ふくざわゆきち | 福澤諭吉

문명론의 개략, 제3권 제 6장 지혜와 덕행의 구별

이윤진이카루스 2015. 3. 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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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지혜와 덕행의 구별

 

앞장까지의 논의에서는, 지덕(智德: 지혜와 덕행)의 두자를 숙어로 사용하여, 문명의 진보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지혜와 덕행의 발생에 관련되는 것으로의 순서를 서술하였어도, 이제 이 장()에서는 지혜와 덕행을 구별하여 그 내용이 다른 바를 밝힐 것이다.

()이라는 것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서양의 언어에서모럴(moral)이라고 한다.모럴(moral)이라는 것은 마음의 예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개인의 마음 가운데 만족하여 누가 보지 않은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은 지혜라고 하는 것인데 (이 표현은 이와나미 문고본<岩波文庫本>에는 とは智惠ということにて로 되어 있는데 본 인터넷 본에서는 とは智徳ふことにて로 표현되어 []라는 것은 지덕[智徳]이라는 것인데의 의미이어서 이와나미 문고본으로 해석함. 역자), 서양의 언어로인텔렉트(intellect)라고 한다. 사물을 고찰하고 사물을 이해하여 사물을 납득하는 행위이다. 또 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서도 지혜에서도 각각 두 종류의 구별이 있는데, 첫 번째는 지조, 결백, 겸손, 의리 등과 같이 하나의 마음 안에 속하는 것을 사덕(私德: 사사로운 덕)이라고 하고, 두 번째로 염치, 공평, 불평부당, 용기 등과 같이 외부의 물체에 대하여 인간사교 상에서 나타나는 바의 행위를 공덕(公德: 공공의 덕)이라고 칭한다. 또 세 번째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행위를 사사로운 지혜라고 칭하고, 네 번째로 사람에 관한 일의 가볍고 무거움과 크고 작음을 구별하여 가볍고 작은 것을 뒤로 하고 무겁고 큰 것을 우선하여 그 시기와 장소를 살피는 행위를 공공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지혜 혹은 이것을 궁리하는 작은 지혜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공공의 지혜 혹은 이것을 총명한 커다란 지혜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네 가지 것 안에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네 번째 조목의 커다란 지혜이다. 생각건대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이 없으면 사사로운 덕행과 사사로운 지혜를 확대하여 공공의 덕행과 공공의 지혜로 할 수 없고, 혹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서로 어긋나 서로 해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옛날부터 명확하게 이 네 가지 조목을 내걸어 논의한 일이 없어도, 학자의 논의에서도 속세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도, 능히 그 뜻이 있는 곳을 음미하면 역시 이 구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맹자에 측은(惻隱: 불쌍히 여김), 수오(羞惡: 악을 미워함), 사양(辭讓), 시비(是非: 옳고 그름을 가림)는 사람 마음의 네 가지 근본이고, 이것을 확대할 때는 불이 비로소 타오르고 샘물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이, 능히 이것을 채우면 사해(四海: 온 세상)을 보전할 수 있고,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부모를 봉양하기에 부족하다고 되어있다. 생각건대 사사로운 덕행을 확대해서 공공의 덕행에 다다른다는 뜻일 것이리라. 또 지혜가 있다할지라도 시세에 편승하는 것만 못하고, 호미가 있다하더라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맹자공손추상1). 생각건대 시세의 완급을 살펴서 사사로운 지혜를 확대하여 공공의 지혜로 된다는 뜻이리라. 또 세간의 이야기에 아무개는 세간에 내세워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어서, 공무를 향해서는 최상이어도 한 몸의 품행에 이르러서는 언어도단이라고 하는 일이 있다. 프랑스의 재상리슐리외<Richelieu>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생각건대 공공의 지혜와 공공의 덕행에 결점이 없으면서 사사로운 덕행에서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또 아무개는 바둑, 장기, 주판은 물론, 어떤 일에서도 궁리가 능숙해도, 소위 바둑의 지혜, 수의 계산에서, 아무튼 무분별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일이 있다. 생각건대 사사로운 지혜는 있고 공공의 지혜가 없는 것을 평하는 것이다. 앞에서와 같이 지혜와 덕행의 네 가지 구분은, 학자도 세인도 함께 허용하는 바의 일이므로 이것을 보편적인 구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 구분을 정하고 그 다음에 그 작용을 논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이 없으면 사사로운 지혜를 확대하여 공공의 지혜로 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바둑, 카드놀이, 구슬놀이 등의 기예도 사람의 궁리한 것이고, 물리학과 기계 등의 기술도 역시 사람이 궁리한 것이어서, 평균적으로 정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그 사정의 경중과 대소를 살펴서 중대한 방향에 따라서 세상에 도움을 준다면, 그 지혜가 작용하는 바, 점점 커진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또 스스로 그 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사물의 이해(利害)와 득실을 살피는 일,아담 스미스가 경제의 법칙을 논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천하의 인심을 인도하여 일반적으로 부유의 원천을 깊게 하는 일이 있으면, 지혜의 작용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얕은 지혜에서 진보하여 큰 지혜에 이르는 것에는 총명과 뛰어난 지식을 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또 학식이 높은 사람의 말투에, 천하를 청소하여도 앞뜰은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등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치국평천하: 治國平天下) 수단을 구하여 크게 소득이 있어도, 한 몸과 한 가정의 안을 다스리는 일이 능하지 않은 자가 있다. 혹은 한 마음 일편단심으로 의리를 지켜 집밖의 일을 모르고, 심하게는 몸을 죽여서 세상에 이익을 주지 않는 자가 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총명의 작용이 결핍되어 사물의 관계를 그르치고, 대소와 경중을 구별할 수 없어서 덕()을 닦는 균형을 잃은 자들이다. 이것에 따라서 생각하면 총명과 뛰어난 지식의 작용은 흡사 지혜와 덕행을 지배하는 것이기에,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하여 논할 때는 이것을 큰 덕행이라고 할 수 있어도, 여기에 천하의 일반적인 인심에 따라서 문자의 의미가 쓰인 유래에 의거하면 이것을 덕행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생각건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인심에 관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칭하는 것은, 오로지 한 사람의 사사로운 덕행에만 이름을 부여한 글자이므로, 그 생각이 있는 곳을 살피건대, 옛날 책에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하다(温良恭謙譲)고 하고, 무위(無爲)로서 다스린다고 하고, 성인(聖人)에게는 꿈이 없다고 하고, 덕망이 높은 군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과 들판과 같다고 하는 등, 모두 이런 취지로써 본래의 취지로 하여, 결국, 밖으로 나타나는 작용보다도 내부에 있는 것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부를 따름이어서, 서양 언어에서수동적[passive]이라 하여, 나로부터 행동하지 않아서 사물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 다만 이기심을 풀어놓는다는 한 가지 일로써 근본을 삼는 것과 같다. 경서(經書)를 생각건대 그 주장하는 바 모두가 수동적인 덕행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활발한 곳의 절묘한 곳이 있은 것 같기는 하여도, 유감스럽게도 책 안의 전체 기풍에서 그 인심에 감동하는 바를 보면 다만 인내와 비굴의 취지를 권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타 신도(神道)와 불교에서도 덕()을 닦는 한 단계에 이르는 데는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이 가르침으로 길러진 우리나라의 국민이기에, 일반적인 인심에 따를 때는 덕() 자의 뜻이 매우 좁아서, 소위 총명과 뛰어난 지식 등의 작용은 이 글자의 뜻 가운데 포함되는 일이 없다. 대체로 문자의 뜻을 해석하는 것에는, 학자가 정한 글자의 뜻에 구애되지 않고 천하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그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의 의미를 취하는 것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한다. 비유컨대 뱃놀이 산(舟遊山: 주유산)이라고 하는 문자와 같다. 하나하나 글자의 뜻을 규명하면 매우 부적절하지만,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에서는, 이 문자의 안에 산에서 논다고 하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 없다. ()이라는 글자도 역시 이와 같다. 학자들에 따라서 뜻을 규명하면 그 의미가 매우 넓어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는 곧 그렇지 않고, 세속에서 욕심이 없는 산사(山寺)의 노승을 보면 그것을 높은 덕()을 지닌 고승이라고 존숭하여도, 세상에서 연구, 경제, 이론 등의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이것을 덕행의 군자라고 하지 않고 재사(才士) 또는 지자(智者: 지혜로운 자)라고 칭하는 것은 틀림없다. 혹은 또 고금의 인물이 큰 사업을 성취하는 자가 있어서 그를 영웅호걸이라고 기리지만, 그 사람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하여 칭하는 바는 다만 사사로운 덕행이라는 한 가지 일에 있을 따름이어서, 공공의 덕행이 더욱더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항목에 덧붙이지 않고 가끔 잊어버리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에서 덕()의 글자의 뜻이 좁은 것으로써 알 수 있다. 생각건대 그 마음에 스스로 지혜와 덕행의 네 가지 구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도, 때로는 이것을 아는 것 같고 또 때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결국 세상의 일반적인 기풍에 제압되어 그 중점이, 사사로운 덕행의 한 편에 편중된 것이리라. 그런고로 나도 이 세상의 일반적인 인심에 따라서 글자의 뜻을 정한다면,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은 지혜의 항목 중에 내걸고, 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칭하는 것은 그 글자의 뜻의 영역을 축소하여 다만 수동적인 사사로운 덕행에 국한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장과 7장에 기술한 바의 덕()이라는 글자는 모두 이 취지에 따라서 사용한 것이어서, 그 논의에 즈음하여,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비교하여, 지혜의 작용은 무거우면서 넓고, 덕행의 작용은 가벼우면서 좁고, 혹은 편집적(偏執的)인 것 같겠지만, 학자들이 혹시 여기에 기술하는 바의 취지를 잘 이해하면 이것에 당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대체로 미개의 상태에 있어서 사사로운 덕행을 가르침을 주장하여 국민도 역시 그 풍습에 복종하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전 세계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생각건대 국민의 정신이 아직 피어나지 않아서 금수(禽獸)를 벗어난 일이 멀지 않은 시대에서는, 우선 그 거칠고 잔혹한 행동을 억제하여 한 몸 안을 완화하여 인간의 편안한 마음을 구하는 데 바쁘게 되면, 인간 사교의 복잡한 관계에 관해서는 되돌아 볼 여유가 없다. 더욱 의식주라는 것에서도, 세상의 시작에서는 소위 손으로써 직접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어서, 아직 가옥이나 의상의 일을 되돌아 볼 여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명이 차츰 진보하면 사람의 일도 역시 번다해지고, 사사로운 덕행이라는 한 가지 기계로써 인간 세상을 지배할 이치는 결코 있을 수 없어도, 예로부터의 습관과 인간의 나태라는 천성으로 인하여 옛날을 흠모하고 지금에 만족하여, 한 편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원래 그 사사로운 덕행의 항목은, 만세(萬世)에 전하여 변할 수가 없고, 세상 한 가운데 통용하여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가장 단일(單一)하여 가장 훌륭한 것이기에, 후세로부터 개정할 수 없는 것을 물론이라 하더라고, 세상의 변천에 따라 그것을 활용하는 장소를 선택하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유건대 음식을 구하는 것은 만고불변이지만, 옛날에는 손으로써 직접 먹고 사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어도, 후세에 이르러서는 음식이라는 것에도 천태만상의 방식이 있는 것과 같다. 또 이것을 비유하면 사사로운 덕행을 갖춘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이목구비를 갖춘 사람의 몸에 관해서와 같다. 본래 그 유용함과 무용함을 논할 수가 없다. 적어도 사람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반드시 이것이 없을 수 없다. 이목구비가 있는지 없는지의 논의는 신체불구자들이 거주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겠으나, 적어도 신체불구자 이상의 지위에 오르면 역시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낭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체로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든지, 또 기독교든지, 어떤 것도 오랜 옛날 문자가 없던 세상에 존재하여 흡사 신체불구자의 시대에 외치는 주장이기에, 그 시대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은 논할 필요도 없다. 후세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세계 중의 인구, 108, 9가 신체불구자일 것이라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결코 등한시하기가 어렵다. 혹은 이것 때문에 재잘거리지 않을 수 없는 형세도 있으리라.유교학자의 도[]에는 성실을 존중하고, 신도[神道]와 불교의 가르침에는 일편단심을 권하는 등, 하층의 민간에 있어서는 최고로 요긴한 일이다. 비유컨대 지혜의 힘이 아직 피어나지 않은 어린이를 기르고, 혹은 지혜가 없고 재주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대하여, 일률적으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 등은 인간의 형편에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결과적으로 오해를 낳아서, 덕행은 무시될 수 있고, 지혜는 존중될 수 있다고 납득하고, 그 지혜를 또 오해하여, 아름다운 덕행을 버리고 간사한 지혜를 구하는 폐단에 빠져, 홀연히 인간의 사교를 전복하는 우려가 없지 않아서, 이 무리를 향해서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붙여 재잘거리는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하더라도, 정성스러운 마음 일편단심이라는 사사로운 덕행으로써 인류의 본분을 삼고, 그로써 세간의 만사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은, 그 폐단도 역시 극히 우려할만한 것이다. 장소와 시기를 감안하여, 그 지향하는 바는 고상한 경지를 기하지 않을 수 없다.그렇다하더라도 문명의 본래 취지는 많은 사건의 시간을 걸쳐 움직여 진보하는 데 있는 것이어서, 먼 옛날의 사건이 없음과 단순함에 만족할 수 없다. 현재의 사람으로 음식을 구하는 것에 손으로써 직접 먹을 것에 달하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이목구비를 구비하는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면, 사사로운 덕행의 한 편을 수양하는 것도 아직도 사람이 하는 일을 다 하지 않았다는 이치가 명백할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극히 번다해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 번다하면 그것에 응하는 마음의 작용도 역시 번다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사로운 덕행 한 가지로써 만사에 응대할 수 있는 것으로 하면, 현재 여성의 덕행을 보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도 이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에서 풍속이 올바른 가문의 부녀자에게, 온순하고 겸손한 덕행을 갖추고, 말이 믿음직스럽고, 행동에 인정이 많고 공손하여, 충분히 가정의 일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드물지 않을지라도, 이 부녀자를 세간의 공무(公務)에 채용할 수 없는 것은 왜인가? 인간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사사로운 덕행만으로써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결국 나의 소견은 사사로운 덕행을 인생의 자질구레한 행위로서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느끼는 것과 같이, 다만 이 한 방향으로 치우쳐 논의의 기준을 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사사로운 덕행이 필요 없다고 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것을 애쓰는 것 외에 또 소중한 지혜와 덕행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흡사 사람의 마음을 양쪽으로 나누어 각각 그 한 편을 지배하는 것이므로, 어느 쪽을 중시하고 어느 쪽을 경시할 이유가 없다. 양쪽을 겸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옛날부터 학자들이 논하는 바를 보면, 108, 9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한 쪽을 주장하여 사실을 그르치고, 그 그르침이 심한 것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지혜라는 것을 쓸데없다고 하는 자가 없지 않다. 세상을 위해 최고로 우려할만한 폐해지만, 이 폐해를 변호하는 것을 맞아 한 가지 난관이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에 있어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와의 구분을 논하여 옛날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에는, 우선 이 두 가지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 그로써 그 작용하는 소재를 밝히는 일이라면, 사상이 얕은 사람의 안목으로써 볼 때는, 혹은 그 논의는 덕행을 경시하고 지혜를 중시하여 공연히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있어 불평을 품는 자도 있으리라. 혹은 그 논의를 가볍게 간과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인간에게 쓸모없다고 오해하는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세상의 문명을 위해서 지혜와 덕행이 함께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람의 몸을 기르기에는 채소와 곡식과 생선과 육류 양쪽 모두를 빼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금 지혜와 덕행의 작용을 밝혀 지혜를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을 논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채식주의를 향해 육식을 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육식을 권하는 것에는 반드시 고기의 효능을 주장하여 채소과 곡식의 폐해를 설명하고, 채소와 고기를 함께 이용하는 데 양쪽이 모두 서로 거스르지 않는 이치를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채식주의자라는 사람은, 한쪽 편의 말을 믿어, 단호히 채소와 곡식을 금지하고 생선과 고기만을 먹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미혹이 심한 것이다. 이것을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생각건대 옛날과 오늘날의 지식인도 지혜와 덕행의 구분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도, 다만 이 오해에서 오는 폐해를 우려하여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하더라도 알고도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한계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에서도 도리에만 합당한 일이라면, 열 사람은 열 사람 모두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가끔 10에 두, 셋의 오해가 있는 것도 더욱 말하지 않는 것이 훌륭했다. , 셋의 오해를 꺼려 7, 8의 식견을 막을 도리가 없다. 마침내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하여 말할 수 있는 논의도 숨기려하고, 혹은 그 논의를 가장하여 애매한 때에 사람을 유도하려고 하여, 소위 자리를 보고 법을 말하는 (그 장소의 분위기에 맞추기) 방책을 운용하는 것은, 같은 무리들의 생생한 기운을 멸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할지라도 흑백은 구별하는 것이다. 같은 무리의 인간에 극심한 지혜와 어리석음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생각으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살펴, 그 오해를 억측하여 사태의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군자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 옳다고 하는 바의 것이 있으면 그대로 그것을 말하여 숨기는 일이 없고, 그 가부의 판단은 남에게 맡길 수 있다. 이것이 곧 내가 감히 구별을 좋아하여 지혜와 덕행의 구분을 논하는 이유이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것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작용이 아니다. 수신(脩身)이라고 하건 신독(慎独)이라 하건 모두 바깥 사물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무욕(無慾)과 정직(正直)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이지만 인간의 비방을 두려워하고 세간의 악평을 꺼려 욕심이 없고 정직한 행동에 힘쓰는 것은, 그것을 진정한 무욕과 정직이라고 할 수 없다. 악평과 비방은 외부의 것이다. 바깥의 사물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 한다면 일시적인 사정으로 세간의 질책을 피할 수 있을 때에는 탐욕스럽고 부정(不正)한 일을 해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있어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즉 가짜 군자(偽君子) 진짜 군자(真君子)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란 모두 외부의 사물의 변화에 구애되지 않으며, 세간의 비난과 칭찬을 고려하지 않고, 권위나 무력도 굴복시킬 수 없고, 가난과 천함도 빼앗을 수 없으며, 확고부동(確乎不抜)하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혜는 다르다. 바깥의 사물과 접하여 그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생각하고 그 일을 행하여 불편하면 저 방법을 사용하고, 나에게 편리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그것을 불편하다고 하면 곧바로 또 그것을 고치고, 한번 편리해진 것이라도 다시 더 편리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마차는 가마보다 편리하지만, 증기력의 유용함을 알면 다시 증기차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차를 고안하고 증기차를 발명하여, 그 이해(利害)을 살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의 작용이다. 이와 같이 바깥의 사물에 접하여 임기응변(臨機応変)으로써 일처리를 하는 것이므로 그 생각이 완전히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와 상반되어 그것을 외부의 작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있는 군자가 홀로 집에 있으면서 침묵하고 앉아 있으면 그것을 악인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 만약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바깥의 사물에 대응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을 바보로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 사람의 행위로서 그 효능이 미치는 곳은 우선 한 가정의 안에 있다. 주인의 행실이 정직하면 집안의 사람들은 자연히 정직으로 향하고, 부모의 언행이 온순하면 자식들의 마음도 스스로 온순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혹은 친척과 친구들 간에 서로 덕행을 채근하여 덕행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맹자 이루하[離婁下] 31), 결국 충고에 따라서 사람을 선행으로 이끄는 범위는 매우 좁다. 이른바 집집마다 타이를 수 없고 사람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이것이다. 지혜는 그렇지 않다. 한번 사물의 이치를 발명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면 순식간에 한 나라의 인심을 움직여, 혹은 그 발명이 커지는 데 이르러서는, 한 사람의 힘이 전 세계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경우가 있다.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고안하여 세계 중심의 공업이 이것 때문에 생각하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고, 아담 스미스가 경제의 원칙을 발명하여 세계 중심의 상업이 이것 때문에 입장을 바꾸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했구나, 혹은 말로써 하고 혹은 글로써 할 수 있다. 한번 그 말을 듣고 그 글을 보고 이것을 실제로 시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와트스미스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어제의 바보는 오늘의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세계 가운데 몇 천 만의와트스미스를 낳을 수 있다. 그 교습의 속도로서 그 행하는 바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저 한 사람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로써 가족과 친구에 충고하는 종류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토마스 클락슨이 전념하여 세상의 노예 악법을 없애고,존 하워드<John Howard>가 연구하여 감옥에서 벌어지는 폐습을 일소한 것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작용이므로, 그 공적이 미치는 바가 역시 지극히 크고 무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변하여 말하는 바, 정말 옳다, 이 두 사람의 선비는 사사로운 덕행을 확대하여 공공의 덕행을 만들어, 그 공적이 지극히 크고 무한하도록 만든 것이다. 생각건대 두 명의 선비가 일을 시행하는 것을 맞아, 천신만고를 꺼리지 않고 궁리하여, 혹은 책을 저술하고 혹은 재산을 소비해서, 어려움을 견디고 위험을 무릅써, 세간의 사람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충분히 그 대업을 이룬 것은, 곧 사사로운 덕행의 공로가 아니라, 소위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이라고 기릴 수 있는 것이다. 두 선비의 공적이 크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덕()이라는 글자를 해석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는 한 편에 관하여 그것을 보면, 살신성인한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여기에 인자한 사람이 있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구하고자 하여 함께 몸을 잃은 것도,존 하워드가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하고 마침내 목숨을 잃은 것도, 그 측은한 마음을 비교하면 어느 것도 깊고 얕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전자(前者)는 아이를 위해서고, 후자(後者)는 수만 명의 사람을 위해서니, 전자(前者)는 한 때의 선행을 베풀고, 후자(後者)는 만대에 선행을 남기는 차이점이 있을 따름이다. 몸을 희생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와의 사이에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경중이 없다. 그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하여 만대 후에 공적을 남겼던 것은,하워드가 총명과 뛰어난 지혜로써 그 사사로운 덕행을 크게 사용하여, 그리하여 공적이 미치는 바를 넓혔던 것이다. 그런고로 인자한 사람이란 사사로운 덕행을 지녔으면서 공공의 덕행과 공공의 지혜가 부족한 자이다. (앞의 마침표는 이와나미 문고본에 표기되어 있고 본 인터넷 본에는 쉼표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와나미 문고본을 따랐다. 역자)하워드는 공()과 사() 모두 이것을 지닌 자이다. 이것을 비유건대 사사로운 덕행은 바탕 쇠()와 같고 총명한 지혜는 세공(細工)과 같다. 바탕 쇠()에 세공을 입히지 않으면 쇠도 다만 무거우면서 단단할 뿐인 물체가 되지만, 이것에 조금 세공을 입혀 망치도 되고 솥도 되면, 곧 망치와 솥의 효능이 있다. 또 조금 궁리하여 작은 칼로 되고 톱이 되면, 곧 작은 칼과 톱의 효능이 생긴다. 더욱 그 세공을 교묘하게 하면 거대한 것은 증기기관으로 될 수 있고, 정밀한 것은 시계의 용수철로 될 수 있다. 지금 세간에서 큰 솥과 증기기관과를 비교하면, 누가 기관의 효능을 크다고 하여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을까? 이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큰 솥과 기관의 바탕 쇠의 다름이 아니라, 다만 그 세공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쇠로 된 기계를 보고 그 바탕 쇠()를 논할 때는, 솥과 기관과 망치와 작은 칼이 정말로 한결같아도, 이 여러 제품 안에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그것에 세공을 입히는 것의 많고 적음에 달렸다. 지혜와 덕행의 균형도 역시 이와 같다. 저 아이를 구하고자 한 인자한 사람도존 하워드, 그 덕행이라는 바탕 쇠()에 관하여 볼 때는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의 차이가 없다할지라도, 하워드는 이 덕행에 세공을 입혀 그 효능을 성대하게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세공을 입힌 것은 곧 지혜의 작용이기에,하워드의 사람됨은 그것을 평가하여 다만 덕행의 군자라고만 할 수 없다. 지혜와 덕행을 겸비하고 게다가 그 총명한 지혜의 힘은 고금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의 힘이 없도록 했더라면, 일생동안, 벌레의 움직임으로서 집안에 거주하면서, 한 권의 경서를 읽고 생을 마감하며, 그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로써 충분히 처자를 감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을 할 수 없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어찌 이 큰 일을 기획하여 유럽 모든 고을의 나쁜 풍속을 제거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말하는 바, 사사로운 덕행의 효능은 좁고 지혜의 작용은 넓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지혜의 작용에 따라 그 영역을 넓히고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한 일은 옛날부터 정해져 움직이지 않는다. 기독교의 10계명인 것을 들면, 첫 번째 하느님의 외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두 번째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라, 세 번째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말라, 네 번째 예배일을 모독하지 말라, 다섯 번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 일곱 번째, 부정한 언행과 생각을 피하라, 여덟 번째 가난할지라도 도둑질을 하지 말라, 아홉 번째 고의로 속이지 말라 또한 거짓을 즐기지 말라, 열 번째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이상 10개 조항이다. 공자의 도()의 오륜(五倫)이라는 것은, 첫째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하여 부모와 자식이 서로 화목한 것이고, 둘째 군신유의(君臣有義)라 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에 얽매임을 지켜 부실한 행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것은 남편과 아내도 지나치게 친밀하게 굴어서 볼썽사나운 상황에 빠질 수 없는 것이고, 넷째 장유유서(長幼有序)라 하여 젊은이는 어떤 일도 조심하여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고, 다섯 째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하여 친구들 간에는 속이기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10계명과 오륜(五倫)은 성인(聖人)이 정한 가르침의 큰 근본 지침이어서 수 천 년 옛날부터 이것을 바꿀 수 없다. 수 천 년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높은 덕을 지닌 선비는 배출되었지만, 다만, 이 큰 기본방침에 관하여 주해를 실시할 뿐이고 특별히 한 가지 조항도 늘린 것이 없다. 송나라 시대에 유교가 번성했다하더라도 오륜(五倫)을 바꾸어 육륜(六倫)으로 만들 수는 없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조항이 적어도 변혁할 수 없다는 것의 명확한 증거이다. 옛 성인(聖人)은 이 조항 모두를 몸소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던 것이므로, 후세의 인물은 어떤 방법으로든 노력하고 고심하여도 결코 그보다 더 뛰어날 수가 없다. 이것을 비유건대 성인(聖人)은 눈을 희다고 하고 숯을 검다고 하는 것과 같다. 후세의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길에 관해서는 흡사 옛 사람에게 전매권을 점령당해, 후세의 사람은 다만 거간의 일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 이것이 곧 예수와 공자 이후에 성인(聖人)이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일은 후세에 이르러 진보할 수가 없다. 개벽 초기의 덕()과 오늘날의 덕()은 그 성질에서 다름이 없다. 지혜는 곧 그렇지 않다. 옛날 사람이 하나를 알면 오늘날 사람은 100을 알고, 옛날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의 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그것을 경시하고, 옛날 사람이 괴이쩍게 여기는 바의 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빙긋이 웃고, 지혜의 항목이 날로 증가하여 그 발명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일일이 셀 겨를이 없고, 차후의 진보도 역시 헤아릴 수 없다. 가령 옛날의 성인(聖人)으로 하여금 현대에 살도록 하여, 오늘날의 경제와 상업에 대한 설명을 듣게 하고, 혹은 현대의 증기선에 태워 대양을 파도를 건너고, 전신으로 만 리(萬里) 떨어진 곳의 새로운 소식을 순간에 듣도록 하는 등의 일이 있다면, 이것에 낙담하는 것은 물론 논할 필요도 없다. 