ふくざわゆきち | 福澤諭吉

문명론의 개략, 제4권 제8장 서양문명의 유래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7. 23:31

8장 서양문명의 유래

 

지금의 서양문명을 기술하는데 그 유래를 천착하는 것은 이 소책자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프랑스의 학자기조씨 저술의 문명사 및 다른 여러 서적을 인용하여, 1%의 대의를 기술한 것 다음과 같다.

서양의 문명이 다른 문명과 다른 바는, 인간의 사회생활에 관하여 그 주장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설을 서로 병립하여 서로 화합하는 일 없는 한 가지 일에 있다. 비유건대 정치의 권력을 주장하는 설이 있고, 종교가 권력을 독점한다는 논의가 있다. 혹은 전제정치라고 하고 혹은 신정(神政)이라고 하고, 혹은 귀족집권(귀족정치) 혹은 중서위정(衆庶爲政: 민주주의)이라 하여, 각자 그 지향하는 바를 향해 각자 그 주장하는 바를 주장하여, 서로 싸운다할지라도 서로 능히 이것을 제어할 수 없다. 하나도 이기는 자가 없고 하나도 패하는 자가 없다. 승패가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아서 서로 적대하면, 설사 불평이 있다할지라도 서로 동시에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동시에 공존할 수 있으면, 설사 적대하는 자라할지라도, 서로 그 실정을 알고 서로 그 행동하는 바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전승(全勝)의 세력을 얻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를 허용하는 경우에 이르면, 각각 자기주장을 펼쳐서 문명의 한 국면을 작동시켜, 마침내는 합쳐서 하나로 될 수 있다. 이것이 곧 자주(自主)와 자유(自由)가 생겨나는 이유이다.

지금의 서양 문명은 로마멸망의 때를 시작으로 한다. 기원 300년경부터 로마제국의 권세는 점점 쇠약해져, 400년대에 이르러 최고로 심해져, 야만족이 팔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또 제국의 온전한 권력을 지킬 수 없다. 이 종족들 안에서 최고를 힘이 센 것은 게르만족이라고 한다. 프랑크족도 곧 이 무리이다. 이 야만의 여러 종족, 제국을 유린하여 로마 수 백 년의 옛 문물을 없애고, 인간의 사회에서 시행되는 것은 오직 완력뿐. 무수한 야만인들, 무리를 지어 침략과 약탈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따라서 나라를 건설하는 자 있으면 따라서 병합되는 자가 있다. 700년대 말에 프랑크의 추장 샤를르마뉴라는 자, 지금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지방을 힘으로 빼앗아 하나의 대제국의 기초를 세우고, 점차 유럽 전 지역을 통일하고자 하는 세력을 이루었어도, 황제의 사후는 나라가 또 분열하여 돌아갈 곳이 없다. 이 시기를 맞아서는, 프랑스라고 하고 독일이라고 하여, 그 나라의 명칭이 있어도, 아직 나라의 체제를 이루지 못한다. 사람마다 하나의 완력을 마음껏 펼치고 하나의 욕심을 자행했을 뿐이다. 후세는 이 시대를 주목하여 야만의 시대 또는 암흑의 시대라고 칭한다. 곧 로마 말부터 기원 90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700년간이다.

이 야만과 암흑의 시대에 있어 기독교 성당은 스스로 형태를 온전히 하여 존재할 수 있었다. 로마 멸망에는 성당도 함께 멸망할 수 있을 것 같았어도 결코 그렇지 않다. 성당은 야만 속에 섞여 지내며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야만족을 교화시켜 자기네 종교 안에 농락하는 일에 힘썼다. 그 담대한 계략도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무지한 야만을 인도하는 것은 고상한 이치로써 할 수 없다. 곧 성대히 의식을 마련하여 외형적인 허식(虛飾)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하여, 애매한 경우에 점차 그 신앙심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후세로부터 이것은 논하면 거짓말로써 사람들 현혹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할지라도, 이 정부도 없고 법도 없는 세상에서 적어도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길이 귀중함을 아는 것은 다만 기독교가 있을 뿐. 만일 이 시대에 이 종교가 없도록 했다면, 유럽의 전체 나라는 한 마당의 금수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공적도 이 시대에 있어서 작다고 할 수 없다. 그 권력을 얻음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육체를 억제하는 일은 세속의 완력에 속하고, 정신을 억제하는 일은 성당의 권력에 귀속되어, 속세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서로 대립하는 것과 같다. 그뿐만 아니라 성당의 사제가 세속적인 일에 관계하여 시내의 민간의 공무를 맡아보는 것은 로마시대부터 시행되는 관습이어서,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그 권한을 잃지 않는다. 후세의 의회에 사제가 참석하는 것도, 그 원인은 멀리 오랜 옛날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당의 권한이 있다)

초기 로마 국을 건설하자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합쳐진 것이 된다. 로마의 관할, 도처로 도시와 촌락이 아닌 것이 없다. 이 합쳐진 도시와 촌락 안에는 각자 개별적인 성문법이 있어, 스스로 한 도시와 한 촌락의 행정을 실시하여 로마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고, 모여서 한 제국을 이루었지만, 제국이 멸망한 후도 시민의회의 풍습은 여전하고 이것을 존속시켜, 그로써 후세 문명의 원소가 되었다. (민주정치의 요소)

