는 대단했다.

송응창은 절강 출신의 양명학자였다. 그의 수하인 원황과 유황상은 진사 출신의 문관이었다. 두 사람은 참모 신분이었지만 무관 이여송을 얕보며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결국 평양 승전 이후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이여송과 송응창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그것은 이여송이 지휘하는 북병과 송응창이 이끄는 남병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여송은 평양전투 승리의 공로를 북병들에게 돌리려고 했고 남병들의 활약을 깎아내렸다. 남병들은 반발했다. 자신들이 화포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병과 북병이 일본군의 수급(首級-머리)을 서로 많이 얻으려고 다투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 산동도어사 주유한(周維翰)과 이과급사중 양정란(楊廷蘭)은 ‘이여송이 참획했다고 주장하는 일본군 수급 가운데 절반은 조선 사람의 것이고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명 가운데 절반도 조선 사람’이라고 이여송을 탄핵했다. 당시 명군 가운데는 조선 백성을 붙잡아 목을 벤 뒤 머리칼을 깎아 일본군의 수급인 것처럼 위장하여 바치는 자들이 실제로 있었다. 탄핵이 불거지자 명 조정은 주유한 등을 직접 평양에 보내 사건의 진위를 조사하도록 조처한 바 있다. 조사 과정에서는 수급의 국적을 가리기 위해 망건 자국 등이 있는 조선인의 머리와 머리칼을 빡빡 민 일본군의 머리를 구별하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사건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명군의 원조에 의지하여 전쟁을 치르는데다 이여송을 이미 ‘재조의 은인’으로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진상 규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평양전투를 통해 역전의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듯 무고한 조선 백성들의 어이없는 희생이 자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