혹은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 반드시 증기와 전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종이를 만들어 글자를 쓰는 법을 가르치고, 혹은 목판조각 기술을 보이는 것도 더욱 이들을 탄복케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증기, 전신, 제지, 인쇄술은 모두 후세 사람들의 지혜로써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이 발명과 궁리를 하는 동안에 성인(聖人)의 말을 듣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길을 실제로 실천한 일이 없고, 옛날의 성인(聖人)은 꿈에도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논하면 고대의 성현은 오늘날의 세 살배기 아이와 같은 것이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와 관련된 일은 형체로서 가르칠 수 없다. 이것을 배워서 얻는 것과 얻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 마음의 노력에 달렸다. 비유건대 경서(經書)에 쓰인 극기복례(克己復礼)라는 네 글자를 보여 그 글자의 뜻을 알게 하는 것도, 물론 아직 도()를 전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네 글자의 의미를 더욱 상세하게 하여, 극기(克己)라는 것은 자신의 사욕을 억제하는 것이고, 복례(復礼)라는 것은 자신의 본심으로 돌아가 분수를 아는 것이라고, 공손하게 반복하여 이것을 설득해야 한다. 교사의 역할은 오직 이것까지이고, 달리 도()를 전하는 방법이 없다. 이 이상은 사람마다의 노력이어서, 혹은 옛 사람의 글을 읽고 혹은 현대인의 언행을 듣고 보아서 그 덕행을 따를 뿐이다. 이른바 이심전심(以心伝心)이라는 것이어서, 혹은 이것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감화라고 한다. 감화는 본디 형태가 없는 것이므로, 그 이것에 감화하는 것과 감화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시험할 방법이 없다. 혹은 실제로 사욕을 마음대로 내면서 자신에게는 사욕을 억제한다고 생각하고, 혹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분수를 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도저히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을 배우는 사람의 마음의 노력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극기복례(克己復礼)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에 크게 계몽되는 자도 있고, 혹은 크게 오해하는 자도 있고, 혹은 이것을 멸시하는 자도 있고, 혹은 이것을 양해하는 것도 오히려 겉모양을 가장하여 사람을 속이는 자도 있다. 그 내용이 천태만상이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가령 이 가르침을 명시하는 자에게서도, 겉모양을 꾸며 사람을 속이든가, 혹은 이것을 오해하여 이것을 믿어, 진정한 극기복례가 아닌 것을 옳다고 하여 의심하지 않는 자가 있을 때는, 옆에서 이것을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규칙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혹은 이 사람에게 고하여 하늘을 무서워하라고 말하고, 혹은 스스로 마음에 물으라고 말하는 것 외에, 수단이 있을 수 없다. 하늘을 무서워하고 마음에 묻는 것은 한 몸 안의 일이어서, 진실로 하늘을 무서워하는 것도 거짓으로 하늘을 무서워하는 것도 남의 눈으로써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것이 곧 세상에 가짜 군자인 자가 생기는 이유이다. 가짜 군자가 심하기에 이르러서는, 비단 도덕적인 일을 듣고 그 의미를 해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교설을 주장하고, 혹은 경서(經書)의 주해를 저술하고, 혹은 하늘의 길과 종교의 일을 논하여, 그 논의가 아무튼 순수하여서, 그 저서만을 취하여 읽으면 후세에 또 한 명의 성인(聖人)을 출현시킨 것과 같은 존재가 있더라도, 물러서서 그 사람의 사적인 것에 관하여 보면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실제로 놀랄만하고, 판단의 어리석음이 실제로 웃을만하다. 한퇴지(韓退之: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가 불교 사리에 관한 표문을 상소하여 천자에게 간한 것은 아무튼 충신답고, 조주(潮州)에 좌천당한 때에는 시 등을 지어 충정에서 나온 분노의 기운을 흘리면서, 그 후, 먼 지방에서 서울의 권세가문에 편지를 보내, 더럽게 재차 벼슬길을 탄원한 것은, 이것이야말로 가짜 군자의 장본인이리니. 이런 부류를 열거하면 옛날과 현대의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서양에서도 한퇴지의 부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첨(교언영색: 巧言令色), 돈을 탐하는 자는 논어를 강독하는 자 안에 있다. 무지한 자를 기만하고 약소한 자를 위협하여 명성과 이익을 아우르면서 모두 취하려는 자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서양인 안에 있다. 이런 소인배는, 형태가 없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시험의 규칙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문으로 출입하여 잠시라도 밀매행위를 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작용으로써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서경[書経]에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구별이 있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워 서경[書経]도 함께 실종되고, 한나라가 흥하여 문제[文帝] 때에 제남[済南]의 노학자 복승[伏勝]이 충분히 29편을 암기하여 전한 것을 금문[今文]이라고 하고, 그 후 공자의 고택을 허물어 벽안에서 고서를 얻어 고문[古文]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므로 지금의 서경[書経] 58편 안에 금문[今文] 29편과 고문[古文] 29편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글을 비교하는 데 완전히 그 양식을 달리하여, 금문[今文]은 어렵고, 고문[古文]은 평이하여, 그 문장의 의미와 어조가, 명백히 두 가지 모양으로 구분되어, 몇 명의 눈으로 보아도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전에 이루어진 동일한 책 가운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드시 그 하나는 위작임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벽속의 고문[古文]이 세상에 유행했던 것은 진[] 시대이어서, 그 이전, 한대[漢代]에 책 가운데 일편진서[一篇秦誓]라 하여 여러 유교학자들이 인용하였던 것을, [] 시대에 가짜진서[위진서: 偽秦誓]라 지칭하여 폐지한 일이 있다. 어느 것도 서경[書経]의 유래는 불분명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믿음이 더욱더 굳어져서, 오로지 이것을 성인[聖人]의 저서로 하여, 채침[蔡沈]이 서경집전[書経集伝]의 서문에서도, 성인[聖人]의 마음을 책에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건대 채침[蔡沈]의 뜻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등의 구별을 논하지 않아도, 책 가운데 기록한 바, 성인[聖人]의 취지에 맞기 때문이라 하여 이것을 성인[聖人]의 저서라고 간주한 것이려니 할지라도,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안에, 그 한 가지 글은 후세부터 성인[聖人]의 뜻에 영합하여 조작한 문장이기에, 이것을 가짜 성인의 저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운데 가짜 군자가 많은 것은 물론, 혹은 가짜 성인[聖人]을 탄생시켜 가짜 성인[聖人]의 저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다.지혜는 즉 그렇지 않다. 세상에 지혜의 분량이 풍족하면, 가르치지 않고도 서로 이것을 배우고, 스스로 사람을 변화시켜 지혜의 영역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 더욱 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감화와 다르지 않다할지라도, 지혜의 힘은 반드시 감화에만 의하여 그 작용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그것을 배우는 데 형체로 하여금 명확하게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덧셈과 뺄셈과 곱셈과 나눗셈의 방식을 배우면, 곧바로 덧셈과 뺄셈과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있다. 물을 끓게 하여 증기로 되게 할 수 있는 이치를 듣고, 기관을 제작하여 이 증기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교습하면, 곧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다. 이미 이것을 만들면 그 효능은와트가 만든 기관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형체가 있는 지혜 교육이라고 한다. 그 가르침에 형체가 있으면 이것을 시험하는 데도 형체가 있는 규칙이 있다. 그러므로 지혜의 방법을 사람에게 전수받았다할지라도, 이것을 실제로 실시하는 것에 관하여 여전히 불안한 마음의 항목이 있으면, 이것을 실제로 시험할 수 있다. 이것을 시험하여 아직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실제로 수행하는 순서를 가르칠 수 있다. 어느 것도 모두 형체로써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없다. 비유건대 여기에 수학교사가 있을 것이다. 12를 등분하여 6을 얻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이것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느냐 수행하지 못하느냐를 시험하는 것에는, 12개의 구슬을 주어 이것을 둘로 나누도록 하여, 분명히 그 방법을 얻느냐와 얻지 못하느냐를 증명할 수 있다. 학생이 만약 오해하여 이 구슬들을 둘로 나누어 84가 되면, 아직 방법을 얻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럴 때는 다시 재차 설명하여 이것을 시험하여, 이번에는 12개의 구슬을 등분하여 66으로 할 수 있으면, 1단계의 교습은 끝나고, 그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뛰어남은 교사와 다른 것이 아니고, 흡사 천지간에 두 명의 교사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그 교습이 신속하여 시험이 명백한 것은 실제로 눈과 귀로써 보고 들을 수 있다. 항해술을 시험하는 것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도록 할 수 있고, 상술을 시험하는 것에는 물건을 매매하도록 하여 그 손익을 볼 수 있고, 의술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환자의 완치와 치료되지 못함을 보고 알 수 있고, 경제학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집의 빈부로써 증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 증거를 보고 그 방법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규명하는 것, 이것을 지혜로운 방법 및 유형의 시험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혜의 일에 관해서는 겉모양을 꾸며 세상을 속이는 방법이 없다. ()이 없는 자는 꾸며서 덕()이 있는 자의 겉모습을 보일 수 있다할지라도, 어리석은 자는 꾸며서 지혜로운 자의 흉내를 낼 수 없다. 이것이 곧 세상에 가짜 군자는 많고 가짜 지혜로운 자가 적은 이유이다. 혹은 저 경제가가 천하의 경제를 논하되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항해자가 논의는 뛰어나더라도 배에 타는 일이 능숙하지 않은 부류는, 세상에 그 사례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은 소위 가짜 지혜로운 자와 비슷하더라도, 결국 세상의 물정에 있어서 논의와 실제가 서로 다를 수 있는 이유가 없다. 다만 도덕적인 일에 관해서는 이 논의와 실제의 서로 다름을 분명하게 할 규칙이 없을 따름이다. 지혜의 범위에 관해서는, 가령 이 가짜 지혜로운 자를 탄생시키는 것도 여전히 그 진위를 규명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러므로 항해자가 배에 타는 것을 터득할 수 없고, 경제가가 살림살이에 서툰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아직 진짜 기량을 알지 못하는 자이거나, 또는 특별히 그 배울 수 있는 기량을 방해하는 원인이 있어 그런 것이다. 비유건대 경제가가 사치를 좋아하고, 항해자가 신체 허약하여 그 기량이 뛰어나도 이것을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부류를 말한다.그리고, 그 기량이라고 하고 또 이것을 방해하는 바의 원인이라고 하고, 모두 이 형체가 있는 일이므로, 그 상황을 규명하여, 진실로 그 기량을 얻은 자인지, 그렇지 않은 자인지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그 진위를 증명하는 때는, 또 옆에서 논의하여 이것을 가르치는 법도 있을 수 있고, 혹은 스스로 궁리하여 타인에게 배우는 길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지혜의 세계에서는 가짜 지혜로운 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위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형체로써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형체로써 진위를 규명할 수 없고, 다만 형체가 없는 기회에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지혜는 형체로써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형체로써 진위를 증명할 수 있고, 또 형체가 없는 기회에서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 마음의 노력에 따라서 진퇴하는 것이다. 비유건대 여기에 두 명의 소년이 있어, 시골지방에서 태어나 천성이 근면하고 정직한 것, 두 사람은 전혀 차이가 없는 사람, 상업이든, 또는 학문을 위해 도회지로 나가, 그 초기에는 스스로 친구를 선택하여 사귀고, 스승을 선택하여 배우고, 도시의 인정이 경박한 것을 보고 몰래 탄식하는 정도의 일이 있지만,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경과하는 사이에, 그 한 명은 종래의 시골 정신을 바꾸어 도시 안의 부질없는 사치를 배워 결국 방탕과 불량한 짓에 빠져 일생 몸을 망치고, 다른 한 명은 그러지 않고 더욱 몸을 닦아 그 품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아서 전혀 시골의 본심을 잃지 않아서, 두 사람의 덕행은 갑자기 하늘과 땅 차이가 되는 일이 있다. 그 사실은 오늘날 도쿄에 있는 학생을 보고도 알 수 있다. 만약 이 두 명의 소년으로 하여금 고향에 있도록 했다면, 두 사람 모두 근면하고 정직한 인물이서, 세월을 지내는 데 따라 유덕한 늙은 어른이 되었음이 당연하여, 중년에서 한 사람은 덕()보다 부덕(不德)에 빠지고, 다른 한 사람은 충분히 몸을 보전한 자이다. 이제 그런 이유를 찾는 데, 두 사람은 서로 천성이 다른 것이 아니고, 또 그 사귀는 사람들도 같아서 배우는 것도 같으므로, 교육의 좋고 나쁨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덕행이 서로 동떨어진 것이 이와 같은 것은 왜인가? 그 한 사람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갑자기 내용을 바꾸어 퇴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옛것을 지켜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어서, 외부 물체의 작용에 강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마음이 노력하는 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이 없고 차이가 있어, 하나는 퇴보하고 다른 하나는 진보한 증거이다. 또 소년 때부터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해쳐 악업에 이르지 않는 바가 없고, 친척과 친구를 사귀는 것도 실패하고, 거의 세상에 몸을 수용할 수 있는 지위가 없는 데 다다른 자도, 일단 활연히 마음가짐을 고쳐, 전일의 비행을 참회하고 장래의 화복을 숙고하여, 근신하고 공부하여 반생을 마치는 자가 있다. 그 생애의 심중을 보면 분명히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 한 생애에 정말로 두 생애에 하는 일을 하여, 흡사 복숭아나무 바탕에 매화 싹을 접목하여, 어른 나무가 된 후에는 다만 매화만을 보고 그 뿌리가 복숭아나무인 것을 구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시험적으로 세상에 관하여 그 실제 증거를 구하면, 옛날의 노름꾼이 지금의 염불하는 자가 되고, 유명한 악한이 신용 있는 장사꾼이 된 부류는 드물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마음씨를 고친 것이 아니라, 전념의 노력에 의하여 마음을 바꾼 것이다. 옛날 구마가이 나오자네(熊谷直実)가 아츠모리(敦盛)를 토벌하고 부처에게 귀의하고, 혹은 사냥꾼이 새끼를 밴 원숭이를 쏘아 평생, 사냥을 그만두었다고 하는 것도 이런 부류일 것이다. 구마가이(熊谷)도 부처에게 귀의하여 곧 염불하는 행자가 되었으니 옛날의 사나운 무사가 아니고, 사냥꾼도 총포를 버리고 쟁기를 선택하여 곧, 기특한 농부여서 예전의 살인자가 아니다. 사나운 무사에서 염불하는 행자로 변하고, 살인자에서 농부로 변모한 일은, 타인의 교습을 필요하지 않는 전념의 노력으로써 순간에 실행할 수 있다. ()과 부덕(不徳)의 사이에 조금의 간격도 없는 것이다. 지혜에 관한 일에 이르러서는 크게 그 취지를 달리했다. 사람의 탄생은 무지하고, 배우지 않으면 진보할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를 사람이 없는 산에 버렸다면, 다행히 죽지는 않아도 그 지혜는 거의 금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혹은 꾀꼬리가 집을 짓는 것과 같은 뛰어난 재주는, 배우지 않은 인간이 평생 연구하여 할 수 없다. 사람의 지혜는 다만 가르침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가르치면 그 진보하는 일도 역시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이미 진보하면 또 퇴보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두 소년의 천성이 서로 같으면, 이것을 가르쳐 역시 함께 진보할 수 있다. 혹은 쌍방의 진보에 더딤과 빠름이 있는 것은, 그 천성이 서로 다르거나, 그 가르침의 방식이 같지 않거나, 혹은 두 사람의 근면함과 태만함이 한 가지 모양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어도 전념하여 노력하는 것으로써 갑자기 지혜를 여는 재주가 있을 수 없다. 어제의 노름꾼이 오늘의 염불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할지라도, 사람의 지혜와 어리석음은 외부의 물체와 접촉하지 않고 하루 사이에 변화할 수 없다. 또 작년의 근면하고 정직한 학생이 금년의 방탕아로 변하여 그 근면하고 정직한 흔적을 본다하여도, 사람이 이미 얻은 지혜는 건망증에 걸리지 않으면 이것을 잃어버릴 일이 없다. 맹자는 호연지기라고 하고, 송나라의 유학자의 주장에는 일단 활연(豁然: 돌연히 깨달음)하여 통하는 것이라 하고, 선가(禅家: 선종)에서는 오도(悟道: 도를 깨우침)라고 하는 것이 있어도, 모두 이 형체가 없는 마음에 형체가 없는 것을 연구하는 것뿐이어서 그 실적을 볼 수 없다. 지혜의 영역에 있어서는, 일단 활연(豁然: 돌연히 깨달음)하여 이것을 이해하여, 그 효능이 왕성한 것, 저 호연지기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아담 스미스가 경제론을 주창한 것도, 침묵하며 홀로 앉아, 일단 활연(豁然: 돌연히 깨달음)하여 오도(悟道: 도를 깨우침)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형체가 있는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그 업적이 점차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달마대사로 하여금 면벽하여 90년이 되도록 하여도 증기와 전신의 발명은 있을 수 없다. 지금의 유학자(儒學者) 부류로 하여금 일본과 중국의 경서(経書) 만권을 읽게 하여, 형체가 없는 은혜와 위엄으로써 하층민을 제어하는 묘법을 궁리하도록 하여도, 현재의 세상에 행하여지는 정치와 경제의 문에는 갑자기 도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말하는 바, 지혜는 배워서 진보할 수 있고, 배우지 않으면 진보할 수 없으며, 이미 배워서 지혜를 얻으면 또 후퇴한 일이 있을 수 없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가르치기 어렵고 또 배우기도 어려워, 혹시 전념하여 노력하여 갑자기 진퇴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덕행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만사의 근본, 인간이 해야 하는 일, ()에 근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없고, 한 몸의 덕()을 닦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그러므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가르치지 않을 수 없고, 배우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만사 방치하여도 지장은 없고, 먼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닦고 그런 후에 도모할 수 있고, 세상에 덕()의 가르침이 없는 것은 더욱 어두운 밤에 등불을 잃는 것과 같아서, 사물의 방향을 볼 수 없고, 서양의 문명도 덕()의 가르침이 초래하는 바이고, 아시아가 반개(半開) 상태인 것도 아프리카가 야만 상태인 것도, 그 원인은 다만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닦는 깊이와 얕음에 따르는 것이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더욱 추위와 따뜻함과 같고 문명은 더욱 온도계와 같아서, 이에 증감이 있으면 홀연히 그에 응하여, 1도의 덕()이 올라갈 때는 1도의 문명을 진척시키는 것이다하여, 사람의 부덕(不徳)을 슬퍼하고 사람이 착하지 못함을 우려하여, 혹은 기독교를 들어올 수 있게 한다고 하고, 혹은 신도(神道)가 쇠락한 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혹은 불교의 법(仏法)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하고, 유교학자에게도 주장이 있고, 국학자(国学者)에게도 논리가 있어, 서로 다른 주장과 논쟁이 구구하고 시끄럽고, 그 슬퍼하고 우려하고 탄식하는 상황이, 흡사 물과 불이 막 집을 삼키려는 것을 당하는 것과 같다. 왜 그것의 당황스러움이 심한가? 내 눈에는 스스로 또 달리 보는 바가 있다. 대체로 사물의 극단을 도출하는 것에 의하여 논의를 중단을 결정할 수는 없다. 지금 선하지 못하고 덕()이 없다하여 극단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정하여, 다만 그 한 편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본디 매우 급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한 쪽이 부족할 뿐임을 보충한다 해서 지금까지 인간의 일을 완벽하게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 저 손으로써 직접 입에 도달하는 음식을 얻는 것도 인간 생계를 이룩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사물의 극단을 보고 논의를 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하면, 덕행(德行)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무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지금 덕()을 가르치기만 함으로써 문명의 근본으로 하고, 세계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기독교 성경을 읽도록 하고, 이것을 읽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어찌되는가? 선종(禪宗: 선가: 禅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도의 진리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지 문자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가르침을 번성하게 하여, 천하의 사람들이 문자를 잊는 데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고사기(古事記)5(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을 암송하여 충절과 몸을 수양하는(충의수신: 忠義脩身) 도를 배우면서 입에 풀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문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을 버리고 고생을 감내하여 인간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개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길가에 석상이 있어, 세 마리의 원숭이를 조각해서, 하나는 눈을 가리고, 다른 하나는 귀를 가리고, 나머지 하나는 입을 가렸다. 생각건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는 비유이어서, 인내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표시한 것이리라. 이 취지에 따르면, 사람의 귀와 눈과 입은 부덕(不徳)의 매체여서, 하늘이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그것에 부여하는 것에 부덕(不徳)의 도구로써 하는 것과 같다. 귀와 눈과 입을 해롭다고 하면 손과 발도 역시 재앙의 수단이리라. 그러므로 장님과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아직 완벽하게 선량한 사람이 아니고, 겸하여 사지의 움직임도 빼앗는 것이 상책이다. 혹은 이 불구의 생명체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 인류가 없도록 하면 상책의 으뜸일 것이다. 이것을 천지의 약속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조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을 염두에 두고,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도의 진리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지 문자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충절과 몸을 수양하는(충의수신: 忠義脩身)의 길을 존중하여, 다섯 가지 감각과 육체의 욕망을 떠난 자는, 도덕적 가르침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 자는 가령 무지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악인이라 하여 탓할 이유는 없다. 무지를 탓하는 것은 지혜의 일이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가 관련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논하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해서는 사사로운 덕()이 결여된 자를 보고 일반적으로 이것을 악인으로 하고, 가르침의 목적은 다만 세상에서 이 악인을 줄이는 한 가지 일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할지라도 충분히 넓게 사람 마음의 작용을 살펴서 그 흔적에 나타나는 바를 상세히 하면, 이 악인을 줄이는 한 가지 일로써 문명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 시골사람과 도시사람을 비교하여 사사로운 덕()의 양을 재면, 어떤 방향에 많은지를 명확하게 결정하기 어려워도, 세상의 일반적인 여론에 따르면 우선 시골 풍속을 질박(質朴)하다고 좋아할 것이다. 가령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시골의 도덕적 풍속을 얄팍하다 하고 도시의 풍속은 두텁다고 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상고시대와 근세를 비교하고, 어린이와 어른을 비교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런데 그 문명이 어떤지를 논할 때는, 도시는 문명이라고 하고 근세는 문명이 진보했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렇다면 곧 문명은 다만 악인의 많고 적음으로써 그 진퇴를 점칠 수 없다. 문명의 근본은 사사로운 덕()이라는 한 방향에 있지 않는 것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할지라도, 저 덕행(德行)에 유식한 자는 처음부터 논의의 극단에 멈추어, 사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한 방향에 치우쳐, 문명의 광대함을 알지 못하고, 문명의 잡다함을 알지 못하고, 그 작용을 알지 못하고, 그 진보함을 알지 못하고, 사람 마음의 다단함을 알지 못하고, 그 지혜와 덕()에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의 구별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이 서로 억제함을 알지 못하고, 서로 고르게 함을 알지 못하고, 전체 사물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전체 국면의 득실을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다만 한결같이 한 쪽으로 이 세상의 악인을 줄이고자 하는 것을 바라서, 그 폐해가 마침내 현재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희(伏犠: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와 소호(少昊: 중국 전설상의 임금) 이상의 국민과 같이 되게 하고, 도시로 하여금 시골과 같이 하고, 어른으로 하여금 어린이와 같게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돌로 만든 원숭이와 같이 되도록 하겠다는 좁은 소견에 빠진 것이다. 결국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의 가르침이라도 그 본래의 취지는 이와 같이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 것이 물론이라 할지라도, 다만 어쩔 것이냐, 세간의 일반적인 기풍에서 그 가르침을 전하고 또 받는 때에 사람 마음에 감동하는 바의 결과를 보면, 결국 이 하잘것없는 폐해를 피할 수 없다. 그 분위기를 묘사하여 말하면, 위산과다 환자 중에서 심한 자는, 어떤 음식을 주어도 전부 시어져서 영양분의 효과를 이룰 수 없는 것과 같다. 음식의 죄가 아니라, 고질이 일으키는 바이다. 학자들은 이것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저 지식인이 심하게 세상의 부덕(不德)을 우려하는 연유를 찾는 데,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악한 자라고 생각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취지일 것이다. 그 노파심은 진실로 존경할 수 있다할지라도, 세상 사람을 죄업이 깊은 범부(凡夫: 보통사람)라고 일컫는 것은, 소위 자리를 보고 말하는 방편일 뿐, 기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인류는 생애동안에, 열심히 나쁜 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과 오늘날의 세상 가운데 있어 어떤 선인(善人)에게서도 반드시 악행이 없음을 보증할 수 없고, 어떤 악인에서도 역시 반드시 선행 없음을 기대할 수 없다. 사람 생애의 행적을 평균하면, 선악이 서로 섞여 선()의 방향이 많을 것이리라. 선행이 많으면 세상의 문명도 차츰 진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행은 모두 교육의 힘에만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유혹하여 악에 빠뜨리려고 해도, 그 계략이 반드시 백발백중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곧 이 계략을 뒤집어 선()에 이용하는 것도 역시, 반드시 사람을 인도하여 선()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결국 사람 마음의 선악은 사람마다의 노력에 달려 있을 따름이어서, 옆에서 자유자재로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고대인에도 선한 사람이 있고, 지혜의 힘이 발생하지 않는 어린이에도 정직한 아이가 많은 것을 보면, 사람의 본성은 평균적으로 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 교육의 큰 취지는 그 선()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는 것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가족과 친구 사이에 선()을 촉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천성에 없는 것을 옆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한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본인이 노력하여 자기의 선()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인위적인 교육만으로써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소위 덕행이라는 것은 본장의 처음에도 기록한 것과 같이 다만 수동적인 사사로운 덕()이어서, 결국은 한 몸의 사욕을 떠나, 재산을 사랑하지 않고 명예를 탐하지 않으며, 도둑질하는 일이 없고 속이는 일도 없고, 맑은 마음을 결백하게 하여 성실을 위해서는 하나의 생명도 내팽개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면, 곧 인내심이다. 인내의 마음은, 본디 죄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저 탐욕과 인색과 속임수와 도둑질의 대악무도의 부덕(不德)과 비교하면 비교될 수 없다할지라도, 사람의 품행에 관하여 이 인내하는 선한 마음과 이 부덕한 악한 마음과의 사이에는 천태만상의 작용이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앞의 문단에서 지혜와 덕행의 항목을 네 가지로 나누었어도, 그 세목을 열거하면 대체로 한계가 있을 수 없다. 흡사 선악을 심한 더위와 심한 추위라는 양 극단으로 삼아, 그 사이에는 봄도 있고 가을도 있어 조금 더운 것도 있고 추워지는 것도 있어, 냉온의 온도에 한계가 없는 것과 같다. 혹시 인류로 하여금 그 천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하면, 심한 추위와 같은 악한 마음은 처음부터 이미 벗어나 먼 상류에 있을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도둑질과 사기를 치는 마음이 없다고 하여 어찌 이것을 미덕이라 하기에 충분한가? 도둑질하지 않고 사기 치지 않는 것 등의 항목은 인류의 품행에 계산하여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저 탐욕과 인색과 사기행각과 도둑질 대악무도함이 있으면,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음을 내부에 포장하면 세간의 경멸을 받고, 그 소행을 외형에 드러낼 때는 사회관련 법으로써 처벌할 수 있다. 어느 것도 인과응보의 절차는 명확해서, 악을 징치하는 도구, 외부에서 준비되고, 선행을 권하는 계기는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부지런히 사사로운 덕()의 한 방향을 가르쳐, 만물의 영장인 인류로 하여금 겨우 이 비인간적인 부덕(不德)을 면하도록 하는 것을 힘쓰고, 이것을 면하는 것으로써 인생 최고의 약속으로 삼아, 이 가르침만을 베풀어 한 세대를 농락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평생 타고난 지혜의 힘을 위축시키는 것은, 필경 사람을 멸시하고 사람을 제압하여 그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마음에 제압을 받으면 마음을 신장시키는 것이 매우 쉽지 않다. 저 정토진종(浄土真宗) 신도들은 스스로 인정하여 범부(凡夫: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라고 칭하여, 다른 힘에 의지하여 극락왕생을 구하여,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을 염불하여 나무아미타불 6자를 외우는 것 외에, 도무지 생각하는 것이 없다. 한학자가 공자와 맹자의 도()에 심취하여 경서를 반복해서 읽는 것 외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국학자가 신도(神道)를 믿어 옛 서적에 천착하는 것 외에 생각이 없고, 서양을 연구하는 학자가 기독교를 좋아하여 매일 새로운 학문을 망각하여, 한 권의바이블을 읽는 것 외에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모두 정토진종(浄土真宗)의 부류이다. 본디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서도, 그 믿는 바를 믿어 한 몸 내부를 수양하여 스스로 사회적 행위를 아름답게 하는 효능은 세상에 이바지하는 한 가지 조항이기에, 결단코 이것을 쓸모없다고 탓할 이유가 없다. 비유건대 문명이 하는 일을 지혜와 덕행이라는 한 가지 부담으로 삼아, 사람마다 이 부담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가르침을 믿어 한 몸의 덕()을 닦는 것은 곧 부담 한편을 짊어지는 것이어서, 한편의 책임을 면했다할지라도, 다만 그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뿐이어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하지 않은 죄는 피하기 어렵다. 그 정황은 흡사 뇌를 가지고 있되 신경이 없는 것과 같고, 머리를 온전히 하고 팔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결국 인류의 본분을 달성하고 그 천성을 온전히 한 자가 아닌 것이다.