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할지라도, 과거 수 백 년 간 이 국가를 칭하여 제국으로 부르고, 그 군주를 존경하여 황제라 이름하고, 그 명칭은 마음속에 새겨져 잊힐 수 없다. 일단 황제 폐하의 이름을 잊지 않으면 전제와 독재의 관념도 이 이름과 함께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후세 군주제의 주장도 그 기원은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군주제의 요소)

이 시대에 있어 천하에 횡행하는 야만 종족이라는 것은, 고서에 기재된 바를 보아 명백하게 그 기풍과 성질을 규명하기에 어렵다할지라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여 생각하는 데, 세찬 기세(호기: 豪気)가 표한(慓悍)하여서 인정을 모르고, 그 무식하고 아둔한 것이 거의 금수에 가까운 것과 같다. 그렇다할지라도 지금 한 걸음을 나아가, 그 속사정에 관하여 세밀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음미하면, 이 아둔하고 표한(慓悍)한 것 안에 스스로 뛰어난 용맹과 강개(慷慨: 의로운 분노)의 기운이 존재하여 자유로운 독립의 기풍이 있다. 생각건대 이 기풍은 인류의 본심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어서, 곧 스스로 인식하여 홀로 하나의 남자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유쾌함을 지각하는 마음이고, 대장부의 뜻이고, 마음의 의지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자 하여도 막을 수 없는 용기이다. 과거 로마시대에도 자유에 대한 주장이 없지는 않고, 기독교의 무리에서도 이 주장을 외치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자유와 자주라고 외치는 것은 한 종족의 자유여서, 한 몸의 자유를 외치는 자가 있다고 듣지 못한다. 한 개인의 자유로운 독립을 주장하여 한 개인의 의지를 펴겠다는 기풍은, 게르만 야만족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 요소가 있음을 보았다. 후세 유럽의 문명에 있어서, 일종의 둘도 없는 금과 옥과 같은 것으로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귀중한 바의 자유와 독립의 기풍은, 그것을 게르만의 덕택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 독립의 기풍은 게르만의 야만에서 배태되었다.)

야만스러운 암흑의 시대가 첨차 끝나고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그 거처를 정해, 이것 때문인가 봉건할거의 추세로 바뀌었다. 이 추세는 900년대에 시작하여 1500, 600년대에 이르러 멸망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를봉건제도(feudal system)의 세상이라고 칭한다. 봉건의 시대에서는, 프랑스라고 하고 서반아(스페인)이라 하여, 각자 그 나라의 명칭을 지녀 각국의 군주가 없는 것은 아니라도, 군주는 다만 실권이 없는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국내의 무사가 도처에서 할거하여 하나의 부락을 이루고,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성의 아래에 부하를 소집하여, 하층민을 노예처럼 간주하여 스스로 귀족이라고 칭하고, 실제로 독립의 형태를 마련하여 꺼리는 바가 없고, 무력으로써 서로 공격할 뿐이다. 암흑의 시대에 있어서는, 세상의 자유라는 것이 개인 위에서 시행되었다할지라도, 봉건의 세상에 이르러서는 크게 그 취지를 달리하여, 자유권은 토지와 백성의 주인인 귀족 한 사람의 몸에 속하여, 이것을 제어하는 것에 일반적인 국법이 없고, 이것을 비판하는 데 시민의 논의가 없고, 한 개의 성 안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은 군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다만 그 전제를 방해하는 것은 적국과 외환(外患)이 아니면 자신의 힘이 부족할 뿐이다. 유럽의 각 나라가 대개 이 기풍을 이루어, 국가 안의 국민 모두 귀족이 있는 것을 알되 국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저 프랑스, 서반아와 같은 것도, 아직 프랑스 국, 서반아 국이라는 칭할 수 있는 국가체제(国体)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봉건할거)

