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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조직서 나가겠다고 하자 칼 든 후배가…”

이윤진이카루스 2012. 9. 29. 09:55

김홍신 “조직서 나가겠다고 하자 칼 든 후배가…”

등록 : 2012.09.28 17:54 수정 : 2012.09.28 20:58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소설가·전 국회의원 김홍신

소설 <인간시장>을 빼놓고는 1980년대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치기 어린 협객 장총찬을 등장시켜 정치, 경제, 교육, 의료, 법조, 언론 등 각계의 기득권자들을 닥치는 대로 응징하고 조롱한 <인간시장>은 81년 출간 즉시 10만권이 팔렸고, 84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권을 돌파했으며, 총판매량 560만권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30대 중반의 무명작가 김홍신은 하루아침에 전국적 명사로 떠올랐고, 작가와 장총찬의 공통점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와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날리던 김홍신은 95년 정치에 입문해 ‘꼬마’ 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두 번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내며 의정활동 평가마다 빠짐없이 최상위권을 기록했습니다. 2004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종로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에는 2007년 10권짜리 대작 <대발해>를 발표함으로써 본업인 소설가로 복귀했습니다. 소설가, 방송인, 정치인으로 파란만장한 30년을 보내고, 요즘도 연간 150회 이상의 바쁜 강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김홍신 선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자택을 찾았습니다. 작가로서 인기 절정이던 시절 직접 지어 28년째 살고 있는 개인주택입니다. 인터뷰는 안철수 전 원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이전인 9월 초에 이루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자존심과 작가의 자존심

-북미주 순회강연을 떠날 예정이시죠?

“네, 법륜 스님, 김제동씨 등과 함께 9월10일부터 21일까지 매일 한 도시씩 도는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외국민들에게 안철수 원장 지지를 호소하는 콘서트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던데요?

“(안 원장과는 상관없이) 오래전부터 법륜 스님이 해마다 하던 거예요. 기사를 보면서 ‘소설가인 나보다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지할 후보는 정했나요?

“대선 후보 모두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누구를 지지할지는 아직 못 정했지만, 야당이 당선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리만큼 안정된 나라에서는 여야가 번갈아 집권해야 조화가 싹터요. 사회현상에 대한 해결책도 준비된 것이 나오고요. 거기다가 엠비(MB) 정부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요. 경제를 살린다는 약속도 못 지켰고, 4대강도 성공이라 말하지만 자연현상은 더 지켜봐야 하고, 제주 강정에서는 밀도 있게 설득하는 과정을 생략했죠. 그 오만에 대한 마땅한 응징이 있어야 해요.”

-여당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 지지율에는 변화가 없는데요.

“저도 납득하기가 어려워요. 국회에서 박근혜 후보와 같이 있었지만, 박 후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만 하는 사람이거든요. 국회의원은 근본적으로 법을 만들고, 예결산, 국정감사를 하는 사람이에요. 5선의 박 후보가 무슨 법을 만들었나요. 국정감사, 예결산을 해봐야 국가 전체가 돌아가는 걸 아는데, 그것도 아니고. 박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의무를 다했는지 냉혹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조직을 그만둘 때 애먹었어요
놔주질 않아 설득하며 말했죠
‘소설로 세상을 흔들고 싶다
날 보내줘야 뭘 할 거 아니냐’
안 되면 그때 칼을 대라고 했죠

디제이는 너무 출중했지만
거기 가면 무릎 꿇어야잖아요
노 대통령은 겅둥겅둥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분이에요
‘아 믿을 만하구나’ 생각했어요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쓰신 <대발해>는 예전보다 훨씬 안 팔렸죠?

“안 팔린 게 아니라 덜 팔린 거죠. 방대한 분량, 옛날 투 문장, 어려운 한자, 연대, 지명, 인명에다가 독도와 달리 동북공정은 눈에 안 보여서 국민들이 실감을 못하는 문제니까요. 국회의원 8년에 집필 4년의 공백이 있다 보니 독자들이 우르르 떠난 영향도 있을 거고요. 제 수필 <인생사용설명서>가 겁나게 팔리는 것과 비교할 때 역시 진중한 문학작품은 읽기 힘들다는 얘기겠죠?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를 조사하면 제 이름이 여전히 5등 안에는 들어가요.”

