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에 대한 합리적 이해
25. 형이상학적 용어는 경험적 용어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
일반적 과정에 의하여 우리가 경험적 용어로 형이상학적 술어를 정의할 수 있는 그 과정을 간단하게 개괄하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시험될 수 없는 (비록 혹시 검증될 수 있을지라도) 술어를 정의할 수 있는 일반적 과정을 간단하게 개괄하면 가치가 있을 것이다,
x를 사람이라고 (혹은 동물이나 식물 또는 또 다른 사물이라고) 하자. 우리는 x의 형이상학적 의향을 ㅡ 버클리(Berkeley)의 의미에서 ‘초자연적(occult)’일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시험될 수 없는 ㅡ 정의하고 싶다.
경험적 사물 y를 고려하라. 그 사물은 매우 일상적 사물일 것이다. 그 사물을 물 한잔이라고 하자.
이제 x는 y로 무엇을 할 것인가? 가장 단순한 일은 그 물 한잔을 마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y가 존재하여 y가 물 한잔이고 x가 y를 마시면 그렇다면...이라는 조건으로만 x가 의향 D를 지닌다’라는 도식에 도달한다. 이제 점들 대신 활기를 되찾게 됨이나 사자로 변함과 같은 정서적으로 흥미진진한 것을 대입하라.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y가 존재하여 y가 (매우 특별한) 물 한잔이고 (혹은 물로 가득 찬 황금 비커) x가 y를 마시면 x는 젊었을 때 그랬던 바와 같이 보일 것이며 느낄 것이고 (혹은 사자처럼 보일 것이고 사자처럼 느낄 것이다) x가 y의 비결에 대하여 안다는 조건으로만 x는 자신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혹은 자신을 사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
x가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지만 사물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물 한잔으로써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x는, 물에 젖거나 물속에 떨어뜨리면, 금이나 진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의향이 그러해서 x를 모든 사람이 (혹은 동물들이나 식물들, 또는 다른 사물들) 혹은 단지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일요일에 태어난 사람들이나 혹은 쌍둥이자리 태생; 또는 월삭[月朔] 동안에 심은 약초) 소유한다.
예를 들어 x를 특정 질병으로 하자. 그렇다면 y는, 하루에 세 번 복용하면, 그 질병을 치료하는 약초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곳에 존재하는 어떤 약초에 의하여 치료될 수 있는’이라는 형이상학적 속성에 도달한다.
내가 기술한 것은 형이상학적 술어들이 아니라 오히려 마술적 술어들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원시적 형이상학은 마술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원시적 형이상학은 자체의 존재적 특징에 의하여 반증에 대항하여 보장된 마술적 주문(呪文: formulae)이다.
그 구축이 여기서 기술된 형이상학적 술어는 모두 유의미하다; 이유인즉 그 술어는 모두 유의미한 술어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定義)는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용어들에 의미가 있다면, 정의되는 용어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하찮은 경험적 용어를, 정의하는 용어로서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분명히 문제가 없다.
더 복잡한 정의(定義)들이, 한 가지 이상의 존재 연산자를 이용하여, 고안될 것이다; 별자리가 존재하는 동시에 라틴어 비밀 주문(呪文: formula)이 존재하여 그 별자리 아래서 주문을 읊어대는 동안 두 가지 약초가 달려져 그 결과로 만병통치약이 생긴다는 조건으로만 두 가지 약초에 만병통치약으로 변할 수 있는 의향적 속성이 있다고 언급될 것이다.
실증주의자들의 주요 공격은 물론 종교적 형이상학을, 특히 ‘합리적 신학(神學)’의 가능성을 겨냥한다. 실증주의자들은 그 형이상학의 용어들이 틀림없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반증하기 위하여, 나는 얼마 전에 카르납(Carnap)의 저서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의 상징주의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형이상학적 주장(the arch-metaphysical assertion)’이라고 지칭한 것을 설명하려고 내가 시도했다. ‘가장 중요한-형이상학적 주장(the arch-metaphysical assertion)’에 의하여 나는 인격적 신(神)의 존재, 다시 말해서 전능하고 편재하고 전지하면서 인격적인 영혼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의미한다. ‘x가 전능하다’는 ‘x는 y라는 사물을 z라는 장소에 놓을 수 있다’라는 관념을 일반화함으로써 정의될 수 있다: 이 관념은 일상생활에 속하고 그리하여 충분히 경험적이다. 그리고 그 관념의 일반화인 ‘x는 무엇이든지 여하한 곳에 놓을 수 있다’는 아마도 더 이상 경험적이 아닐지라도, 매우 일상적인 작용을 경험적 용어에 적용함으로써 정의될 수 있고 그리하여 분명히 유의미하다. 편재(遍在: omnipresence)는 경험적 술어인 ‘x는 장소 y에 위치한다’를 일반화함으로써 정의하기가 훨씬 더 쉽다. 결과는 ‘x는 모든 장소에 위치한다’이다. ‘전지(全知: omniscience)’와 ‘인격(person)’이라는 용어는 모두 ‘x는 y를 안다’라는 술어의 도움을 받아서 함께 정의될 수 있다. y가 있고 x가 y를 안다는 조건으로만, x가 인격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x가 어느 곳에 위치한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x가 모든 y를 안다는 조건으로 x가 전지하다(omniscient)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정신에 관하여, 편재하는 인격이 정신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이 방식으로 우리는 합리적 신학(神學)에, ‘경험적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신학은 형이상학적으로 남는다: 합리적 신학이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합리적 신학의 주장이 ㅡ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ㅡ 시험될 수 없다는 이유로 형이상학적으로 남는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년, 211-3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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