위와 같이 봉건의 귀족 홀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 같아도, 결코 이 독립적인 권한으로써 유럽 전 지역의 형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이미 야만적인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여 그 믿음을 얻고, 기원 1100년부터 20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고로 강성함에 도달했다. 생각건대 그 권력을 얻은 원인을 찾으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체로 인류의 생생한 모습을 보는 데, 세태의 변천에 따라서 혹은 일시적인 영광을 빛낼 수 있고, 힘이 있으면 그로써 백만의 적을 섬멸할 수 있고, 재간이 있으면 그로써 천하의 부()을 지킬 수 있고, 인간의 만사는 재간과 힘에 따라서 뜻대로 할 수 있다할지라도, 오직 삶과 죽음 저승의 이치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이 저승의 이치와 마주할 때는, 샤를르마뉴의 뛰어난 무용(武勇)이라할지라도, 진시황의 맹렬한 위력이라 할지라도, 추호의 힘을 사용하는 데 방법이 없고, 처연하여 낙담하고, 부귀는 뜬구름, 인생은 아침이슬임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 마음의 최고로 약한 부분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어서, 방어전으로써 말하면 준비를 하지 않은 요새와 같고, 사람의 몸에서 말하면 예민한 급소와 같아서, 한번 이것을 침범당하면 갑자기 움츠러들어, 나의 미약함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다. 종교의 본분은 이 저승의 이치를 설명하여 우주의 미묘함을 밝히는 것이라고 칭하여, 감히 사람이 지닌 의혹에 답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생명을 지닌 인류에 있어서 누가 이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자가 있는가? 그뿐만 아니라 당시 문화가 아직 개화되지 않고, 오류와 가볍게 믿는 세계의 한가운데여서, 허랑한 거짓말일지라도 일찍이 그것을 의심하는 자가 없고, 세상에 복종하는 것이라 하여 종교를 믿는 형세를 이루어, 한 마음으로 오로지 종교의 교설을 믿도록 할 뿐이어서 도무지 사사로운 논의를 허락하지 않고, 그 전제 억압의 형세는 왕과 제후의 폭정으로써 하층민을 괴롭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시의 사정을 일반적으로 평가하면, 백성은 흡사 그 몸을 반으로 잘라 정신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육체의 운동은 왕과 제후의 속권(俗權: 정치권력)의 다스림을 받고, 정신의 작용은 로마 가톨릭의 명령에 따른 것과 같다. 속권(俗權: 정치권력)은 신체라는 유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종교는 정신이라는 무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종교는 이미 정신의 세계를 지배하여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왕과 제후의 속권(俗權: 정치권력)에 대립하여도, 더욱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르기를, 정신과 육체를 어느 것이 귀중한가? 육체는 끝이고 또 바깥이고, 정신은 근본이고 또 안쪽인데, 나는 이미 그 근본을 제압하고 안쪽을 지배했노라, 어쩌랴 그 바깥과 끝을 버릴 이치가 있는가? 반드시 그것을 나의 범위 안에서 농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점차 왕과 제후의 지위를 침범하여, 혹은 그 나를 빼앗고 혹은 그 왕위를 박탈하여, 로마교황은 흡사 하늘과 땅에서 홀로 존귀한 것 같다. 게르만의 황제 하인리히4세가 교황 그레고리의 노여움을 사서, 추운 겨울의 바람과 눈 속에서 맨발로 로마의 성문에 선 것이 3일간의 낮과 밤, 울며 교황에게 애걸하였다고 하는 것도 이 시대의 일이다. (종교의 권력이 크게 번성하다)

야만의 횡행이 점차 진정되어 할거의 형세를 이루고, 이미 성을 구축하여 집을 건설하고 그 주거가 안정되는 데 이르면, 다만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는 것으로써 만족할 수 없고, 점차 사람에게서 풍취를 생기게 해서, 의복은 가볍고 따뜻함을 원하고 음식은 맛있음을 좋아하여, 제반 수요가 동시에 일어나 또 옛날의 조야함을 감수하는 자가 없다. 이미 수요가 있으면 따라서 또 그것을 공급하는 자가 없을 수 없다. 이것 때문인가 처음에 조금 상공업의 길을 열고, 도처에 시읍(市邑)의 형태를 이루어, 혹은 그 시민의 안에 재산을 이룩한 자도 있다. 곧 로마 이후, 시읍(市邑)이 부흥한 것이다. 생각건대 이 시민들이 서로 모여 무리를 이룬 것이야, 그 초기에 있어서는 결코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야만적인 무사들이 과거의 형세를 회고하여 폭력과 약탈과 관련된 쾌락을 잊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시대의 형세가 이미 정해져 멀리 출정할 이유가 없고, 근방에서 약탈을 자행할 수 있는 상대는 다만 같은 종족인 시민이 있을 뿐. 시민의 눈으로써 봉건의 귀족과 무사를 보면, 물건을 팔 때는 손님과 같고, 물건을 빼앗길 때는 강도와 같기 때문에, 상업으로써 그들과 교류한다고 할지라도, 겸하여 또한 그 폭력을 막는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시읍(市邑)의 주의에 성곽을 세우고, 성안의 주민은 서로 도와 외적을 막고, 그로써 이해(利害)를 함께한다는 취지여서, 큰 모임을 열 때는 종을 울려서 주민을 모으고, 서로 다른 뜻이 없음을 맹서하여 믿음을 표시하고, 이 회동의 때에 있어서 대중 안에서부터 사람 몇 명을 선출하여, 성안의 우두머리로 삼아서 공격과 방어의 정치를 맡도록 하는 풍습이다. 이 우두머리인 사람, 일단 선거에서 당선되어 권력을 잡은 때는, 그 전제, 의지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대부분 군주제의 특별한 체제라도, 다만 시민의 권리로써 거듭 다른 사람을 선출하여 그를 대신하도록 하는 법률이 있다.

이와 같이 시민이 무리를 이루어 독립하는 것을 프리시티: 자유도시: Free City라고 칭하여, 혹은 제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혹은 귀족의 군대와 싸워, 전쟁의 혼란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프리시티는 자유로운 시읍[市邑]의 의미여서 그 시민은 곧 독립적인 시민이다기원후 1000년경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자유의 도시를 세운 것이 많고, 그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의 밀라노」 「롬바르디아, 독일에서는 한세틱 리규 (한자동맹)라 하여, 1200년대의 초부터 류벡함부르크등의 시민이 서로 모여 공회(公會)을 결성하여, 그 세력이 점점 번성하여 한 때는 85 마을의 연합을 이루어 왕과 제후 귀족도 그것을 제어할 수 없고, 더욱이 조약을 맺어 그 자립을 인정하고, 각 시읍(市邑)에 성곽을 쌓아 군비를 두어 법률을 만들고 시행령을 시행하는 것을 허용하여, 흡사 독립국의 체제를 이루는 데 이르렀다. (민정[民政: 민주정치]의 요소)