위와 같이 사사로운 덕()은 타인의 힘으로써 용이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충분히 그것을 만드는 것도 지혜에 의지하지 않으면 구실을 할 수 없다. ()은 지혜에 의존하고, 지혜는 덕()에 의존하고, 지혜가 없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덕()이 없는 것과 동일하다. 다음에서 그 증거를 제시하겠다. 지금의 학자, 기독교를 편리하다고 하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를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종교에 옳고 그름의 구별이 있는가? 그 옳고 그름은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바,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본서의 취지가 아니므로 잠깐 글을 멈추고, 그 민심에 느끼는 바의 효능에 관하여 논할 때는, 기독교도 역시 반드시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다. 유럽의 선교사가 동양의 여러 섬 및 기타 야만스러운 지방에 와서, 그 원주민을 개종시켰다는 사례는 옛날부터 적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원주민은 예전과 같은 원주민이어서, 그 문명의 상황은 본래 유럽과 비교할 수 없다. 부부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발가벗은 원주민이 교회에 군집하여, 일처다부 사이에 태어난 그 자식에게, 기독교의 세례를 행하는 것도 다만 그 개종의 의식일 뿐이다. 혹은 그 지방에 문명의 단초를 열어 진보를 향하는 것도 드물게 있다할지라도, 그 문명은 틀림없이 선교사가 교습한 문학과 기술이 함께 나아갈 뿐이어서, 다만 종교라는 한 가지 일에만 의하여 발생하는 결과가 아니다. 종교는 표면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또 한편에서 보면,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에서 키워진 일본 사람들에게서도, 다만 문명의 이름을 부여할 수 없을 뿐, 그 마음씨에 이르러서는 모두 악인이라고 할 수 없고, 정직한 자도 역시 매우 많다. 이 내용을 보면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의 도(), 틀림없이 무력하고, 기독교만 홀로 유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곧 무엇으로써 기독교를 문명에 편리하다고 하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의 도()는 당장 쓸모가 없다고 하는가? 학자의 생각은 전후가 맞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그 논의에 의하여 생기는 근본을 찾아, 그 의견이 있는 곳을 분석해서 찾는 데, 기독교는 문명국에서 퍼져서 문명과 같이 양립할 수 있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는 비문명국에 퍼져서 문명과 함께 양립할 수 없는 이유로, 후자(後者)를 쓸모없다하고 전자(前者)를 편리하다고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할지라도 그 퍼지는 것과 퍼지지 않는 원인은,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 힘의 강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본질을 치장하여 희망을 증가시킬 수 있는 지혜의 작용에 잘하고 못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개 모두 문명의 은혜를 입은 자이어서, 특별히 그 선교사와 같은 것은 오직 성경만을 읽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학교 교육을 받아 문학과 기술을 습득한 인물이기에, 지난해는 선교사가 되어 먼 나라에 여행한 자도, 올해는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법률관련 직업을 열심히 할 수 있고, 오늘은 교회에 머물면서 설교할 수 있는 것도 내일은 학교에 가서 교사가 될 수 있으며, 법과 세속을 겸비하여 법 교육과 함께 학문과 기예를 가르쳐 사람을 지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이유로, 문명과 양립하여 상충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종교를 경멸하지 않은 것은 다만 그 종교의 10계명만을 믿는 것이 아니고, 선교사의 언행 스스로 쓸모없지 않아서 오늘날의 문명에 적합하기 때문에 이것에 귀의하는 것이다 (10계가 인터넷 본에는 十戎로 표시되어 있고,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十誡로 표시되어 있어 이와나미 문고본의 표현이 옳고 인터넷본의 표현 의 오기로 보인다: 역자). 이제 만약 기독교 선교사로 하여금 배우지 못하고 기술이 없는 우리 산속 절의 주지승과 같게 한다면, 설령 그 품행이 올바른 성인(聖人)과 같이 되는 것도, 신구약성서를 암송하여 아침저녁으로 읊어도, 문명의 높은 학자에게서 누가 이 종교를 믿는 자가 있을 것인가? 우연히 그것을 믿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사람은 시골노파, 염주를 만지며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패거리일 뿐이다. 이 패거리의 눈으로써 보면 예수도 공자도 석가도 이세신궁(伊勢神宮)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합장하고 절하는 사람은 여우도 너구리도 모두 신()이요 부처이다. 의미도 모르고 독경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어떤 공적을 이룰 수 있는가? 결코 문명의 공적을 이룰 수 없다. 이 문명화되지 않아서 암흑인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강제로 기독교를 가르치려 하고, 타이르고 설득하고, 심지어는 돈을 주어 이끌어 들여, 점차 기독교에 귀의하는 자가 생기는 데에 이르는 것도, 사실은 다만 불도(佛道) 안에 예수라고 부르는 하나의 파벌을 세운 것과 같은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은 결코 지식인이 평소에 지닌 뜻이 아니다. 지식인은 반드시 박학다재한 기독교 선교사를 받아들여, 종교와 함께 그 문학과 기술을 배우고, 그로써 우리 문명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견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기술은 지혜가 하는 일이다. 지혜가 하는 일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기독교 선교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에게서 배울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곧, 저 기독교를 편리하다고 하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를 당장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지식인의 소견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본디 기독교 선교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만 있는 자라면 기독교 선교사에게서도 평범한 교사에게서도 좋고 나쁨의 차별이 없다. 다만 박학다재하고 몸이 올바른 사람을 좋아할 따름이다. 만약 천하에 기독교 선교사를 제외하는 것 외에는 올바른 인물이 없다고 한다면, 본디 이 교사에만 의하여 어떤 일도 교습할 수 있다할지라도, 기독교파가 반드시 올바른 사람이 독점하는 장소가 아니고, 넓게 세계에서는 스스로 박학하고 정직한 군자가 있을 것이다. 이를 선택하는 것은 사람마다의 평가에 맡길 수 있을 뿐이다. 왜 오로지 기독교의 명분에 구애될 이유가 있을까? 어느 쪽도 종교의 실체에 편리함과 불편함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이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에 의하여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인터넷 본에는 지혜<智恵>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지우<智愚: 지혜와 어리석음>로 표현되어 이와나미 문고본에 따라서 해석함. 역자). 예수의 가르침도 석가의 가르침도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어리석은 사람의 쓸모가 될 뿐이다. 지금의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도 지금의 신관(神官)과 승려와 유학자 무리의 손에 있어 지금의 국민을 가르치면, 당연히 쓸모없고, 만약 이 무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크게 배우는 일이 있도록 하여, 문학과 기술로써 그 가르침을 치장하고, 문명인의 귀를 빌려 이것을 설명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 가르침에 백배의 가치를 늘려, 혹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부러워하는 것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을 비유하면 가르침은 오히려 칼과 같고, 가르침을 시행되는 나라의 국민은 더욱 장인(匠人)과 같다. 날카로운 칼이 있다할지라도 서투른 장인의 손에 있으면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한다. 덕행도 문명화되지 못한 국민을 만나면 문명의 쓸모가 되지 못한다. 저 덕행에 통달한 자는 장인(匠人)의 잘하고 못함을 오해하여 칼의 예리함과 무딤을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말하는 바, 사사로운 덕()은 지혜에 의하여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지혜는 사사로운 덕()을 인도하여 그 효능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지혜와 덕행 모두 구비되지 않으면 세상의 문명은 기대할 수 없다.

