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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컬럼 -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진실

이윤진이카루스 2013. 1. 26. 11:20

박근혜도 구명운동 나선 ‘무등산 타잔’의 진실?

등록 : 2013.01.25 19:48 수정 : 2013.01.25 21:13

 

1977년 4월20일 광주 무등산 무당골에서 일어난 비극은 유신시대 강제철거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무등산 타잔’ 박흥숙. 보도사진연감

잔인한 철거 앞에…착한 흥숙씨 눈이 뒤집혔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7>‘무등산 타잔’의 비극

지난 1월20일은 용산참사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안 죽을 수 있던, 안 죽어야 했던 생때같은 목숨 여섯이 불에 타버린 날이다. 몇몇 사람들은 개발이라 불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날벼락 같은 철거였던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은 것은 용산이 처음은 아니었다. 용산참사 32년 전, 무등산 자락의 속칭 무당골에서 4명의 철거반원들이 살해당하는 비극이 일어난 적이 있다. ‘무등산의 비극’은 유신시대 한국의 천민자본주의가 적나라하게 보여준 개발과 철거의 사회사였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된 것은 무등산의 비극 1년 뒤였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처절한 단독 봉기 딱 3년 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가난과 철거가 불꽃처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비극의 주인공 박흥숙을 ‘무등산 타잔’으로 불렀다. 무등산은 넉넉한 산이지만 없는 게 많았다. 무등산 타잔에게는 없는 게 많았다. 그에게는 제인도 없었고, 치타도 없었고, ‘아~아아~아아아아~’ 하고 부르면 달려와 줄 사자도 고릴라도 없었다. 무등산에는 타잔만 있었고 치 떨리는 가난이 있었다. 서정주는 <무등을 보며>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가난과 철거가 불꽃처럼 만났을 때 살인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숱하게 봤던 타잔 영화에서는 악당조차도 죽어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무등산 타잔은 영화 타잔에 나오지 않는 어머니가 있었다. 서정주는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라고 노래했지만, 그 어머니는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이마라도 짚어 줄 지애비가 없었다.

1977년 4월20일 오후 3시께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7명이 관할 지역인 운림동 산145번지 증심사 계곡 덕산골(속칭 무당골)에 들이닥쳤다. 덕산골에는 원래 20여채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는데, 구청에서 여러 차례 강제철거를 통해 4채만 남은 상황이었다. 몇 번의 계고장을 받았던 박흥숙의 가족은 예정한 날짜에 철거반이 나오자 가재도구를 꺼내는 등 순순히 철거에 응했다. 문제는 철거반원들이 단지 건물을 철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을 질렀다는 점이다. 폐자재를 얼기설기 엮어 다시 집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당시 많은 빈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고 천장 위에 넣어 두었다.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거금 30만원이었다. 불길이 치솟자 어머니는 집 안으로 달려들어가려 했으나, 철거반원이 밀치는 바람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박흥숙은 여기까지는 참았다고 한다. 박흥숙의 집을 불태운 철거반원들은 계곡을 타고 올라갔다. 몇십 미터 떨어진 곳에는 거동도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있었다.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의 집마저 불타오르자 박흥숙은 이성을 잃었다.

1977년 4월 광주시 철거반원들이
무등산 무당골에 들이닥쳤다
전국체전과 박정희 방문을 앞두고
무허가 판자촌 철거에 나선 것
박흥숙 가족과 병든 노인들이 살던
집 4채가 부서지고 불에 탔다 

이웃노인 장례까지 혼자 치러주던
청년 박흥숙은 이성을 잃고
철거반원 7명 중 넷을 죽였다
“부유한 사람만 이 나라 국민이고
가난한 사람은 아니란 말인가”
그는 호소했지만 사형을 당했다

열쇠집과 철물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 박흥숙은 이때의 경험을 살려 사제 총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무등산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박흥숙은 산짐승을 만났을 때의 호신용으로 총을 만든 것이다. 총알이 나가는 총은 아니고 소리만 크게 나는 딱총이었지만, 박흥숙이 총을 들고 나타나자 철거반원들은 기겁을 했다. 7명의 철거반원 중 2명이 산 아래로 달아나자 박흥숙은 여동생 박정자를 시켜 빨랫줄을 가져와 남은 5명을 서로 묶고는 광주시장과 담판하기 위해 광주시청으로 가겠다고 했다. 평소 얌전하던 오빠가 무섭게 흥분한 것을 본 여동생은 산을 내려가 광주시에 전화하여 급박한 상황을 알렸지만, 시청에서는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급해진 박정자는 없는 살림에 택시를 타고 시청으로 달려가 시장실에 직접 신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박정자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당시 박정자는 덕산골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철거반원은 대개 무술 유단자이거나 건장한 체격의 청장년들이었지만, 사제 총을 들고 나타난 박흥숙에게 제압당해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 중 몇몇은 틈을 보아 끈을 풀고 박흥숙에게 저항하다 다시 제압을 당했다. 흥분한 박흥숙은 이들을 인근의 가로 2.5m,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에 몰아넣고는 쇠망치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4명이 죽었고 1명은 뇌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박흥숙은 현장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언론은 이 끔찍한 사건의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광주시는 폭력적인 강제철거, 특히 방화가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박흥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법시험을 준비해오고 있었던 것은 허황한 출세욕에 사로잡혀 “되지도 않을 일을 꿈꾸는 과대망상증 환자”의 행위로 매도되었다. 언론은 박흥숙에게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을 선사했다. 박흥숙이 운동에 열중했던 것은 ‘고시 공부하는 선배들을 보면 공부하다가 몸이 약해져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부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제일이라는 생각에서 체력단련을 한 것’이었다고 한다. 박흥숙은 운동을 많이 해 몸이 날쌔기는 했지만 그가 특별히 싸우는 기술을 연마한 것은 아니었다.

