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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이론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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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이론

 

37. 형이상학적 연구 강령으로서 다윈론

나는 항상 진화론에 극도로 관심을 가졌고 진화를 한 가지 사실로서 아주 기꺼이 수용한다. 다윈론에서 뿐 아니라 다윈에게도 나는 매혹당했는데, 진화론적 철학자 대부분에게 다소 인상을 받지 못했다; 훌륭한 한 사람이 예외인데 다시 말해서 새뮤엘 버틀러(Samuel Butler)이다.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는 시행과 오류-제거에 의한, 다시 말해서 라마르크적 지시(instruction)라기보다 다윈적 선택(selection)에 의한 지식의 성장 이론을 담았다; 이 요점으로 (저 저서에서 내가 암시한) 인하여 물론 진화론에 대한 나의 흥미가 증대했다. 내가 말해야 할 것 중 몇 가지는, 나의 방법론을 이용하려는 시도로부터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을 조명하려는 다윈론에 대한 그 시도의 유사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진화론과 연결된 몇 가지 인식론적 문제를 다루려는 나의 간략한 최초 시도를 담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그런 문제를 다루었고, 슈뢰딩거가 얻은 결과 중 몇 가지 결과와 매우 유사한 결과에 내가 도달했다고 나중에 내가 발견하여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1961진화와 지식의 나무(Evolution and the Tree of Knowledge)”라는 제목으로 나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허버트 스펜서 기념 강좌(the Herbert Spencer Memorial Lecture)를 제공했다. 이 강좌에서 내가 슈뢰딩거의 관념을 다소 넘어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라마르크론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다윈론의 한계를 ㅡ 지시(instruction)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자연선택 ㅡ 엄격하게 지키는 반면, 다윈 이론에 대한 사소한 개량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을 추가로 전개했다.

나는 또한 콤튼(Compton)a 강좌에서 (1966) 몇 가지 연관된 문제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다윈론의 과학적 위상이라는 문제. 내가 보기에 다윈론은 다음과 같이 라마르크론에 대하여 꼭 같이 동일한 관계에 있다:

 

귀납론에 대한 연역론,

반복에 의한 지시에 대한 선택,

정당화에 대한 비판적 오류 제거.

 

이 표의 왼편에 있는 관념들의 논리적 옹호 불가능성으로 인하여, 다윈론에 (, 오른편의) 대한 일종의 논리적 설명이 확립된다. 그리하여 그 옹호 불가능성은 거의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으로서 서술될 수 있을 터이다; 아니면 그 옹호 불가능성은 응용 논리로서 ㅡ 아무튼 응용 상황적 논리로서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ㅡ 서술될 수 있을 터이다.

이 관점으로부터 다윈론의 과학적 위상이라는 문제는 ㅡ 최고로 넓은 의미에서, 시행과 오류-제거의 이론 ㅡ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나는, 다윈론이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은 아니지만, 형이상학적 연구 강령이라는 ㅡ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이론들을 위하여 가능한 기초구조 ㅡ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론에 더 많은 것이 있다: 나는 다윈론을, 내가 상황적 논리라고 지칭하는 것의 적용으로서 또한 간주한다. 상황적 논리로서 다윈론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제한된 가변성을 지닌 실체들이 있는 제한된 불변성의 기초구조인 세계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변종에 의하여 만들어진 실체 중 몇 가지는 (기초구조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것들), 다른 것들이 (상황과 충돌하는 것들) 제거될 것인 반면, “생존할것이다.