새롭게 종교를 도입하는 득실을 논하는 것은 본장의 취지가 아니라도, 논의 순서가 여기에 이르렀기에, 덧붙여 조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물건을 구하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이거나 또는 부족한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항목의 구하는 것이 있어, 어느 것인가 전후완급을 정하는 것은, 우선 내가 소유한 상황을 고려하여, 전혀 나에게 없는 것인지, 또는 두 가지 중, 제일 부족한 것을 살펴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하나를 구하고 다른 하나를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필요하여도, 이것을 구하는 데 전후완급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다. 문명은 일개 국민의 지혜와 덕행을 밖에 드러내는 현상이라는 것은 앞서 이미 논했다. 그런데 일본의 문명이 서양 여러 나라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곧 일본이 아직 문명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그 국민의 지혜와 덕행에 부족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어서, 이 문명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에는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에 대한 두 항목의 요구이다. 그러므로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는 널리 일본국 가운데를 전망하여 이 두 가지의 분량을 헤아려, 어느 것이 많고 어느 것이 적은지를 살피지 않으면, 그 요구의 전후완급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다. 어떤 어리석은 자라할지라도, 일본 전체의 국민을 평가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부족하여도 지혜는 넘친다고 하는 바는 없을 것이다. 그 증거가 될 수 있는 항목은 매우 많고 또 명확해서 헤아릴 겨를이 없고, 또 헤아리는 것에도 미치지 않은 정도의 것이라도, 만약을 위해 한, 두 가지 사례를 들겠다. 대체로 일본에서 시행되어 온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 교육은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이고, 서양에서 시행되어 온 것은 기독교이다. 기독교 및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가 주장하는 바는 같지 않다할지라도, 그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는 큰 취지에 이르러서는 서로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비유건대 일본에서 흰 눈은 서양에서도 희고, 서양에서 검은 숯은 일본에서도 검은 것과 같다. 또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는 동양과 서양의 학자가 빈번히 자기들의 가르침을 주장하고, 혹은 그 책을 저술하고 혹은 다른 주장을 반박하여 논쟁을 그치는 일이 없다. 이 논쟁의 내용을 보아도 역시 그것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가르침에 큰 우열이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무릇 사물의 역량은 대개 서로 대적하지 않으면 논쟁은 일어날 수 없다. 소와 고양이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하고, 씨름꾼과 어린이가 싸웠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힘이, 백중한 사이에 있는 것이다. 저 기독교는 서양인의 지혜로써 닦고 꾸며서 유지한 종교라서, 그 정교하고 세밀한 것 도저히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가 미치는 바가 아닐지라할지라도, 서양의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빈번히 그 가르침을 주장하여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를 배척하여 자신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 학자가 미흡하나마 주장을 세워 그것에 적대하고자 하여, 아무튼 싸움과 논쟁의 체재를 갖춘 것은 왜인가? 서양의 종교가 반드시 소와 씨름꾼 같지 않고, 일본의 종교가 반드시 고양이와 어린이 같지 않아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 틀림없이 백중지세에 있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편이 백(: 맏이)이고 어느 편이 중(: 둘째)인지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할지라도, 우리 일본인도 상응하는 종교를 신봉하여 그 덕()의 가르침에 은혜를 입은 자라면, 사사로운 덕()의 두터움과 얕음을 논할 때는, 서양인에 비하여 백(: 맏이)이 아니라도 반드시 중(: 둘째)이다. 혹은 종교의 논의 관련하지 않고 사실에 관하여 보면, (: 맏이)인 자는 오히려 문명화되지 않은 일본인 안에 많은 것도 되리라. 그러므로 덕()의 분량은 가령 우리나라에 부족함이 있는 것도 초미의 긴급사항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지혜에 관한 것은 완전히 이것과 다르다. 일본인의 지혜와 서양인의 지혜를 비교하면, 문학과 기술과 상업과 공업, 최대에서 최소에 이르기까지, 하나에서 헤아려 백에 이르러서도 또 천에 이르러서도, 하나도 저쪽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저쪽에 적대하는 자가 없고, 저쪽에 적대하고자 기도하는 자도 없다. 천하에 지극히 어리석지 않다는 것 외에 우리의 학술과 상공업으로써 서양 여러 나라에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생각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누가 큰 수레로써 증기차에 비교하고, 일본도로써 소총에 비교하는 자가 있을까? 우리에게 음양오행설을 주장하면, 저쪽에는 60 원소의 발명이 있다. 우리가 천문으로써 길흉을 점친 것에, 저쪽은 이미 혜성의 역()을 작성하여 태양과 달의 실제내용을 음미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평지에 거주했다고 셈하는 것에, 저쪽은 둥글고 움직이는 물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우리나라로써 지존의 신국(神國)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쪽은 이미 세계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영토를 개척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시행령과 상법이 정비된 것은 오히려 우리보다 훌륭한 것이 많다. 이것들의 제반 사항에 이르는 것은, 지금의 일본의 형편에서 결코 서양을 향하여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일본인이 자랑하는 것은 다만 자연적인 물산이 아니라면 산수(山水)의 풍경뿐, 사람이 제조한 물건에서는 전혀 그것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나에게 싸우고자 하는 뜻이 없으면 저쪽도 역시 싸우지 않는다. 외국인은 충분히 자국의 일에 붙여 자부하는 자들이지만, 아직 증기차의 편리를 이야기하여 큰 수레의 불편을 논박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결국 피차의 지혜가 다른 것은 소와 고양이 같은 것이어서 서로 싸움의 단서를 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것을 보면, 방금 우리나라가 매우 급하게 구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학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이것을 밝히리라. 시골에 인물이 있고, 옛 번()의 무사라고 한다. ()을 폐지하기 전에 녹봉 2, 3백석을 받고, 주군을 섬기고 충성, 부모에게 봉사하여 효도, 부부의 구별이 있고, 장유유서가 있고, 빌린 돈은 반드시 갚고, 사교상의 의리를 반드시 성실히 지키고, 한 점의 불의를 저지른 일이 없다. 하물며 사기와 도둑질에 관해서야! 혹은 위력으로써 농부와 상인을 압제한 일이 있어도, 본디 신분상 당연하여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 집은 극도로 검약, 몸은 극도로 노력,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주, 검과 창을 쓰는 기술,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문자를 알지 못할 따름이다. 지금 이 사람을 위하여 계획하는 것에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을 줄까, 아니면 지식을 줄까? 시험 삼아 이 사람을 덕()으로 이끌어, 별안간 기독교의 10계명을 보여주는 일이 있으면, 4계명까지 각 조항은 태어나서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혹시 그것을 들을 수 있다할지라도, 5계명이하에 이르러서는 이 사람이 반드시 말하여, 나는 부모를 공경하였고, 나는 사람을 죽일 의도가 없어, 어떻게 음란한 짓을 하겠는가, 어떻게 도둑질을 하겠는가 하고, 하나하나 항변하여 쉽게 승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본디 기독교는 이 10계명의 본문으로써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도 스스로 공경하는 법이 있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에도 스스로 죽이지 않는 취지가 있고, 음행을 하지 않는 것에도 뜻이 있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도 뜻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정성껏 반복하여 충분히 그 취지를 다하여, 마침내는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다할지라도, 아무튼 덕행의 일에 관해서는, 이 무사의 평소 품행에 있어서, 적어도 초보적인 소양이 있는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에서 그 지혜에 관하여 얻은 바를 시험하는 데, 몸 전체가 흡사 공허한 것 같다. 다섯 가지색깔의 구별은 겨우 할지라도 자연의 일곱 가지 색깔의 이치는 본디 알지 못하고, 추위와 더위에 관한 인사는 말해도 온도계의 상승과 하강의 이치를 모르고, 식사 때는 잘못 알지 않더라도 시계의 용법을 이해하는 일에 능하지 못하고, 고향의 밖에 일본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일본 밖에 외국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어찌 내부의 형세를 알 것이고, 어찌 외부의 외교를 알 것이고, 옛 풍속을 그리워하여 옛 법을 고수하고, 한 가정이 흡사 일 개의 작은 하늘과 땅이어서, 그 분별력이 미치는 바는 다만 가족 내부에 국한되어, 집밖에 나가는 것이 겨우 한 걸음이어서 세계만방 모두 캄캄한 것과 같다. ()을 폐지하는 한 가지 행동으로써 이 작은 하늘과 땅을 뒤엎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만 어찌 할 바를 모를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을 평하면 우직하다고 하는 것 외에 상태를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우직한 국민은 다만 옛 무사족속에만 한하지 않고 세간에 그런 부류는 매우 많다. 사람들이 널리 아는 바에서, 학자도 정부도 함께 염려하는 바의 것이다. 그런데, 저 덕행에 관한 지식인은 여전히 이 어리석은 백성을 설득하여 기독교를 전파하여 그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이 분주하여, 그 지혜의 유무는 버리고 묻지 않는가? 지식인의 눈에는 다만 어리석고 정직하지 않은 자만을 보는 일이 될 수 있다할지라도, 세간에는 어리석으면서 정직한 자도 역시 매우 많다. 지식인은 이것을 향해 어떤 조치를 취하려는가? 정직으로 하여금 더욱 정직하게 하고, 그 어리석음으로 하여금 더욱 어리석게 하기를 바라는가? 물건을 구하는 데 전후완급의 분별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의 옛 학문이 항상 당장 쓸모가 없다고 매도하지 않는가? 이것을 매도하는 것은 왜인가? 사실은 지혜의 작동이 없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리라. 다른 사람을 나무라며 스스로 전철을 밟고, 스스로 건축하여 스스로 허물어, 미혹이 심하다.

