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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컬럼 임진왜란 - 조선인 코를 베어오면 땅을 주리라

이윤진이카루스 2012. 9. 15. 08:18

사회

사회일반

“조선인 코를 베어오면 땅을 주리라”

등록 : 2012.09.14 19:41 수정 : 2012.09.14 20:21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임진왜란이 끝나고 철군하는 명군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그림의 가운데 부분에 크게 묘사된 인물이 바로 병부상서 형개로 추정된다. 그를 크게 그린 것은 명군 지휘부에 대한 조선의 사은(謝恩) 심리를 담고 있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일본과의 결전에는 소극적이었다. <국립진주박물관>(2010)에서 전재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25) 정유재란의 참상

강화 협상이 파탄으로 끝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공하기 위한 병력 징발과 배치에 착수했다. 그가 동원한 병력은 모두 14만1천여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히데요시는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자신의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재침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조선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전라도와 충청도가 아직 온전하기 때문이라며 이번에는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제주도까지 공격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요컨대 정유재란은 전라도를 비롯한 조선의 남부 지역을 차지하려는 야욕에서 비롯되었다. 이윽고 1597년 1월12일,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단 150척이 서생포(西生浦)로 향하면서 침략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조선의 칠천량 해전 참패로
전라·충청도가 일본군에 뚫렸다
이러한 위기에서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133척을 물리치는
명량해전 승리를 일궈냈다

하지만 5만 조명연합군이 나선
울산성 전투가 성과 없이 끝나자
일본군은 무차별 학살과 함께
조선인 코를 경쟁적으로 베어갔고
마귀 휘하 명군도 악행을 일삼았다

이순신의 투옥, 조정 지시에 불복한 죄
선조는 1597년 2월6일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지시한다. 이순신의 비극은 일본군의 반간계(反間計)에서 비롯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대립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통사 요시라(要時羅)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보내 가토가 다대포를 지나 서생포로 갈 예정이라는 정보를 흘리고 조선 수군을 시켜 그를 습격하라고 권유했다. 조정은 이순신에게 수군의 출동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정보의 진위를 믿을 수 없는데다 사실일 경우 복병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며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가토가 실제로 서생포로 들어오자 선조와 신료들은 이순신을 성토했다. 1월27일 열린 어전 회의에서 윤두수(尹斗壽)는 ‘이순신이 명령을 어겼으니 파직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은 ‘이순신이 교만해진 것 같다’고 했고, 훗날 이순신의 목숨을 구했던 정탁(鄭琢)조차 ‘이순신이 죄를 지었다’고 했다. 선조는 아예 “이순신이 비록 가토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순신이 해임되고 투옥된 이후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육군의 전력이 시원찮은 상황에서 선조는 수군의 활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수군이 출동하여 일본군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그들을 쓸어버릴 것을 주문했다.

어깨가 무거워진 원균은 1597년 7월, 함대를 이끌고 부산 방향으로 출격했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7월15일 새벽 원균 함대는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만다. 원균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졸들이 전사하고 함대가 궤멸되다시피 했다. 흔히 칠천량(漆川梁) 해전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12척의 함선만이 살아남았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의 연승과 함께 확장되어 왔던 막강한 수군 전력이 일시에 붕괴되고 제해권은 일본 수군에게 넘어갔다.

칠천량 패전의 여파는 곧바로 전라도로 미쳤다. 일본군은 이제 제해권을 바탕으로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육군을 좌우(左右) 2개의 지대로 나눠 좌군은 경상우도에서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하고 우군은 경상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북상했다. 급기야 8월16일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킨다. 남원 함락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무혈입성했다. 이후 좌군은 충청도로 진입하여 부여를 거쳐 서천에 이르렀다가 다시 남하하여 전라도를 장악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우군은 계속 북상하여 공주를 지나 천안 방면까지 전진했다. 연도의 지방 수령과 백성들이 피신한 상태에서 일본군은 무인지경으로 밀고 올라왔다.

교토에 있는 코무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일으킨 뒤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가 일본으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일본군은 살아 있는 사람의 코를 베어 전쟁 이후 조선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만행을 저지른 뒤 ‘위령’을 명목으로 세운 기념비가 교토에 남아 있다. 부산박물관 임진7주갑 특별기획전 도록(2012)에서 전재

“서해를 지켜라” 명나라 수군 첫 파견
칠천량과 남원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선조는 왕자들과 나인들을 피신시켰다. 신료들 가운데도 사표를 던지고 가족과 함께 피신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백성들 또한 야음을 틈타 도주했다.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자가 너무 많아 도성이 텅 비게 생겼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 조야가 동요하자 명의 경리어사(經理御史) 양호(楊鎬)는 선조와 조정 신료들을 심하게 힐난했다. “군신(君臣)이 적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주색에 빠지거나 피난할 생각만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군의 재침을 계기로 명군 지휘부의 내정 간섭이 심화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선조는 격앙되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반발했다.

양호의 발언은 과한 측면이 있었지만 정유재란 초기 그의 단호한 조처는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일본군이 천안 방면으로 올라오자 양호는 4천의 병력을 급히 남하시켰다. 9월7일 명군은 직산(稷山)에서 일본군과 여섯 차례의 접전을 벌여 그들을 물리쳤다. 일본군은 경기도 진입을 포기하고 청주를 거쳐 남쪽으로 다시 철수한다.