이것에, 생명체가 혹은 더욱 특히 자기-생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 가능한 몸체들이 있을 수 있는 특별한 기초구조의 존재라는 ㅡ 아마도 희귀하고 고도로 개별적인 상황의 집합 ㅡ 전제를 추가하라. 그렇다면 시행과 오류-제거라는, 혹은 다윈론이라는 관념이 적용 가능해질 뿐 아니라 거의 논리적으로 필수적이 되는 상황이 주어진다. 이것은, 생명체의 기초구조나 근원이 필수적이라고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체가 가능할 터이지만 생명체를 낳는 시도가 발생하지 않거나 생명체를 낳은 모든 저 시도가 제거된 기초구조가 있을 것이다. (후자[後者]는 단순히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발생할지 모른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혹시 파괴될 한 가지 이상의 방식이 있다.) 의미되는 바는, 생명체를 허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생명체가 시작된다면 이 전체적 상황으로 인하여 다윈적 관념은 상황적 논리의 한 가지 관념이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다윈의 이론이 성공적일 터임은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이론은 매우 특별하고 아마도 심지어 유일무이한 상황이다. 그러나 심지어 생명체가 없는 상황에서도 다원적 선택은 어느 정도까지 적용될 수 있다: 비교적 안정적인 (문제의 상황에서) 원자핵들에, 안정적이지 못한 원자핵들보다 더 풍부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화합물에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다윈론이 생명체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극도로 비개연적이어서 왜 생명이 시작되었는지를 아무것도 설명할수 없다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통계적 설명은, 최종적으로, 매우 높은 확률로써 틀림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높은 확률이, 이용 가능한 시간이 엄청나기 때문에 낮은 확률이 높아진 것뿐이라면 (볼츠만의 설명에서처럼; 35절의 주석260에 대한 원문 참조) 이런 방식으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럴지라도 이런 종류의 설명이 생명의 근원에 적용될 수 있다고 추측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생명과 생명의 기초구조가 우리의 상황을 구성한다고 전제되자마자, 상황적 논리로서 다윈론에 대한 견해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윈론에 관하여 다윈론이 다른 것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이상학적 연구 강령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상황적 논리에 대한 다윈론의 밀접한 유사성은, 상황적 논리를 다윈이 정식화하는 데 본질적인 거의 항진명제적인(恒眞命題的: tautological) 특징에도 불구하고 다윈론이 거둔 거대한 성공의 일부이고 지금까지 진지한 경합 이론이 나서지 않은 사실의 일부이다.

상황적 논리로서 다윈의 이론을 보는 견해가 수용될 수 있다면, 지식의 성장에 관한 나의 이론과 다윈론 사이의 기묘한 유사성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을 터이다: 두 가지 이론 모두는 상황적 논리에 대한 경우일 터이다. 지식에 대한 의식적인 과학적 접근에서 ㅡ 잠정적 추측에 대한 의식적 비판과 이 추측에 선택압력을 의식적으로 증대시키는 것 (그 추측을 비판함에 의하여) ㅡ 새롭고 특별한 요소는, 결과적으로 서술적이고 논증적인 언어의 출현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 서술이 비판될 수 있는 서술적 언어의 출현.

그런 언어의 출현으로 인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아마도 생명 자체만큼 비개연적인, 고도로 비개연적이고 혹시 유일무이한 상황을 대면할 터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고려하면, 추측과 반증이라는 의식적 절차를 통한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지식의 성장 이론이 거의논리적으로 뒤따른다: 그 이론은 다원론의 일부뿐 아니라 상황의 일부가 된다.

 

다윈론 자체에 관하여, “()-다윈론이나 현대적 종합(The Modern Synthesis)”(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에 의하여) 같이 다양한 명칭으로 지칭되는 이 이론의 현대적 형태로서 내가 다윈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내가 이제 설명해야겠다. 그 용어는 본질적으로 다음 전제나 추측으로 구성되는데, 그것들에 대하여 나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1) 지구상의 매우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는 매우 희귀한 형태로부터, 아마도 심지어 단일 유기체로부터 시작된다: 진화 역사인 진화의 나무가 있다.

(2) 이것을 설명하는 진화이론이 있다. 그 이론은 주로 다음 가설로 구성된다.

(a) 유전: 자손은 부모 생명체를 상당히 충실하게 재생한다.

(b) 변종: (아마도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작은변종이 있다. 이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적이고 유전적인 돌연변이들이다.

(c) 자연선택: 변종들뿐 아니라 유전 물질 전체가 제거에 의하여 제어되는 다양한 작동기제(mechanisms)가 있다. 그것들 가운데는 작은돌연변이만 확산되는 것을 허용하는 작동기제가 있다; “커다란돌연변이는 (“희망에 찬 괴물”) 통상적으로 치명적이고 그리하여 제거된다.

