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당시 이순신은 조선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준비된 장수’였다. 그는 임진년에 벌어진 해전에서 10전 10승을 거둠으로써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그의 위업 덕분에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던 조선은 부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은 이순신 장군을 바다의 신으로 묘사한 민화이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17) 수군의 빛나는 전과
“중국은 남쪽으로는 일본, 북쪽으로는 여진과 이웃하는데 조선이 홀로 막아주고 있다. 조선 사람들이 배에 타서 조종하는 것은 그 빠르기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들이 딴마음을 품고 오랑캐에게 굴복한다면, 단지 장수 한 사람만 시켜 침범해오더라도 우리의 회양청등(淮揚靑登: 산동과 그 이남의 강남 지방)은 전혀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할 것이다.”
1626년(인조 4) 조선을 다녀갔던 명나라 사신 강왈광(姜曰廣)이 남긴 기행문 <유헌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 수군의 역량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후금이 조선 수군을 동원하여 명을 공격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점이다. 강왈광은 왜 조선 수군을 이렇게 높이 평가했을까?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상을 목도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7세기 초 명과 청, 두 나라는 조선의 향배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 배경에는 조선 수군의 존재가 중요한 변수로 자리잡고 있었다.
천자총통·지자총통으로 도도 선단을 격파
전쟁 초반, 육전에서 연전연승했던 일본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점령한 이후 선조에게 글을 보낸다. “일본 수군 10만이 또한 서쪽으로부터 몰려올 것인데 대왕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내몰린 선조와 조선 조정을 조롱하면서 항복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랬다. 일본군의 작전은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육군이 길을 나눠 북상하고 수군이 군수물자를 싣고 서해로 진입해 지원하면 조선을 단기간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 수군이 서해로 들어오면 그들은 한강을 통해 서울을, 대동강을 통해 평양을, 압록강을 통해 의주를 공략할 수 있었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어쩌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 야심찬 구상은 이순신에 의해 어그러지고 만다. 개전 직후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주하고 경상우수사 원균마저 패하면서 경상도 일원의 바다는 일본 수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휘하 전력을 거의 상실했던 원균은 여수에 주둔한 이순신에게 부하를 보내 거듭 출동을 요청했다. 이순신 함대는 1592년 5월4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거제도 해역으로 발진한다. 이순신 함대는 5월7일, 옥포에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이끄는 일본 함대를 발견한다.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정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이윽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일제히 발사하여 도도의 선단을 격파했다. 이 싸움에서 도도의 수군은 26척의 배를 잃었다.
프로이스가 <일본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조선 수군의 배는 크고 견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화포의 성능이 뛰어나 조총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대양의 거센 파도를 견뎌낼 만한 큰 배가 부족했다. 또 조선 수군이 보유한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에 맞설 만한 중화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이윽고 5월29일, 이순신은 거북선까지 새로 투입하여 사천 해전을 치른다. 결과는 조류의 변화까지 세심하게 계산하여 준비했던 이순신의 함대의 승리였다. 곧이어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벌어진 대소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일본 수군은 당혹해하며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육전에 참전하고 있었던 와키자카 야스히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을 수군 지휘관으로 투입하는 한편, 여수와 가까운 곤양(昆陽) 지역으로 육군과 수군을 전진시켜 조선 수군을 제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592년 7월, 임진왜란 전체의 형세를 뒤바꾸는 대회전이 벌어진다. 유명한 한산도 대첩이 그것이다. 와키자카는 73척의 선단을 이끌고 고성과 거제도의 경계인 견내량이란 곳으로 진입했다. 다시 미륵도에 머물던 김천손이란 인물은 자신이 목격한 일본 수군의 이동 정보를 이순신 함대에 알려준다.
7월8일 이순신은, “바로 견내량으로 나아가 적을 공격하자”는 원균의 주장을 뿌리치고 와키자카의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편다. 견내량은 수심이 얕은데다 암초가 많아 조선의 함선들이 작전을 벌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유인 작전에 말려든 와키자카의 함대가 조총을 쏘며 추격해 오자 미리 숨어 있던 조선 함대는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조선 수군이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맹공을 퍼붓자 일본 함대는 참패했다. 59척의 배와 3천명 이상의 병력을 잃은 와키자카는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 명종대에 만들어진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이다. 애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건조되었다. 갑판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 상부에는 전투원이 머물고 중간 공간에는 노를 젓는 격군들이 배치되었다. 크고 견고하여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연구>에서 전재 |
부산에서 왜선 130여척을 격파하자
급기야 일본은 해전을 중지했다
육군 물자·군량 수송로가 막혔고
일본군은 발이 묶였다
조선과 명은 숨통이 트였다
만약 일본군이 의주까지 공격했다면
선조는 압록강을 건넜을지 모른다
명으로 귀순하겠다고 되뇌던 그였다
끊어진 보급로…평양 고니시 군대의 곤경
한산대첩을 거둔 이후에도 조선 수군은 멈추지 않았다. 7월10일에 다시 발진하여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던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를 공격했다. 이미 겁을 집어먹은 일본 수군은 포구에 머물면서 버티다가 육지로 상륙했는가 하면, 끝내는 함대를 수습하여 부산 방향으로 탈출했다.