김홍신은 194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논산에서 성장했습니다. 만주벌판까지 불려 다닐 정도로 솜씨 좋은 도목수였던 아버지가 “남에게 술 사 주는 걸 좋아해서” 가계에 큰 도움이 못 됐던 까닭에, “알뜰하지만 손이 컸던” 어머니가 계주 노릇을 하며 집안 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나마 김홍신이 초등학교 4학년, 고등학교 1학년, 대학교 1학년 때 세 차례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집을 팔아 빚잔치를 하면서도 “망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바로 그 집에 세를 살면서 버텼습니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학교와 철길 사이에 위치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홍신은 학교의 뜀틀과 철봉으로 몸을 단련했고, 달리는 기차 앞에 누워 누가 오래 버티는지 경쟁하며 배짱을 키웠습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동네의 선후배, 친구 중에는 논산의 ‘건달’들이 적지 않습니다. 재수 끝에 추가 합격으로 건국대 국문학과에 들어갔지만 등록금이 없어 곧 휴학을 하고 낙향한 그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런 건달 후배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조직을 하나 만듭시다. 형님이 큰형님을 하쇼.” 그래서 1년 후 복학할 때까지 100명이 넘는 동네 건달들의 보스 노릇도 했습니다. 살벌한 얘기를 그는 참 무덤덤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몸이 작아서 조금 빨랐고, 철길에서 늘 제일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보스가 된 거죠. 조직을 그만둘 때는 애를 먹었어요. 후배들이 ‘우리를 놔두고 가면 어떡하냐’면서 놓아주지를 않았거든요. 칼 들고 버티는 애들도 있었고요.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랬어요. ‘소설을 제대로 써서 세상을 흔들고 싶다. 니들이 나를 보내줘야 대학을 마치고 뭔가를 할 것 아니냐. 대한민국에서 큰 인물이 되겠다. 안 되면 그때 니들이 칼을 대라.’ 선량한 친구들이라 저를 보내줬죠. 그 약속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어요.”

-<인간시장>에서는 위기 때마다 그런 후배들이 장총찬을 돕죠?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하면서도 후배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이름 대면 알 만한 두목들과 친하게 지내고요. 한때는 기자들이 ‘사건현장에 가면 늘 김홍신이 먼저 와 있더라’고도 했죠. <인간시장>에 가짜 휘발유 만드는 법을 썼더니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면서 믿지를 않았는데, 그거 다 사실이었어요. 김포에 있는 계사(닭집)에서 건달들이 가짜 휘발유 만드는 걸 직접 취재했거든요. 두목들이 그걸 알고 달려와서는 ‘제조과정의 마지막에 쓰는 색소, 약품, 장소, 건달이라는 사실만 밝히지 않으면 쓰십시오’라고 타협을 했죠.”

육영수추모회 취직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나요?

“건달들이 소설가, 시인, 음악가, 미술가를 좋아해요. ‘내가 못 가진 걸 가졌다’는 존경심 같은 게 있어요. 또 제가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 아귀가 맞는 거예요.”

복학 이후 문학반 회장을 하며 글솜씨로 이름을 날린 김홍신은 건국대 곽종원 총장(평론가)과 임옥인 가정대 학장(소설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습니다. 총장실에서 개인지도를 받고 용돈을 얻어 쓸 정도였습니다. 졸업하고 아르오티시(ROTC)로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곽 총장의 권유로 선명회(지금의 월드비전) 산하기관 홍보팀에 취직해 한센병 환자들과 2년을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것이 한센병의 권위자였던 연세대 유준 박사였습니다. 한센병에 관심이 많던 육영수 여사 때문에 육여사추모사업회에도 관여하던 유 박사는 1976년 겨울 김홍신을 추모사업회 홍보부장으로 추천합니다. ‘영애’ 박근혜씨가 실질적으로 이끌던 조직이었던 만큼 월급도 많고 대우도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김홍신은 “박정희 조직에 가서 일하란 말입니까? 박사님, 사람 잘못 보셨어요”라며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춥고 배고팠던 그날 밤 버스를 타고 동국대 홍기삼 교수(평론가)의 집을 찾아가던 길에 후회가 밀려들었습니다.