직접 지은 ‘움막’을 어머니께 바치다

언론은 “무당촌을 사수하려는 집념에 사로잡힌 무당의 아들이 제단을 차려둔 집도 태우려 하자 난동을 부린 것”처럼 사건의 동기를 왜곡하기까지 했다. 사건은 박흥숙 개인에 의해서 저질러졌지만, 언론은 “30여명의 주민들이 낫과 몽둥이로 집단 난동”을 벌였고, 불도 주민들이 지른 것처럼 날조했다. 일부 언론은 박흥숙의 어머니 심금순을 무당이라고 했다. 무당도 그냥 무당이 아니라 “무당골에서도 가장 뛰어나 굿거리 10여개를 몽땅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수입이 많은 무당촌의 실력자였으며 광주시내에다 집을 3채나 샀다”는 것이다. 덕산골이 무당촌이라 불린 이유는 그곳이 산 좋고 물이 좋아 사람들이 굿을 하러 오기 때문인데, 박흥숙의 어머니 등은 굿하러 온 사람들이 밥을 해달라고 하면 수고비를 받고 밥을 해 주는 날품팔이를 했을 뿐이다. 비극의 현장이었던 구덩이는 집이 철거될 것을 각오한 박흥숙이 철거 후 공부방으로 쓰려고 파 놓은 것이었다. 언론은 박흥숙이 철거반원들을 살해하고 암매장하기 위해 미리 구덩이를 파 놓은 것처럼 보도했다. 당시 조선대학교 학생이던 김현장(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였지만 최근에는 새누리당으로 가 문재인 후보를 맹비난한 바로 그 김현장!)은 덕산골 현장을 찾아가 박흥숙의 가족과 이웃을 만나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여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펴내던 <월간 대화> 1977년 8월호에 “무등산 타잔과 인간 박흥숙”이라는 르포를 써 유신언론이 왜곡한 박흥숙의 진실을 알렸다.

한순간에 4명을 살해한 박흥숙은 원래 착실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문화방송>(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발굴한 박흥숙의 국민학교 생활기록부에 보면 그는 “머리가 비상하게 좋고, 마음이 착하고,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폐결핵을 앓던 박흥숙의 아버지는 그가 6학년 때 세상을 떠났고, 곧이어 그의 형마저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어머니는 동생들과 함께 광주로 나갔지만, 박흥숙은 고향에 남아 자신이 수석으로 합격한 영광중학교에 다니려고 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상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자, 박흥숙은 교과서를 친구에게 팔아 차비를 마련해 광주로 왔다. 박흥숙네 형편은 광주천변에 판잣집 하나 마련할 수 없었기에 무등산 중턱 덕산골까지 흘러들어왔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진짜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밟아도 찍소리 한번 못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 “서민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빈민들, 그냥 나무뿌리 캐먹을 정도고, 누가 오면 밥 얻어먹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어린 박흥숙이 어렵게 어렵게 광주로 왔지만, 이곳에서도 가족들은 모여 살 수 없었다. 국민학교 4학년을 중퇴한 여동생은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나갔고, 어머니는 어린 남동생 둘을 데리고 내장사에 식모살이를 갔고, 외할머니도 먼 친척집으로 식모살이를 갔다. 박흥숙도 시내의 철물공장과 열쇠수리점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박흥숙의 소원은 가족들이 모여 사는 것이었다. 1974년 그는 자기 손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이 아니라 “방 1개와 부엌 1개로 이루어진, 돌을 얼기설기 붙인 ‘움막’에 가까운 것”이었다.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손이 부르터 피가 흘렀으나 약이 없어 바르질 못했다”면서 한달여에 걸쳐 문제의 그 ‘무허가’ 건물을 지은 것이다. 그 집은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집이었으나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이 집을 어머님에게 바쳤다.” 가족들이 같이 모여 살 집을 지어 어머니께 바친 것은 박흥숙에게는 “둘도 없는 인생의 클라이맥스”였다. 그것은 “나는 울었고 쓰러져서 울었고, 다시 일어났다”는 박흥숙이 얻은 “조그마한 과실”이었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덕산골 깊은 산골까지 무허가 건물을 자진철거하라는 계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박흥숙은 “당장 이사 갈 곳도 없고 참으로 피와 땀의 결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고생, 고생, 그 고생을 해서 지은 집을 차마 내 손으로 부술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라고 최후진술에서 그때의 심정을 얘기했다.