잇따른 승전을 통해 사기가 오른 이순신 함대는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는 한편,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소속 병력들의 연합 훈련을 통해 전력을 더욱 강화했다. 1592년 8월24일 좌수영을 출발한 연합함대는 9월1일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공격했다. 조선 수군은 부산에 모여 있던 470여척의 왜선 가운데 130여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경상도 일원에서 조선 육군이 사실상 궤멸되었던 상황에서 수군이 올린 전과는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한산도 싸움을 비롯한 연이은 해전에서 수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자 일본군은 전략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군의 패전 상황을 보고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 장수들에게 해전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대신 거제도 등지에 성을 쌓아 조선 수군을 견제하고 부산에서 경상도로 이어지는 수로 교통로를 확보하는 데 주력할 것을 강조했다.
이순신의 활약 덕분에 일본 수군이 위축되자 전국(戰局)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조선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본 육군의 보급이 지장을 받게 되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와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북상해 있었다. 수군이 이순신 함대에 막혀 서해로의 기동이 좌절되자 평양에 머물던 고니시의 부대는 특히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군이 몰려오면 어디로 갈 것이냐?’고 선조를 조롱했지만 수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수송로가 끊기자 군량 문제가 심각해졌다. 점령지 인근에서 확보한 군량을 아껴 먹으면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피복 등 다른 물자 부족도 문제였다. 당시 평양의 일본군들은 다가올 조선의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피복이나 신발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의주까지 치고 올라가는 것은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반면 멸망의 위기까지 내몰렸던 조선은 이순신 수군의 연승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서진을 차단하여 평양의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발을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 수군이 서해로 들어와 평양의 고니시 군대의 보급 상황이 좋아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고니시 군은 필경 의주를 공격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가야만 했을 것이다. 국체의 상징인 선조가 사라질 경우, 조선은 저항의 구심점을 잃고 그대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평양에 이르렀을 때부터 선조가 명으로 귀순하겠다는 말을 되뇌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명 천진·요동·산동으로의 진입까지 막다
이순신의 활약을 통해 조선은 서해의 수로를 활용할 수 있었다. 선조와 조정은 궁벽진 의주에 있었지만 활짝 열린 서해의 수로를 이용하여 조정의 명령을 삼남 지방과 제주도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온전하게 보전된 전라도에서 생산된 각종 물자가 배편을 통해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등지까지 운반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화도는 서해의 남북을 이어주고 수도권과 강원도 등지를 도모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이 되었다. 조선 각지의 백성들은 “조정과 나라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서해 수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순신 수군의 활약이 남긴 영향은 조선 차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명의 해방(海防)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일본 수군 선단이 서해로 진입할 경우, 명의 주요 지역 또한 일본군의 위협에 직접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북경의 바로 옆에 있는 천진(天津)은 물론, 산동(山東)과 요동, 강남 지방까지 공격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도발하면서 최종 목표로서 ‘명나라 정복’을 표방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명 조정은 임진왜란의 발생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먼저 자국의 해방 태세부터 점검했다. 일본 수군이 천진, 요동, 산동 등지로 진입하는 사태를 가장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서해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명 또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실제로 1592년 12월, 명이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5만의 육군을 조선에 다시 보내면서도 수군은 보내지 않았던 것은 그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이순신이 워낙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수군을 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명 수군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부터였다. 구체적으로는 1597년 7월, 원균이 거느리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했던 직후였다. 이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되고,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명은 비로소 조선에 수군을 파견했다. 일본군이 명 본토에 상륙하는 상황을 차단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순신은 이렇게 바다를 지켜 조선을 구해냈을 뿐 아니라 명의 해방까지도 확보하는 공을 세웠다. 전란 초기 벼랑 끝으로 몰렸던 선조는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또 지리멸렬했던 육군 때문에 실망했던 선조와 조정의 수군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순신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일선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선조나 조정이 이순신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훗날 처형 직전까지 내몰리고 백의종군을 해야 했던 이순신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싹텄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