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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계몽주의와 슐라이어마허/김덕영

이윤진이카루스 2013. 1. 10. 10:31

문화

문화일반

독일 계몽주의 한복판서 “종교는 직관과 감정” 현대신학 태동

등록 : 2013.01.09 20:07 수정 : 2013.01.09 20:07

 

17세기 말~18세기 초 이성을 중시하는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중시하는 경건주의의 아성이기도 했던 할레대학의 신학부 건물. 슐라이어마허는 이곳에서 공부하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1804년에는 이곳 신학 교수로 초빙되어 왔다.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할레를 점령한 뒤 대학을 폐쇄하자, 베를린으로 옮겨가야 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② ‘슐라이어마허 신학’ 싹튼 할레

주정부 건물로 변한 자택은 굳게 잠겨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한 신학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다시 한 번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앞의 경우가 근대 신학으로의 전환이라면 뒤의 경우는 현대 신학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의 주인공이 마르틴 루터라면 19세기의 주
인공은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1768~1834)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할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할레는 비텐베르크에서 6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지 이틀 만에 할레에 들르니 마치 작은 시골 읍에서 대도시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텐베르크의 인구가 5만이 채 안 되는 데 비해 할레의 인구는 23만이 넘는다.

일단 걸어서 슐라이어마허가 살던 집을 찾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이름은커녕 할레를 대표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도 잘 몰랐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부터 1807년까지 이 거리의 22번지에 살았다. 1501~1506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그를 기념하는 편액이 하나 걸려 있었다. 현재 이 건물은 문화재와 관련된 주정부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19세기까지 주로 지식인들이 살아서 ‘지식인의 거리’라고 불리던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는 이날따라 무척이나 휑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닌 가슴” 주창한
경건주의 영향받으며 유년기 성장
할레대학서 칸트공부 세계관 확장
낭만주의 접한뒤 신학적 체계구축
“종교 본질은 절대의존감정” 규정
나폴레옹의 대학 폐쇄에 베를린행

할레 중심광장엔 음악가 헨델 동상
빈민구제기관 유명한 프랑케재단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 드물어

허전한 마음으로 시내 중심부의 시장 광장으로 나왔더니,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동상 하나가 보인다. 할레에서 태어난 바로크 시대의 대음악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다. 할레를 대표하는 인물은 역시 슐라이어마허보다는 헨델이었다. 그 동상 아래에서 한창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시장 광장 바로 옆에는 ‘헨델 하우스’가 있다. 16세기 중반 이전에 지어진 이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건물은 헨델의 생가인데, 현재는 박물관과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날도 콘서트가 있는 날인 듯했다. 한숨 좀 돌리고 이것저것 좀 물어보려고 안으로 들어서니 곱상한 할머니 한분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얼른 입장권을 사라고 하신다.

지난번 비텐베르크와 달리 이번에 찾은 할레에서는 소득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면서 다시 계획을 다듬다보니, ‘프랑케재단’이 그곳에서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케라는 이름은 슐라이어마허와 할레대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이름이 아니던가?!

할레대학은 비텐베르크대학보다 한참 뒤인 1694년에 개교했다. 독일 계몽주의의 선구자인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와 독일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가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런데 할레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의 아성이기도 했다. 경건주의는 17세 후반기에 주지주의(이성이 의지나 감정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로 치우치며 형식화한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이며 교회개혁운동이었다. 경건주의는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회개를 통한 거듭남의 체험을 중시했다. 이처럼 경건주의는 종교적 주관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경건주의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경건주의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한 신학자가 바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다. 프랑케는 할레대학의 그리스어·히브리어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나중에는 신학 교수가 되었다. 바로 그로 인해, 그리고 그가 창립한 ‘프랑케재단’으로 인해 루터교 정통주의가 지배하던 할레대학이 경건주의 운동의 아성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감정을 중시하는 경건주의가 한 대학에 공존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학생이 고작해야 수백명에 불과한 그 당시 대학의 규모를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계몽주의를 대표했던 크리스티안 볼프가 마르부르크대학으로 떠났다가 갈등이 해소된 뒤에야 다시 할레대학으로 돌아왔다.

슐라이어마허가 배우고 가르친 할레대학

슐라이어마허는 가정과 학교에서 엄격한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1787~1790년 할레대학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다.(그리고 1794년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슐라이어마허가 공부할 당시 할레대학의 신학교수들은 경건주의가 아니라 주로 계몽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적 인식과 초자연적 계시를 매개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계시종교가 아니라 이성종교였다.