문제의 1977년 4월, 왜 광주시에서는 무등산 중턱에까지 철거반을 보냈던 것일까? 1977년 10월에는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이때 광주에 오게 되어 있었는데,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을 찾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주시는 무등산 일대에 대한 정화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에 깊숙이 간여했던 손정목은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상공을 헬리콥터 타고 다니면서 그래가지고 서울 상공에서 시장실에 전화를 해가지고 ‘지금 무허가 건물 그거 빨리 철거해’ 이게 박정희 대통령 취미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만큼 무허가 건물에 관심을 가지고 없애야 되겠다 하는 분은 없어요”라고 회고했다. 그 박정희가 무등산을 찾는다니 ‘독일병정’, ‘전폴레옹’ 등의 별명이 말해주듯 “한번 결정한 것은 확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유명한 광주시장 전석홍은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판잣집을 깨끗이 정리하려 한 것이다.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단행하고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18살의 박흥숙은 “나는 대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대통령 각하에게 국민총화를 위한 무궁한 지도력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기원하였다”고 일기에 썼다. 그 박정희가 무등산에 온다기에 철거반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도록 아예 무허가 건물에 불을 지른 것이다.

박근혜까지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박흥숙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진다면서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형제를 잃고 애통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백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 나 같은 기형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어떤 극형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도대체 마음씨 착하고 머리 좋고 자립심 강하던 청년이, 덕산골에 요양왔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간 폐병 환자들에게 혼자 장사도 지내드리던 아름다운 청년은 어쩌다가 희대의 살인자가 되었을까? 박흥숙은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참회했지만,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고,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올데갈데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러, 돈이나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 등이 깡그리 타버리고 말았다. 하물며 당국에서까지 이처럼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누가 달갑게 방 한칸 내줄 수 있겠는가?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런 대책 없이 강제철거를 밀어붙이는 국가폭력에 맞선 박흥숙의 ‘단독 봉기’에 대해 사법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박흥숙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각계에서는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박흥숙의 여동생 박정자는 “박근혜씨까지도 자기 아버지가 잘못한 걸 알고 구명운동을 했으니까”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구명운동도 보람 없이 박흥숙은 1980년 12월24일 사형을 당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쟁이의 아들 영수는 인쇄소 노동자가 되어 옛날 노비문서를 조판하다가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고생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난쏘공>이 나오고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영수의 아들은 어떤 처지가 되었을까? 이제 그들은 비정규직이란 이름의 더 작은 난쟁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고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역사다. 그러나 아들의 아들, 아들의 손자, 손자의 아들마저 난쟁이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저주다. 박흥숙이 망치를 들었다면 영수는 칼을 뽑았다. 영수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은강재벌 총수의 가슴팍에 칼을 박으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와 몹시 닮은, 그러나 경영권을 승계하지 못한 재벌 총수의 동생을 죽이고 사형을 당했다.

사건 3년 후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했을 때 박흥숙은 옥중에 있었지만, 동생 박정자는 광주시내 대인시장 골목에서 어머니와 함께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박정자는 밥을 함지박으로 해서 열심히 도청에 퍼 날랐다. 때마침 전두환 신군부 측의 교란공작으로 독침사건 등이 벌어져 시민군의 신경이 곤두서 있어 외부에서 가져온 물자를 받지 않을 때였다. 그때 박정자가 자신이 박흥숙의 동생이라고 하자, 시민군들이 안심하고 밥을 받았다고 한다. 박정자 모녀는 이때 열심히 밥을 해 나른 일로 2007년 제1회 오월어머니상을 받았다.

32년이 지난 뒤 비극의 무대는 인적 드문 무등산 중턱에서 서울 한복판 용산으로 바뀌었다. 죽어간 사람들은 철거반원이 아니라 철거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무등산 타잔’ 같은 저항도 못한 채 이들은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살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쪽을 향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그리던 ‘흉악한 테러리스트’는 새까만 숯덩이가 되었다. 살아남은 ‘폭도’ 8명이 감옥에 갔다가 3년9개월이 지난 2012년 10월 2명만 가석방되었다. 1977년 무등산 타잔 사건이 났을 때 박흥숙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던 젊은 박근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박근혜 당선인의 침묵이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