(d) 변종가능성: 어떤 의미에서 변종은 ㅡ 다양한 경쟁자의 출현 ㅡ 명백한 이유로 선택에 선행할지라도, 변종가능성이 ㅡ 변종의 범위 ㅡ 자연선택에 의하여 제어됨이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예를 들어, 변종의 규모뿐 아니라 빈도와 관련하여. 유전과 변종에 관한 유전자 이론은, 다른 유전자의 변종가능성을 제어하는 특별한 유전자를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층구조에, 혹은 아마도 훨씬 더 복잡한 상호작용 구조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복잡성을 우려해서는 안 된다; 이유인즉 복잡성은 거기에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택론적 관점에서, 유전을 제어하는 유전자 암호방식과 같은 것 자체가 선택의 초기 산물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고도로 정교한 산물이라고 우리가 전제해야 한다.)

전제 (1)(2), 내가 생각하기에 다윈론에 필수적이다 (몇몇 규칙성이 장착된, 변화하는 환경에 관한 몇몇 전제와 함께). 다음 요점 (3)은 요점 (2)에 관한 나의 심사숙고이다.

(3) “보수적원리 (a)(d) 그리고 내가 독단적 사고라고 지칭하는 것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고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b)(c) 및 내가 비판적 사고로 지칭한 것 사이에도 그렇다.

이제 나는, 내가 다윈론을 형이상학적으로서 그리고 연구 강령으로서 간주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싶다.

다윈론은, 시험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다윈론이 시험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언젠가 어떤 행성 위에서 조건 (a)(b)를 충족시키는 생명체를 우리가 발견한다면 (c)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결국 풍요롭게 다양한 두드러진 형태를 낳을 것이라고 다윈론이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윈론은 이만큼 주장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지구상의 세 가지 종(: species)이 지닌 유전자 조직과 유사한 유전자 조직을 지닌 정확하게 세 가지 종류의 박테리아로 구성된 생명체를 우리가 화성에서 발견한다고 전제하라. 다윈론은 반증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세 가지 종(: species), 많은 변종 가운데서 생존하기 위해 충분히 잘 적응된 유일한 형태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종(: species)만 있어도 (혹은 어떤 종[: species]도 없어도) 우리는 동일하게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윈론은 실제로 다양성의 진화를 예측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윈론은 실제로 다양성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기껏해야 다윈론은 유리한 조건에서 다양성의 진화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일반적 용어들로 기술하는 것은 ㅡ 그 조건이 존재하여 다양한 형태가 출현할 것임을 제외하고 ㅡ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이론을 거의 최고의 상태에서 ㅡ 거의 그 이론을 가장 시험 가능한 형태로 ㅡ 수용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 이론이 매우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를 거의 예측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 그 이론의 예측적이거나 설명적 힘은 훨씬 더 절망적이다. “적응을 고려하라. 첫눈에 보기에 자연선택이 그것을 설명하는 듯이 보이고 어느 정도 설명한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지금 살아있는 종(: species)이 자체의 환경에 적응한다고 말하면, 사실상, 거의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다. (: species)이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선택에 의하여 그 종이 제거되었을 터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말로 우리는 적응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유사하게 어떤 종(: species)이 제거되면 그 종(: species)은 틀림없이 환경에 잘못 적응했다. 적응이나 적합성은 현대 진화론자들에 의하여 생존 가치로서 정의(定義: defined)되고 생존에서 실제적 성공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취약한 이론을 시험할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극도로 귀중하다. 그 이론 없이 다윈 이래 우리의 지식이 성장한 바와 같이 어떻게 우리의 지식이 성장할 수 있을 터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령 페니실린에 적응된 박테리아로써 실험을 설명하려고 시도함에서, 우리가 자연선택 이론에 의하여 크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분명하다. 그 이론이 형이상학적일지라도, 그 이론은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실용적 연구들을 많이 설명한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페니실린으로 감염된 환경과 같은) 대한 적응을 합리적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다: 그것은 적응의 작동기제(mechanism)가 존재한다고 암시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심지어 활동 중인 작동기제(mechanism)를 상세하게 연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저 모든 것을 수행하는 지금까지 유일한 이론이다.

이것은 물론, 다윈론이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된 이유이다. 다윈론의 적응 이론은, 확신을 주는 최초의 비()-신학적 이론이었다; 그리고 유신론(有神論)은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쁜데 이유인즉 유신론이, 궁극적인 설명에 도달되었다는 인상을 풍겼기 때문이다.

