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 교수 ‘과거, 출세의 사다리’ 펴내
태조~선조 문과급제자 4527명 보면
1100명이 문벌귀족 아닌 양인 출신
그중 306명은 3품이상 고관직 올라
흔히 조선시대라 하면 대대로 세습적 지위를 누렸던 ‘양반’의 존재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양반은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일 뿐 고정된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오직 자유민인 ‘양인’과 비자유민인 ‘천인’만이 세습적인 신분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양인으로서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과거시험을 쳐 벼슬아치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원로 역사학자인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가 최근 펴낸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는 조선시대의 신분구조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5년에 걸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낸 저작이다. ‘조선시대는 양반이 세습적 특권을 누리던 폐쇄적인 사회였다’라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고, 조선시대를 읽는 새로운 눈을 제공하는 역저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태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앞으로 광해군~영조, 정조~철종, 고종 시기를 다룬 세 권이 더 출간될 예정이다.
한 교수는 오랫동안 조선시대의 신분구조가 양반의 특권과 세습성에 기대고 있다는 주장에 맞서, 조선시대 양반과 평민의 구별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으며 신분이동도 훨씬 개방적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18세기 초 실학자 유수원(1694~1755)의 문제의식으로부터 그런 풀이의 실마리를 찾았다. 유수원은 자기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문벌의 폐단’을 짚으며, 문벌이 없었던 건국 초기(15세기)엔 양인이면 누구나 벼슬아치가 될 수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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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 체험 |
이에 근거해, 한 교수는 15세기에는 양인과 노비가 양립하는 신분구조만이 있었을 뿐인데, 점차 벼슬을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며 17세기에 이르러 양반-중인-평민의 신분구조가 나타났다고 본다. 그러다 18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신분상승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양반신분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족보를 통해 본 조선 문과급제자의 신분이동’이란 부제에서 알 수 있는 대로, 한 교수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배출된 문과급제자 1만5000여명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일일이 따져봤다. 급제자 가운데 신분이 낮은 사람 비율이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밝혀 자신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그동안 연구들은 <방목>(과거시험 합격자 명단)만을 본 뒤 특정 성관에서 많은 엘리트층이 배출됐다는 결론을 내고, 이를 조선사회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곤 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방목>뿐 아니라, ‘족보’와 ‘실록’까지 면밀히 검토해 급제자의 실질적인 가계와 벼슬을 낱낱이 확인했다.
결론을 보면, 태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문과급제자 4527명 가운데 신분이 낮은 급제자로 판명된 사람은 1100명으로, 전체 급제자의 24.2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3품 이상 고관에 오른 급제자도 306명이나 됐다. “조선 전기를 평균적으로 볼 때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24%를 유지한다는 것은 과거시험을 통한 신분이동이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태조~정종 때 40.4%까지 달했던 비율이 선조 때 16.72%까지 낮아져, 시간이 흐르면서 역동성이 크게 줄어드는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실학자들이 문벌의 폐단을 경고하면서 이 비율은 다시 꾸준히 올라가 고종 때에는 58%에 이른다. 다만 영조 이후의 수치는 아직 미확정이다.
한 교수는 “과거제도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힘없고 외로운 사람들이 오직 공부만으로 출세하는 길을 열어주고 문벌 독점과 횡포를 견제하는 구실을 했다”며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