“‘월급도 두 배가 넘는데 거절을 했어요’라고 제가 자랑을 했더니 홍 교수님이 씩 웃더라고요. ‘근데 아직도 후회하고 있걸랑요’라고 덧붙이니 그제야 제 등짝을 치시며 ‘김홍신답다. 후회 안 했다면 네 얘기 안 믿는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너는 크게 될 인물이야’ 하시는데 가슴이 확 풀렸어요. 선명회 경험 때문에 저의 첫 장편소설 <해방영장>도 한센병 환자들 이야기를 다뤘죠.”

-학연 중심의 문단에서 고생도 많았죠?

“극심한 초조, 불안, 열등감 때문에 자살하고 싶었던 재수 시기부터 81년까지 긴 기간이 저에게는 암흑기였어요. 76년 문단에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는 <조선일보>에 ‘문인 된 게 부끄럽다’며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등 친일한 선배들과 문단의 패거리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어요. 문단에서 난리가 나고 문인협회에 가입도 안 시켜줬죠. 거기다가 건국대는 종합대학 중에 문인 수가 가장 적은 학교예요. 한번은 문학 하는 친구와 신문사를 찾아갔는데, 그 친구의 선배인 문학담당기자가 저는 본 척도 안 하면서 그 친구에게 ‘마감이라 정신없다. 밥이나 사 먹으라’고 봉투를 주는 거예요. ‘나도 (촌지로) 받은 거야’ 하면서요. 그러더니 친구에게 ‘다음 토요일까지 콩트 하나 써오라’고 하더군요. 자기 대학 후배라고요. 선배도, 친구도, 후배도 없었던 저는 그때 절박함을 느꼈어요. 데뷔만 한 무명 문인이 얼마나 많아요. 나도 이렇게 끝나는 것 아닌가 싶어 아주 지독한 목마름에 한동안 방황했죠.”

-<인간시장>으로 모든 게 뒤집어졌죠?

“하루아침에 학연, 지연, 혈연이 아무 의미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물이 돼버렸죠. 한번 유명인사가 되니 가수건 배우건 정치인이건 재벌이건 모든 게 금방 통하더군요. 80년대 초반에는 공항을 비롯해 어디를 가나 장관급 이상 대우를 받았어요. 현실에서는 돈이 중요하고, 사람들은 권력을 원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명예라는 걸 깨달았죠.”

-그런데도 늘 <인간시장>의 한계를 이야기하시더군요.

“그런 책이 팔리는 시대가 좋은 시대는 아니죠. 명성은 얻었지만 문학의 본질적인 의미는 덜 담긴 책이에요. 그러나 계엄하에서 검열을 피해가면서 쓴 책이라는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요. 저를 구속시키려 했지만 너무 빅 스타가 되어버려서 그럴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전해 들었고요. 적당한 스타는 적당할 때 나오지만, 빅 스타는 위기, 고통, 절망, 대참사에서 나와요. 사람들이 영웅, 군자, 스타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어야 하니까요. 시대적 상황이 인물을 찾는 거죠. 제가 그랬듯이 요즘은 안철수 교수가 거기 딱 맞아떨어진 거고요.”

-엄청난 인세 수입은 어디에 쓰셨어요? 출판사가 두 번이나 승용차도 선물했던데요?

“문제는 재테크를 몰랐어요. 아내가 너무 오래 병상에 있다 보니 밥하는 분과 애들 돌봐줄 분이 필요했고, 의료보험도 제대로 안 된 시절이라 입원비용도 만만치 않았어요. 정치권에 들어가서도 처음 2년간은 취재, 여론조사 비용 등 해마다 1억 몇천씩 개인 돈을 썼고요. 그 후에 후원회를 만들었지만, 로비가 안 통한다고 소문이 나니 후원금도 없더군요.”

-정치에 투신한 후 꼬마 민주당,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반김대중 정서 때문 아니었나요?

