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심경을 밝히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재점화]
인터뷰/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씨
광복군으로, 반독재 민주투사로 우뚝 섰던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63)씨는 두개골이 함몰된 아버지의 유골을 보는 순간 37년 동안 응어리졌던 분노가 솟구쳤다고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계곡 절벽에서 추락사했다던 부친의 주검은, 마치 그동안 ‘억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웅변하듯,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으로 보이는 상흔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보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먼저 걱정했고 너무나도 청렴했던 아버지를, 그는 남들 앞에선 ‘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공인으로 대했다. 지난 1일 유해를 이장하며 부친의 타살 흔적을 목격한 순간부터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가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장씨는 광복절인 15일 <한겨레> 기자와 만나, 부친의 이장 시기가 올해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게 된 것이 “37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 이제 역사를 바로 세울 때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숙명인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님의 사인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행위자를 찾아내야 한다.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기록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37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이제 역사를 바로세울 때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처럼 여겨져…
돌아가셨을때 의사 3분을
은밀히 문상객처럼 모셔 검시
의사들 ‘뒷골 함몰된 것 같다’” ■ 그때는 말도 못 꺼냈다…각본이라 여겼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확신하나? “절벽에서 떨어졌다는데, 주검이 너무도 멀쩡했고, 멍도 없고 오른쪽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다. 양팔 겨드랑이 쪽엔 멍이 있었는데 누군가 잡아끌고 갈 때 난 것처럼 보였다. 시신을 보자마자 ‘각본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세 분을 문상객처럼 모셔와 주검을 살펴보도록 했다. 귀 뒤 상처에 성냥개비를 집어넣으니 다 들어갔다. 의사들이 만져보더니 ‘뒷골이 함몰된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도 ‘약사봉 현장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많았다. 아버지가 추락한 것을 봤다는 증언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결론은 아버지가 추락 현장에 가지 않았고, 다른 데서 변을 당한 뒤 시신을 옮겨놓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야 이야기를 하는가? “당시엔 사망 의혹 얘기만 해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고초를 겪는 시절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자가 고초를 겪었고, 일본 일간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시신 사진을 일본에서 현상해 가져왔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고 동분서주하다가 정보기관원에게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뒤 괴한 4명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달 동안 병원 신세도 졌다.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말레이시아로 도망갔다. 박정희 사망 뒤 귀국했는데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체포돼 고문당하고는 다시 싱가포르로 도망갔다. 그렇게 24년 동안 국외도피 생활을 한 뒤 2004년에야 돌아왔다. 의심이 들었어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고 의혹에 대해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에도 의혹을 규명하지 못했는데. “1993년 민주당이 조사단을 꾸렸지만, 한계가 많았다. 과거의 기득권 세력이 정치계, 학계, 언론계, 법조계, 사정기관에서 활약하는데, 그들의 벽이 너무나 두꺼워 손대는 데 한계가 있었던 거다. 김대중 정권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할 때도 ‘대통령이 목숨 내놓고 하지 않는 한 희생자 두번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문사위원회 조사관도 수사권이 없어, 국가기관들에 자료를 주도록 강제할 힘이 없었다. 젊은 검사가 ‘박정희·전두환 식으로 (고문이라도) 하면 다 나올 텐데, 함구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 노무현 정권은 기득권 세력과 연결고리가 없어 기대했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 돼 실망하고 말았다.” ■ 37년 세월, 아버지를 ‘장 선생’으로
-아버지 장준하 선생은 어떤 이였나? “많은 항일 민족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정국에서 정치적 역할을 못했지만, 장 선생은 이승만 독재에 이어 박정희 유신독재가 극에 달한 1970년대까지 역할을 했다. 군계일학으로 예지력이 대단하고 청렴해 야권에서도 견제를 받았다. 정치적으로 이용한 뒤엔 배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래도 독재정권 깨부수는 데 제구실하겠다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개 정치인이 아니라 민족지도자였다.” -군사정권 때 가족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던데. “유신정권이 조선시대마냥 삼족을 없애지는 않았지만, 거지 아닌 거지로 만들어 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먹고살려고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지금까지 한번도 함께 모인 적이 없다. 먹을 것이 떨어져 아버지를 잘 아는 지인이 쌀 1가마니를 몰래 가져다줬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혼쭐이 난 적도 있다. 다른 정치인들은 수난을 당해도 정치적 탄압으로 끝났지, 이렇게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낸 유례는 없을 거다. 직장에 취업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정보기관에서 압력을 넣어 못했다. 아버지를 잘 아는 기업에 찾아가 일 좀 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회장이 봉투를 쥐여주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27살 한창 나이였는데, 돈 돌려주고 나왔다. 가족들이 평생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노모(김희숙씨·88)와 함께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보증금 1000만원, 월세 20만원 셋집에서 월 60만원 연금으로 지낸다. 그러나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다시는 우리 가족과 같은 비참한 가족이 나와서는 안 된다.” “우리가족 거지 아닌 거지 만들어
죽음상태로 몰아넣었다
뿔뿔이 흩어져 지금까지도
함께 모인 적이 없어
직장에 취업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기관에서 찾아와 압력” ■ 박근혜 사과 이전에 진실부터
-박근혜 새누리당 경선후보와 화해할 생각은 있는가? “박근혜 후보 만나는 것은 명분 안 서는 일이다. 과거를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날 수는 없다. 2007년 대선 때 박근혜의 사과를 받아준 것은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한나라당 중책 맡은 분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과거를 사과하고 싶다’ 해서 그것만 모친이 받아들였다. 당시 박근혜는 ‘아버지 시대에 희생당했던 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모친은 ‘요식행위 아닌 진정성 있게 정치를 해달라’고 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박근혜의 대선 출마에 대한 생각은? “박근혜와 내가 원수진 것 아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그런 삶을 살아온 거다. 박근혜도 박정희의 딸로 태어난 숙명을 지녔다. 하지만 정치권력에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 때 했으면 됐지, 모자랄 것 없이 다 갖췄는데 이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주면 차라도 한잔 할 수 있을 거다. 그러지 않으면 평행선 달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정치를 하겠다면, 아버지가 아닌 박정희의 모든 행적, 또 기득세력과 분명한 선을 긋고 독자적으로 해야 한다. 먼저 진실을 밝힌 뒤 화합해야지, 범죄를 숨기고서 화합하자는 것은 자신을 숨기는 일이다. 박근혜 자신은 친일이 아니라고 해도 박정희 시대에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 잔재세력이 박근혜 옆에 들러붙어 나라를 일본에 다시 넘겨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박정희와 장준하, 두 인물을 평가한다면? “박정희의 실체를 보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이름을 두번이나 바꿨다. 첫번째 창씨개명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일본군 장교가 되겠다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 이름을 따라 또 이름을 바꿨다. 박정희가 했다는 근대화사업도, 장면 정권 때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은 부친이 세웠던 계획이었다. 국토건설요원으로 일할 대졸 공무원 2000명을 뽑아 임명장을 주려던 때 5·16이 터졌다. 이들은 교육받은 엘리트였고, 근대화사업의 동력이 됐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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