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산주의보다 못하다" 직격탄
[신년 인터뷰]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경제 활력 불어넣으려면 종부세·상속세 등 올려 강력한 소득재분배 나서야
경제 활력 불어넣으려면 종부세·상속세 등 올려 강력한 소득재분배 나서야
대담=온종훈 정치부장 jhohn@sed.co.kr
정리=김능현기자 nhkimchn@sed.co.kr
사진=이호재기자
- 입력시간 : 2013.01.07 17:23:28
- 수정시간 : 2013.01.08 10:38:25
대기업 규제는 풀어주되 증세 통한 분배정책으로
성장 과실 골고루 돌아갈 때 재벌 개혁 필요없어져
산업화·민주화세력 아우르는 용광로식 통합에도 힘써야
"재산의 대물림은 자본주의를 망칩니다. 부모가 부자면 그 자식까지 놀고 먹고 반대로 부모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도 가난하게 살아간다면 공산주의보다 못한 사회예요."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파워시프트(권력이동)가 일어나고 있는 2013년 새해 우리 사회의 원로인 박승(78) 전 한국은행 총재를 만났다.
어느덧 4년 넘게 나라 밖에서 거칠게 휘몰아치는 경기불황이라는 한파와 그 한파를 피할 한 가닥 불길조차 피우지 못하는 무기력함, 그리고 수십년째 나라를 좀먹어온 동서 지역갈등, 계층갈등에 세대갈등까지 더해진 내우외환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묻기 위해서다.
지친 한 해를 떠나 보내고 그 자리를 '희망'이라는 자양분으로 채워넣어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해야 할 새해지만 암울한 현실을 타파할 모범답안은 존재할까.
박 전 총재는 1시간 이상 진행된 인터뷰에서 꺼져가는 성장의 불씨를 되살리면서 절망에 빠진 가난한 우리 이웃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나름의 해법, 더 정확히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설파했다. 앞으로 5년간 경제불황과 사회갈등이라는 벽을 넘어 성장과 통합으로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가야 할 막중한 책무를 부여 받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재산 대물림은 자본주의 망쳐
"우리나라처럼 땅이 좁은 나라에서는 부동산에 중과세해야 합니다. 저는 자녀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큰 평수(70평형) 아파트를 샀는데 종합부동산세를 한 푼도 안 내고 있어요. 현 정부에서 종부세가 무력화됐거든요,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겁니다."
세금 얘기가 나오자 박 전 총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세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부유세'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증세론자다.
서울의 전통적인 부촌인 종로구 평창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그는 "부동산을 몇몇 부유층이 독점하면 나머지 서민들은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며 "부동산 중과세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에서 내가 사는 평형대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면 세금이 적어도 한 해에 3,000만원은 나올 거예요. 오죽하면 세금 무서워서 집 못 산다는 말까지 나오겠습니까."
박 전 총재의 증세론은 상속세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스스로를 '재산 당대론자'라며 '상속세율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안 남기겠다고 선언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30년 전에 이미 자식(2남3녀)에게 재산 안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며 자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충분한 교육 기회를 주면 부모 역할은 다한 것이다. 남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다시 유럽의 예를 들었다. "영국은 상속세도 엄청나서 2대 이상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을 정도예요. 상속세를 물려 받은 토지로 낼 수밖에 없어 점차 국유지가 많아지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국의 전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런던 교외에 30만평에 달하는 평원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토지를 물려 받은 자녀들이 엄청난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그 토지를 세금으로 대신 납부했어요. 처칠에게 남은 것은 그 토지의 한쪽에 자리잡은 자신의 묘밖에 없어요."
경제 노화 심각… 일본형 불황 징조까지
박 전 총재가 자신에게 불리한 종부세와 상속세 강화를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침체의 늪에 빠진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증세를 통한 강력한 소득재분배가 유일한 해법이라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기불황은 앞으로도 5년, 길게는 10년 이상 이어질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조차 해외발 악재를 상쇄시킬 동력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인구고령화와 저출산, 부동산시장 장기침체, 정부부채와 가계부채 급증, 빈부격차, 기업의 투자 감소 등으로 경제가 노화증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외 수요를 대체할 국내 수요마저 사라지는 이중고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일본형 불황'의 징조마저 보인다"고도 했다.
대기업·부유층만 돈버는 '빈곤화 성장' 타파를
그는 경기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부유층만 돈을 벌고 대다수 서민들은 가난해지는 '빈곤화 성장'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과 강력한 소득재분배라는 정책 조합이 필요하다는 게 박 전 총재의 주장이다.
규제 완화를 통해 대기업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줌으로써 성장을 견인하도록 하고 그 성장의 온기가 서민들에게 스며들도록 정부가 나서 강력한 소득재분배 정책을 펴야 한다는 논지다. 박 당선인의 공약인 민생 해결도 소득재분배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외국에서 돈을 벌어오면 이 돈이 국내에 투자되고 자연스럽게 고용도 늘어 서민들도 성장의 과실을 향유했어요. 경제가 7% 성장하면 기업도 7% 성장하고 가계소득도 7% 증가하고 저소득층 소득은 오히려 이보다 많이 늘었습니다. 정부는 대기업들이 돈을 잘 벌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환율을 관리만 하면 경제가 잘 돌아갔어요. 하지만 지금은 반대예요. 대기업들이 국내투자를 외면한 채 해외투자만 늘리고 남은 돈은 기업 내에 유보하거나 자사주를 사는 데 골몰하고 있어요. 가계저축은 줄어드는 반면 기업저축은 자꾸 늘어나는 게 단적인 예지요. 결국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증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으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고 이를 저소득층에 적절히 분배하지 않으면 돈이 돌 수 없는 구조입니다."