종교는 문명이 진보하는 때에 따라 그 취지를 바꾸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기독교가 일어난 초기는 로마시대이다. 로마의 문물이 번성하였다하더라도, 오늘날의 문명으로써 보면 대체로 무지하고 야만스러운 세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그 시대에서는 오직 허망한 망설을 주장하여, 바로 당시의 사람의 지혜에 맞추고,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일이 없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도 없이, 수백 년 간, 세상과 서로 변해서 점점 사람의 믿음을 얻어, 그 즈음에 스스로 일종의 권력을 얻어 오히려 사람들의 생각을 제압하여, 그 정상, 흡사 폭력정부의 전제로써 국민을 괴롭히는 것과 같았지만, 사람의 지혜가 발생하는 힘은 큰 강의 흐름과 같아서, 막으려 하다가 오히려 충돌하고, 종교의 권력은 일시에 그 명성을 떨어뜨리는 데 이르렀다. 곧 기원 1500년대에 시작된 종교개혁이, 이것이다. 이 개혁은 로마의 천주교를 배제하고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종파를 일으킨 것이어서, 여기서부터 양 종파가, 무리를 달리하여 서로 대치한다고 할지라도, 오늘날의 세력에서는 신교 쪽이, 차츰 권력을 얻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이 양 종파는 원래 동일한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 믿는 바의 목적도 쌍방 모두 다른 것이 없다할지라도, 신교가 번성한 이유는, 종교의식을 간단하게 고쳐, 옛 관습의 허망한 망설을 반성하여 바로 근세의 사람의 정서에 부응하여, 그 지식이 진보하는 상황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구교는 농후(濃厚)하여 어리석고 바보 같음에 가깝고, 신교는 담백(淡白)하여 활발한 차이가 있다. 세상의 물정과 문물의 고금의 차이를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의 인터넷 본 원문은 世情人古今相違したるものと인데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世情人文古今相違したるものと로 되어서 자가 추가되어 있다. 이와나미 문고본에 따라서 번역하였다. 역자).