이제 다윈론이 동일한 인상을 풍긴다는 정도까지, 다윈론은 적응에 대한 유신론적 견해보다 그렇게 훨씬 더 좋지 않다; 그리하여 다윈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라 형이상적이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연구 강령으로서 다윈론의 과학관련 가치는 매우 큰데, 특히 다윈론이 비판되어 개선될 수 있다고 인정되면 그렇다.

위의 요점 (1)(2)에서 언명된 바와 같이, 이제 다윈론의 연구 강령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먼저, (2)가 다시 말해서 다윈의 진화론에 매우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의 지구상 진화를 설명하는 충분한 설명력이 없을지라도, 그 진화론은 그 진화를 틀림없이 암시하고 그리하여 그 진화를 주시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진화론은 틀림없이, 그런 진화가 발생한다그 진화는 점진적일 것이라고 정말로 예측한다.

점진성(gradualness)대한 중대한 예측은 중요하고 그 예측은 (2)(a)-(2)(c)로부터 즉각 귀결된다; 그리고 (a)(b) 및 적어도 (c)에 의하여 예측되는 돌연변이들의 작음(smallness)은 실험적으로 잘 뒷받침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상세하게 알려진다.

그리하여 점진성(gradualness), 논리적 관점에서, 그 이론의 핵심적 예측이다. (내가 보기에 점진적임은 그 이론의 유일한 예측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형태들의 유전적 토대에서 변화가 점진적이라면, 그 변화는 ㅡ 적어도 원칙적으로ㅡ 그 이론에 의하여 설명된다; 이유인즉 그 이론은 작은 변화들 각각이 돌연변이에 기인하여 발생한다고 정말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 설명, 우리가 물리학에서 요구하는 유형의 설명과 매우 다른 것이다. 특정 일식을 예측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 일식을 설명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특정 진화적 변화를 (아마도 한 가지 종[: species] 내부에서 유전자 개체군 안의 특정 변화를 제외하고) 우리가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 작은 변화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몇 가지 중간 단계가 있었다 ㅡ 연구를 위한 중요한 암시: 연구 강령.

게다가 그 이론은 우연적 돌연변이를 그리하여 우연적 변화를 예측한다. 그 이론에 의하여 방향이 지적된다면 그 방향은, 격세유전 돌연변이가 비교적 빈번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작위-행보(random-walk) 유형의 진화적 연쇄를 기대해야 한다. (무작위 행보는, 예를 들어 걸음마다 자신의 다음 행보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하여 룰렛바퀴[roulette wheel]를 참고하는 사람에 의하여 서술되는 행로[track]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출현한다. 무작위 행보가 진보 나무에서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떠한가? 그 질문은, “정향진화적(定向進化的) 추세로서 때때로 지칭되는 바와 같이 그 추세를 다윈론이 설명할 수 있다면, 답변될 터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방향으로 진화적 변화의 연쇄 (무작위적이 아닌 행보). 슈뢰딩거와 워딩튼(Waddington) 그리고 특히 알리스터 하디 경(Sir Alister Hardy)과 같은 다양한 사상가가 정향진화적 추세에 대한 다윈적 설명을 제시하려고 시도했고 나도 또한 예를 들어 나의 스펜서(Spencer) 강좌에서 그렇게 하려고 시도했다.

아마도 정향진화를 설명할, 다윈론의 풍요로움에 대한 나의 제안은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다.

(A) 내부의 선택압력으로부터 나는 외부의 혹은 환경적 선택압력을 구분한다. 내부의 선택압력은 생명체 자체에서 유래하고, 내가 추측하는 바, 생명체가 선호하는 것이 물론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여 변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 선호하는 것으로부터 (혹은 목표”) 유래한다.

(B) 다양한 유전자들의 집단들이 있다고 나는 전제한다: 주로 신체 구조를 제어하는 집단들이 있는데 나는 그 집단들을 α-유전자로 지칭하겠다; 주로 행위를 제어하는 집단들을 b-유전자로 지칭하겠다. 중간 유전자를 (혼합 기능 지닌 유전자를 포함해서) 나는 여기서 고려사항에서 제외하겠다 (그 유전자가 존재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b-유전자는 다시 p-유전자와 (선호 사항이나 목표를 제어하는) s-유전자로 (기량을 제어하는) 유사하게 세분될 것이다.