이상 기술한 바와 같이, 기원 3, 4백년 경부터, 사원이나, 군주제나, 귀족이나, 백성이나, 무엇이든 모두 그 형태를 이루어 각각 다소의 권력을 지녀, 흡사 인간의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제반 여건은 구비했다하더라도, 아직 그것을 합쳐서 하나로 하여, 한 나라를 만들어 하나의 정부를 세우는 때에 이르지 못하여, 시민들이 싸우는 바, 각 한 부분에 머물러, 아직 전체적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기원 1096년 십자군 사건이 일어난다. 이 군대는 유럽의 시민, 종교 때문에 힘을 합쳐서 소아시아 지역을 정벌하여, 전체 유럽을 아군으로 하고 아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이어서, 시민의 마음에 처음으로 유럽과 아시아라는 안팎의 구별을 예상하여 그 방향을 하나로 하여, 또 유럽의 각국에 있어서도 역시 하나의 전체적인 대사건이므로, 전국의 시민이 지향하는 바를 같이하여, 전국의 이해(利害)로써 관여하는 데 이르렀다. 그리하여 십자군이라는 사태는 유럽의 시민으로 하여금 유럽이 있음을 알게 하고, 각국의 시민으로 하여금 각 나라가 있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군대는 1096년부터 시작하여, 뒤에 중단되었다가 뒤에 일어나, 전후의 정벌이 여덟 차례이어서, 그 전부가 끝난 것은 1270년의 일이다.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본래 종교의 열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200년의 긴 세월을 거쳐 그 업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이것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각 나라의 군주 자신에 있어서도, 종교적 권력을 다투는 것은 정치적 권력을 다투는 중대함과 같지 않다. 아시아에 가서 토지를 강탈하는 것은, 유럽에 있어 국경을 여는 편리함과 같지 않음을 알고, 또 군사적인 일에 따르겠다고 하는 자가 없다. 시민도 역시 점차 그 소견을 크게 하여, 자국에서 공업을 권장하는 일을 계획하여 할 것임을 깨닫고 원정을 좋아하지 않고, 정벌의 열정도 모호한 사이에 흩어져 사건의 끝에 파하고, 그 결과는 웃을 수 있는 것 같아도, 당시 유럽의 촌사람이 동방 문명의 상황을 목격하여 그것을 자국으로 옮겨, 그로써 스스로 사물의 진보를 돕고, 또 한편으로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대조하여 안팎의 차이를 알고, 그로써 스스로 국가의 체제를 정한 것은, 이 십자군의 결과라고 칭할 수 있다. (십자군의 업적을 나타내는 것은 크다)

봉건시대에 있어서는 각국의 군주는 다만 실권이 없는 지위를 지닐 뿐이라 할지라도, 본디 평온한 마음에 도달할 수 없다. 또 한편에서는 국내의 시민도 점차 식견을 넓히고, 오래 귀족의 굴레에 묶인 것을 싫어한다. 이것 때문인가 또 세상에 일종의 변혁을 발생시켜 귀족을 제압하는 단초를 열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면, 1400년대 말에 프랑스 왕 루이11세가 귀족을 타도하고 왕실의 권력을 되찾은 것과 같은 것이다. 후세에서 이 군주의 업적을 논하면, 그 사기와 교활, 천박할 수 있는 것 같아도, 역시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생각건대 시대의 추세의 변화,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옛날은 세간을 다스리는 데 다만 무력만 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대신하는 것에 지혜의 힘으로써 하고, 완력을 대신하는 것에 교활함으로써 하고, 폭력에 대신하는 것에 기만으로써 하여, 혹은 타이르고 혹은 유인하여, 교묘하게 책략을 운용하는 취지를 보면, 설령 그 인물이 생각하는 바가 비열하여도, 그 기대하는 바는 점점 원대하여, ()을 경시하고 문()을 중시하는 기풍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에 있어서 왕실에 권력을 집중한 일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스페인의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모두 그렇다. 그 나라의 왕이 이것에 힘쓴다는 것은 본래 논할 필요가 없다. 국민도 역시 왕실의 권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원수인 귀족을 멸하려 하여, 위아래가 투합하여 그 중간을 타도하겠다는 형세가 되고, 전국의 정치적 시행령이 점차 한 길로 돌아와 점점 정부의 체제를 이루는 데 이르렀다. 또 이 시대에서는 무기를 사용하는 법이 점점 세상에 퍼져서, 활과 말을 사용하는 길은 차츰 폐기되어, 천하에 필부의 용기를 두려워하는 자가 없다. 또 동시에 문자를 출판하는 기술을 발명하여, 흡사 인간세계에 새롭게 뜻을 전달하는 길을 연 것과 같고, 사람의 지혜가 갑자기 피어나서 사물의 경중을 달리하여, 지혜의 힘, 지위를 차지하고, 완력, 길을 피하여, 봉건적 무인(武人)은 날마다 권위를 잃어 그 의지하는 곳을 잃어버리고, 상하의 중간에 있어서 고립된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형세를 평가하면, 국가의 권력이 점차 중심적인 하나의 정부에 집중하려는 형세로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세력이 합쳐서 하나가 됨)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특권을 자행하여 꺼리는 바가 없고, 그 상태는 흡사 옛날 악한 정부가 여전히 존재하여 무너지지 않은 것과 같고, 내부의 형편은 무너지고 파괴되어 끝났더라도, 오로지 옛 문물을 고수하여 융통성을 알지 못하고, 회고하여 세상을 보면 사람의 지혜는 날마다 진보하여 또 옛날의 소홀함과 가벼운 믿음뿐 아니라, 글자를 아는 것은 오직 성직자의 농단에 속하지 않고, 세속인이라 할지라도 역시 글을 읽는 자가 있다. 이미 글을 읽는 이치를 구하는 법을 알면, 사물에 관하여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의(: 의문)라는 한 글자는 바로 사원이 금지하는 말이어서, 그 추세는 양쪽 모두 서로 허용할 수 없다. 이 때문인가 세상에 종교개혁이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다. 1520, 유명한 종교개혁의 우두머리 루터, 처음에는 로마 교황에게 저항하여 새로운 주장을 외쳐, 천하의 인심을 움직여 그 세력 거의 당할 수 없다. 그렇다할지라도 로마도 역시 병든 사자와 같고, 생명력은 쇠약하다할지라도 사자는 곧 사자이다. 구교가 사자와 같고, 신교는 호랑이와 같고, 그 승패 쉽게 결정할 수 없다. 유럽의 각국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일이 거의 그 수를 알 수 없다. 마침내 프로테스탄트라는 하나의 종파를 열고, 신교와 구교 모두 그 지위를 잃지 않아서 루터의 노력도 그 업적이 헛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살인의 과오를 헤아리면 이 신교의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낮고 낮지 않고는 잠시 제쳐놓고, 결국 이 종교적 교설의 관점을 찾으면, 쌍방 모두 종교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만 사람 마음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을 다투는 것이다. 예수교를 시비하는 것은 아니고, 로마의 정치적 권한을 다투는 취지이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기풍을 밖으로 나타낸 것이어서, 문명 진보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문명의 징후)