위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유럽의 각국에서 문명이 앞선 것은 반드시 신교에 따르고, 뒤진 것은 반드시 구교를 신봉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비유컨대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의 국민은 거짓말에 빠진 자가 많아서, 프랑스인이 영민하고 활발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바 크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은 문명국이 아니고 프랑스는 문명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프랑스는 옛 천주교를 믿고,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은 신교인프로테스탄트에 귀의했다. 이 취지를 보고 생각하면, 천주교도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 종교의 방식을 고쳐서 스스로 프랑스인의 품성에 맞춘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인은 종교를 도외시하여 돌아보지 않는 것일 터이다. 신교도 스코틀랜드와 스웨덴 양국에 있어서는 그 특성을 바꾸어 스스로 국민의 어리석음에 적응한 것이리라. 요컨대 종교는 문명의 정도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옛날 산속의 종교 또는 천태종과 진언종과 같은 것은 오로지 불가사의를 주장하고, 혹은 물과 불이 인연을 맺는다고 하고, 혹은 가지기도(加持祈禱: 부처의 힘으로 재난을 면하려는 기도)의 묘법을 닦는다고 하고, 그로써 사람을 현혹하여, 옛 국민은 이 거짓말을 신앙하도록 한 일이 있었지만, 헤이안(平安)시대에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일어나기에 이르러서는 불가사의를 말하는 일이 적고, 그 종교의 방식이 대체로 간소하고 담백함을 위주로 하여 역시 헤이안(平安)시대의 문물에 적응하여, 마침내 여러 종파를 압도하여 홀로 권력을 독점했다. 세상의 문명은 점진적으로 진보하기에 종교도 반드시 간소함을 좇아, 점점 도리에 토대를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증거이다. 가령 오늘날에 홍법대사(弘法大師: 헤이안시대 진언종[眞言宗]의 개조 구카이[空海] 스님)를 환생시켜, 그 옛 사람을 현혹시키는 바의 불가사의를 주장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메이지(明治) 연간의 사람들에는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국민은 정말로 오늘날의 종교에 적응하고, 종교도 국민에게 만족하고, 국민도 종교에 만족하여, 서로 불평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일본의 문명이 지금보다 점차 진보하고, 지금의 정토진종(淨土眞宗)도 허망하다고 하여 혐오하기에 이르면, 필히 또 별도의 정토진종(淨土眞宗)을 낳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서양에서 믿는 종교를 그대로 채택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종교라는 것은 도외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학자의 힘을 모두 쏟아도 정부의 권력을 사용하여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적인 추세에 맡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책을 저술하여 종교의 옳고 그름과 바르고 사악함을 논하여, 법을 세워 종교의 가르침을 지배하고자하는 것은, 천하의 최고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있는 선량한 사람이 반드시 선()을 행하지 않고, ()이 없는 악인이 반드시 악()하지 않다. 옛날 서양 여러 나라에서 종교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였던 사례는 역사를 보고 알 수 있다. 그 최고로 심한 것은퍼시큐션[persecution]: 종교박해이라 하여, 자기가 믿는 바의 종교와 다른 사람을 뒤쫓아 살육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프랑스 및 스페인에 있어서 그 사례가 최고로 많다. 유명한 바솔로뮤살육에서는, 8일간에 죄 없는 국민 5천명을 죽였다고 한다. 사건은 서양사정 2편 프랑스의 역사에 있다.그 참혹하기는 사태의 한계가 없어도, 살육을 저지른 본인이 보면, 본래 한 가지 마음이 오로지 종교를 믿어, 믿음이라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둘러보아 거리끼는 바가 없고, 소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이다. 이 선량한 사람이 이 큰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왜인가? 사사로운 덕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총명한 지혜가 결여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권력을 맡겨, 그로 하여금 믿는 바가 생기게 하면, 어떤 큰 악행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없다. 세상을 위하여 최대로 두려운 요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여러 나라의 문물이 점차 번성하는 데 이르러, 오늘날에는 이미 퍼시큐션[persecution]: 종교박해이라는 사건을 있음을 듣지 못한다. 이것은 고금의 종교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앞서고 뒤짐에 의하여 그런 것이다. 동일하게 이 예수의 종교인 것에, 옛날에는 이 종교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지금은 이 종교로써 사람을 구원한다고 함을 왜인가? 사람의 지혜와 어리석음에 관하여 그 원인을 구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빛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보호하여 악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 근자에는 우리 일본에서도, 미토 번(水戸 藩) 안에서 정당(正党)과 간당(姦党)이라는 것이 있다. 그 유래는 지금 이곳에서 논하는 데 이르지 못할지라도, 결국, 충의(忠義)라는 두 글자를 논쟁하여 무리를 나누는 것이어서, 그 상황은 종교론과 다르지 않다. ()이라고 하고 간()이라고 하는 것도 그 글자에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스스로 칭하여 정()이라고 남을 평가하여 간()이라고 이름을 붙일 따름이다. 양 패거리 모두 충의(忠義)의 일을 저질러, 그 한 사람의 언행에 관하여 보면, 가슴속의 항아리 같은 진심을 품은 자들이 많다. 그 가짜 군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이 패거리가 일을 그르칠 때를 맞아 항상 침착하여 죽음에 대하여 당황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세에 논의 때문에 무고한 백성을 많이 죽인 것은 미토 번(水戸 藩) 안을 최고로 한다. 이것 역시 선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른 한 가지 사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난세 이후를 계승하여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며, 고난을 꺼리지 않아 마침내 300년 태평시대를 열어, 천하를 태산 같은 평안함에 올려놓았다고 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업적의 훌륭함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다. 실제로 아시카가(足利)의 말기, 국내의 분란의 시대를 맞아, 오다(織田)와 도요토미(豊臣)의 업적도 아직 그 기초를 다지는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에야스(家康)가 없었다면 어떤 시대가 태평을 기약할 수 있는가? 실제로 이에야스(家康)300년간 태평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한 몸에 (인터넷 본에는 一心로 되어있어 한 마음에라는 의미이나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一身로 되어 있어서 한 몸에로 해석함. 역자) 관하여 그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살피면, 사람에게 부끄러울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특히 그 태합(太閤)의 유언을 배신하고 오사카(大阪)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없이, 특히 부탁을 받았던 히데요리(秀頼)를 보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방탕함과 어리석음과 허약함을 부추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제거해야 하는 것을 제거하지 않아서 후일 오사카(大阪)를 함락시키는 중개자로 남긴 것과 같은 것은, 간계가 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한 가지 조항에 관해서는 이에야스(家康)의 몸에는 한 점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덕으로써 300년의 태평을 열어 서민을 도탄에서 구한 것은 기이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 외에 요리토모(頼朝)에게서도 노부나가(信長)에게서도, 한 몸의 품행을 논하면 잔인과 박정과 사기와 번복 미워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모두 한 때의 전쟁을 멈추고 국민의 살육을 줄인 것은 무엇인가? 악인도 반드시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필경 이 무리의 영웅은, 혹시 사사로운 덕행에 결점이 있다할지라도, 총명과 예지의 작동으로써 선행의 큰일을 이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점의 흠집을 보고 전체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논하는 바를 요약하여 말하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은 한 사람의 품행에서 그 효능이 미치는 바가 좁고, 지혜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빨라서 그 미치는 바가 넓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한 일은 개벽의 초부터 이미 정해져서 진보할 수 없고, 지혜의 작동은 매일 진보하여 제한이 없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유형의 기술로써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고,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람마다의 생각에 달려있고, 지혜는 이것과 반대로 사람의 지혜를 규명하는 데 시험하는 방법이 있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갑자기 진퇴하는 일이 있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번 이것을 얻어서 잃는 법이 없고, 지혜는 서로 의지하여 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고, 선량한 사람도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있고 악인도 선행을 행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대체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사람에게 전수하는 것에 관해서는 유형의 수단이 없고, 충고가 미치는 바는 겨우 친척과 친구 사이뿐이라 할지라도, 그 교화가 도달하는 영역은 매우 넓다. 만 리 밖에서 출판된 저서를 보고 크게 깨닫는 일이 있고, 옛 사람의 언행을 듣고 스스로 생각을 작동시켜 마침내 한 몸의 마음자세를 고친 자가 있다. 백이(伯夷)의 풍모를 듣고 일어선다고 함은 이것이다. 적어도 사람으로서 세상을 해치려는 뜻이 없다면 한 몸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고, 바로 이것은 인류인 사람이 스스로 맡아야 하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의무이다. 자신의 나쁜 생각을 방지하는 것에는, 용사가 적을 향해 싸우는 것과 같고, 폭군이 백성을 억압하여 괴롭히듯이 하고, 선행을 보고 취하는 것은 수전노가 돈을 탐해 만족하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이 하고, 이미 한 몸을 닦아 또 충분히 한 가정을 교화하여, 더욱 여력이 있으면 곧 널리 타인에게 미치게 하여 설명하고 권유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덕행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여, 한 걸음에서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영역을 넓히는 것을 힘써야 한다. 이것 역시 인간의 한 가지 과업이어서, 문명을 돕는 효능은 본디 매우 크기 때문에, 세상에 선교사 무리가 있어 도덕적인 일을 권유하는 것은 진실로 바람직할 수 있는 것이라도, 다만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한편으로써 세상 한 가운데를 농락하고자 하여, 혹은 심하기에 이르는 것은 덕행의 가르침 가운데 한 파벌을 주장하여 다른 교파를 배척하여, 한 파벌로써 세상의 덕행 교육을 힘으로 빼앗고 겸하여 또 지혜의 영역도 침범하여, 흡사 인간의 의무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는 한 가지 일에 멈추어 덕행 교육의 일이 또 그 내부의 한 개 파벌에 국한하는 것과 같이 하여,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여 자유를 얻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무위(無爲)와 무지에 빠뜨려 실제 문명을 해치는 것과 같은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수동적인 사사로운 덕행으로써 세상의 문명을 돕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그 덕택을 입도록 하려는 일이 있은 것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비유건대 내 땅 안에 집을 지어 때때로 옆집의 담장이 된 것과 같다. 이웃사람을 위해서는 매우 편리하다고 할지라도, 원래 내 집을 짓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지 이웃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연한 편리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사로운 덕행을 닦는 것도 원래 한 몸을 위하여 하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해 덕행을 닦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사람이 거짓 군자이어서, 덕행 실천가가 혐오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본분은 한 몸을 닦는 데 놓여있다. 그것을 닦아 문명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일이 있는 것은 우연적인 아름다운 일일 뿐이다. 우연적인 사건에 의거하여 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커다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겨우 한 몸의 뒤처리를 하려고 해서, 아직 사람다운 직분을 끝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시험적으로 묻노니, 덕행을 실천하는 군자여, 매일 먹고 입는 바의 물건은 어디서 나오는가? 조물주의 은혜가 매우 크다 할지라도, 의복은 산에서 생기지 않고, 음식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하물며 세상의 문명이 점차 진보하면 그 편리함, 다만 의복과 음식뿐만 아니라, 증기기관과 전신의 이익도 있고, 법령과 상업의 편리함이 있는 것에 있어서야! 모두 이 지혜의 하사품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평등권의 취지에 따르면, 앉아서 타인의 하사품을 받을 이치가 있을 수 없다. 만약 덕행을 실천하는 군자로 하여금 표주박처럼 하여, 잘 매달려 먹는 일이 없으면 곧 그만이리라 (유덕한 군자가 매달려만 있어 먹을 수 없는 표주박과 같은 것이 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적어도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증기기관과 전신의 이점을 이용하여, 법령과 상업의 편리함을 편리함으로 하는 것이라면, 역시 그 임무에 맡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육체의 편리는 이미 풍부하고 한 몸의 사사로운 덕행은 이미 부끄러울 것 없다고 하여도, 아직 이 형편에 머물러 안주할 이유가 없다. 그 풍부하다고 하는 것,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겨우 오늘날의 문명에 있어서 만족스러울 뿐, 아직 그 최고점에 이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정신이 발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지의 시작에는 법칙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무한한 정신으로 하여금 정해진 이치를 규명하고, 마침내는 유형과 무형의 구별이 없이, 천지간의 사물 모두를 인간의 정신 속에 포함시켜 누락된 것이 없기에 이를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왜 또 구구한 지혜와 덕행을 구별하여 그 경계선을 다투는 데 만족하리. 흡사 사람과 하늘이 양립하는 형국이다. 천하 후세에 반드시 그날이 있을 것이다.

 

巻之三

 

第六章 智徳

 

 

 前章までの議論には智徳二字熟語文明進歩世人一般智徳発生するものなりとの次第たれども今此一章てはとを区別して其趣なる

 とは徳義ふことにて西洋にてモラル。「モラルとは行儀ふことなり一人こころよくして屋漏をくろうざるものなりとは智徳ふことにて西洋にてインテレクト事物事物事物合点するなり又此徳義にも智恵にも各二様ありて第一貞実潔白謙遜律儀等一心するものを私徳第二廉恥公平正中勇強等外物して人間交際上はるゝ公徳又第三めてずるの私智第四人事軽重大小分別軽小にして重大にし其時節場所とをするの公智私智或工夫小智ふもなり公智或聡明大智ふもなりして此四者にて重要なるものは第四条大智なり聡明叡知あらざれば私徳私智公徳公智らず公私相戻相害することもあるより此四箇条げてじたるものなしとども学者議論にても俗間常談にてもよく其意吟味すればして此区別あるを孟子惻隠羞悪辞譲是非人心四端なりるときはするがよくれば四海たざれば父母つかふるにらずとあり私徳公徳るのならん又智慧ありとどもずるにかず鎡基じき鋤鍬ありとどもつにかずとあり(『孟子公孫上一)。時勢緩急私智公智すのならん又俗間世間推出して申分なき人物公用向には最上なれども一身行状ては言語道断なりとふことあり仏蘭西宰相リセリウなり公智公徳欠点なくして私徳しきのなり又某囲碁象棋十露盤勿論何事にても工夫上手なれども所謂碁智恵算勘にて兎角無分別なる人物なりとふことあり私智ありて公智なきをするなり智徳四様区別学者俗間のものなれば普通区別はざるを此区別めて其働ずること

 へる聡明叡知あらざれば私智公智すをへば囲碁闘牌カルタ)、弄椀珠シナダマ技芸工夫なり窮理器械等亦人工夫にしてしく精神するのなれども其事柄軽重大小して重大従事世間すれば其智恵なりと又自から其事ださゞるも事物利害得失することアダム・スミス経済ずるがくしてから天下人心一般富有くすることあるは智恵れるものとれにも小智より大智るには聡明叡知なかるらざるなり又士君子口吻天下洒掃さいさうすれども庭前みるにらずなどゝて治国平天下めて所得あれども一身一家ることはざるあり一心一向律儀戸外らずしきはしてするなきありれも皆聡明しくして事物関係大小軽重ずるはずして脩徳釣合したるものなりれば聡明叡知智徳支配するものなるが徳義ずるときは大徳ふもなりとども天下一般人心字義りにればらずの由縁あり古来我国人心徳義するものは一人私徳のみにしたる文字にて其考するに古書温良恭謙譲無為にしてると聖人なしと君子盛徳なるがしと仁者山野如しとふなど是等本旨結局はるゝよりもするものを徳義るのみにて西洋にてへば、「パッシとてよりくにはずしてして受身姿唯私心放解するの一事要領すが経書ずるに其所説悉皆受身のみをずるに活潑妙処もあるがくなれども如何せん書中全体気風にて其人心ずるれば唯堪忍卑屈るにぎず其他神仏とても脩徳一段ては大同小異のみ此教せられたる我国人民なれば一般人心るときはくして所謂聡明叡知等此字義含有することなし文字趣意くには学者めたる字義はらずして天下衆人其衆心意味るを確実なりとすへば舟遊山文字字義せば不都合なれども世間一般にては此文字ぶと含有することなし亦斯学者流せば其意味甚しとども世人らず世俗にて無欲なる山寺老僧れば高徳なる上人尊崇すとども窮理経済理論等学問ずる人物あれば徳行君子はずして才子又智者すること必定なり又古今人物大事業あれば英雄豪傑として称誉するとども其人徳義する唯私徳一事るのみにて公徳きものは徳義条目へずしてるゝことあるが世人にてきこと其心から智徳四様区別らざるにざれどもとしてはるが又時としてはらざるが結局天下一般気風せられて其重んずる私徳一方したるものならん余輩此天下一般人心字義れば聡明叡知智恵条目中げて徳義するものは其字義領分くして唯受身私徳らざるをざるなり第六七章悉皆この趣意ひたるものなれば其議論智恵徳義とを比較してくしてくして偏執なるがくなれども学者若趣意了解せばふことなかる

 未開有様私徳主張して人民亦其風くは我国のみに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国民精神未発生せずして禽獣ることからざるの時代ては其粗野残刻挙動制馭して一身緩和人類放心めしむるにはしければ人間交際入組たる関係てはるにあらず猶衣食住ても開闢には所謂手以するものにて家屋衣装るにあらざるがるに文明次第めば人事亦繁多私徳一器械人間世界支配きの々あるらずとども古来習慣人生懶惰天賦とにふてんじ一方して平均ふたることなりより其私徳条目万世へてらず世界中通用して異同あるらず単一にしてなるものなれば後世より改正らざるは無論なりとども沿革るに場所これをるの工夫せざるらずへばるは万古同様なれども手以するの一法ありしもの後世れば飲食にも千種万様方術あるがこれをへば私徳人心けるは耳目鼻口人身けるがより其有用無用きにあればれなかるらず耳目鼻口有無議論片輪者住居する世界はるきことなれども片輪以上地位れば亦喋々のすにらず神儒仏なり又耶蘇教なりれも上古不文片輪時代へたるなれば其時代必用なるはよりたず後世今日るまでも世界中人口片輪なるければ徳義亦決して等閑にしがため々たらざるらざるのもあらん。《儒者神仏一向一心下流民間ては緊要なるなりへば智力未発生せざる小児無智無術なる愚民して一概徳義などは人間のさまできものにずとはゞして誤解じてしむ智恵しと心得其智恵又誤解して美徳てゝ奸智むるの人間交際覆滅するのなきにざれば此輩ては徳義々のなかるらずとども誠心一向私徳人類本分世間万事支配せんとするがきは其弊亦極きものなり場所時節とを勘弁して其向高尚せざるらず。》 りとども文明本旨多事むにるものなれば上世無事単一んずらずとしてるに手以するのとせず我身耳目鼻口するもるにらざるをらば私徳一方るも人事したるにざるの明白なる文明人事繁多なるを人事繁多なればずる亦繁多ならざるらず私徳一品万事きものとせば婦人徳行満足するもなしとらず支那日本にて風俗正しき婦人温良恭謙へて言忠信行篤敬よく家事するのあるらしからずとども此婦人世間公務らざるはぞや人間事務するには私徳のみをらざるのなり結局余輩所見私徳人生細行としてざるにはざれども古来我国人ずるこの一方して議論本位るをまざるなり私徳無用なりとしてるにはざれどもるの又大切なる智徳あるとのさんとするのみ

 智恵徳義とは両断して各其一方支配するものなればれをしとれをしとすのなし二者兼備するにざれば十全人類らずるに古来学者ずるれば徳義一方主張して事実其誤なるにては智恵無用なりとするなきに弊害なれども此弊害弁論するに困難ありとなれば智恵徳義との区別じて旧弊めんとするには此二者分界にし其功用所在すことなれば思想浅るときは其議論んじてんじ徳義領分すものなりとて不平もあらん其議論看過して徳義人間無用なりとて誤解するもあるければなり文明のために智徳入用なるは猶人身ふに菜穀魚肉ながららざるが今智徳功用して智恵等閑にすらざるをずるは不養生なる菜食家肉食るにならず肉食るには功能菜穀弊害菜肉共ひてながら相戻らざるのにせざるらずるに此菜食家なる其片言じてじて菜穀じて魚肉のみをはんとすることあらばしきなり誤解はざるをずるに古今識者智徳らざるにざれどもこの誤解弊害れてはざることならんりとどもはざれば際限あるらず何事にても道理にさへふことなれば十人十人悉皆誤解するものに誤解あるも尚云はざるにれり誤解りて智見ぐのなし畢竟世人誤解れて議論をもさんとし其議論ふて曖昧んとし所謂坐その雰囲気せることらすは同類々を蔑視するの挙動世人愚なりとども黒白ずるものなり同類人間しき智愚はあるらずるに我心其誤解臆度して真面目げざるは敬愛するにずや君子らざることなりとするのものあらば丸出しにすことなく其可否判断してなり是即余輩智徳差別ずる由縁なり

 徳義一人るものにてすための脩身慎独皆外物関係なきものなりへば無欲正直徳義なれども誹謗世間悪評りて無欲正直なるるものはこれを無欲正直らず悪評誹謗とはなり外物のためにくものは徳義らずしこれを徳義といはゞ一時事情にて世間めをるゝをるときは貪欲不正ふも徳義げなかるきは偽君子真君子との区別はあるらず徳義とは一切外物変化はらず世間譏誉ることなく威武することはず貧賎ふことはず確乎不抜するものをふなり智恵なり外物して其利害得失ふて不便利なれば便利なりとふも衆人これを不便利なりとへばすなはこれを一度便利りたるものも又便利なるものあればらざるらずへば馬車駕籠よりも便利なれども蒸気力きをれば又蒸気車らざるらず此馬車工夫蒸気車発明其利害してるものは智恵なり外物して臨機応変以処置すものなれば其趣全徳義相反してはざるを有徳君子黙坐するもこれを悪人らずとども智者若無為にして外物することなくばこれを愚者るもなり