몇몇 생명체는 외부의 선택압력을 받고 유전자들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b-유전자를 발전시켜서 그로 인하여 그 생명체가 특정 변화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나는 나아가 전제한다. 행위 변화의 범위는 유전적 b-구조에 의하여 어떤 정도로 제어될 것이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b-구조에 의한 행위가 너무 엄격하게 결정되지 않으면 그 행위는 유전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유전자 변화 가능성의 범위에 대하여 너무 엄격하지 않은 유전적 결정만큼 성공적으로 판명될 것이다. ((2)(d) 참조.) 그리하여 유전적으로 결정된 범위나 정보비축 내부에서 비-유전적 변화를 의미하면서 우리는 행위의 순전히 행위적변화나 행위의 변종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유전적으로 고정되었거나 결정된 행위적 변화와 대조시킬 것이다.

특정 환경적 변화가 새로운 문제를 그리하여 새로운 선호 사항이나 목표의 채택을 (예를 들어, 특정 유형의 음식물이 사라졌기 때문에) 초래한다고 이제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선호 사항이나 목표는 처음에 새로운 잠정적 행위의 형태로 (b-유전자에 의하여 허용되지만 고정되지 않은) 나타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은 잠정적으로 유전적 변화 없이 자신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순전히 행위적이고 잠정적 변화는, 성공적이라면, 새로운 생태적 장소의 채택이나 발견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변화로 인하여, 유전적 p-구조가 (다시 말해서, 개체들이 지닌 본능적 선호 사항이나 목표”) 선호 사항에 대한 새로운 행위적 유형을 적거나 많게 기대하거나 고정하는 개체들이 선호될 것이다. 이 단계는 결정인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이유인즉 이제, 새로운 선호 사항에 따르는 기량 구조에서 (s-구조) 저 변화들이 선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호되는 음식물을 얻기 위한 기량.

이제 나는, s-구조가 변한 다음에만 α-구조에서 특정 변화가 선호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기량을 선호하는 신체적 구조에서 저 변화. 이 경우에서 내부의 선택압력은 지향(指向: directed)”될 것이고 그리하여 일종의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가 발생할 것이다.

이 내부의 선택 작동구조(mechanism)에 대한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이 도식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p s α.

 

다시 말해서 선호 구조와 그 구조의 변종이, 기량 구조의 선택과 그 선택의 변종을 제어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순전히 신체 구조의 선택과 그 선택의 변종을 제어한다.

그러나 이 연쇄는 순환적일 것이다: 새로운 신체 구조는 다시, 선호의 변화를 선호하고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다윈이 성적(性的: sexual) 선택으로 지칭한 것은, 여기서 설명된 관점에서, 내가 서술한 내부 선택압력의 특별한 경우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선호 사항으로써 시작하는 순환이라는 특별한 경우. 내부 선택압력이 비교적 환경에 대한 나쁜 적응을 초래할 것임은 특징적이다. 다윈 이래 이것은 자주 주목되었고, 어떤 두드러진 부적응 사례를 (공작새 꼬리의 과시와 같은 생존 관점에서 부적응 사례) 설명하려는 희망은, 자신의 성적(性的: sexual) 선택이론을 다윈이 도입하기 위한 주요 동기 중 하나이다. 원래 선호 사항은 잘 적응되었을 것이지만, 내부 선택압력 및 변화된 신체 구조로부터 변화된 선호 사항으로 정보교환(feedback)(α에서 p) 행위적 형태(의식[儀式: rites])와 신체적 형태 두 가지를 과장된 형태로 만들어낼 것이다.

-성적(-性的: nonsexual) 선택의 사례로서 나는 딱따구리를 언급할 것이다. 합당하게 추정하면 이 특수화는,

 

 

 

p s라는

 

도식에 따라서 유전적 행위 변화를 초래하고 그다음 새로운 기량을 초래한 새로운 먹이에 대한 미각의 변화로써 (선호 사항)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신체적 변화는 마지막에 일어났던 듯이 보인다. 자체의 미각과 기량에서 변화를 겪지 않고 자체의 부리와 혀에서 신체적 변화를 겪는 조류는 자연선택에 의하여 빠르게 제거된다고 기대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역순은 그렇지 않다. (유사하게, 그리고 명백함이 못지않게: 새로운 기량을 지녔지만, 새로운 기량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선호 사항을 지니지 못한 새는 이익을 보지 못할 터이다.)