1400년대 말부터, 유럽 각국에 있어서 그 국력이 점차 하나의 정부에 모여, 그 초기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 왕실을 흠모할 뿐이어서,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국왕도 역시 귀족을 타도하고자 한 것은 일반 백성의 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때의 편의를 위하여 흡사 국왕과 백성이 도당을 결성하여 서로 이익이 되는 바를 이용하고, 스스로 백성의 지위를 높이 끌어올려, 혹은 정부로부터 허락하였기 때문에 더욱 국민에게 권력을 부여한 일도 있다. 이 과정에 따라, 1500, 600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봉건적 귀족도 점차 흔적을 끊고, 종교의 교설에 대한 논쟁도 아직 평화로운 치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점차 그 방향을 정하여, 나라의 형세는 다만 국민과 정부 둘에 귀속된 것과 같다. 그렇다할지라도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일반적인 경향이어서, 각국의 군주도 이 습관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 때문인가 국민과 왕실 사이에 싸움을 단초를 열어, 이 사건이 선구를 이룩한 것은 곧 영국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왕실의 권위가 크지 않은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국민도 역시 상업과 공업에 힘써 가산을 축적하고, 혹은 귀족의 토지를 매입하여 지주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미 가산과 토지를 보유하여 직업에 힘써, 내외의 상업을 독점하여 국가 재정의 주인이 되면, 또 앉아서 왕실의 전제를 방관할 수 없다. 과거에는 로마에 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오늘날은 왕실에 저항하여 정치개혁이 일어나려는 추세에 이르러, 그 상황이 종교와 세속의 차이가 있어도, 자주와 자유의 기풍이 밖으로 흘러서 문명의 징후인 것은 동일하다. 생각건대 오랜 옛날에 실시된 프리시티: 자유도시의 요소도 여기에 이르러 점차 발생한 것이리라. 1625찰스1세가 즉위한 후는, 민권설(民權說)에 겸해 또 종교적 싸움도 시끄럽고, 혹은 의회를 열고 혹은 의회를 폐쇄하여, 여론이 봉기, 마침내 1649년에 이르러 국왕의 지위를 폐지하고, 한 때 공화정치체제가 이루어졌어도 영속할 수 없고, 이후 여러 가지 국가적 혼란을 거쳐, 1688윌리엄3세가 왕위에 오르고부터, 비로소 크게 정부의 방향을 정해, 자유와 관용의 취지에 따라 임금과 국민이 함께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정해, 그로써 오늘날에 전했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1600년 초, 루이13세 때에, 재상 리슐리에의 힘으로써 더욱 왕실의 권위를 빛내고, 1643루이14세가 왕위를 계승한 때는, 연세가 5세이어서 아직 국사를 알지 못하고, 게다가 내외 많은 일이 있는 때였어도 국력을 떨어뜨리는 데 이르지 않고, 왕이 나이를 먹음에 이르러 천품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충분히 선조의 유업을 이어 국내를 위력으로 복종시킬 뿐 아니라, 누차 외국과 맞서 싸워 이기지 않은 적이 없다. 재위 72년간, 왕의 위세가 혁혁함의 극에 달하여, 프랑스에서 왕실이 번성한 것은 특히 이 시대로써 최고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말년에 이르러서는, 군대의 위세가 점점 떨치지 못하고, 정치의 기강이 점점 이완되어, 은연중에 왕실 몰락의 단초를 보는 것 같다. 생각건대루이14세가 늙은 것은, 다만 그 사람이 늙은 것만이 아니고, 유럽 전체에 흡사 왕권이 노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15세는, 더욱 정부의 추악함을 극대화하여 거의 무정부와 무법의 극단에 빠져, 이것을 옛날의 상황과 비교하면, 프랑스는 흡사 전후 두 나라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할지라도, 또 한편에서 나라의 문명이 어떠한지를 찾으면, 정치 파멸의 이때를 맞아, 문물이 번성한 것이 이전시대에 비교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600년 사이에도 학자들의 논의에서 자유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라도, 그 소견이 혹은 협소함을 면하지 못한 것, 70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그 면목을 바꾸어, 종교적 교설의 가르침이라든지, 정치학이라든지, 논리학이든지, 자연과학이든지, 그 연구하는 바에 제한이 없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의심하여, 그것을 규명하고 그것을 시험하여, 생각이 활연하여 그 지향하는 바를 방해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개괄적으로 이 시대의 사정을 논하면, 왕실의 정치는 흐르지 않고 정체한 사이에 부패를 낳고, 국민이 지닌 지혜의 힘은 진보하고 쾌활하기 때문에 생기를 더하여, 왕실과 국민 사이에 반드시 격동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1700년대 말에 프랑스 대혁명은, 이 격동적인 사실에 나타난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이 터진 것이야, 영국에서는 1600년대 중간에 있어서고, 프랑스에서는 1700년대 말에 있어서여서, 전후 100여년의 차이가 있어도, 사건의 원인과 그 결과가 서로 대응한다는 뜻은, 바로 동일한 전철을 밟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은 서양문명의 대강이다. 그 상세한 것은 세상에 문명사의 번역서가 있고, 참고하여 볼 수 있다. 학자는 충분히 그 책 전체에 눈을 두어, 반복하여 숙독하여 전후를 참고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크게 소득이 있을 것이다.