어려서부터 경건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적 성향의 할레 신학자들에게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주로 철학자들의 강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그리스 고전을 탐독했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부터 1828년까지 20년 이상 플라톤의 저작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 웅대한 지적 작업에는 대학 시절의 공부가 결정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슐라이어마허를 그린 초상화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할레대학에서 칸트의 철학을 접했는데, 이는 그의 정신세계를 결정적으로 각인했다. 그는 칸트로부터 세계를 합리적이고 계몽주의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배웠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순수이성’은 인간의 경험세계를 인식하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로써 경건주의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던 슐라이어마허의 세계관은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한 슐라이어마허는 결코 칸트주의자가 아니었다. 칸트에게 종교는 궁극적으로 윤리이다. 칸트는 신의 존재에서 도덕법칙을 도출하지 않고 그 역으로 도덕법칙에 근거해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종교이론이 추구하는 바는 도덕신학이다. 반면에 슐라이어마허가 보기에 종교는 실천적 윤리가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는 사변적 형이상학도 아니다. 종교는 윤리나 형이상학으로부터 도출할 수 없는 독립적이고 원천적이며 직접적인 그 어떤 것이다. 종교는 ‘무한자’(신)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다. 이런 인식은 슐라이어마허가 칸트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경건주의의 정신적 유산을 내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할레대학을 졸업한 뒤 슐라이어마허는 가정교사와 부목사로 일하다가 1796년 베를린으로 가서 병원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7년부터 낭만주의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단순한 우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지적 세계와 신학적 사고를 결정적으로 각인하는 제3의 요소를 만나게 된 대사건이었다. 낭만주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달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정과 직관을 중시했다. 이 점에서 낭만주의는 경건주의와 유사했다. 그리고 개인과 그의 개성, 개개인의 차이성 및 유일성과 그 위에 기초하는 개인의 삶과 행위를 강조했다. 이 점에서 낭만주의는 경건주의와 상이했다. 그것은 경건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개인주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새로운 개인주의에 적합한 신학적 논리를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할레를 대표하는 길인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 22번지에 위치한 슐라이어마허의 옛집. 그는 1804년부터 1807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는 19세기까지 지식인들이 주로 살아서 ‘지식인의 거리’라고 불렸다.

슐라이어마허는 1799년 4월에 <종교론>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현대신학의 출생 신고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종교의 본질이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인간은 종교적 직관과 감정을 통해 신을 만나고 내적으로 받아들여 신과 합일을 이룬다. 종교는 유한자와 무한자가 서로 만나고 통합되는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무한자인 신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후기 신학사상의 결정판인 <기독교 신앙>(1830~1831)에서 종교의 본질을 “절대의존감정”이라고 규정한다.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간과하는 점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개인주의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주의는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양적 개인주의는 칸트와 피히테에 의해 대변되던 입장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결합시킨다. 인간은 평등한 한 자유로운데, 이를 근거짓는 것은 개인을 초월하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원리, 곧 이성이다. 이에 반해 질적 개인주의는 낭만주의에 의해서 주창된 입장으로서 개인의 특성과 유일성을 강조한다. 이 질적 개인주의는 슐라이어마허의 철학과 만나면서 그 형이상학적 기초를 획득하게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역설하기를,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그에게만 고유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오직 그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과제가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종교 또는 체험종교는 바로 이 질적 개인주의 시대의 종교였던 것이다.

할레 시내 중심부 광장에 서 있는 ‘음악의 어머니’ 헨델의 동상. 광장 옆에는 헨델의 생가인 ‘헨델 하우스’가 있다.

거리 전체가 프랑케재단

헨델 동상 아래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따뜻한 음료로 몸을 녹인 뒤 프랑케재단을 찾아 나섰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에게 물으니 길을 건너면 된다고 말하면서 대충 손으로 가리킨다. 참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재단은 한두 개의 건물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길 건너 전체가 프랑케재단이라는 것이 그 젊은이의 손짓이 뜻하는 의미였던 셈이다.

프랑케재단의 본관건물에 들르니 안내하는 분이 자료도 듬뿍 주고 신명나게 설명을 해준다. 이 재단은 프랑케가 1695년 불과 4탈러의 기부금으로 빈민·고아를 구제하기 위한 기관으로 출발했다. 현재는 50개 넘는 건물에 다양한 사회·문화·학문·교육·종교 관련 시설과 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할레대학의 신학부도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 이토록 역사적이고 거대하고 복합적인 재단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고색창연한 과거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동하며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기관과 시설로서 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 할레대학의 신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그의 할레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할레를 점령한 다음 대학을 폐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슐라이어마허는 1807년 베를린으로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 뒤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 등과 더불어 베를린대학의 설립을 주도하고 1810년부터는 그 대학의 교수 겸 신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 할레대학은 1817년 다시 문을 열면서 비텐베르크대학과 통합했으며, 1933부터는 ‘마르틴 루터 대학 할레-비텐베르크’로 학교 이름을 바꿨다.

프랑케재단에서 나와 할레대학을 둘러본 뒤 천천히 시내 구경을 했다. 하루 종일 슐라이어마허는 할레에서 잊혀진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를 만났다. 중앙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마치 도시의 정문과도 같아 보이는 구조물이 있고 그 양편에 할레를 빛낸 인물들의 초상이 빙 둘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슐라이어마허가 있었다. 이 위대한 인물이 할레의 집단기억에 생동하기를 바라며 할레를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글·사진/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