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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와 문서의 힘 - 정병준 교수

이윤진이카루스 2013. 1. 23. 12:37

문화

학술

“현대사는 문서 한 장의 힘이 폭발적…끈질기게 매달려야 행운오죠”

등록 : 2013.01.22 21:22 수정 : 2013.01.22 21:22

 

정병준 교수가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재미동포 사학자 방선주 박사와 함께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찾아 헤매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종 책과 자료상자들이 이곳저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의 연구실에선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쌓여 있던 책과 자료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새 길을 여는 한국의 인문학자들
③ ‘현대사와 정면승부’ 역사학자 정병준

역사학은 근본적으로 사료와의 싸움이고, 역사학자는 늘 산더미 같은 자료 속에서 조그만 실마리라도 붙잡으려 발버둥치는 탐정이나 수사관이다. 말로는 멋져 보이지만, 그 실질적인 과정은 주부습진까지 걸려가며 먼지투성이에 산화된 종이 더미를 헤쳐야 하는 ‘노가다’에 가깝다.

지난 16일 이승만·한국전쟁·독도 등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주제들과 끈질기게 정면승부를 벌여온 한국 현대사학자 정병준(48) 이화여대 교수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정 교수는 스스로 “기초체력이 좋아서 그런 종류의 ‘노가다’에 소질이 있다”며 웃었다.

몽양 여운형 연구로 석사학위를, 우남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 교수는 한국사와 관련한 최대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8년 동안 근무한 바 있다. 정 교수는 수많은 사료들을 접했던 이때의 경험이 역사학자로서의 소양을 닦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특히 국외사료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열달 동안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가서 재미동포 사학자 방선주(80) 박사와 함께 일했던 경험을 “정말 좋았던 경험”으로 꼽았다. 굴곡진 역사 때문이긴 하지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한국 현대사에 대해 한국보다 더 많은 자료를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수많은 문서들이 미국 연방기관 조직별로 비치돼 있습니다. 분류 그룹만 500여개나 돼요. 여기서 뭔가를 찾아내려면, 일단 아카이브의 시스템을 알아야 하고 미국 정부 조직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국무부 자료라면 국무부에서 어떤 기관들이 한국과 관련된 일을 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결코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진 않는다고 한다. 시간과 돈을 들여 수많은 자료를 끈질기게 뒤진 끝에야 행운처럼 의미 있는 사료가 걸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2001년 방 박사와 함께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가 미국 방첩대(CIC)의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문서를 발견한 것이 그런 끈질긴 노력과 행운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발견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정 교수는 이때 “문서 한 장의 힘이 정말 폭발적이구나”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한다.

미 국립문서보관소 파견 갔을 때
안두희가 미 방첩대 요원이라는
문서 발견하고 사료의 힘 깨달아

한국전쟁·독도 문제 연구해보니
굵직한 현대사 주제들 다루려면
합리적·논리적인 자료 구성 필수

한국전쟁이 공동체에 끼쳤던 영향
장기적 관점으로 파헤쳐보고 싶어
요즘 재미한인 진보주의자에 관심

사실 정 교수가 가장 보고 싶었던 자료는 미군이 북한에서 빼앗아온 ‘북한 노획 문서’였다고 한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는 200만여점의 북한 노획 문서가 있는데, 평양의 외무성 도서관을 통째로 옮겨놓은 수준이라고 한다. 박사논문 주제로 한국전쟁을 고려하기도 했던 정 교수는 북한 노획 문서를 비롯해 충분한 사료 연구를 거친 뒤인 2006년에야 <한국전쟁>을 펴냈다. 이 책은 옛소련 문서까지 폭넓게 연구해, 미군정 자료에만 기반을 뒀던 브루스 커밍스 연구의 약점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국제전’으로서 한국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냈다. 북한군이 자랑했던 탱크와 자주포는 낙동강쯤 내려오면 기름과 포탄이 바닥날 정도였다. 한마디로 북한은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었고, 남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한반도에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낸 미국과 소련이 이 적대 관계가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전혀 통제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면서 여섯달 동안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자료들이 말을 걸어오더군요. 북한군 최고사령부부터 일개 대대에 속한 병사까지, 비극적인 전쟁에 휩쓸려 들어간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2010년에 내놓은 <독도 1947>에서도 그는 국제 정세에 대한 고찰로부터 한국 현대사를 바라봤다. 이 책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자료가 발단이 됐다. 독도 문제에 대해 미국 쪽 문서들이 1950년대부터 갑자기 일본 쪽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의혹을 느낀 그는 전후 처리를 위해 강대국들이 맺었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주목했고, 2005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951년 영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통보한 대일평화조약 초안에 첨부된 한 장의 지도를 발견했다. 지도에는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역사학자 쓰카모토 다카시는 영국정부의 초안을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했는데, 알고 보니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지도의 존재는 일부러 빼놓고 소개하지 않았던 겁니다. 역사학자로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무척 부끄러웠죠. 사실을 확인하고서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기여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습니다.”

한국전쟁·독도·이승만과 같은 굵직한 주제들과 정면승부를 해온 정 교수는 “시대의 지층을 상대한다”는 마음으로 역사를 대한다고 했다. 그의 무기는 합리적·논리적인 자료 구성이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자료와 논리로 놓는 징검다리”에 비유했는데, 여기에는 이념이나 관점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녹아들어 있다.

정 교수는 앞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의 공동체에 끼친 영향을 장기지속적인 관점으로 파헤쳐보고 싶다”고 했다. 한마디로 ‘지금의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연구다.

“해방 뒤 한국 사회를 지배한 권력은 ‘줄을 대서 불하받은 권력’입니다. 일제가 한국인들의 이익과 관계없는 강한 국가와 관료기구를 남겨놨고, 미군정이 이것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한국 정부에 넘겼으니까요. 그것이 바탕이 돼 오늘날 국민의 이해와 관계없는 커다란 관료기구가 자리잡게 된 거죠. 이런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어가보고 싶습니다.”

정 교수는 재미한인 진보주의자들의 비극적 삶에도 각별한 관심을 품고 있다. 지난해 계간 <역사비평>에 해방 뒤 북한에서 미국의 공작원으로 몰렸던 ‘현앨리스’의 일생을 다룬 글을 실은 건 그런 관심의 한 결과물이다. 그는 “독립운동이라는 대의에 가장 헌신했던 사람들인데,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걸어야 했다”며 “이들의 삶을 꼭 기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