 

 

 

第八章 西洋文明由来

 

 西洋文明して其由来詮索するは此小冊子くするには仏蘭西学士ギゾ-」氏所著文明史及諸書其百分一大意すこと

 西洋文明なる人間交際其説一様ならず諸説互並立してすることなきの一事へば政治主張するのあり宗教にするのあり立君神政府貴族執権或衆庶為政とて各其赴各其主張する主張ふとどもによくするをなくするなし勝敗久しくせずして相対すれば仮令不平なりとども同時存在せざるを同時存在するをれば仮令敵対するども其情実其為さゞるを全勝ずして所為すの場合れば各自家文明一局にはして是即自主自由ずる由縁なり

 西洋文明羅馬滅亡とす紀元三百年代より羅馬帝国権勢漸衰微四百年代しく野蛮種族八方より侵入して又帝国全権らず此種族にて有力なる日耳曼ぜるまん。「フランク種族此党なり此野蛮諸族帝国蹂躙して羅馬数百年旧物一掃人間交際はるゝ唯腕力のみ無数生蕃して侵掠強奪至らざるなしあれば併合せらるゝあり七百年代フランク酋長チャレマンなる仏蘭西日耳曼伊多里地方押領して一大帝国欧羅巴全州一統せんとするのしたれども死後国又分裂してするなし此時ては仏蘭西日耳曼其国あれどもさず各一個腕力ふして一個情欲にするのみ後世此時代して野蛮世又暗黒羅馬より紀元九百年代るまで七百年なり

 此野蛮暗黒時代耶蘇寺院から其体ふしてするをたり羅馬廃滅寺院きにたれどもしてらず寺院野蛮雑居して存在するのみならず此野蛮して宗教籠絡せんことを勉強せり其胆略亦大なりと無智野蛮くには高尚てすらず儀式外形虚飾耳目眩惑曖昧其信心発起せしむるにれり後世よりずれば妄誕人民蠱惑するのかれしとども此無政無法天理人道きを唯耶蘇宗教あるのみ此時代此教なからしめなば欧羅巴全州一場禽獣世界なるされば耶蘇教功徳此時代なりとらず其権力るも亦偶然してへば肉体するの世俗腕力精神するの寺院俗権教権相対立する加之寺院僧侶俗事関係して市在民間公務るは羅馬時代よりはるゝ習慣なれば此時るまでも其権はず後世議院僧侶出席するも其因縁上世するものなり。(寺院権あり

 羅馬るや幾多市邑合衆したるなり羅馬管轄として市邑ならざるはなし此衆市邑には各自個成法ありてから一市一邑処置して羅馬帝めて一帝国したりしが帝国廃滅市民会議依然として後世文明元素れり。(民庶為政元素

 羅馬帝国滅亡したりとども在昔数百年この帝国其君主其名称人民肺肝してらず皇帝陛下れざれば専制独裁此名せざるを後世立君其源るなり。(立君元素

 此時代天下横行する野蛮種族なる古書する其気風性質にししとども当時事情推察してずるに豪気慓悍にして人情らず其無識暗愚なること禽獣りとども今一歩めて其内情吟味すれば此暗愚慓悍から豪邁慷慨して不覊独立あり此気風人類本心よりりしものにてからめて独一個男子から愉快るのなり大丈夫なり心志発生留めんとしてらざるの勇気なり在昔羅馬時代にも自由なきに耶蘇教にも此説主張するなきにざれども其自由自主るものは一種一族自由にて一身自由あるをかず一個不覊独立主張して一個ふせんとするの気風日耳曼生蕃其元素あるをたり後世欧羅巴文明一種無二金玉として今日るまでも貴重する自由独立気風日耳曼はざるを。(自由独立気風日耳曼野蛮胚胎せり