 徳義一人ひにて其功能一家主人行状正直なれば家内者自から正直父母言行温順なれば子供から温順親類朋友しとども(『孟子離婁下三一)、結局忠告くの領分所謂毎戸らず毎人らずとは此事なり智恵らず一度物理発明してこれをれば一国人心かし其発明なるにては一人よく全世界一変することあり。「ゼイムス・ワット蒸気機関工夫して世界中工業これがために其趣一変、「アダム・スミス経済定則発明して世界中商売これがために面目めりこれをるやてしてす一度其言其書あれば其人しくワットスミスならず昨日愚者今日智者りて世界中幾千万ワットスミス其伝習にして其行はるゝ領分きは一人徳義家族朋友忠告するの或人云、「トウマス・クラルクソン一心売奴悪法、「ジョン・ホワルドJohn Howard〉」勉強獄屋弊風一掃したるは徳義なれば其功徳所亦洪大無量はざるをずと此二士私徳公徳其功徳洪大無量ならしめたるものなり二士すに千辛万苦らずして工夫らしして世間人心かしによく其大業したるは私徳所謂聡明叡知きものなり二士功業大なりとども人心徳義一方ればしてふよりならず今爰仁人ありて孺子じゆしるをはんがためにふも、「ジョン・ホワルド数万ふてしたるも其惻隠比較すれば深浅あるらず唯彼一孺子のためにし数万人のためにし一時功徳万代功徳すの相違あるのみすの一段てはとの徳義軽重あることなし其数万万代功業したるは、「ホワルド聡明叡知其私徳功徳したるものなり此仁人私徳して公徳公智しきなり、「ホワルド公私両ながらするなりへば私徳地金聡明智恵細工地金細工さゞれば唯重くしてきのみのなれどもしく細工してせばとの功能あり又少しく工夫らして小刀せば小刀功能あり尚其細工にすれば巨大なるは蒸気機関精細なるは時計弾機ばねとなる今世間にて大釜蒸気機関とを比較せば機関功能なりとしてばざるあらんこれをぶはぞや大釜機関地金なるに唯其細工ぶなり器械其地金ずるときは機関小刀しく一様なれども此諸品しきとの区別ずるは細工すの多少あればなり智徳釣合ひも亦斯孺子はんとしたる仁人ジョン・ホワルド其徳行地金るときは軽重大小なしとども、「ホワルド此徳行細工して其功能盛大したるものなりして其細工したるものは智恵なればホワルド為人ひとゝなりして唯徳行君子とのみらず智徳兼備して其聡明智力古今したる人物このをして智力なからしめなば一生蠢爾しゆんじとして一冊聖経其徳義てよく妻子することをはこれをざることもある奈何此大事業欧羅巴全州悪風俗くをんや私徳功能智恵徳義智恵其領分其光するものなり

 徳義よりかず耶蘇十誡なるものをれば第一ゴッドありと第二偶像する第三ゴッドふする第四礼拝第五汝父母せよ第六人第七穢れたる言行思想けよ第八貧賎なりとども第九故さらにいつは亦詐第十他人以上十箇条なり孔子五倫とは第一父子親ありとて親子相親しむことなり第二君臣義ありとて旦那家来とのには義理合不実なる挙動あるらずとのことなり第三夫婦別ありとて亭主妻君りなれなれしくして見苦しきらずとのことなり第四長幼序ありとて年若何事差控長老しとのことなり第五朋友信ありとは友達には偽詐らずとのことなり此十誡五倫聖人めたる大綱領にして数千年よりらず数千年より今日るまで盛徳士君子輩出したれどもこの大綱領註解すのみにて一箇条をも増加することなし宋儒盛なりとども五倫じて六倫すを徳義箇条なくして変革らざるの明証なり聖人此箇条ふたるのみならずにもへたることなれば後世人物如何勉励苦心するもして其右きのなしへば聖人しとしとたるが後人これを如何きや徳義ては古人専売められ後世唯仲買すより手段あることなし是即耶蘇孔子聖人なき所以なり徳義後世進歩らず開闢今日其性質異同あることなし智恵らず古人一れば今人古人るゝのものは今人古人のものは今人智恵箇条増加して其発明きは古来枚挙あらず今後進歩亦測らず聖人をして今日らしめ経済商売かしめ蒸気船せて大洋波濤電信万里新聞瞬間かしむるのことあらば落胆するはよりたずはこれをかすにずしも蒸気電信せずしてくの版木彫刻すもこれを敬服せしむるに如何となれば此蒸気電信製紙印書悉皆後人智恵たるものにて此発明工夫すの聖人徳義したることなく聖人にもらざりしことなればなり智恵ずれば古代聖賢三歳童子しきものなり

 徳義らずるとざるとは工夫せりへば経書したる克己復礼四字して其字義らしむるもよりへたりとらず此四字意味尚詳にして克己とは一身私欲することなり復礼とは自分本心立返分限ることなりと丁寧反覆これを説得教師これまでにてるのなし此上唯人々の工夫にて古人今人言行聞見して其徳行きのみ所謂以心伝心なるものにてはこれを徳義風化風化より無形なればこれにするとせざるとにては試験あるらず私欲にしながら自分には私欲したりと分外しながら自分には分限るともあるしとども其思ふとはざるとはきにこれを工夫するのみ克己復礼発明するもあり誤解するもあり蔑視するもあり了解するも外見ふてもあり其趣千状万態にして真偽区別すること仮令ひこの蔑視するにても外見誤解して克己復礼ざるものをとしてはざるあるときはより如何ともすらず此時ては縄墨きものなきゆゑはこれにるにれよとからへとふの手段あるらずふは一身にてるゝもるゝも外人看破是即偽君子なるずる由縁なり偽君子しきにては徳義其意味するのみならず自分にて徳義主張経書註解天道宗教其議論如何にも純精無雑にして其著書のみをめば後世又一聖人出現したるがきものあれども退其人れば言行齟齬すること心匠なること韓退之仏骨天子めたるは如何にも忠臣らしく潮州へんせられたるにはなど忠憤しながら其後遠方より権門手紙きたなくも出仕歎願したるはれこそ偽君子張本なれ此類れば古今支那にも日本にも西洋にも韓退之手下なきに巧言令色論語ずる無智小弱名利せてながららんとする耶蘇正教ずる西洋人此輩小人無形徳義試験縄墨なきを徳義出入して暫時にても密売畢竟徳義らざるの明証なり。《書経今文古文との区別あり秦皇天下書経漢興文帝済南老学生伏勝よく二十九篇暗記してへたるものを今文其後孔子故宅壁中より古書たりとて古文書経五十八篇今文二十九篇古文二十九篇ありるにこの今古比較するに其体裁にし今文難渋古文平易其文意語勢両様ありて何人るも秦火以前はれたる同一書中のものとははれず其一偽作たるをかれざるなり壁中古文はれたるは時代にて其以前漢代書中一篇秦誓とて諸儒引用したるものを偽秦誓けてしたることありれにも書経由来不分明なるものとはざるをされども後世ては信仰益固くして聖人蔡沈書経集伝にも聖人はれたるものなりとへりしむきにずや蔡沈今文古文等区別ぜずとも書中聖人ふがにとて聖書見做したることならんとども今古其一文後世より聖人へて作為したる文章なれば偽聖書はざるをされば偽君子きは勿論偽聖人じて偽聖書をもきものと。》 智恵らず世上智恵分量饒多なればへずしてにこれをからして智恵領域らしむることかの徳義風化ならずとども智恵ずしも風化のみに其働るものに智恵ぶにてして其痕跡加減乗除べば加減乗除沸騰せしめて蒸気きの機関して此蒸気力るの伝習すれば蒸気機関れば其功用ワットりし機関ならず有形智教其教あればこれを試験するにも有形規則縄墨あり智恵法術けたりとども実地すことに尚不安心箇条あらば其実地試験試験して実地施行せざるあらば実地施行手順れも皆形らざるものなしへば数学教師あらん十二等分してるの生徒へてこれを実地るやるには十二個へてこれをたしめ其術るとざるとを生徒若てこのとにさばざるものなりるときは説弁して此度びは十二等分してとにするをれば此一段伝習りて其学たるなるは教師なることなく天地二人教師じたるが其伝習にして試験明白なるは耳目聞見航海るにはらしむ商売るには売買せしめて其損益医術巧拙病人治不治経済学巧拙貧富証拠其術たるととを智術有形試験法智恵ては外見世間くのなし不徳者ふて有徳者外見しとども愚者ふて智者真似らず是即偽君子多くして偽智者少なき由縁なりはかの経済家天下経済じて一家世帯つのらず航海者議論なれどもることはざるの世間其例少なからず是等所謂偽智者なるものにたれども畢竟世事物議論実際相異なるきのなし唯徳義ては此議論実際との相違にす縄墨しきのみ智恵領分ては仮令此偽智者ずるも尚其真偽手段あり航海者ることはずして経済家世帯なることあらば其人らざる者歟其学たるるの源因ありてるものなり。《へば経済家奢侈航海者身体虚弱にして其術なれども実地すことはざるの。》して其術これを源因皆是有形なれば其有様して其術たる者歟らざる者歟するはきに其真偽するときは又傍より議論してるのもあるから工夫してぶのもある結局智恵世界には偽智者地位さゞるなり徳義らず真偽らず唯無形きのみ智恵真偽又無形

 徳義一心工夫進退するものなりへば二少年あり田舎地方れて天稟謹直なること二人毫差別なき商売歟学問のため都会其初から朋友都会人情軽薄なるを歎息せしのことなりしが半年一年其一人旧来田舎魂じて都下浮華放蕩無頼生涯一人らずして益身其行状終始一なるがくして田舎本心はず二人徳行頓雲壌懸隔することあり其事実今日東京学問生徒ても此二少年をして故郷らしめなば二人共謹直なる人物にて歳月るに有徳老成人たるなるに中年にして一人より不徳一人はよく其身ふせしなり今其然由縁るに二人互天稟なるに又其交同様にしてのことも同様なれば教育良否るものとらずるに其徳行懸隔することきはぞや其一人徳義じて却歩一人其旧はざりしものにて外物強弱あるに一心工夫不動とのありて退たるのなり又少年より遊冶ゆうや放蕩とし悪業至らざるなくして親類朋友をも世間地位なきにりしにても一旦豁然として心術前日悔悟して後来禍福謹慎勉強して半生あり其生涯心事れば前後二段一生にしてしく二生成木後唯梅花のみを其根たるはらざるものゝ世間其実証めなば博徒念仏者有名悪漢手堅町人りたるのしからず此輩皆他人差図心事めたるに一心工夫改心したるものなり在昔熊谷直実敦盛猟師たる生涯めたりとふも此類なる熊谷すれば念仏行者にて荒武者猟師鉄砲ればやさしき百姓にて殺生人荒武者より念仏行者殺生人より百姓るの他人伝習せず一心工夫瞬間不徳とのれざるなり智恵ては其趣にせり無智なりばざればらず初生無人たばにしてせざるも其智恵禽獣なるらずするがなるなき人間一代工夫にては出来ざる智恵唯教るのみれば其進むことも亦際限あるらずめば又退くこともあるらず二人少年天稟相同じければ亦共双方進歩遅速あるものは其天稟相異なる其教授方同じからざる二人勤怠一様ならずしてるものなり何等事情あるも一心工夫くのあるらず昨日博徒今日念仏者しとども智愚外物れずして一日変化らず去年謹直生今年遊冶郎じて其謹直をもずとどもたる智見健忘病症るにざればふことなし孟子浩然宋儒には一旦豁然としてずると禅家には悟道ふことあれども皆是無形無形工夫するのみにて其実跡らず智恵領分ては一旦豁然として其功用なることかの浩然きものあるらず。「ワット蒸気機関発明、「アダム・スミス経済論首唱したるも黙居独坐一旦豁然として悟道したるに積年有形理学研究して其功績漸事実はれたるものなり達磨大師をして面壁九十年ならしむるも蒸気電信発明はあるらず古学者流をして和漢経書万巻ましめ無形恩威下民するの妙法工夫せしむるも方今世界はるゝ治国経済にはらず智恵ばざればらずれば又退くことあるらず徳義又学一心工夫にて進退することあるものなり

 徳行家、「徳義百事大本人間事業らざればきものなし一身ればらざるものなし徳義へざるらずばざるらず人間万事これを放却するもなし徳義めてきなり徳教なきは猶暗夜ふがくして事物方向るになし西洋文明徳教なり亜細亜半開なるも亜非利加野蛮なるも其源因唯徳義るの深浅るものなり徳教猶寒暖文明猶寒暖計増減あれば一度すときは一度文明るものなりとて不徳不善耶蘇しと神道へたるをして仏法持張しと儒者にもあり国学者にもありて異説争論囂がうがう其悲憂歎息有様水火まささんとするにるものゝ狼狽しきや余輩にはから又別あり事物極度持出すとも議論まるらず今不善不徳とて極度有様本位めて唯其一方はんとせばより焦眉たれども此一方のみをへばとて人事ふしたりとらず猶彼手以するのるも人間活計すとらざるが事物極度議論きものとせば徳行亦無力なりとはざるを今徳教のみを文明大本世界中人民をして悉皆耶蘇聖教ましめむの事業なからしめなば如何禅家不立文字にして天下人民文字るゝにらば如何古事記五経諳誦して忠義脩身糊口方法をもらざるあらば文明きや五官情欲艱苦人間世界何者たるをらざるあらば開化きや路傍石像あり三匹彫刻してへりざるざるはざる寓意にて堪忍徳義したるものならん此趣意へば耳目口不徳媒妁にてずるは附与するに不徳てするが耳目口なりとせば手足亦悪事方便たらんゆえに盲聾唖子十全善人四肢をもふこそ上策なれ不具生物るよりも世界人類なからしめなば上策なる造化約束ふか余輩少しくなきをされども耶蘇聖経不立文字忠義脩身五官肉体情欲徳義じてはざるものなりじてはざる仮令無智なりとども悪人としてるのなし無智るは智恵なり徳義極度ずれば徳義ては私徳して悪人目的唯世此悪人なくするの一事るがりとどもよく人心して其事跡はるゝにすれば此悪人なくするの一事文明らざるのあり今田舎土民都会市民とをして私徳ればれのきやしとども世間一般へば田舎風俗質朴なりとしてぶことならん仮令ばざるも田舎徳風しとして都会しとするはなかる上古近世とを子供大人とをするも亦斯るに其文明如何ずるときは都会文明なりと近世文明進歩したりとはざるなし文明唯悪人多少其進退らず文明大本私徳一方らざること明白しとども徳行識者より議論極度まり思想余地さずして一方切迫文明洪大なるをらず文明雑駁なるをらず其働くをらず其進むをらず人心多端なるをらず其知徳公私あるをらず其公私互相制するをらず相平均するをらず事物一体めて其全局得失判断するのらずして唯一心一向此世悪人なくせんことを其弊世界人民をして犠昊伏犠少昊以上くならしめ都会をして田舎くならしめ大人をして小児くならしめ衆生をしてくならしめんとするの陋見りたるものなり必竟神儒仏及耶蘇とても其本旨切迫なるものにざること無論なりとども唯如何せん世間一般気風にて其教これをるの人心ずる結果れば此陋弊かるゝを其趣形容してへば酸敗家しきへは何等飲食ふるも酸敗して滋養せざるが飲食痼疾なり学者これに注意せざるらず

 又彼識者しく不徳由縁るに畢竟世をば悉皆悪しきふてはんとするの趣意なる其婆心しと罪業深凡夫るは所謂坐くの方便のみ其実ずしもらず人類生涯々として悪事のみを古今世界中如何なる善人にても悪行なきをらず如何なる悪人にても亦必善行なきをらず生涯行状平均すれば善悪相混じて方多きものならん善行多ければこそ文明次第たることなれして其善行悉皆教のみにじたるものにれんとして其謀百発百中ならざることあらば此謀にしてゆるもらざるを到底ツマリ善悪々の工夫るものにてより自由自在与奪きものに行届かざる古代善人あり智力発生せざる子供正直なる者多きをれば平均してなりとはざるを徳教大趣意其善発生げざるにるのみ家族朋友るとは其人天性になきものをより附与するに其善心げるものをくの本人工夫自己らしむるのみ徳義人力のみをきものに工夫発生するものなり且其所謂徳行とは此章にもしたるが唯受身私徳にて其結局一身私慾まずらずむことなくることなく精心潔白にしてのためには一命をもつものをしてふことなれば忍難なり忍難のこころよりなるにをかの貪吝詐盗大悪無道不徳すれば同日らずと品行此忍難善心此不徳悪心とのには尚千種万様あるなり前段智徳箇条四様たれども其細目枚挙せば際限あるらず善悪甚暑甚寒両極して其間にはもありもあり薄暑もあり向寒もありて冷温なきがもし人類をして其天性ふするをせしめなば甚寒悪心よりして上流ずや盗詐あらざればとて美徳とするにらん不盗不詐等箇条人類品行きものに貪吝詐盗大悪無道なるあらばにしてざるなり其心包蔵すれば世間軽蔑其所業外形すときは人間交際れにも因果応報次第にして懲悪はり勧善するものとるに今孜々として私徳一方万物たる人類をして此人非人不徳かれしめんことをかるゝを人生最上約束此教のみをして一世籠絡せんとして人生天稟智力退縮せしむるは畢竟人蔑視圧制して其天然るの挙動はざるを一度圧制ればすことからずかの一向宗からめて凡夫他力依頼して極楽往生一心一向弥陀じて六字名号るの工夫あることなし漢儒者孔孟心酔して経書復読するの工夫なく和学者神道じて古書詮索するの工夫なく洋学者耶蘇日新学問一冊バイブルむの工夫なきがきも皆一向宗なりより此流にても其信ずるじて一身から人間交際にするの功能裨益一箇条なればして無用としてるのなしへば文明事業智徳一荷して此荷物きものとすればじて一身るは其片荷にて一方れたりとども唯其信きをずるのみにてきをかざるの其事情恰して神経なきがふしてふが畢竟人類本分して其天性ふしたるざるなり

