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에 대한 경향 해석
양자역학의 발흥과 동시에 더 젊은 물리학자 대부분은, 통계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은 앙상블 이론이 (a theory of ensembles) 아니라 단일한 기본적 입자들의 역학 이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다소 주저하다가 나도 이 견해를 수용했다.) 다른 한편 그들은, 통계역학처럼 양자역학이 확률론적 이론이라고 또한 확신했다. 기본적 입자들에 대한 역학 이론으로서 양자역학은 객관적 면모를 지녔다. 확률론인 이론으로서 양자역학은 주관적 면모를 지녔다 (혹은 그들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은, 객관적 면모와 주관적 면모를 결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기본이론이었다. 그러한 것이 양자역학의 혁명적 특징이었다.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이것으로부터 다소 이탈했다. 아인슈타인에게 통계역학과 같은 확률론적 이론은 극도로 흥미롭고 중요하며 아름다웠다. (그는 초기에 확률론적 이론들에 몇 가지 결정적 기여를 성취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기본 물리학 이론도 아니었고 객관적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히려 주관적 이론들로, 우리 지식의 단편적 특성 때문에 우리가 도입해야 하는 이론들이었다. 이것으로부터 양자역학은, 자체의 탁월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이론이 아니라 미완성이라고 (자체의 통계적 특성으로 인하여 자체가 미완성 지식을 사용하여 작동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객관적이거나 완성된 이론은 확률론적이지 않고 결정론적 이론일 터라고 귀결된다.
이 두 가지 입장에 공통적 요소가 있다고 보일 것이다: 두 가지 입장은, 확률론적이거나 통계적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주관적 지식이나 지식의 결핍을 이용한다고 전제한다.
당시 (1920년대 말) 토론된 유일한 확률에 대한 객관론적 해석이 빈도해석이었음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이것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벤[Venn], 폰 미제스[von Mises], 그리고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 의하여 다양한 해석본으로 개발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 자신에 의하여.) 이제 빈도이론가들은, 대량현상(mass phenomena)에 관한 객관적인 문제들과 상응하는 객관적인 답변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대량현상의 요소로서 단일한 사건의 확률을 우리가 말할 때마다 객관성이 문제가 된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광양자의 (光量子: photon) 방사와 같은 단일 사건과 관련하여 확률에 의하여 우리의 무지가 평가될 따름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이유인즉 객관적 확률은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사건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평균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만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단일 사건 자체에 관하여 객관적인 통계적 확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따라서 그리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서, 주관론이 양자역학에 들어간 곳은 여기였다. 그리고 내가 확률에 대한 경향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주관론과 싸우려고 시도한 곳은 여기였다. 이것은 임시방편적 도입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확률에 대한 빈도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논증들을 신중하게 수정한 결과였다.
주관념은, 경향이 물리학적 실재로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향은 성향에 대한 척도이었다. 측정될 수 있는 물리학적 성향은 (“잠재력”) 장(fields)의 이론에 의하여 물리학에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성향을 물리학적으로 실재적인 것으로서 간주한 선례가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향을 물리학적으로 실재적인 것으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제안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비결정론에 관한 여지가 남았다.
경향을 도입하여 해결하려고 의도된 종류의 해석 문제를 밝히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이 슈뢰딩거에게 보낸 편지를 나는 토론하겠다. 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가 1935년에 발표한 잘 알려진 사고실험을 언급한다. 가이거 계수기의 도움을 받아서 폭탄을 격발시키기 위하여 슈뢰딩거는 어떤 방사능물질을 배열하는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 배열은, 그 폭탄이 특정 시간 간격 안에 폭발하거나 아니면 도화선이 끊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폭발 확률을 1/2로 하라. 고양이 한 마리를 폭탄 옆에 두면 그 고양이가 죽임을 당할 확률도 1/2일 것이라고 슈뢰딩거는 논증했다. 전체 배열은 아마도 양자역학을 통하여 기술될 것이고 이 기술에 고양이에 대한 두 가지 상태의 ㅡ 산 상태와 죽은 상태 ㅡ 중첩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적 서술은 ㅡ 사이(ψ)-함수 ㅡ 실재적인 것을 서술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실재적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양자역학이 주관적이고 미완성임을 이것이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사이(ψ)-함수를 완성된 서술로서 [그것에 의하여 서술되는 실재적인 물리적 과정에 대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문제의 순간에 고양이가 살아 있지 않다고 의미하는 것이고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다고 의미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상황이 관찰에 의하여 실현될 터이다.
우리가 이 견해를 [ψ-함수의 완성에 대한] 배척한다면, ψ-함수가 사태의 실재적 상태가 아니라 사태의 상태에 관하여 우리 지식의 총화를 서술한다고 우리가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이론물리학자 대부분에 의하여 수용되는 듯한 보른[Born]의 해석이다.
그러나 나의 경향 해석을 수용하자마자 이 궁지는 사라지고 양자역학 다시 말해서 ψ-함수는, 사태에 대한 결정론적 상태는 아닐지라도, 사태의 실재적 상태를 ㅡ 실재적 성향 ㅡ 정말로 서술한다. 그리고 사태의 상태가 결정론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미완성을 가리킨다고 언급될 가능성이 클지라도, 이 미완성은 이론의 ㅡ 서술의 ㅡ 오류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사태의 상태 자체에 대한 비결정성의 반영일 것이다.
슈뢰딩거는 항상, | ψ ψ* |가 실재 밀도와 같은 물리학적으로 실재적인 것을 서술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실재 자체는 비결정적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식했다. 경향 해석에 따르면 이 직관은 전적으로 옳았다.
확률에 대한 경향 이론과 그 이론이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데서 수행하는 역할을 나는 여기서 더 이상 토론하지 않겠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처음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나는 기억하는데 그로 인하여 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낙망하지도 않았다. 그 후 상황이 매우 많이 변했고, 양자역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경멸적으로 나의 이론을 처음에 일축한 동일한 비판자들 (보어[Bohr] 옹호자들]) 몇몇은 이제 그것은 모두 구식이고 사실상 보어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지금 말한다.
수학자이자 양자역학 역사가인 B. L. 판데르바르덴(van der Waerden)으로부터 1967년의 나의 논문 “‘관찰자’ 없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Without ‘The Observer’)에 관한 서신을 내가 한 통 받았을 때, 나는 거의 40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에 대하여 나 자신이 보상 이상의 것을 받은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 서신에서 그는 자신이 나의 논문의 13가지 논지 모두에 그리고 또한 확률에 대한 나의 경향 해석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말했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년, 153-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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