 野蛮暗黒時代漸周流横行人民其居てか封建割拠りたり此勢九百年代千五六百年廃滅したるものなり此時代ダル・システム封建時代には仏蘭西西班牙すべいん各其国して各国君主なきにざれども君主唯虚位するのみ国内武人諸方割拠して部落部下下民奴視してから貴族独立体裁へてなく武力攻伐するのみ時代ては自由なるもの一身一己はれたりとども封建ては其趣にし自由土地人民たる貴族一人するに一般国法なく間然するに人民議論もなく一城ては至尊はざるを唯其専制るものは敵国外患ざれば自力不足のみ欧羅巴各国大概このして国中人皆貴族あるを国王あるをらず仏蘭西西班牙きも仏国西国国体さゞるなり。(封建割拠

 封建貴族独らにするにたれどもして此独権欧羅巴全洲形勢支配するに宗教野蛮人心籠絡して其信仰紀元千百年より二百年代ては強盛めり其権たる由縁れば亦決して偶然人類生々の有様るに世体沿革一時栄光かすあれば百万ほろぼあれば天下人間万事才力くなるきにたりとども死生幽冥てはらざるものあり此幽冥ふときは、「チャレマン英武ども秦皇猛威ども秋毫るになく悽然として富貴浮雲人生朝露さゞるを人心部分此処るものにて防戦へばけざる要害人身にてへば穎敏なるきうしよのくにして一度さるれば避易我微弱さゞるなし宗教本分此幽冥造化微妙にするものとして疑惑ふるものなればする人類はれざるあらんや加之当時人文未けず粗忽軽信なれば虚誕妄説どもなく天下靡然びぜんとして宗旨信仰一心一向ぜしむるのみにて議論さず其専制抑圧王侯暴政下民るにならず当時事情してすれば人民其身両断して精神肉体との二部肉体運動王侯俗権制御精神羅馬宗教命令俗権身体有形世界支配するものなり宗教精神無形世界支配するものなり

 宗教精神世界支配して人心王侯俗権対立すとどもこれに満足せずして精神肉体貴重なるや肉体なり又外なり精神なり又内なり其本して支配せり奈何其外とをるのあらんずしも我範囲籠絡せざるらずとて王侯地位其国其位羅馬法皇天上地下独尊なるが日耳曼皇帝第四ヘヌリ法皇グレゴリ逆鱗厳冬風雪徒跣とせんして羅馬城門つこと三日三夜法皇ひしとふも此時代なり。(宗教権力大なり

 野蛮横行漸鎮定して割拠てゝ其居んずるにれば唯飢寒かるゝを満足らず風韻じて軽暖美味百般需要一時又旧時粗野ずるなし其需あればこれをするものなかるらずてかしく商工諸処市邑して其市民もあり羅馬市邑再興したるものなり此市民相集すや其初てはして有力なるものに野蛮武人昔年有様回顧して乱暴掠奪愉快るゝことはずとども時勢既ればるになく其近傍掠奪にす相手唯一種市民あるのみ市民封建貴族武人ればるときははるゝときは強盗くなるが商売るとども又其乱暴ぐのさゞるらず市邑周囲城郭城中住民相助外敵利害にするの趣向にて大会のときにはらして住民異心なきをふて此会同のときに衆庶より人物数名城中頭取して攻防らしむるのなり此頭取なる撰挙るときは其専制くならざるはなし立君特裁なれども唯市民他人撰挙してらしむるの定限あり

 市民して独立するものをフリイ・シチ帝王貴族争乱殆虚日あることなし。《「フリイ・シチ自由なる市邑にて其人民独立市民なり紀元一千年より欧羅巴諸国自由市都るもの其有名なるものは伊太里ミラン」「ロンバルヂ」、日耳曼にてはハンセチック・リギュハンザ同盟)」とて千二百年代よりリュベッキハンボルフ市民相集公会其勢力漸にして一時八十五邑連合して王侯貴族することはず条約其自立各市邑城郭兵備法律政令ふことをして独立国体裁すにれり。(民政元素

 以上所記紀元三四百年より寺院なり立君なり貴族なり民庶なりれも皆其体して各多少権力人間交際必用なる諸件はりたれどもして一国一政府るの時節らずして人民各局処まり全体なるものをらざるなり紀元千零九十六年十字軍あり此軍欧羅巴人民宗教のためにして小亜細亜征伐全欧羅巴洲味方して亜細亜したることにて人民欧亜内外区別想像して其方向にし且欧洲各国ても亦一国全体大事件なれば全国人民ふし全国利害するにれり十字軍一挙欧羅巴人民をして欧羅巴あるをらしめ各国人民をして各国あるをらしめたるものと此軍千九十六年より前後征伐八度にして其全たるは千二百七十年のことなり