물론 단계마다 많은 정보교환(feedback)이 있을 것이다: p s, 지적된 바와 같이 αsp 모두에게 돌이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보교환(feedback)을 산출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s는 유전적 변화를 포함하여 p와 동일한 방향으로 추가적 변화를 선호할 것이다.) 더 과장된 형태와 의식(儀式: rituals)의 주원인이 되는 것은 이 정보교환(feedback)이라고 우리가 추측할 것이다.

그 문제를 또 다른 사례로서 설명하기 위하여, 특정 상황에서 외부의 선택압력이 크기를 선호한다고 전제하라. 그렇다면 동일한 압력은 크기에 대한 성적(性的: sexual) 선호에 또한 우호적일 것이다: 선호 사항은, 먹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외부 압력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p-유전인자가 생기자마자 새로운 순환 전체가 세워질 것이다: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를 촉발하는 것은 p-돌연변이들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상호강화(mutual reinforcement)에 대한 일반적 원리가 발생한다: 한편 우리에게, 기량 구조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신체적 구조에 대한 선호나 목표 구조에서 1차적인 계층적 제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 구조들 사이의 일종의 2차적 상호작용이나 정보교환(feedback)이 또한 있다. 상호강화의 이 계층적 체계가, 대부분의 경우에서, 선호나 목표에서 제어가 주로 전체 계층구조 도처에서 하위 제어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내가 제안한다.

사례들에 의하여 이 두 가지 관념 모두가 예시될 것이다. 내가 선호 구조목표 구조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유전적 변화를 (돌연변이), “기량 구조에서 유전적 변화와 신체 구조에서 유전적 변화로부터 우리가 구분한다면, 목표 구조와 신체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하여 다음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a) 신체 구조에 대한, 목표 구조의 돌연변이들의 행동: 딱따구리의 경우에서와 같이 미각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먹이 획득과 유관한 신체 구조가 변하지 않은 채 남을 것인데 그 경우 그 종(: species)은 자연선택에 의하여 제거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특수한 기량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아니면 그 종(: species)은 눈(eye) 같은 기관과 유사한 새로운 신체적 특수화를 발전시켜서 적응할 것이다: (:species)이 보는 것에 (목표 구조) 더 강력한 관심을 두게 되면, (eye)의 구조 향상을 선호하는 돌연변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b) 목표 구조에 대한, 신체 구조의 돌연변이들의 행위: 먹이 획득과 유관한 신체 구조가 변할 때, 먹이와 관련된 목표 구조가 자연선택에 의하여 고착되거나 굳어지는 위험에 처하고 그로 인하여 다시 추가적인 신체적 특수화가 발생할 것이다. (eye)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신체 구조의 향상을 위한 선호적 돌연변이로 인하여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예리하게 증가할 것이다 (이것은 반대 효과에도 유사하다).

 

개괄된 이론에 의하면, 진화로 인하여 어떻게 생명체의 고등형태로 지칭될 것이 생기는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과 같은 것이 시사된다.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다원론은 그런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다원론은 기껏해야 적응의 정도에서 향상과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틀림없이 적어도 인간만큼 잘 적응된다. 아무튼 박테리아는 더 길게 존재해서 박테리아가 인간보다 더 오래 생존할 것이라고 우려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생명체의 고등 형태와 동일시될 것은 행위적으로 더 풍요로운 선호 구조이다 ㅡ 더 큰 범위의 선호 구조; 그리고 선호 구조가 내가 그것에 귀속시키는 선두적 역할을 지닌다면 (대체로), 고등 형태를 향한 진화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도 제시될 것이다: 고등 형태는 p s α라는 기본적 계층구조를 통하여 출현하는데 다시 말해서, 선호 구조가 주도권을 쥘 때마다 그리고 그런 조건이라면 그렇다. 과도한 특수화를 포함하여 정체(停滯: stagnation)와 복귀돌연변이(reversion), 이 기본적 계층구조 안의 정보교환(feedback)에서 전도(顚倒: inversion)가 일어난 결과이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종들(: species)의 분리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마도 많은 해답 가운데서 하나) 가능하다고 시사되기도 한다. 그 문제는 이렇다: 독립적 돌연변이는, 새로운 종(: species)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종(: species)의 유전자 집합에서 변화를 초래할 따름이라고 기대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 species)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하여 국지적 분리가 틀림없이 요구된다. 보통 우리는 지리적 분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지리적 분리는 새로운 행위의 채택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새로운 생태적 장소의 채택에서 기인하는 분리의 특별한 경우로서만 간주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생태적 장소에 ㅡ 특정 유형의 장소 ㅡ 대한 선호가 유전이 되면, 상호교배가 생리학적으로 여전히 가능할지라도 이것으로 인하여 그 교배가 그치기에 충분한 국지적 분리가 생길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종(: species)은 동일한 지리적 영역에 ㅡ 이 영역이, 특정 아프리카 연체동물에 대한 경우로 보이는 바와 같이, 맹그로브 나무의 규모일 뿐이라 할지라도 ㅡ 사는 반면 아마도 분리할 것이다. 성적(性的: sexual) 선택에도 유사한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