이순신의 탁월한 능력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조정은 수군이 궤멸된 직후인 7월22일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했다. 8월29일 고흥의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수군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9월16일, 진도와 화원반도(花園半島) 사이의 명량(鳴梁)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물리치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다. 죽음을 각오한 결전 의지를 바탕으로 험악한 조류의 흐름을 활용하여 얻은 값진 성과였다.

명량해전 승리의 의미는 컸다. 칠천량에서 완승하여 한껏 사기가 오른 일본 수군은 전라도를 지나 서해로 진입하여 한강까지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일본 육군의 북상과 함께 수군의 서해 진입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은 회복 불능의 위기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제해권을 되찾음으로써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입은 명한테도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그들이 서해로 진입하면 남경(南京), 절강(浙江), 등래(登萊), 직예(直隸) 등 명 본토의 요충지들이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명은 칠천량의 패전 소식이 알려진 직후, 해방(海防)을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또 양호는 강화도를 철저하게 방어하라고 조선에 요구했다. 서해의 중간 거점이자 명에서 조선으로 실어오는 각종 물자의 집결지였던 강화도가 일본 수군의 위협에 노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명은 이어 의주 부근에 머물던 자국 수군을 남하시키고 진린(陳璘)을 시켜 광동(廣東) 수군 5천명을 이끌고 조선을 원조하도록 했다. 후속 수군 부대도 대거 징발하여 속속 파견했다. 명이 임진년에는 출동시키지 않았던 수군을 동원한 것은 그만큼 위기의식이 컸다는 것을 방증한다.

명 도독 마귀(麻貴)의 초상.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울산성 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던 도독 마귀의 모습이다. 종전 후 그는 명으로 돌아갔지만 명이 망하자 그의 후손들이 조선으로 귀화하여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코무덤을 만들고 ‘공양’이라 이죽거리다
직산전투와 명량해전 패전을 계기로 수세에 처한 일본군은 남쪽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 태세에 돌입한다. 1597년 12월, 조명연합군은 5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가토가 지키고 있던 울산성 공격에 나선다. 전세가 역전된 상황에서 과연 일본군을 조선 바깥으로 쫓아버릴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싸움이었다.

연합군은 12월24일 공격을 개시하여 성을 포위했지만 울산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성은 견고했다. 조명연합군은 ‘깎아지른 듯이 버티고 있는’ 석축(石築)을 올려다보면서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성안의 일본군은 식량과 물이 떨어져 “불에 탄 쌀을 주워 먹고 옷과 종이를 비에 적셔 짜 마시는 자가 많았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연합군은 수차례 화공(火攻)을 통해 승기를 잡았으나 일본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부산 방면에서 일본군 증원병까지 이르게 되자 공성을 포기한다. 1598년 1월4일, 양호는 포위를 풀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명군 지휘부는 이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명 조정에 보고했지만 함께 참전했던 조선 신료들의 증언 내용은 전혀 달랐다. 명군 부총병 이여매(李如梅)의 접반사였던 이덕열(李德悅)은 “명군이 후퇴할 때 일본군은 30리 밖까지 추격했고 명군의 전사자가 거의 4천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사실상 패전이었던 것이다.

명군이 울산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 민중의 고난은 극에 달했다. 우선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이전보다 훨씬 잔학한 만행을 자행했다. 히데요시는 재침 직전 “모든 조선인을 죽이고 조선을 텅 비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일본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조선 백성들의 코를 베었다. 1597년 8월,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점령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획득된 코는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운반되었다. 코를 많이 획득한 가신(家臣)들에게 봉토(封土)를 늘려주는 등 상급을 주겠다고 히데요시가 약속하자 만행은 경쟁적으로 이어졌다. 다량의 코가 일본으로 도착하자 히데요시는 교토에 이른바 코무덤을 만든 뒤 “조선과 명의 전사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한 공양”이라며 이죽거리는 광기를 드러냈다.

명군이 끼치는 피해 또한 극심했다. 당시 명은 병부상서 형개까지 서울에 파견하여 전쟁을 독려했지만 실제 그는 일본군과 결전을 벌일 의지가 없었다. ‘겉으로는 싸우면서도 속으로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陽戰陰和)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비록 일부 지휘관들은 결전을 주장했지만 그들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울산성 전투가 소득 없이 끝나자 철수하던 명군은 난병(亂兵)으로 돌변했다. 인근 촌락에 들어가 약탈과 강간, 살인을 자행했다. 특히 도독 마귀(麻貴) 휘하에 소속된 몽골 출신 병사들의 난폭함은 조선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귀의 병력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을 때 국왕 선조까지도 그들을 꺼려 옹주들에게 피신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국왕 선조까지 양호 등에게 힐문을 받아 곤경에 처해 있던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명군의 민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조선 민중들은 일본군과 명군 사이에서 죽어나고 있었다. 죽고, 다치고, 끌려가고, 코를 베이고, 강간당하고, 약탈당했다. 정유재란은 끔찍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