 私徳他人容易きものに仮令ひよくるも智恵依頼せざればらず無智徳義無徳しきなり其証さん学者耶蘇宗教便利なりとして神儒仏迀遠なりとするはぞや其教正邪ある其正其邪余輩らざるこれをずるは本書趣意ざれば其民心ずる功能ずるときは耶蘇亦必ずしも有力なるに欧羅巴教化師東洋諸島及其他野蛮地方其土人改宗せしめたるの古来少しとせずるに今日るまで土人依然たる土人にて其文明有様固より欧羅巴比較らず夫婦区別らざる赤裸土人群集して一母衆父れたる其子供耶蘇正教洗礼ふも唯是改宗儀式のみ其地方文明進歩きしものもにこれありとども其文明教師伝習したる文学技芸たるものにて唯宗教一事のみにじたる結果宗教表向儀式きのみ又一方れば神儒仏せられたる日本人民にても唯文明だすらざるのみ其心術ては悉皆これを悪人らず正直なる亦甚此趣れば神儒仏ずしも無力にして耶蘇のみ有力なるに耶蘇文明便利なりとして神儒仏迀遠なりとする学者前後不都合なるにたり今其議論ずる其意見るに耶蘇文明はれて文明並立神儒仏不文はれて文明並立らざるが迀遠なりとして便利なりとひしことならんりとども其行はるゝとはれざる由縁本体強弱あるに其本体ふて光明智恵巧拙あればなり西洋諸国にて耶蘇教ずる大概皆文明したるにて其教師きは唯聖経のみをむに学校文学技芸心得ある人物なれば前年教化師遠国旅行したる今年自国法律今日説法するも明日学校教師法俗兼備して法教学芸智域くがゆゑに文明並立して相戻らざるのみ此教軽蔑せざるは唯其教十戎のみをずるに教師言行自から迀遠ならずして今日文明するがために帰依するなり今若耶蘇教師をして無学無術なること我山寺坊主くならしめなば仮令其行状しくして聖人くなるも新旧約書諳誦して朝夕にこれをるも文明士君子にしてかこのずるあらんやずるあれば其者田夫野嫗やおう)、数珠なで阿弥陀仏ずるのみ此輩れば耶蘇孔子釈迦大神宮区別あるらず合掌してむものは皆神仏なり意味らぬ読経其愚民へてきやして文明らず此不文暗黒愚民中入込みてひて耶蘇聖教へんとししきはへてくこれに帰依するあるにるも其実唯仏法耶蘇一派けたるがきのみきはして識者素志識者博学多才なる耶蘇教師れて宗教其文学技芸我文明せんとするの意見なるされども文学技芸智恵なり智恵るはずしも耶蘇教師らず智恵あるきのみかの耶蘇教便利なりとして神儒仏迀遠なりとしたるは識者了簡違ずや余輩より耶蘇教師むに智恵さへあるなれば耶蘇教師にても尋常教師にても好悪差別あることなし唯博学多才にしてしきぶのみ天下耶蘇教師くのしき人物なきものとすればより此教師のみに何事伝習しとども耶蘇宗門ずしも正者専売場所世界にはから博学正直士君子もあるぶは々の鑑定きのみ耶蘇教名目拘泥するのあらんやれにも本体便不便はあるらずこれをずる人民智恵ずるものなり耶蘇釈迦愚人せば愚人すのみ神儒仏神職僧侶儒者輩人民ればこそ迀遠なれ此輩をしてきことなりとどもぶことあらしめ文学技芸其教文明くことあらば其教百倍してをしてましむるにへば猶刀はるゝ人民猶工匠利刀ありとども拙工れば其用さず徳行不文人民へば文明さゞるなりかの徳行識者工匠巧拙利鈍めたるものと私徳智恵其光明ずるものなり智恵私徳其功用確実ならしむものなり智徳両ながらはらざれば文明らざるなり

 宗教るゝの得失ずるは此章趣意ざれども議論次第こゝにびたるがながらしくはざるをるとはきもの歟又不足するものをんとすることなり二箇条ありて其孰前後緩急るには我所有有様其全きもの不足するものをしてめざるらずめて不用なりとするにながら入用なれどもるに前後緩急あるのみ文明一国人民智徳はしたる現象なりとのことは前既じたりして日本文明西洋諸国のものにばずとのこともなり日本文明せざるは其人民智徳不足するありてるものなれば此文明せんとするには智恵徳義とをめざるらず即是方今我邦ける二箇条なり文明学者日本国中見渡して此二者分量くしてなきをするにざれば其求前後緩急らず如何なる不明者ども日本全体人民して徳義不足すれども智恵ありとはなかる其証拠箇条且明にしてふるにあらず亦計ふるにもばざるのことなれどものために二例さん日本はるゝ徳教神儒仏なり西洋はるゝものは耶蘇教なり 耶蘇神儒仏其説じからずとども其善としとするの大趣意てはなることなしへば日本にて西洋にても西洋にて日本にてもきが且徳教ては東西学者頻りに自家主張其書して争論止むことなし此争論ても亦以東西しき優劣なきを凡物力量略ほぼ相敵せざれば争論らずふたるを力士小児ふたるをかず争闘るは其力伯仲るものなりかの耶蘇教西洋人智恵脩飾維持したる宗教なれば其精巧細密なること神儒仏ざるしとども西洋教化師日本りに其教主張神儒仏してれの地位んとし神儒仏学者ばずながらもてゝ敵対せんとして喧嘩争論体裁すはぞや西洋教必ずしも力士とのくならず日本教必ずしも小児とのくならずして東西しく伯仲るの明証其孰たるは余輩するずとども我日本人相応じて其徳教したるなれば私徳厚薄ずるときは西洋人してたらざるもたり議論せずして事実ればたる不文なる日本人きこともあらん分量仮令我国不足することあるも焦眉急須ざることなり智恵なり日本人智恵西洋人智恵とを比較すれば文学技術商売工業最大より最小るまでよりへてるも又千るもとしてるものあらず敵対するなく敵対せんともなし天下至愚ざるの我学術商工西洋諸国並立せりとはなかる大八車蒸気車日本刀小銃するあらん陰陽五行ればには六十元素発明あり天文吉凶したるに彗星太陽太陰実質をも吟味せりかざる平地住居したるりなりしに其円くしてくものなるをれり我邦至尊神洲ひしに世界中奔走して土地其政令商法斉整なるはよりなるもの是等諸件ては日本有様にてして西洋きものなし日本人のものは唯天然物産ざれば山水風景のみ人造にはてこれあるをかずふのなければ亦争はず外国人はよく自国自負するものなれども蒸気車便利大八車不便理したるをかず畢竟彼我智恵相違とのくにして争端かざるものなりれば方今我邦至急智恵ずしてぞや学者思はざるらず

 又一例さん田舎人物あり旧藩士族廃藩家禄二三百石へて父母へて夫婦別あり長幼序あり借金必附合必一毫不義理したることなし詐盗てをや百姓町人圧制したることあれどもより身分当然なればなし節倹勉強弓馬剣鎗せざるものなし唯文字らざるのみ今此人のためにるに如何きやへんかへんか突然として耶蘇十誡すことあらば第四誡までの箇条生来知らざることなればしとども第五誡以下ては此人必はん父母せりすのなしいんすることをせんむことをせんとて抗論して容易敬服することなかるより耶蘇此十誡白文きに意味深長なるものにて父母するにもからのありさゞるにもからさゞるの趣意あり不婬にもあり不盗にもあることならんくには丁寧反覆よく其旨してには此人感動せしむることもあるしとども徳行ては此士族平生行状なくも初段心得はあるはざるをるに一方より其智恵所得るに渾身恰空虚なるが五色区別ずれども天然七色よりらず寒暑挨拶れども寒暖計昇降をしらず食事らざれども時計用法をばすことはず生国日本あるをらず日本外国あるをらず形勢らん交際らん古風古法一家一小乾坤にして其眼力唯家族戸外ること一歩にして世界万物悉皆暗黒なる廃藩一挙以此小乾坤へし今日ては唯途方るゝのみして此人物すればにしてなりとふの名状きなし愚直人民唯旧藩士族のみにらず世間其類甚にして学者政府のものなりるにかの徳行識者この愚民耶蘇正教其徳義めんとするにはしくして其智恵有無てゝはざる識者には唯愚にして不直なるのみをることなるしとども世間にはにしてなる亦甚識者これに何等処置さんとするや其直をして益直ならしめ其愚をして益愚ならしめんとするるに前後緩急弁別なきものと西洋家流和漢古学迀遠なりとしてののしるにずやこれをるはぞや事実智恵なきをるものならんから其覆轍からからへるのしきなり

 宗教文明進歩其趣ずるものなり西洋にても耶蘇宗旨りし其初羅馬時代なり羅馬文物盛なりとども今日文明ればしてこれを無智野蛮はざるを耶蘇宗教其時代には虚誕妄説へてしく当時人智めらるゝこともなくかすこともなく数百年相移りて次第信仰其際から一種権力人民心思圧制其情状暴政府専制衆庶るがくなりしが人智発生大河るゝががんとして宗旨権力一時其声価すにれり紀元千五百年代りたる宗門改革なり此改革羅馬天主教してプロテスタント新宗派したることにてより両派にして相互屹立すとども今日にては新教次第るが此両派同一耶蘇教よりたるものにて其信ずる目的双方共なることなしとども新教なる由縁宗教儀式簡易古習虚誕妄説しく近世人情其智識進歩有様すればなりしてへば旧教濃厚にして愚痴新教淡薄にして活潑なるのあるなり世情人古今相違したるものと

 右所記へば欧羅巴各国にて文明なるものは新教なるものは旧教なるに亦決してらずへば今蘇格蘭すこつとらんど瑞典すえーでんとの人民妄誕惑溺する者多くして仏蘭西人穎敏活潑なるにばざること蘇瑞不文にして仏蘭西文明はざるをるに天主教蘇瑞新教プロテスタント帰依せりこのれば天主教仏蘭西ては其教風めてから仏人気象するものらざれば仏人宗教度外みざることなる新教蘇瑞両国ては其性じてから人民痴愚するものならん到底ツマリ宗教文明るの明証日本にても山伏宗旨又天台真言宗きは不思議水火ぶと加持祈禱妙法すると蠱惑して人民はこの妄誕信仰せしことなりしが中古一向宗るにては不思議ふことなく其教風都簡易淡薄として亦中古人文諸宗圧倒して権力らにせり文明次第進歩すれば宗教簡易道理かざるをざるのなり今日弘法大師再生せしめ其古人蠱惑せし不可思議へしむることあるも明治年間にはずる者甚なる今日人民はまさに今日宗旨宗旨人民満足人民宗旨満足して不平あるらず日本文明今より次第一向宗をも虚誕なりとしてふにらば又別一向宗ずることもある西洋はるゝ宗旨まゝに採用することもある結局宗旨のことは度外きのみ学者すも政府るも如何ともすきものに唯自然成行きのみして宗旨是非正邪けて宗旨支配せんとする天下至愚

 有徳善人必ずしもさず無徳悪人必ずしもさず往時西洋諸国にて宗旨のためにしたるの歴史其最しきものはペルセキウションとてずる宗旨なる殺戮することなり古来仏蘭西及西班牙いすぱにあ其例最有名なるバルゾロミウ屠戮とりくには八日無罪人民五千人したりと西洋事情二編仏蘭西史記にあり。》其惨酷なるは沙汰りなれども屠戮ふたる本人れば一心一向宗旨一事ては俯仰憚なく所謂屋漏ざる善人なり此善人にして此大悪事ふはぞや私徳らざるに聡明智恵しきなり愚人権力してをしてずるあらしめなば何等大悪事をもさゞることなしのために妖怪爾来諸国文物漸なるに今日ペルセキウションあるをかずこは古今宗旨異同あるに文明前後るものなりしく耶蘇宗旨なるにはこの宗旨のためにはこの宗旨ふとは何故智愚其源因むるの手段なかる智恵徳義光明すのみならず徳義保護してかれしむるものなりくは我日本にても水戸藩中正党姦党あり其由来今爰ずるにばずとども結局忠義二字議論して徒党たるものにて其事柄宗旨論ならずふも其字意味あるらずからしてしてるのみ両党共忠義其一人言行れば腹中甕かめ赤心者多其偽君子ざるの此輩るときに従容死狼狽するなきをるに近世議論のために無辜人民したるのきは水戸藩中とす是亦善人したる一例なり

 徳川家康乱世櫛風しつぷう浴雨艱難らずして三百年太平天下泰山やすきたりとて今日るまでも其功業なるをせざるなし足利末世海内紛擾織田豊臣功業其基くすることはず此時家康なかりせばれの太平きや家康三百年間太平父母るに此人一心其徳義すればきものなからず就中其太閤遺託大阪保護するのなくせられたる秀頼けずして其遊冶暗弱養成石田三成きをかずして後日大阪すの媒妁したるがきは奸計しきものを此一条ては家康には一点徳義なきがるに此不徳三百年太平衆庶塗炭たるは奇談ずや其他頼朝にても信長にても一身行状ずれば残忍刻薄偽詐反覆悪きものしとども皆一時干戈人民殺戮なくしたるはぞや悪人ずしもさゞるにざるなり必竟此輩英雄私徳欠点ありとども聡明叡知なるものをしたる人物一点きず全璧らざるなり

 ずるしてへば徳義一人行状にて其功能所狭智恵ることにして其及所広徳義開闢より進歩らず智恵際限あることなし徳義有形らずるととは々の工夫智恵して智恵すに試験あり徳義進退することあり智恵一度ふことなし智恵依頼して其功能はすものなり善人すことあり悪人ふことありとのことをしたるものなり徳義るにては有形方術なく忠告親族朋友のみなりとども其風化する領分万里出版したる著書発明することあり古人言行から工夫らし一身心術あり伯夷つとは此事なりとしてするのなくば一身徳義めざるけんやのためにのために人類たるから徳義なり自己悪念ぐには勇士ふが暴君してるがくしるは守銭奴くことをらざるくし一身よく一家教化尚余力あらば他人ぼして衆生をしてらしめ一歩にても徳義領分めんことを是亦人間一科業にて文明るの功能固より洪大なるが教化師ありて徳義るはきことなれども唯徳義一方世界中籠絡せんとし其甚しきにては徳教中一派主張して教派一派徳教押領して又智恵領分をも人間徳教一事りて徳教又其内一派るものゝくし思想束縛して自由さしめず無為無智れて文明するがきは余輩ばざるなり受身私徳文明世人をして其徳沢らしむることあるは偶然たる美事きのみへば我地面内てゝ隣家屏墻りたるが隣人のためには便利なりとども我家たるは自己のためにして隣人のためにしたるに偶然便利きのみ私徳るも一身のためにするものにて他人のためにするに他人のためにあらば即是偽君子にて徳行家なり徳義本分一身るにこれを文明することあるは偶然美事のみ偶然一世支配せんとするはなる元来人として此世一身始末をすればとてたるの職分れりとするにらず徳行君子衣食する何処よりたるや上帝恩沢洪大なりとども衣服ぜずよりらず文明次第めば其便利唯衣服飲食のみならず蒸気電信あり政令商売便あるにてをや皆是智恵にあらざるはなし人間同権趣意へばして他人るのあるらず徳行君子をして瓢瓠へうこくならしめよくふことなくばまん有徳君子がぶらがるだけでべられない瓢箪のやうなものになるなら無意味なことだ)。蒸気電信として政令商売便便とすることあらば亦其責ぜざるらず加之肉体便利既にして一身私徳既ることなしとふもこの有様ずるのなし其饒るなしとふは今日文明れるのみ其極らざることなり精神発達するはあることなし造化仕掛には定則あらざるはなし無限精神有定には有形無形なく天地間事物悉皆人精神包羅してすものなきに此一段ては又区々の智徳じて其界ふにらん人天並立有様なり天下後世必其日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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