정향진화 추세 배후에 있는 가능한 유전적 작동기제(mechanism)에 대한 서술은, 위에 개괄된 바와 같이, 전형적인 상황적 분석이다. 다시 말해서, 개발된 구조가 상황 논리의 방법을 모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 구조는 생존 가치를 지닐 것이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진화론에 관한 또 다른 제안은, “생존 가치라는 관념과 그리고 목적론과도 관련된다. 이 관념들은 문제해결을 통하여 훨씬 더 분명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생명체와 모든 종(: species)은 부단히 멸종의 위협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 위협은, 그 생명체와 모든 종(: species)이 해결해야 하는 구체적 문제의 형태를 띤다. 이 구체적 문제 중 많은 문제가 생존 문제와 같은 것은 아니다. 훌륭한 둥지를 발견하는 문제는, 새끼 새들에게 생존 문제로 변할지 모르지만, 한 쌍의 새에게 생존 문제가 되지 않고도 그 새에게 구체적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종(: species), 당장 그 특정 새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해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 대부분은 생존에 의해서라기보다 선호 사항, 특히 본능적 선호 사항에 의하여 제기되어 문제의 본능이 (p-유전자) 틀림없이 외부의 선택압력을 받고 진화했을지라도 그 선호 사항에 의하여 제기되는 문제가 통상적으로 생존 문제는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생명체를, 목적-추구하는 것으로서보다 문제-해결하는 것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이 낫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내가 구름과 시계에 대하여(Of Clouds and Clocks)”에서 밝히려고 시도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창발하는 진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ㅡ 물론 원칙적으로ㅡ 것이다.

생명의 근원과 문제의 근원은 동시적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생물학이 화학으로, 나아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판명되기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이것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어느 날 무생물로부터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창조가 개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물론 본질적으로 (환원론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아주 흥미진진할 터일지라도 이것으로 인하여 생물학이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환원될수 있다고 확립되지 않을 터이다. 이유인즉 이것으로 인하여 문제의 출현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이 확립되지 않을 ㅡ 물리학적 수단으로 화합물을 생성하는 능력에 의하여 화학결합(chemical bond)에 대한 물리학적 이론이나 심지어 그런 이론의 존재가 확립되지 않는 것과 같이 ㅡ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입장은, 환원 불가능성 창발을 옹호하는 입장으로서 서술될 것이고 나의 입장은 아마도 다음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물리학적 과정과 상세하게 상관되는(correlated)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 혹은 물리화학적 용어들로 점진적으로 분석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은 없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어떤 물리화학적 이론도 새로운 문제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물리화학적 과정과 같은 것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최소 작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least action) ,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와 같이 물리학에서 변분 원리(變分 原理: variational principles) 아마도 유사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유신론적[有神論的] 방법은 하느님을, 유사한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시도한다.)

(2) 이 추측이 옹호될 수 있다면 이 추측으로 인하여 몇 가지 구별이 발생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서로 구분해야 한다:

물리학적 문제 = 물리학자의 문제

생물학적 문제 = 생물학자의 문제

생명체의 문제 = 다음과 같은 문제: 어떻게 나는 생존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변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적응할 수 있는가?