“저도 디제이를 좋아했어요. 정말 배울 게 많았거든요. 세 시간 넘어 대화를 해도 같은 얘기 하나 없이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말하는 분이었어요. 다만 너무 출중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죠. 저도 한 시대의 빅 스타인데 거기 가면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잖아요. 놀라운 정치력은 인정하면서도 이철, 노무현, 제정구, 이부영, 김홍신, 서경석, 홍성우, 장을병 같은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었어요.”

-노 대통령과도 오랜 인연이죠?

“노무현 후원회장을 한 이기명 선생을 알았기 때문에 노무현 초선 때부터 등산모임에 초대받아 여러 번 만났어요. 노 대통령은 겅둥겅둥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분이에요. 말하는 거나 몸짓에 약간의 건달기가 있는데 사람은 참 편안했어요. 96년 선거 직전에 비례대표 발표 나던 날, 돈 많은 사람에게 앞 순번을 주는 해괴한 일이 있었죠. 그때 종로 지역구로 전화해서 ‘총선 보이콧하자’고 하니, 노 후보가 ‘좋아. 나는 출마 포기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도부가 철회를 하고 문제를 바로잡았어요. 그때 ‘아, 노무현은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통추 그룹은 개성이 또렷해서 논쟁이 붙으면 양보 없이 따지지만 인간성들이 근사했어요.”

김홍신 타임라인 ※클릭하시면 더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공업용 재봉틀 발언’ 변명하긴 싫지만…

-98년 지방선거 때의 “공업용 재봉틀” 발언은 좀 심하지 않았나요?

“그게 원래 <도둑놈과 도둑님>에도 나오고, 몰래카메라를 당했을 때 이경규, 최수종씨에게도 했던, 제가 자주 쓰는 우스개예요. 염라대왕 앞에 가면 잘못한 걸 한 바늘씩 떠야 한다더라. 아내는 세 바늘을 뜨는데 남편은 바늘로 뜰 수 없어서 공업용 재봉틀로 드르륵 하더라. 그런데 그런 설명은 빼놓고 대통령 입을 재봉틀로 박는다는 얘기만 남은 거죠. 하지만 제가 변명하지 않았어요. 말실수는 변명하면 안 돼요. 미안하다고 끝내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지 자꾸 거론하면 구차해지기만 해요. 그런 때는 상대 입장으로 탁 들어가 줘야 해요. 제가 젊어서 유명해지고 실수도 많이 하면서 어렵게 익힌 거예요.”

-한 번만 한다고 하셨는데, 결국은 비례대표를 두 번이나 하고, 지역구 선거도 나오셨죠?

“2000년에는 이미 짐을 다 싼 상태였어요. 첫 4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기초생활보장법, 의약분업, 장애인 관련 법안을 만들었는데, 임기가 끝나면 법안들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쉽기는 했죠. 그때 시민단체에서 김홍신을 빼면 안 된다고 문제 삼아 제 이름이 들어갔어요. 2004년에는 아내가 오랜 병고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제가 공황장애를 겪었어요. 스트레스가 심해서 머리가 빙빙 돌고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검진해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죠. 병이 나으려면 움직이고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참에 김한길, 정동영이 ‘의정활동 1위가 출마를 안 하면 어떻게 하냐?’며 저를 설득했어요. 선거 40일 전에 종로로 갔고, 선거 직전 중환자실의 아내가 세상을 떴죠. 삼우제까지 선거운동 안 한다고 일주일을 움직이지 않았어요. 결국 500표 차이로 졌죠. 공황장애는 친구들과 여행하고 글 쓰면서 회복이 됐어요.”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대발해>를 끝내고 몸은 완전히 망가졌지만 인간으로, 글쟁이로,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황홀감을 느꼈어요. <인간시장>과 <대발해>를 빼놓고 제 인생을 말할 수는 없죠.”

4시간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전화를 받고 메시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단 한번 크게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을 상대로 치기 어린 주먹을 휘두르던 청년 장총찬은 어느새 지혜롭고 신중한 노년의 전직 국회의원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세월의 힘이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안 팔리는 게 아니라 덜 팔린 것”이라는 자존심, 적절한 순간마다 밉지 않게 끼어드는 자기 자랑, 어깨에 남아 있는 약간의 건달기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장총찬의 그 흔적이 은근히 귀엽게 느껴졌던 인터뷰였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