 十字軍宗教熱心よりたることなれども二百年きを其功せずはざるを各国君主ても宗教ふは政治ふの重大なるにかず亜細亜土地押領するは欧羅巴国境くの便利かざるを又軍事はんとするなし人民亦漸其所見にし自国勧工きものあるをりて遠征まず征伐熱心曖昧消散して事終其成行きにたれども当時欧洲野人東方文明有様目撃して自国から事物進歩又一方には東西相対して内外から国体めたるは此十字軍結果。(十字軍功することなり

 封建時代ては各国君主唯虚位するのみとどもより平心なるをべからず又一方には国内人民次第知見貴族覊絆きはんるをとせずてか又世上一種変動じて貴族圧制するのきたり其一例へば千四百年代仏蘭西王第十一世ロイス貴族して王室したるがなり後世より此君事業ずれば其欺詐狡猾しむきにたれども亦大らざるものあり時勢変革これをせざるらず昔日世間するに唯武力のみありしもの今日てはるに智力てし腕力るに狡猾てし暴威るに欺計てし策略らしたるれば仮令此人物心事鄙劣なるも其期する遠大にしてんじんずるのありとはざるを此時代王室るの仏蘭西のみならず英国日耳曼西班牙諸国ても亦皆然其国君るはよりたず人民亦王室其讐敵なる貴族さんとし上下相投じて其中すの全国政令漸一途して政府体裁すにれり又此時代には火器用法漸まり弓馬道次第廃棄して天下匹夫るゝなし又同時文字にするの発明して人間世界達意街道たるが人智頓発生して事物軽重にし智力地位腕力封建武人権威して其依上下中間孤立するものゝして此時形勢すれば権力漸中心一政府まらんとするのきたるものと。(国勢合一

 寺院しく特権にしてなく其形状恰旧悪政府尚存してれざるものゝ内部有様敗壊したれども只管旧物墨守して変通らず世上れば人智日又昔日粗忽軽信のみにるのことは僧侶壟断せず俗人ども亦書ありるのれば事物なきをるに此疑一字寺院禁句にて其勢両ながら相容らずてか宗教変革大事件じたり千五百二十年有名なる改宗首唱羅馬法皇して新説天下人心かして其勢殆らずりとども羅馬亦病める獅子生力衰弱すとども獅子獅子なり旧教獅子新教其勝敗容易らず欧洲各国これがためにしたることんど其数らずプロテスタント一宗派新旧共其地位はずして尽力其功空しからずとども殺人れば此新教なりとらずされども其廉不廉結局この宗旨論眼目れば双方共正邪主張するにはずして唯人心自由すとさゞるとをふものなり耶蘇宗教是非するにはずして羅馬政権ふの趣意なり此争論人民自由気風したるものにて文明進歩徴候。(宗教改革文明徴候

 千四百年代より欧洲各国其国力漸一政府其初ては人民皆王室ふのみにてから政治するのあるをらず国王亦貴族さんとするには衆庶依頼せざるを一時便宜のために国王人民党与其利するから人民地位高上引揚政府よりしてさらに人民権力附与したることもあり此成行沿千五六百年ては封建貴族次第宗旨争論平治せずとども其方向形勢唯人民政府とのしたるがりとどもにせんとするは有権者通癖にして各国君主此癖することはずてか人民王室との争端此事したるものは英吉利なり此時代ては王室威権盛大ならざるにずとども人民亦商売工業めて家産貴族土地地主たるものもなからず家財地面して内外商売にして国用主人たれば又坐して王室専制傍観することはず昔年羅馬して宗旨改革あり今日王室して政治改革あらんとするの其事柄とのあれども自主自由気風して文明徴候たるは同一なり往古はれたるフリ・シチ元素発生したるものならん千六百二十五年第一世チャレスきし民権又宗教しく議院物論蜂起千六百四十九年国王一時共和政をなしたれども永続することはず爾後様々の国乱千六百八十八年第三世ヰルレム王位りしより政府方向自由寛大趣意君民同治政体今日へり

 仏蘭西ては千六百年第十三世ロイス宰相リセリウ益王室権威かし千六百四十三年第十四世ロイス王位たるときは年甫はじめ五歳にして国事らず加之内外多事なれども国力すにらず年長ずるに天資英邁よく祖先遺業国内威服したるのみならず屢外国へてたざるはなし在位七十二年王威赫奕仏蘭西にて王室なるは此時代れども其末年ては兵威稍はず政綱漸隠然として王室零落きざしるが第十四世ロイスしたるは唯其人したるのみに欧洲一般王権老衰したるものと第十五世ロイス益政府醜悪めて無政無法昔年有様すれば仏蘭西前後二箇あるがりとども又一方より文明如何れば政治廃壊此際文物なること前代無比千六百年にも学者議論自由思想なきにざれども其所見或狭隘なるをかれざりしもの七百年代ては其面目宗旨なり政治なり理論なり窮理なり其研究する際限あることなく心思豁然として其向るものなきがして此時事情ずれば王室政治不流停滞腐敗人民智力進歩快活のために生気王室人民との激動なかるらざるの千七百年代仏蘭西大騒乱此激動事実はれたるものなり其事破裂するや英吉利にては千六百年代てし仏蘭西にては千七百年てし前後百余年あれども源因其結果相互照応するのしく同一むものと

 西洋文明大略なり其詳なるは世上文明史訳書あり学者よく其書全体反覆熟読して前後参考することあらば所得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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