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마그나카르타 제정 800년이 되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대헌장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말이다. 권리와 정의는 양도, 거부, 또는 지연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의 양도불가 원칙이 마련되었다. 인권이 진보한 것 같지만 권력의 지배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은 중력처럼 언제나, 영원히 인간을 억누른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권력의 전횡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마그나카르타의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가 제정된 지 800년이 되었다. 인권의 기원을 어디에서 잡느냐가 항상 논쟁거리이지만 적어도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대헌장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말이다. 올해 영국에선 크라우드소싱으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학계와 시민들의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비비시>(BBC)는 의회와 공동기획으로 민주주의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영국의 조지 3세가 얼마나 식민지 주민들을 괴롭혔는지 그 죄상을 상세히 열거한다. 마그나카르타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대헌장의 역사적 울림이 뚜렷이 남아 있다. 유엔이 그 정관을 ‘유엔헌장’이라고 부른 것도 마그나카르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엘리너 루스벨트가 ‘인류의 대헌장’이라고 불렀던 건 유명한 일화다. 대헌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215년 6월15일 영국의 존 왕과 그의 신하인 영주들 수십명이 모였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 흔치 않은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회동 장소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80리 떨어진 서리주 근방 템스 강변의 초원. 이 부근 목초지의 지명이 러니미드. 사적지로 지정되어 현재 일반 대중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담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이 조용하고 목가적인 풀밭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봉건시대엔 국토 전체가 국왕의 소유였다. ‘배런’이라 불리던 영주들은 자기 땅에선 작은 왕처럼 행세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국왕의 토지를 하사받아 사용하던 임차인이었다. 영주는 그 땅을 아랫사람들에게 다시 세주었으므로 봉건제는 여러 단계의 임대차 관계로 엮인 복잡한 먹이사슬 같은 제도였다. 영주는 두목 임차인이고 가장 낮은 단계의 농노는 졸병 임차인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간에 권리와 의무가 정해져 있어 일종의 관습적 봉건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옛 군주들이 흔히 그러했듯 존 왕은 고집불통에다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좌충우돌하면서 매사를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와 늘 싸웠고, 교황과 다투다 파문된 적도 있고, 전쟁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영주들을 엄청나게 쥐어짰다. 참다못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떼를 지어 몰려가 런던타워를 점거하고 국왕에게 관습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에 존 왕이 마지못해 협상에 임했던 것이다. 몇가지 사실관계부터 정리하자. 1215년 6월15일에 존 왕이 합의문에 실제 서명한 것은 아니다. 존 왕이 글을 쓸 줄 알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며칠 동안 영주 쪽의 협박과 종용 끝에 국왕의 윤허가 6월15일에 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겨우 분이 풀린 영주들이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갱신한 뒤 필사 전문가들이 합의 내용을 라틴어로 양피지에 써서 양초로 봉인한 것이다. 1부만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배포될 문서여서 수십부를 일일이 필사해서 했다. 따라서 이 사본들 모두가 ‘원본’에 해당된다. 현재 4부가 남아 있다. 양가죽을 석회수에 오래 담근 다음 꺼내어 팽팽하게 당긴 상태에서 말린 뒤 반달형 칼로 표면을 긁어내고 깃털 펜으로 글씨를 썼다. 양피지가 엄청나게 비쌌던 탓에 필경사들은 되도록 잔글씨로, 행을 띄우지 않고 빽빽하게, 그것도 약자를 많이 쓰면서 기록을 해야 했다. 1조니 2조니 하는 구분은 후대에 영어로 번역하면서 붙인 것이다. 처음부터 대헌장이라 부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엔 자유헌장이라 했는데 나중에 국왕의 산림 관련 조항이 별도의 헌장으로 떨어져 나간 뒤부터 나머지 부분을 대헌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헌장의 반포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존 왕은 헌장을 준수할 의사가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선포 직후 그것을 무력화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무효선언까지 받아 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영주들이 이듬해 다시 항의를 시작했고 왕이 1216년 말에 사망하고서야 사태가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대헌장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 우선 총 63조로 이루어진 대헌장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권리원칙을 담은 문헌이 아니다. 불만 가득한 영주들을 달래기 위해 왕의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이행 각서였다. 따라서 전통과 관습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과거지향적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 중 인권 발전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조항은 모두 다섯개다. 1조는 영국(잉글랜드)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규정했다. 영국과 로마 가톨릭교회 간의 해묵은 애증관계를 읽을 수 있다. 13조는 런던을 비롯한 모든 시, 군, 구의 자유 특히 교역의 자유를 재확인했다. 서양의 지방분권 전통이 원래 경제활동의 자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권의 측면에선 39조와 40조가 특히 중요하다. 39조는 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함부로 체포하거나 구금하지 못하고, 그의 권리나 소유물을 박탈하지 못하며, 범죄자 취급하거나 추방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이 조항으로부터 훗날 인신보호 규정이 도출되었다. 또한 피고는 ‘동등한 자유민들의 정당한 판단’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함으로써 시민배심원단에 의한 재판, 즉 민주적 사법집행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옳고 그름을 시민들이 판단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함으로써 적법절차의 준수 원칙이 비롯되었다. 국왕이라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가 사이먼 샤마는 이 조항 덕분에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권력의 자의적 지배는 종언을 고했다고 평가한다. ‘자유민은 그 누구도…’라고 한 부분은 훗날 ‘그 누구도 이러저러한 이유로…’라는 반차별 원칙으로 발전했다.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7조가 대헌장의 39조를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40조는 권리와 정의는 양도, 거부, 또는 지연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의 양도불가 원칙이 마련되었다. 마지막으로 61조는 영주들 중에서 25인의 대표를 뽑아 국왕이 헌장을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도록 하고, 만일 헌장을 어길 경우 국왕의 부동산과 동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시절에 국왕에게 이런 엄격한 재갈을 씌워놓았으니 대헌장이 얼마나 혁명적인 인권문헌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대헌장은 이처럼 파격적이었지만 문제가 없지 않았다. 영주, 기사, 자유민 등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게만 적용된 문헌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90퍼센트의 농노들에게는 벌금형 제한, 자의적 재산몰수 금지, 강제노역 금지와 같은 극히 일부 권리만 인정되었다. 1689년 명예혁명 때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바뀌긴 했지만 이때에도 여성은 제외되었음을 기억하자.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차원에서 절대 권력은 인정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마그나카르타의 정신은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역설적인 측면도 있다. 영국인들에게 대헌장의 원칙은 상식처럼 문화 속에 각인된 탓에 성문헌법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대헌장의 원래 목적은 불만이 내전으로 터져 나오지 않도록 막기 위한 대증요법이었다. 봉건제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것이 영주들의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와서 인권의 원칙으로 격상되었다. 수구적 동기가 혁신적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