박 전 총재는 특히 최저생계보장ㆍ교육ㆍ의료라는 3대 기본 수요는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사회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저생계비조차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층이 800만명에 달한다"며 "이들에 대한 생존권은 전적으로 정부가 나서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무리한 재벌개혁은 성장동력 해칠 수도
박 전 총재는 지난해 18대 대선의 최대 화두였던 '경제민주화'도 결국은 소득재분배에 실패한 데서 비롯된 반작용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 조세부담율(국민소득 대비 조세총액)이 26%인 반면 우리나라는 19%대에 불과하다. 박 전 총재는 "소득재분배가 이뤄지지 않고 빈곤화 성장이 거듭되니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의 재벌개혁 요구가 빗발치는 것"이라며 "소득재분배가 곧 경제민주화"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용어라기보다는 정치용어예요. 정치민주화가 정치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면 경제민주화는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득재분배가 잘되면 굳이 재벌개혁을 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어요. 오히려 무리하게 재벌개혁을 하다 성장동력을 해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합니다."
지역·세대·남북통합까지 함께 추구해야
박 전 총재는 18대 대선에서 박 당선인과 겨뤘던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경제 멘토 중 한명이다. 문 전 후보 캠프 내 경제자문그룹의 좌장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박 전 총재는 박 당선인에게 '용광로'식 통합에 나서줄 것을 주문했다. '용광로'라는 단어는 문 전 후보가 대선 기간에 민주당과 안철수 전 후보 측, 중도ㆍ무당파층, 시민사회 및 보수세력을 아우르는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용광로 선대위'라고 이름 붙인 데서 나온 말이다.
박 전 총재는 "박 당선인이 추구해야 할 시대정신은 산업화 독재세력과 민주화 저항세력을 한데 아우르는 용광로식 통합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1960년 초부터 30년간은 산업화 시대였어요. 당시 집권세력은 산업화에는 성공했지만 국민의 인권은 무시한 독재세력이었습니다. 산업화 독재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1980년대 이후 20년간은 민주화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인권이 크게 신장되는 등 민주화는 진전됐지만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해졌어요. 이제 산업화 독재세력과 민주화 저항세력 간 대립과 갈등을 상호 이해와 존중으로 바꿀 때가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동서지역 간 통합, 노소 간(세대 간) 통합, 남북 간 통합까지도 추구해야 합니다."
그는 "박 당선인이 얘기하는 대통합은 동서 간 지역통합에만 치우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며 "지역통합 외에도 사회세력 간(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세대 간 통합으로 패러다임을 넓혀 광폭의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광폭 통합을 '가치통합'이라고 정의했다.
박 전 총재는 가치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생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상생이란 '개인의 이익극대화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상생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적자생존을 유발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해 저소득층 생존ㆍ의료ㆍ교육 등 기본적인 삶의 수요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하고 이념적으로는 진보와 보수를 초월한 실용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 전 총재는 선제적 통화정책 중시 '영원한 한은맨' 자처 문재인후보 경제자문도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학계와 금융계ㆍ정부를 넘나들며 한국 경제와 호흡을 함께한 경제계 원로다. 지난해 18대 대선에서는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경제정책자문단에 참여했다. 그는 대선 초기인 지난해 9월 문 전 후보 측 주최로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전문가와의 간담회'에서 "문 후보는 국민의 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미지가 상당히 짙게 각인돼 있다"며 "안정감과 균형감을 보완해 중도층과 중산층, 40ㆍ50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해 눈길을 끌었다. 문 전 후보가 40ㆍ50대의 지지를 얻지 못해 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 전 총재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는 "재벌개혁은 확고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되 부작용이 최소화되도록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문 전 후보에게 대기업과 고소득층 증세를 통해 30조원의 재원을 마련한 뒤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교육ㆍ의료복지 등 4개 민생문제 해결에 사용하는 '양극화 힐링 프로그램'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은행 근무 중 해외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입행 초기 한은 건물에 불이 나자 물양동이를 들고 지붕에 올라갔던 일은 지금도 한은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지냈고 김대중 정부 말기인 지난 2002년 한은 총재로 임명되면서 첫 직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다양한 경력이 있지만 한은 근무기간이 20년에 육박하는 만큼 '영원한 한은맨'을 자처한다. 건설부 장관 재임 시절 당시 노태우 정부의 핵심 정책과제였던 '주택 200만호 건설'을 뚝심 있게 밀어붙여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발언으로 주택 가격 폭등을 유발한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은 총재 시절에는 강단 있는 통화정책으로 한은의 독립성을 높였다는 평을 받았다. 참여정부 때인 2005년 부동산시장이 과열 양상을 보이자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한 게 대표적 사례다. 선제적 통화정책을 중시했고 시장과의 '소통'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첫 한은 총재로 꼽힌다. 한은 직원들은 경제교육 등을 통해 한은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약력 ▦1936년 전북 김제 ▦1961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 한국은행 입행 ▦1974년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1976년 중앙대 정경대 경제학과 교수 ▦1986년 한은 금융통화운영위원 ▦1988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건설부 장관 ▦1993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1999년 제29대 한국경제학회 회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년 제22대 한국은행 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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