인공적 문제 = 다음과 같은 문제: 어떻게 우리는 쓰레기를 통제하는가?

이 구분으로부터 우리는 다음 논지에 도달한다:

생명체가 지닌 문제는 물리학적이 아니다: 그 문제는 물리학적 물체도 아니고 물리학적 법칙도 아니며 물리학적 사실도 아니다. 그 문제는 특수한 생물학적 실재이다; 그 문제는, 그 존재가 생물학적 효과의 원인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실재적이다.

(3) 특정 물리학적 물체가 자체의 번식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제하라: 그 물체가, 번식할 수 있다고 전제하라; 화학적으로 (또는 심지어 기능적으로) -본질적일 사소한 결점을 지니고, 정확하게 혹은 결정체(crystals)처럼 번식할 수 있다고 전제하라. 그러나 그 물체는 아마도,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해 있지” (완벽한 의미에서) 않을 것이다: 이것을 이룩하기 위하여 번식뿐 아니라 진정한 변화 가능성이 그 물체에 필요하다.

(4) 그 문제의 본질문제 해결하기라고 나는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용어는 여기서 진지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생명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물리적 신체(bodies)”(더 정확하게, 과정) 구성된다. 이것을 다양한 종(: species), 자연선택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번식뿐 아니라 변종의 방법에 의하여 배웠는데 변종 자체가 동일한 방법에 의하여 학습되었다. 이 회귀(回歸: regress)는 반드시 무한한 것이 아니다 ㅡ 정말로, 그 회귀는 창발(emergence)과 관련하여 상당히 확정된 어떤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버틀러(Butler) 및 베르그송과 같은 사람은, 내가 그들의 이론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직관에서 옳았다. 생명력(“교활함: cunning”)은 물론 정말로 존재한다 ㅡ 그러나 생명력은 반대로,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라기보다 생명의 산물인 선택의 산물이다. 선구적 역할을 이행하는 것은 정말로 선호 사항이다. 그러나 선구적 역할은 라마르크적이 아니라 다윈적이다.

나의 이론에서 선호 사항에 (성향이기 때문에 경향으로부터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은) 대한 이 강조는 분명히 순전히 객관적인것이다: 우리에게 이 선호 사항이 의식적이라고 전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선호 사항은 의식적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추측하는바 처음에 행복의 상태와 괴로움의 상태라는 (쾌락과 고통) 형태로 의식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의 접근방식으로 인하여, 의식적 상태의 창발에 대한 설명을 객관적인 생물학적 용어로 요구하는 연구 강령이 거의 반드시 발생한다.

 

6년 후 이 절()을 다시 읽고a 어떻게 순전히 선택론적인 이론이 (볼드윈[Baldwin]과 로이드 모건[Lloyd Morgan]유기체 선택이론), 획득 형질의 유전이라는 라마르크적 교설에 양보하지 않고 라마르크(Lamark)나 버틀러(Butler) 혹은 베르그송에 의하여 강조된 진화의 특정 직관적 양상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더 단순하고 더 분명하게 제시할 또 다른 요약의 필요성을 내가 느낀다. (유기체 선택의 내력에 대해서 특히 알리스터 하디 경[Sir Alister Hardy]의 훌륭한 저서, 살아있는 흐름[The Living Stream] 참조.b)

첫눈에 보기에 다윈론은 (라마르크론과 반대로) 개별적 생명체의 적응적 행위 혁신에 (선호, 소망, 선택) 진화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인상은 피상적이다. 개별적 생명체에 의한 모든 행위 혁신으로 인하여 저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환경 사이의 관계가 변한다: 그것은, 생명체가 새로운 생태학적 장소를 채택하거나 심지어 창조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새로운 생태학적 장소는, 선택된 장소를 위하여 선택하는 선택압력의 새로운 집합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생명체는, 자기 행위와 선호에 의하여,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선택압력을 부분적으로 선택한다. 그리하여 생명체는, 진화가 채택할 과정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새로운 행위 방식의 채택 혹은 새로운 기대의 (또는 이론”) 채택은 새로운 진화 통로를 트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윈론과 라마르크론 사이의 차이점은, 버틀러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행운과 교활함 사이의 차이점이 아니다: 다윈과 선택을 선호하면서 우리가 교활함을 배척하지 않는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167-180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