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가능성, 반증 가능성, 오류판정 가능성
19. 시험가능성 그러나 의미는 아니다.
오류판정 가능성이라는 철학적 독단이나 검증가능성이라는 철학적 난제에 의하여 내가 구획설정의 문제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내가 밝히고 싶었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처음에 구획설정의 문제를 언명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 일부를 내가 말했다. 더 정확하게 그 문제는 고도로 실제적이고 시급한 문제였다 ㅡ 어떤 이론이 수용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 이론이 경험적 논증을 (다시 말해서 관찰과 실험의 도움을 받는 논증) 수단으로 주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논증들이 진지한 시험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 나의 문제는 별안간 논리적 문제로, 방법론적 문제로, 그리고 심지어 과학 자체의 문제로 판명되었다. 이유인즉 이론을 판단하는 것이 과학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론을 판단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이론이 반증될 수 없어서 시험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이론이 평범한 과학적 표준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시험을 견디는 정도를 평가함으로써) 판단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험가능성이나 반증 가능성 또는 오류판정 가능성이 이론체계에 있는 과학적 특징의 기준으로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내가 제안했다; 다시 말해서, 한편 경험과학과 다른 한편 순수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과 사이비-과학 사이의 구획설정 기준으로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내가 제안했다.
시험가능성이나 반증 가능성 또는 오류판정 가능성을 의미의 (‘무의미한 헛소리’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기준으로서 제안한다는 생각이 당시나 그 후에도 나에게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1927년이나 그즈음에 비엔나 학파가 검증가능성을 의미의 기준으로 수용했다고 내가 처음으로 들었을 때, 두 가지 전혀 다른 근거를 들어 내가 즉각 이 절차에 반대했다: 먼저 유의미함을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 수용하는 것은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횡설수설로서 낙인찍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다고 느낀 독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검증가능성이 의미나 중요성의 기준으로서 제시되어 간접적으로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불합리하여 정말로 필요한 것의 반대가 되었던 해결책이었다. 이유인즉 그 해결책이 너무 좁은 동시에 너무 넓었다고 내가 밝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비의도적으로) 과학적 이론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그리하여 그 이론을 형이상학과 동일한 수준에 (다시 비의도적으로) 위치시킨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4절과 부록 ✡ii 참조).
게다가, 그 해결책은 과학적 토론이 (합리적 토론의 특정 종류로서) 비판적 토론이며 그 토론의 근본적 태도가 검증이나 확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반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중요한 의미에서 ‘검증주의적’이었다.
한편 경험과학과 다른 한편 사이비-과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논리학이나 순수 수학 사이에 구획을 설정하는 넓은 경계선은, 의미와 무의미라는 영역 사이라기보다 의미의 영역 핵심을 바로 관통하여 ㅡ 구분선 양편에 유의미한 이론들을 두고 ㅡ 그어져야 한다. 더욱 특히 형이상학이 틀림없이 무의미하다는 독단을 내가 배척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원자론과 같은 몇몇 이론이 오랫동안 시험될 수 없어서 반증될 수 없고 (게다가 부수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 이론들은 물리과학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이론들은 반대 운명으로 고통당했다. 그 이론들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기술하면 분명히 타당하지 않다. 나는 몇 명의 형이상학자가 (특히 헤겔과 헤겔주의자들을 내가 염두에 둔다) 의미 없는 말을, 그리고 더욱 나쁘게 허세적 횡설수설을 내뱉는 데 몰두했다고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과학자라고 이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아무튼 무의미를 너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하다. 확실히 무의미나 의미 결여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기본적 문제로서 선택하거나 그 문제의 폭로를 자신의 주요 혹은 자신의 유일한 과제로서 선택하면 다소 불건전하고 다소 현명하지 못하다: 의미-분석은, 정신-분석처럼, ‘자체를 자체의 치료법으로서 오해하는 질병’으로 쉽게 변할 것이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2000년, 174-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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